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꺼진 불도 다시 보자(1) >
송은채 사장은 월요일 아침 출근하자마자 비서실장인 홍승대 실장으로부터 당황스러운 소식을 듣게 됐다·
“신영투자증권에서 현진물산의 주식을 인수하겠냐고 타진해 왔습니다· 15500원으로 말입니다·”
홍승대 실장은 자신이 말하면서도 믿기가 힘든지 마른 입술을 축이며 눈치를 보았다·
“15500원? 현재 얼마죠?”
“동시호가 16300원에 걸린 것까지 확인했는데 9시에 얼마로 시작할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거의 시장가나 마찬가지네? 조건은?”
“조건을 걸지 않았습니다· 무조건 혜성기업을 인수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저 인수할 의향이 있는지를 가볍게 물어왔습니다· 아무래도 이상합니다· 며칠 전만해도 당장이라도 혜성기업을 인수하지 않으면 우리 지분을 임지은 현진고속 사장에게 넘기겠다고 이리저리 돌려 말하면서 협박했었는데 뭔가 우리가 모르는 사정이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모르는 사정? 그게 뭘까요?”
“그건··· 일단 임원 회의 소집할까요?”
“아니요· 그럴필요 없어요· 재무팀 오재식 상무만 불러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그리고 또 어떤게 남았나요?”
“혜성기업을 인수할거냐고 의향을 물어본 것은 어떻게···”
송 사장은 당연히 거절한다고 말하려 하다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이 정도면 애초에 이형준 본부장과 협상할 때 거절한다고 말하면 됐을 일인데 이 결정을 다시 자신에게 넘겼다는 게 의아했기 때문이다·
혜성기업의 미래가 없다는건 연희를 통해 수차례 이야기했을게 뻔했는데 말이다·
“그건 일단 넘어가죠· 주식 회수에만 집중해요·”
“알겠습니다·”
“이형준 본부장 주말에 특이한 점은 없었나요?”
“사촌 결혼식에 참석했다는 걸 제외하곤 특이한 점은 없었습니다·”
송은채 사장은 잠시 한숨을 쉬었다·
토요일 결혼식에서 연희와 그 신입사원이 담판을 짓고 왔는데 비서실 실장이 특이한 점이 없다고 하니 답답할 수밖에·
그렇다고 뭐라 하기에도 뭐한 것이 비서실 직원들이 심부름센터도 아니고 어느 대기업 정보팀처럼 국정원 뺨때리는 수집능력을 가진 것도 아니었다·
그냥 그려려니 할 수밖에·
“알겠어요· 나가보세요·”
홍승대 실장이 나가고 송 사장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생각의 원인은 하나였다·
도대체 어떤 방법을 썼길래 이형준 본부장이 갑자기 마음을 바꿨는지·
마음 같아서는 당장 불러서 물어보고 싶지만 보는 눈이 한둘이 아니었다·
“일단 정규직부터 시켜주고 봐야 하나?”
*
“최영훈 씨· 인사과로 오라는데?”
이은성 사원이 자리에서 돌아보며 영훈에게 말했다·
혹시 무슨 실수한거 아니냐는 눈빛이었지만 영훈이나 연희는 이 소식이 무얼 뜻하는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넵! 다녀오겠습니다!”
영훈이 벌떡 일어나서 나갈 때 연희도 잽싸게 따라붙었다·
“벌써 결과가 나왔을까요?”
“똑똑하고 욕심이 대단한 사람이라 뭐가 중요한지 잘 알고 있을 겁니다· 이왕 결정하는거 질질 끌지 않겠죠· 이제 이 문제는 내 손을 떠난 거니까 회사에서 묻지도 마세요· 난 아예 관여하고 싶지 않습니다·”
영훈이 항복하듯이 두 손을 들었다·
“알았어요·”
“그런데 계속 따라올겁니까?”
“전 다른데 가려는 거예요· 인사과 가세요·”
연희를 보내놓고(?) 인사과에 들어선 영훈은 자신을 기묘한 표정으로 보라보는 직원들을 볼 수 있었다·
특히 오재준 대리는 이럴 리가 없다는 듯 똥씹은 얼굴로 영훈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찾으셨다고해서 왔습니다·”
“네 여기로 잠깐 오실래요?”
영훈이 오재준 대리에게 다가가니 그가 근로계약서를 내밀었다·
인턴으로 입사할 때도 썼던 계약서인데 정규직으로 전환되면서 다시 쓰는 것 같았다·
“축하드립니다· 영훈 씨는 이제 현진물산 정규직으로 채용되셨어요·”
이토록 무미건조한 축하라니·
하지만 영훈은 그 메마른 축하가 너무도 감격스러웠다·
산에서 내려올 때는 어디서 몸 쓰는 일이나 하다가 결국 점이나 보게 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이제는 누가 봐도 남부럽지 않은 대기업 정규직 사원이 되었다·
괜히 코끝이 시큰거렸다·
남들은 대기업에 합격하면 온 가족이 다 축하해주던데···
문득 엄마 생각이 떠올랐다·
무당이 된 엄마는 지금쯤 어떻게 살고 있을지··· 죽었는지 살았는지 영훈이 대기업 정규직이 된 걸 알면 어떤 기분일지···
“뭐해요?”
“아 미안합니다· 여기 쓰면 되는 건가요?”
“네· 그런데 한가지 물어봐도 됩니까?”
“그러세요·”
“그냥 순수하게 궁금해서 그러는 거니까 오해하지 마시구요· 크흠··· 도대체 사장님하고 어떤 관계입니까? 그러니까 무슨 먼 친척이시라거나 아니면 회장님 일가의 장학금을 받으셨다거나···”
순간적으로 인사과에 정적이 흘렀다·
사르륵 하는 종이 넘기는 소리 조차 허용하지 않는 절대적 침묵·
영훈은 피식 웃었다·
“그런 거 아닙니다·”
“그럼···?”
“사장님이 절 스카웃 하셨습니다·”
“스카웃이요?”
전에는 이 말을 하기 꺼려졌었다·
분명 송 사장이 스카웃한거나 마찬가지였지만 아무것도 가진게 없었던 자신의 모습에 당당히 스카웃 당했다는 말을 못했는데 이번 일로 당당히 이야기할 수 있었다·
물론 인사과 직원들은 이게 무슨 개소리냐는 듯 얼빠진 표정으로 본다·
“네· 사장님께서 스카웃하셔서 능력을 보고 인정하시면 정규직으로 전환시켜준다고 하셨습니다·”
“그럼 능력을 뭔가 보여주셨다는 말입니까?”
“글쎄요· 그건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인사과 직원들에게 있어 진정 미스테리한 미소였다·
네까짓 것들은 알 수 없는 사장님과 나만의 비밀이 있다는 식의 말이었기 때문이다·
멀리서 귀를 활짝 열어놓고 집중하며 듣고 있던 민홍기 과장은 빈 종이에 최영훈이라는 이름을 적고 동그라미를 연속해서 그렸다·
이전까지는 그냥 사장님의 치부일지도 모르는 신입사원에서 사장님의 비밀스러운 칼이 됐기 때문이다·
어디에 어떻게 쓰이는지도 모르는 미스터리한 칼이라는 게 문제였지만·
*
양철기 전무는 머리에 손을 올리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똑똑···
“어 왜?”
“영업팀 차지열 본부장님께서 오셨습니다·”
“차 상무? 들어오라고 해·”
양철기 전무는 갑자기 들이닥친 차 상무 때문에 계속했던 고민을 날려버렸다·
“안녕하십니까·”
정중하게 인사하며 들어온 차 상무·
업무에 관련된 일이 아니면 어지간해서는 자신의 방으로 먼저 찾아오는 일이 드물었던 그였기에 양 전무는 궁금함을 참고 허허 웃었다·
“웬일이야? 자네가 내 방에 왔을 때가 작년 초에 우크라이나 건 때 이후로 처음이지?”
“맞습니다·”
“뭘 서서 얘기를 하고 있어· 앉아· 차 뭐줄까? 커피? 홍차? 내가 전에 영국 갔다가 홍차 기가 막힌거 사왔거든· 그거 한 잔 할래?”
“그럼 오랜만에 온 김에 귀한 거 맛보겠습니다·”
양 전무는 차 상무의 대답이 묘하게 마음에 들었다·
“그렇지· 차 상무도 너무 일에만 몰두했어· 좋은 거 맛있는 거 먹어야 할 때야· 소연아! 여기 내가 아껴 먹는 홍차 있지? 그거 좀 타와·”
“알겠습니다·”
양 전무는 그렇게 허허 웃으며 차를 내놨지만 먼저 왜 왔냐고 묻지 않았다·
목마른 자가 우물을 찾는 법이고 배고픈 자가 구걸하는 법이다·
부탁하는 사람과 부탁을 들어주는 관계가 확실해야 나중에 탈이 없다는 걸 경험으로 잘 알고 있었다·
차 상무는 영국에서 들여온 고급 홍차를 잠시 음미하고는 말했다·
“말씀하신대로 맛이 깊습니다·”
“내가 그래서 비싸게 주고 사왔지·”
“혹시 신영에서 날아온 소식 들으셨습니까?”
“응? 뭐 말인가?”
방금 전까지도 그것 때문에 골치를 썩고 있었던 양 전무는 시치미 뚝 떼고 물었다·
“신영투자증권에서 혜성기업에 대한 인수제안을 철회했다고 합니다·”
“아~ 그거? 들었지· 아침에 그거 듣고 무릎을 쳤다니까· 그것 참 다행이지 뭐야·”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차 상무의 물음에 양 전무는 미소를 싹 걷어내고 말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빙빙 돌리지마· 원하는 게 있으니까 찾아왔을 거 아니야? 나 떠보려고 여기까지 행차하신 건 아니지? 적당히 간 봤으면 이제 패를 까야지 계속 뭉개고 있다간 개평도 못 받고 쫓겨나·”
“흐음··· 죄송합니다· 그럼 말씀드리겠습니다· 토요일에 이형준 본부장과 만났었습니다·”
“하하하 이거 차 상무 엉큼한데가 있었네? 그래서?”
“주식을 주십사 했는데 면전에서 하고 싶은 말의 반도 꺼내지 못했습니다·”
양철기 전무의 얼굴이 삽시간에 굳어졌다·
“주식을 달라 했다고? 구매자가 설마 임지은 사장인가?”
“현진그룹의 경영권 안정화를 위해 사겠다는 뜻이었습니다·”
현진물산이 아닌 현진그룹이라고 칭했다·
차 상무의 말은 역설적이게도 구매자가 누구인지를 밝힌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반대로 양 전무에게 자신이 누구 줄을 타고 있는지를 명확히 인지시켰다·
“이거이거 내가 사람을 좀 안다고 생각했는데 한참 부족했어· 차 상무에게 많이 배워야겠는걸?”
“그게 어떻게 전무님이 부족한 탓이겠습니까? 제가 그저 좀 운이 좋았던 것일 뿐이죠·”
대놓고 임지은 사장의 라인을 탄 걸 운이 좋았다고 말한다·
자신의 패를 깐 셈이다·
“위험한 발언인건 알지?”
“어차피 전무님도 임지은 사장님에게 회사가 넘어갈 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왜 그렇게 생각해?”
“아무리 아들이 아닌 딸이라고 해도 며느리보다 더 애착이 가는건 당연하지요· 게다가 임지은 사장님은 지금까지 일을 손에서 놓은 적이 없었지만 송 사장님은···”
말을 흐렸지만 결국 송은채 사장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주부에 불과했다는 말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사실 양 전무가 대놓고 송 사장과 반대라인을 타고 있는걸 회사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좋아· 나도 빙 돌아가는 건 그만하지· 그래서 그 어린놈이랑 만나서 말 한마디 못했다는게 할 말 전부는 아닐 테고··· 그 다음은?”
“신영에서 지금 진행하고 있는 모든 계획을 전면 철회할 거라고 은연중에 밝혔습니다·”
“전면 철회한다고? 확실해?”
“인수제안 철회 소식을 들으셔서 아시겠지만 이형준 본부장에게 송 사장님이 접촉한게 확실합니다· 그리고 정확하지는 않지만 송 사장이 이형준 본부장의 목을 잡은 것 같습니다·”
“목을 잡았다?”
“네· 만나자마자 제가 송 사장 라인이 아니라는 걸 알고는 식사도 안하고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목을 잡고 있다··· 목을 잡고 있단 말이지···”
양 전무는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이마를 쓰다듬었다·
회사 경영이라고는 해본 적도 없는 양반이 어떻게 신영금융그룹 손자의 목을 잡을 수 있을까?
“전 사장님의 손이 닿았을까?”
“임지훈 사장님은 그런 스타일이 아닙니다·”
“하긴 그 양반도 좀 고지식한 스타일이긴 하지·”
“아마 임지훈 사장님이었다면 신영그룹 회장을 만나 일을 처리해달라고 했을 겁니다·”
“그럼 뭘까···”
이때 문을 똑똑 두드리며 비서가 들어와 양 전무의 귀에 무언가를 속삭이고 갔다·
비서가 나가자 양 전무가 비릿하게 웃으며 말했다·
“사장님이 재무팀 오재식 상무를 불렀다는데?”
“오 상무를요?”
“송 사장님이 사람 쫄리게 하는 재주를 가지고 있었네 그려? 재밌지 않나?”
“전무님은 재밌으신가 보군요·”
“원래 상대가 강해야 이겼을 때 짜릿함이 더 강해지거든·”
차 상무는 고개를 들어 위층을 바라보았다·
과연 무슨 이야기가 오가고 있을지 궁금해하면서···
< 꺼진 불도 다시 보자(1) > 끝
ⓒ 영완(映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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