< 저주(2) >
경복궁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고급 일식집·
은은한 노란 조명이 고이케 유리코를 비추었다·
안 그래도 상당한 미인인 그녀였는데 조명에 반사된 그녀는 더없이 우아하고 섹시했다·
사진으로만 봤을 때와 직접 마주한 그녀는 느낌이 아주 많이 달랐다·
“나를 보자고 했다구요?”
어딘지 모르게 내려보는 듯한 그녀의 눈빛도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어쩌면 동생이 가지게 된 과한 복을 내가 차지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한국말이 유창하시군요· 몇 년 유학이라도 하신 것 같은데 맞습니까?”
“어렸을 때 꽤 자주 왔었어요· 한국 음식이나 문화 드라마 영화도 좋아해서 남는 시간에 공부했었어요·”
“한국 친구는 없으셨구요? 왜 그런 말이 있잖아요? 외국 언어를 공부하려면 그 나라 이성친구를 사귀면 제일 효과가 크다는···”
“후훗 저도 들어봤는데 창훈 씨를 만나기 전까지는 친구라고 할 만한 사람은 못 사귀었어요· 솔직히 일본인 친구도 마찬가지이긴 하지만··· 아 창훈 씨 이전에 한국인 친구를 만나긴 한 것 같아요· 그쪽에서 절 친구라고 생각할지는 모르겠지만요·”
“설마요· 고이케 유리코 씨가 친구라고 생각한다면 당연히 상대방도 친구라고 생각하지 않을까요?”
“모르죠·”
“도대체 무슨 사이기에 그렇습니까?”
“음··· 저를 아주 잘 알고 저에게 조언을 해줄 수 있는 사람· 그리고 난 그 조언을 무시하지 않는 사이? 그 정도면 친구 아닐까요?”
“맞네요 친구· 그 사람이 누구인지 참 궁금한데요?”
고이케 유리코는 피식 웃다가 말했다·
“그건 나중에 알려주도록 할게요· 그런데 창훈 씨 모르게 저를 만나자고 하신 이유를 아직 말씀해주지 않으셨는데요?”
“솔직히 의아했습니다· 내 동생을 왜 만나려고 했는지도 그리고 만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결혼하려고 결심한 이유도요·”
“당신도 당신 아버지처럼 나를 의심하는 건가요?”
도훈의 눈빛에 이채가 감돌았다·
“아버지가 당신을 의심했었나요?”
“어머 모르셨나봐요· 김태현 회장님이 얼마나 걱정스럽게 생각하셨는지 말도 못한답니다· 뭐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에요·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고 해도 의심했을 테니까· 그리고 사실 그 누구보다 의심이 많은 사람이 저라서요·”
“의심이 많으시다구요? 그런 것치고는 결혼을 굉장히 빨리 선택하신 것 같은데···”
“이상하죠? 저도 이상해요·”
누구보다 의심이 많은 사람이 갑자기 다른 나라에 와서 며칠 만난 남자와 결혼을 한다?
김도훈 사장은 더욱 확신할 수 있었다·
그녀의 결혼에는 우명그룹을 향한 탐욕이 숨어 있다는 걸·
“창훈이는 내 동생이에요· 어렸을 때야 싸우기도 했고 지금도 종종 투닥거리기도 하지만 그래도 내 혈육인데 그렇게 말하면 제가 더 의심할 수 있다는 생각은 안 하십니까?”
고이케 유리코는 턱을 괴고 도훈의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 고혹적인 모습에 도훈이 빠져들려는 찰나 그녀가 작고 도톰한 입술을 움직였다·
“내가 당신의 인정을 받아야 하는 건가요?”
“네?”
“난 창훈 씨와의 결혼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허락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거든요· 그리고 그렇게 듣지도 못했구요· 그러지 말고 본론을 꺼내봐요· 창훈 씨 몰래 날 여기까지 부른 이유·”
도훈은 홀리듯이 대답했다·
“나랑 합시다 그 결혼·”
고이케 유리코는 입을 가리고 깔깔 웃었다·
“하하하하! 당신 참 재미있는 사람이군요?”
“농담하는 거 아닙니다·”
“농담이 아닌 건 알겠어요· 하지만 재밌는 사람은 맞는 것 같아요· 내가 그 말을 어떻게 해석할지 궁금하지 않아요?”
“짐작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계속 턱을 괸 채로 회 한 조각을 오물거리다가 말했다·
“한국에 오기 전에 많은 생각을 했어요· 결혼을 결심하고 일본에서의 일을 정리하면서 앞으로 어떤 일들이 생길지 한편으로는 걱정스럽고 한편으로는 기대가 됐어요·”
“···”
“누구를 만나게 될까? 창훈 씨 가족은 어떤 사람일까? 내가 이 결혼을 잘하는 것일까?”
“만나고 보니 어땠습니까?”
그녀는 대답 대신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물었다·
“당신은 나에게 뭘 해줄 수 있죠?”
“우명화학 올해 매출 2조 7천억에 영업이익 5천억이 넘었습니다· 10년 전 인수한 이래 단 한 번도 영업이익이 마이너스가 난 적이 없고 줄곧 안정적인 성장을 이어갔어요·”
“오호···”
“어떤가요? 창훈이와 결혼한다고 해도 당신이 우명그룹의 지분을 얻을 수는 없을 겁니다· 아버지는 당신을 그룹의 전용 은행창구처럼 이용하려고 할 테고 당신은 탐탁치 않더라도 큰 이익 없이 이용만 당할 겁니다·”
“그런가요?”
“그럴 바에야 나와 결혼합시다· 내가 당신에게 우명화학의 지분을 줄게요·”
제법 각오하고 한 말인데 고이케 유리코의 대답이 그의 예상을 벗어났다·
“그게 끝인가요?”
순간 당황한 그를 보며 그녀가 피식 웃었다·
“난 창훈 씨 몰래 절 불러내길래 솔직히 기대를 좀 했어요· 그런데 조금··· 실망스러운걸요?”
“실망···스럽다구요?”
“우명화학이 나쁘지 않은 회사인 건 알겠지만 난 동생의 아내가 될지도 모르는 사람이잖아요· 그런 사람을 회유하는데 고작 우명화학 하나인가요? 내가 가지고 있는 로얄메이저의 자산가치가 어느 정도인지 알고는 있는 거예요?”
도훈은 진심으로 당황스러웠다·
그룹의 핵심 계열사 하나를 그냥 넘겨주겠다고 하는데 고작 배포가 그 정도밖에 안 되냐는 말을 들을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고이케 유리코의 실망한 눈초리는 도훈의 남자로서의 자존심에까지 상처를 냈다·
“이건 첫 번째 제안에 불과합니다·”
결국 당황한 도훈이 그 짧은 순간에 생각해내서 꺼낸 말이 이거였다·
하지만 고이케 유리코는 처음부터 도훈의 제안을 진지하게 듣지 않고 있었다·
그저 도훈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어서 나온 것일 뿐·
오히려 우명그룹에 집착해서 동생의 아내 될 사람에게까지 추근대는 그의 모습에 정나미가 떨어진 그녀였다·
“피곤하군요· 서울에 와서 제대로 쉬지도 못했거든요· 다른 제안은 나중에 듣기로 할게요· 그리고 기껏 한국에 와서 또 회를 먹으니 물리는 느낌도 들고···”
“아 미안합니다· 메뉴를 제대로 신경쓰지 못했네요·”
도훈은 일본인이라고 무작정 일식집을 예약한 비서실장을 속으로 욕했다·
하지만 비서실장이라고 그녀의 입맛이 어떤지 하루만에 어떻게 알 수 있었을까·
“그럼 전 이만 일어설게요·”
고이케 유리코는 망연자실해하는 도훈을 두고 미련없이 가게를 나왔다·
*
오성병원 VVIP 병동·
불법승계를 둘러싸고 폭풍의 눈으로 떠오른 오성병원 VVIP 병동에 젊은 남자가 방문했다·
이미 재계에서 유명인이 된 영훈은 오성그룹 비서실 직속 경호팀을 거쳐 강재식 부회장이 머물고 있는 병실로 가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몸은 괜찮으십니까?”
영훈은 사실 이곳을 찾아오기 전에 오성그룹의 연락을 받은 이후부터 계속 마음이 좋지 않았다·
얼마 전부터 느끼게 된 불길한 기운이 계속해서 신경쓰이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대한민국에서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강재식 부회장과 만나면서도 그의 표정은 심통 난 어린애처럼 잔뜩 굳어 있었다·
“암 환자가 괜찮아봤자지· 그런데 내가 불러서 기분이 나빴나? 표정이 영 좋지가 않구만·”
“아닙니다· 개인적으로 조금 안 좋은 일이 있어서요·”
“개인적으로 안 좋은 일?”
“네· 사적인 일이라 신경쓰실 가치가 없으십니다·”
영훈은 응접실 소파에 털썩 몸을 맡기고는 떨떠름하게 바라보는 강재식 부회장에게 말했다·
“저를 만나자고 하셨다고요? 하실 말씀이 있으십니까?”
“내가 부를 걸 알고 있었지 않나? 내가 할 말도 알고 있겠지·”
영훈은 미간을 찌푸렸다·
전에 강대성 실장에게 민구상 대표의 이름을 꺼낸 것·
그리고 그가 비자금 통장 때문에 이 사단을 내게 된 것·
만약 평상시였다면 결코 하지 않았을 말이었다·
그런데 강대성 실장과 대화를 나누면서 자신도 모르게 꺼낸 말이었다·
그와 대화를 끝내고 오면서 치열하게 고민했다·
정말 의도하지 않고 한 이야기인지 아니면 조금이라도 의도했던 것이었는지 스스로 자문했음에도 아직까지 답을 얻지 못한 영훈이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셨습니까?”
“내가 아는 자네라면 사소한 문장 단어 하나에도 깊은 의미를 둘 정도의 심계를 지녔으니까·”
“그래서 부회장님께서 생각하시는 제 생각은요?”
강재식 부회장은 손등에 꽂힌 주사바늘을 만지작거리다 말했다·
“난 처음에 자네가 대선 후보와 긴밀한 사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쉽사리 믿지 않았네· 믿지 않았어· 그럼에도 자네 제안을 신경쓸 수밖에 없었던 건 감히 내 앞에서 그런 제안을 할 수 있는 자네의 배짱과 심계를 인정했기 때문이야· 믿지 않았음에도 흔들렸거든·”
“···”
“그런데 실제 자네 말대로 천보윤 의원이 대선후보가 됐고 특별한 사고가 생기지 않는다면 결국 다음 청와대에는 천보윤 의원이 앉게 될 게 분명해 보이지· 우리가 알아본 바로 이미 천보윤 의원과 자네 그룹은 아주 긴밀한 사이임이 분명해 보이고 말이야·”
“그런가요?”
“난 궁금했다네· 그 정도 능력을 지닌 자네가 나에게 무엇을 원하고 있을지 말이야· 대성이에게 접근해서 얻고자 하는 게 무엇인지 궁금했어· AMA 시스템? 좋지· 우리 오성전자와 업무협약을 맺고 장기적인 성장을 도모한다면 아마 AMA 시스템 하나만으로도 HS그룹은 최소 10년 이상
먹고 사는데 걱정이 없을 거네·”
“저희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는 영훈의 대답에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리고 천천히 뜨면서 말을 이었다·
“대단한 일이긴 하네만 난 근본적으로 이런 질문을 할 수밖에 없었어· 정말 회사가 발전하는 게 목표일까?”
“아닐 거라고 보십니까?”
그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마치 숨어서 먹이를 노리는 맹수처럼 고요하면서도 살기 어린 그의 얼굴은 아마 다른 사람이라면 그 앞에서 숨쉬기도 힘들게 만들었을 것이 분명했다·
“우리 아버지가 비자금을 왜 만들었는 줄 아나? 세계적인 대기업을 이끌고 있음에도 왜 그런 돈을 만들었을까? 법인카드 하나면 세상 무엇이든 다 살 수 있고 뭐 하나 부족하지 않을 것인데·”
“···”
“내 것이 아니거든· 사람의 본질적인 욕구· 내 마음처럼 씀에도 회사 통장에 비치된 그 거대한 자금이 내 것이 아니라는 것· 그게 사람을 미치게 만든단 말이야· 피를 끓어오르게 만들지· 난 그런데 자네는 어떤가?”
영훈은 가슴이 답답해짐을 느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씀이 뭡니까?”
“얼마면 되겠나?”
“네?”
“민구상이 가진 4천억· 큰 돈이지· 아마 자기 정치인생을 걸었을 거야· 암··· 그 돈이면 그럴 만하지· 하지만 자네라면 이 사태를 막을 수 있겠지·”
“저에게 그런 힘이 있다고 보십니까?”
“그러니까 내 아들에게 민구상이 그 돈을 받아서 움직이고 있음을 말하지 않았나? 나에게 신호를 보낸 거 아니었어? 만나자고 한 건 나지만 사인을 보낸 건 자네잖나? 내가 틀린 건가?”
영훈은 침을 삼켰다·
강재식 부회장의 말을 듣고 나서 확실히 알았다·
그의 말이 맞음을···
“···”
“말해 보게· 얼마면 되겠나?”
“제가 얼마면 움직일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강재식 부회장이 껄껄 웃었다·
“하하하! 맞아· 그랬지· 내가 어리석은 질문을 했어· 전에도 그랬듯이 자네 입에서 먼저 금액이 나올 리는 없겠지· 좋아·”
강재식 부회장은 천천히 일어나 병실 내에 비치된 금고를 열어 무언가를 꺼내 영훈의 앞에 툭 던지듯 내려놓았다·
“이건···”
“맞아· 내가 가지고 있는 통장 중 하나네· 8700억이 들어 있지·”
영훈은 심장이 떨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 정도면 차라리 정당하게 상속세를 내지 그러십니까?”
“상속세는 이것보다 훨씬 크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게다가 이 돈을 꺼내서 낼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
“만성이가 감히 우리 오성그룹을 조각내려고 하나 난 그걸 두고볼 생각이 없어· 용납할 수 없는 일이지· 막아주게· 그럼 이 통장은 자네 거야·”
살이 떨리고 눈빛이 흐려졌다·
정신이 아득해지는 감각에 잠시 눈을 감은 영훈·
정신을 차리려고 머리를 흔들며 눈을 뜨는 순간 강재식 부회장의 머리 위로 무언가가 보였다·
잠깐 스치듯 보였다 지나갔지만 영훈은 그게 무엇인지 알았다·
암을 이겨내고 다시 그룹에 복귀하는 모습 강대성 실장이 결혼하고 낳은 자식을 보며 기뻐하는 모습 그리고 생각지도 못하게 큰 교통사고로 생을 마감하게 되는 모습까지···
“씨발···”
“뭐라고?”
갑작스러운 욕설에 노한 강재식 부회장을 보면서 영훈은 실성한 듯 웃었다·
“하하··· 하하하···”
“자네··· 뭐 하는 건가?”
영훈은 자리에서 일어서서 그대로 자신의 뺨을 후려쳤다·
어찌나 세게 후려 갈겼는지 입가가 터져서 피가 흘러내렸다·
입가에 흐른 피를 맛보며 잠시 정신을 차린 영훈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오늘 있었던 일은 없던 것으로 하겠습니다·”
“자네···”
그토록 피하고자 했건만···
어린 나이에 산속에서 그 처절한 생을 보내며 치열하게 피하고자 했건만···
사주는 피할 수 없고 무당이 될 저주 역시 피할 수 없음이라·
절망감을 느끼며 영훈은 사력을 다해 병실에서 도망쳤다·
< 저주(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