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꺼진 불도 다시 보자(3) >
연희는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구도욱 사장의 나이가 이제 오십을 바라보고 있어요· 그런데 재신이 돌봐준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사주가 좋은게 맞는 건가요?”
“한 사람의 인생을 전체로 보면 나이 오십이 아주 늦은 나이는 아닙니다· 특히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태어나 오로지 자신의 손으로 일가를 이루려면 나이 마흔이 넘는건 대수로울 것 없지요· 구도욱 사장의 사주는 만약 혜성기업의 사장이라는 말을 못 들었다면 중간에 어려움을 많이 겪었으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 정도로요?”
“이 사람은 나이 마흔 지나서 모든 어려움이 술술 풀리고 사방에서 도움이 밀려오는 대운이 들어와있어요· 그런데 이상한 게 지금쯤이면 돈방석을 깔고 앉아도 한 두 개 깔고 앉은게 아닐 텐데 저러고 있는게 이상합니다· 진짜 생년월일이 잘못된 게 아닙니까?”
“잘못된 건 없어요·”
“흐음 이상하다···”
영훈은 계속 고개를 갸웃거렸다·
혜성기업 리포트를 보면 분명 회사의 상황은 최악인데 어느 부분이 잘못된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일단 서가은 씨 만나러 가요·”
“그럽시다· 어차피 구도욱 사장의 사주가 맞다고 해도 할 수 있는 게 없으니까· 그렇죠?”
연희는 한숨을 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후··· 그렇긴 해요· 영훈 씨의 의견이 그렇다고 해도 데이터로 설명할 수 있는게 아니라서 인수는 불가능에 가까울거예요·”
“그럼 괜히 온거 아닙니까?”
“으음~ 괜히 왔다기 보다는 어차피 인천 오는 김에 왔다고 생각하면 되죠·”
“사장님께는 어떻게 보고할겁니까?”
“당연히 모른척 할 생각이에요· 알고 보니 혜성기업이 황금알 낳는 거위일 수도 있다고 영훈 씨가 그랬다고 하면 엄마가 ‘정말 그러니?’ 하면서 회사를 인수하지는 않을 거잖아요· 그렇게 하면 임원들이 대표이사 해임 건의안 올릴 걸요? 대신 최대한 돌려서 말해볼게요·”
“굳이 그렇게 안 하셔도 되는데·”
“어머? 영훈 씨가 아니라 우리 현진물산을 위해서라도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죠· 엄마한테 혜성기업에 대해서 조금 더 자세하게 알아보자고 할 생각이에요· 그렇게 조사하다보면 뭐라도 나오지 않겠어요?”
“그렇게 하시든가요· 그런데 오피스텔은 어디에 있습니까?”
연희는 운전대를 잡은 상태로 씨익 미소지었다·
“궁금하죠? 거기가 엄청 좋은 데예요· 여의도에 있는데 전용 45평이고 전망 끝내줘요· 풀옵션이라 뭘 챙길 것도 없을 걸요?”
“45평이요? 뭐가 그렇게 넓습니까? 너무 큰 거 아닙니까? 부담스러운데?”
“부담가지지 말아요· 엄마가 이번에 주식 매입하고나서 얼마나 고마워했는데요· 언제 다시 자리 한 번 만드실거예요· 지금은 너무 자주 만나면 사람들 눈에 띌까봐 타이밍을 잡고 계세요·”
“뭐 그러라고 하십쇼· 그런데 오피스텔 너무 큰데···”
영훈은 슬쩍 연희의 눈치를 보면서도 기대되는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드라마나 영화에서나 보던 그런 고급 오피스텔에서 언제 살아볼 생각이나 할 수 있었을까?
그것도 빌려 달라고 한 것도 아니고 상대방이 스스로 빌려준다고 한 것이니 과욕을 부린 것도 아니다·
“목소리는 그게 아닌데요? 솔직히 지금 바로 달려가고 싶어 죽겠죠?”
“크흠 아닙니다·”
“퇴근할 때 톡으로 주소 공동현관 입구 비번이랑 도어락 비번도 알려 드릴게요· 고시원은 편할 때 짐 빼면 될거예요·”
“편하니 좋네요·”
그렇게 둘은 즐거운 분위기로 인천 송도 센트럴 파크 호텔에 도착하니 한창 화보 촬영 중이었다·
촬영 스태프와 간단히 인사하고 서가은 매니저와 인사하니 이제 현진물산 사람들을 몇 번 만났다고 반갑게 맞아준다·
“안녕하세요·”
“오셨어요? 마침 조금 있으면 쉬는 시간이라 딱 맞춰서 오셨네요·”
“박현승 실장님은 어디 계세요?”
박현승 실장은 서가은을 담당하는 매니저이자 서가은의 각종 스케줄과 협찬 등 모든 걸 관리하는 임원급 관리자였다·
오늘 함께 있다는 말을 듣고 왔기에 연희가 물어보는 거였다·
“잠깐 자리 비우셨는데 금방 오실거예요·”
“네· 그럼 기다릴게요·”
그 사이 영훈은 차에 실어온 각종 가방과 악세서리 등 샘플들을 끌어내렸다·
이 중에는 싼 건 250만원짜리 손바닥만한 클러치백부터 2천만 원이 넘는 목걸이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오늘 서가은에게 이걸 다 안겨주고 전속계약에 대한 긍정적인 답변을 받아낼 계획이었다·
잠시 후 30대 초반의 깔끔한 인상의 청년이 다가왔다·
금테 안경에 수려한 인상의 그는 얼핏보면 잘 생겼지만 눈꼬리인 간문이 흩어져 바람기가 짙었고 눈썹과 눈썹 사이인 인당에 작은 흉터가 있어 젊었을적 학업을 이루지 못했을 상이었다·
“아유 오셨어요? 전에 뵙고 두 번째네요· 진작 연희 씨가 오시지··· 제가 엄청 기다리고 있었던거 아세요?”
역시나 말은 번지르르하게 잘 한다·
“아하 네···”
연희는 떨떠름한 미소를 지으며 인사하고는 박현승 실장에게 남자용 장지갑을 건넸다·
“이거 Nodri Clare에서 새로 나온 남성용 장지갑이에요· 올블랙 컬러로 시크하면서도 유행을 타지 않는 디자인이라서 오래 쓰실 수 있어요· 아마 이번 뉴월드 백화점에 입점하고 나면 판매가가 90만원으로 책정될 거예요·”
“아유~ 이거 받아도 되는건지 모르겠습니다·”
“받으세요· 실장님 드리려고 특별히 챙겼거든요·”
“그럼 잘 받겠습니다·”
박 실장은 그러면서도 영훈의 옆에 놓인 산더미 같은 명품들에 흘깃 시선을 주었다·
자기 것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부러운 건 어쩔 수 없으리라·
뭐 서가은과 친하다면 그녀가 몇 개 챙겨줄 수는 있겠지만 상관할 일은 아니었기에 연희는 본척만척했다·
“이따가 대화 나눠보시면 아시겠지만 우리 가은이가 Nodri Clare를 굉장히 마음에 들어 하더라구요·”
“다행이에요·”
“그리고 이번에 우리 회사 대표님 생신이라고 소속 배우들하고 같이 조촐한 파티가 있어요· 참석하시는거 어떠세요?”
“저희가요?”
“여러 명이 참석하기는 그렇고··· 대표적으로 한 분만 참석하시는 게 보기에도 좋고 해서요· 아무래도 여성분이시니까 연희 씨가 현진물산 대표로 참석하시는 것이···”
대놓고 수작을 부리는게 영훈의 눈에도 보이는데 연희라고 모를 리 없다·
그녀는 이런 수작을 초등학교 다닐 때부터 무수하게 받아왔지 않겠는가?
“으음··· 지금 확답을 드리긴 어렵고 회사에 물어보고 말씀 드릴게요· 그런데 초대해주신다는건 저희랑 가은 씨가 전속계약을 맺는데 아무 문제 없다는 거겠죠?”
“물론입니다· 전속계약이야 다른 브랜드들도 하고 그러는데요· Nodri Clare 정도면 저희야 환영이죠·”
현재 계약중에 있는 다른 브랜드들과 상충하는지 여부 확인 때문에 오래 걸릴거라던 당초 대답과는 달리 아주 화끈하게 밀어부친다·
어지간히 연희가 마음에 들었나보다·
그런데 이때 서가은이 박현승 실장의 어깨를 툭 치며 들어왔다·
“나 왔어· 안녕하세요· 오래 기다리셨죠?”
갈색 웨이브진 머리에 호수 같이 맑은 눈망울 티없이 하얀 피부는 그녀를 보는 모든 남자들로 하여금 사랑에 빠지지 않고는 못 배기게 만들게 틀림 없다·
그리고 그런 그녀가 선택한 가방과 악세서리라면 화제의 중심이 되는건 필연적일 터·
“아닙니다·”
“전속계약 얘기 하고 있었죠? 제가 오빠한테 이거 괜찮을 것 같다고 하면 좋겠다고 말해놨어요·”
“어머 고마워요·”
“제가 좋아서 협찬 받겠다는건데요· 오빠는 들어가 이제·”
“어? 어 그래···”
박 실장이 씁쓸한 표정으로 퇴장하자 가은이 연희에게 슬쩍 말했다·
“박 실장이랑 개인적으로 친해지지 말아요· 무슨 말인지 알죠?”
“아하하 네· 알겠어요· 일단 저희가 가져온게···”
서가은은 연희가 마음에 들었는지 미소를 띄며 연희의 설명을 가만히 듣고 있았디·
서가은의 상은 전형적인 고양이상으로 이해심이 넓고 인자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데 지나친 이해심으로 손해를 보는 경우도 종종 있을 것이다·
특히 콧대가 반듯해 모든 일을 자신이 주도적으로 처리하려고 하는데 이번 협찬건도 그렇고 대부분의 스케줄 결정은 아마도 그녀가 주도적으로 할 가능성이 높았다·
다만 그러다보니 외로움과 고독함을 자주 느끼는 경우가 많은 상이었다·
보아하니 나중에 둘이 상당히 친해질 것 같았다·
“어머 이거 예쁘다·”
“예쁘긴 한데 가은 씨가 하니까 더 예쁜 것 같아요· 이 컬러가 이렇게 잘 받기 힘든데·”
“그런가요?”
“그럼요· 이 역삼각형의 독특한 클로져와 나선형의 스트랩은 어지간한 사람이면 뭘 저런걸 했나 싶거든요· 딱 서가은 씨 것 같아요·”
연희는 연신 칭찬을 쏟아냈다·
영훈은 명품에 대해서는 쥐뿔도 아는게 없었기에 그저 들고 온 샘플을 하나하나 연희에게 건네는데 열중할 뿐이었다·
“그런데 연예인 하셔도 되겠어요· 정말 예쁘시다·”
서가은의 칭찬에 연희는 손을 저으며 웃는다·
“아니에요· 연예인은 아무나 되나요? 전 연기하는 분들 보면 정말 존경스럽다니까요? 어쩜 아무렇지도 않게 연기를 할 수 있는지··· 전 아마 대사 한줄도 못하고 어버버 댔을 거예요·”
“연예인 하라고 명함 같은 거 받지 않았어요?”
“받긴 했는데 전 제 주제를 알았던 거죠· 자 이 목걸이는요 이번 가을에 새로 나온 라인인데 일곱 개의 다른 패턴이 서로 이어지고 있죠? 디자이너 선생님이 가을의 기억을 표현했다고 해요· 그래서 착용하게 되면···”
영훈은 연희가 그렇게 열심히 브랜드를 홍보할 때 탁트인 송도의 전망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은지 얼마 안 된 높은 빌딩과 아파트 그리고 그 사이에 잘 조성된 공원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을 보았다·
엄마가 무당이 되지 않았다면 나도 저렇게 평범하게 살았을까?
“영훈 씨·”
멍하니 공원을 바라보던 영훈을 연희가 딱 때렸다·
“네?”
“뭐해요? 그 숄더백 주세요·”
“아 미안해요·”
영훈이 가방을 건네자 서가은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지루하신가봐요?”
“아닙니다· 다만 명품에 대해 아는게 많지 않으니 제가 끼어들면 대화에 방해가 될까봐 그랬습니다·”
영훈의 솔직한 말이 의외였는지 서가은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되게 솔직하시네요?”
“좀 그런 편입니다·”
“그럼 솔직한 생각을 말해봐요· 이게 정말 나한테 어울리나요?”
“정말 솔직하게 말씀드릴까요?”
“네·”
“솔직히 동네 보세 옷가게에서 아무 옷을 걸쳐 입으셔도 어울릴 겁니다·”
“어머 그런 무표정한 얼굴로 칭찬을 받으니까 기분이 이상한데요? 칭찬 맞는거죠?”
연희가 재빨리 말을 받았다·
“원래 영훈 씨가 웃음이 많지 않은데 대신 빈말을 하진 않아요· 그래서 상사한테 혼난 적도 있다니까요?”
“그렇구나···”
거래처라면 거래처라고 할 수 있는 곳에서 이렇게 편한 모습을 보이니 궁금하기도 하고 황당하기도 한 것 같았다·
“그럼 잘 모르는 영훈 씨가 봤을 때 이중에 가장 어울릴 것 같은거 하나만 골라주실래요?”
“개인적으로 쓰실 건가요? 아니면 외부에 노출될 걸 원하시는 건가요?”
“음~ 개인적으로 쓸 거요·”
영훈은 널려 있는 명품들을 슥 훑어보다가 단조로운 패턴의 무늬만 있는 아이보리색 지갑 하나를 손끝으로 톡 찍었다·
“그럼 전 이게 좋은 것 같습니다·”
“그래요? 이게 어떤 점에서 저랑 잘 어울릴 것 같아요?”
“서가은 씨가 좋아할 것 같아 보여서요·”
연희는 그 찰나에 서가은의 눈빛이 흔들리는걸 놓치지 않았다·
< 꺼진 불도 다시 보자(3) > 끝
ⓒ 영완(映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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