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서실의 고스트 사원(1) >
영훈은 사실 별 뜻 없이 한 말이었다·
본래 뛰어난 미인이 이런 상을 타고 나면 남자들은 겉만 보고 도도하거나 성격이 강하다고 생각해 쉽게 다가서지 못하는데 알고 보면 천상 여자가 따로 없다·
남자들에게 이보다 좋은 배우자가 없다고 생각할 정도랄까?
아마 모르긴 몰라도 그녀의 장래희망이 현모양처일 가능성도 굉장히 높다·
특히 전에 노 대리가 서가은을 만나러 회사에 갔다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완벽하게 세팅된 그녀의 모습에 반했다고 하면서도 별다른 악세서리를 하고 있지 않아 놀랐다는 말에 그녀의 성격을 대략 알 수 있었다·
그러니 화려한 다른 것들보다 단순한 패턴의 깔끔한 지갑 하나가 더 마음에 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었는데 그게 맞았는지 그녀가 놀라는걸 보면서 영훈은 스스로가 더 놀랐다·
‘이게 이렇게 맞는다고?’
딱 이 생각이 들 때 서가은이 말했다·
“눈치가 빠른 거예요? 아니면 관찰력이 뛰어난 건가요? 셜록홈즈처럼 그런···”
“그런거 아닙니다· 그냥 그럴 것 같았습니다·”
“대단하네요· 나 방금 되게 놀랐는데· 예전에 되게 유명하다는 점집에 점 보러가서 크게 놀랐을 때 딱 이 느낌이었거든요·”
“기분 탓입니다·”
“아하하 되게 신기한데요? 어쨌든 오늘 즐거웠어요· 전속모델계약 날짜 정해지면 연락주세요· 어차피 실장 오빠가 말해주겠지만 왠지 그날은 저도 참석하고 싶네요·”
연희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원래 전속모델계약 때 참석 안 하세요?”
“제 도장 가지고 보통 회사에서 많이들 계약해요· 스케줄도 바쁘고 한국에 없을 때도 많은데 항상 내가 계약할 자리에 있을 수는 없으니까· 그래도 내 허락 없이 아무 계약이나 막 하지는 못해요·”
“그렇구나· 그럼 저희쪽에서 계약서 교환해서 검토하고 날짜 정해지면 연락 드리도록 할게요·”
“네· 오늘 좋은거 협찬해주셔서 감사했어요· 잘 쓸게요·”
그녀는 영훈이 골라준 아이보리색 지갑을 흔들며 미소지었다·
그렇게 서가은과 헤어지고 차를 타고 돌아오는데 연희가 운전하다가 슬쩍 물어본다·
“아까 무슨 멘트를 그렇게 기름치게 쳐요?”
“무슨 멘트 말입니까?”
연희는 영훈 특유의 무심한 말투를 따라하며 말했다·
“당신이 좋아할 것 같아 보여서요· 와~ 나 90년대 드라마 직관하는줄 알았잖아요· 원래 그렇게 느끼한 말 잘해요?”
“난 그게 느끼한 말인 줄 몰랐습니다· 그냥 그렇게 생각해서 한 말이었는데··· 어째 질투하는 느낌인 것 같은데요?”
“어머! 무슨 말이에요? 그냥 웃겨서 그래요· 세상 아무 욕심 없을 것 같은 분이 그러니까 신기해서 그런거죠· 그런 멘트 쉽게 안 나오는데 완전 선수 아니에요?”
“아니에요· 그리고 세상 욕심 없지 않습니다· 돈에 대해서는 욕심을 안 가지려고 노력하는 것 뿐이죠·”
“오호~ 그러니까 돈 욕심이 아닌 건 욕심을 낸다는 말인거죠? 이를테면 여자라든가?”
“욕심을 낸다기 보단 평생 혼자 살 수는 없지 않습니까? 난 출가하려고 산에 간 거 아닙니다· 아직도 혈기왕성한 청년이에요·”
“알겠어요·”
영훈의 인간적인 모습을 본 것 같은 생각에 연희는 살포시 미소지었다·
서가은과의 미팅에서 좋은 결과를 가지고 온 연희와 영훈은 노 대리에게 간략하게 보고하고 법무팀 협조하에 전속모델계약서 작성을 시작했다·
이후 업무시간을 보내고 퇴근한 영훈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고시원으로 향했다·
연희는 몸 먼저 들어간 다음 나중에 짐을 옮기라고 했지만 어차피 퇴근하고 나서도 크게 할 일이 없었기에 얼른 이 좁은 고시원을 탈출하고 싶었던 거다·
“총각 왔어?”
언제나 그렇듯이 고시원 입구에서 주인 아주머니가 반겼다·
“네· 안녕하세요·”
“우리 딸이랑 인사했다며?”
“네·”
“회사는 좋지? 인턴이기는 하지만 열심히 해· 그러면 혹시 알아? 정규직이 될 수 있을지?”
기운을 북돋아주기보다는 어째···
“제가 열심히 해서 그런지 운 좋게도 정규직 됐습니다·”
“어? 정규직이 됐다고?”
“운 좋게도 그렇게 됐습니다·”
운이 좋았다는 걸 두 번이나 강조했음에도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저 정규직이면 그럼 월급을 얼마나 받는 거야? 연봉으로 한 삼천?”
“죄송한데 그건 말씀드리기가···”
“그러지 말고 한 번 말해봐· 삼천? 혹시 삼천 보다 많아?”
“원래 급여는 막 말하고 다니면 안 돼서···”
“총각 외지에 나와서 반찬 챙겨주고 걱정해준게 누구야? 나만큼 총각 챙겨준 사람이 있었어? 엄마나 마찬가지지· 엄마다 생각하고 말해봐· 얼마야?”
반찬이래봤자 맨날 김치 떨어지면 그것만 채워주는 것 뿐이었고 사실 영훈은 그 김치로 라면 한번 끓여 먹은적도 없었다·
차라리 나이가 젊은 사람이라면 강하게 면박이라도 주겠는데 나이 많은 엄마뻘 어른이라 참 난감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아주머니 그런 건 막 물어보는거 예의 아니에요· 그리고 저 오늘 고시원 나갑니다·”
“어? 여길 나간다고?”
아주머니는 처음에 예의가 아니라는 말에 확 기분나쁜 티를 내다가 고시원을 나간다는 말에 눈을 크게 뜨고 놀랐다·
고시원을 나간다는 말이 곧 진짜 정규직이 됐다는 말과 다름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지금 짐 챙기려구요·”
“아니 아직 기간 많이 남았는데··· 벌써 간다고 해도 환불 안 돼· 알지?”
혹시나 환불할까봐 마지막에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눈치를 본다·
“환불은 됐습니다· 그럼···”
더 말 시킬까봐 바로 자리를 피하는데 공동부엌에서 주인 아주머니의 딸이 나왔다가 시선을 마주쳤다·
“어?”
“안녕하세요· 오늘이 마지막이네요·”
“마지막이요?”
“네· 이제는 고시원 생활 정리하려구요·”
가볍게 츄리닝 차림의 그녀는 오늘도 그녀 엄마의 심부름으로 냉장고에 김치를 채우러 온 것 같았다·
“갈 데는 정하셨구요?”
“네·”
이때 주인 아주머니가 뒤에서 따라오며 말했다·
“이 총각 정규직 됐데· 야 인턴에서 정규직 되기가 그렇게 쉬운 거니?”
“어? 정규직 되셨어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적어도 입사 후에 빠르면 3달 정도 평가하고 정규직 전환될 텐데?”
“운이 좋았어요·”
“어디로 가시는데요? 서울은 월세가 비싸서 어지간한 데는 엄청 부담스러울 텐데요?”
“오피스텔 하나 구했습니다· 혼자 살기 적당한 곳이더라구요·”
“오피스텔 월세 엄청 비싼데?”
“뭐···”
이제는 대답해주는 것도 지쳐 그냥 웃으며 그녀를 지나쳤다·
그리고 전에 오리엔테이션에 가지고 갔었던 캐리어에 옷을 챙겨 넣고 한 짐 싸서 나오니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던 둘·
“잘 지냈습니다·”
“그래 총각· 잘 지내고· 혹시 갈데 없으면 또 와·”
“안녕히가세요·”
씁쓸해 하는 그들을 뒤로 하고 택시로 연희가 찍어준 주소에 도착하니 아주 으리으리한 빌딩이 눈에 들어왔다·
딱 봐도 30층은 넘어 보이고 주변에 식당과 편의점 등 각종 편의시설이 넘쳐났다·
공동현관을 통과하자 정중히 인사하는 경비원과 엘리베이터부터 고급스러운 디자인에 ‘괜히 수락했나?’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특히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느꼈던 충격은 앞으로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거실 가운데 화이트톤의 소파와 50인치가 넘는 TV 커튼을 열자 보이는 한강과 여의도의 야경이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영훈은 캐리어의 짐을 풀 생각도 하지 못하고 한동안 멍하니 서서 야경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20년간 산에서 수양한 보람이 있기는 한 것 같았다·
평생 꿈꾸던 좋은 오피스텔에 왔음에도 들뜨지 않는 걸 보면·
그렇지 못했다면 저 아래 휘황찬란하게 빛나는 불빛들을 모두 가지고 싶었을 거다·
날 무시한다고 고시원의 두 모녀에게 호통을 치고 싶었을 지도 모른다·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다만 한 가지 얼굴도 기억 안 나는 엄마가 그립다는 것·
그렇게 영훈은 커튼을 잡고 한참 동안 야경을 바라보았다·
*
영훈이 새로운 집에 들어간 그 시각 송파구의 고급 갈비집·
이형준 본부장은 굳은 표정으로 들어섰다·
“어이쿠 오셨습니까?”
딱 봐도 그보다 나이를 최소 20년은 더 먹었을법한 양반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허리를 숙인다·
이형준 본부장이 아무리 신영금융그룹의 차기 대권을 손에 쥘 사람이라고는 해도 양철기 전무도 무려 현진물산의 전무인지라 이런 저자세는 맞지 않는 것이었는데 이 본부장은 한 술 더 떴다·
인사를 받지도 않고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서로 허례허식으로 시간 낭비하지 맙시다· 앉으세요·”
“이거 저희가 본부장님께 큰 실례를 한 것 같습니다· 단단히 화가 나셨군요·”
이형준은 양철기 전무를 슬쩍 살피곤 말했다·
“보아하니 전무님도 모르신다 이 말인데··· 좋습니다· 일단 식사라도 하고 이야기 합시다·”
“하하하 맞습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아무리 껄끄러운 사이라고 해도 일단 식사를 같이하면 어색했던 분위기가 조금 풀어지기 마련이다·
양 전무가 화색을 띄며 반기는 이유가 그것이다·
이형준 본부장은 보기보다 대식가인지 둘이 6인분이나 되는 고기를 해치우고 나서 후식으로 나온 냉면을 반쯤 먹었을 때 입을 열었다·
“전 성격이 모나서 시간 낭비하는 걸 좋아하지 않습니다· 나한테 뭘 줄 수 있습니까?”
“이거 젊으신 분이라서 그런지 나같이 늙은이들은 쉽게 따가갈 수가 없겠습니다· 허허··· 그럼 말씀드리겠습니다· 신영투자증권에서 새로운 수익처 창출을 위해 수익성 좋은 해외 호텔을 매입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몇 개 사들이긴 했죠· 그런데요?”
“2015년에 현진관광에서 호주 시드니에 있는 포시즌 호텔을 사두었습니다· 당시 매입가는 3천억· 현재 가치는 5천억이 넘어갑니다· 4천억에 넘길 의향이 있습니다·”
“현진관광이 임은진 사장 소유죠?”
“맞습니다·”
“내가 해줘야 하는건요?”
“현진물산에서 호주 레버턴에 있는 코발트 광산을 인수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다른 자원개발업체랑 컨소시엄을 맺고 들어와 달라?”
“그냥 입찰가만 조금 올려주시는 정도면 만족합니다·”
“조금 가지고 되겠어요?”
“경쟁이 생기면 이런저런 이유로 예상보다 많은 금액이 도출되겠지만 원래 입찰이라는게 그런거 아닙니까?”
“이봐요 송 사장은 바보가 아니에요· 내년 중순에 신영은행에서 발행한 5천억 채권이 만기가 되는데 그걸 생각못할까?”
“안 되는 걸 되도록 만드는 걸 능력이라고 부르죠·”
형준은 비릿하게 미소지었다·
“욕심이 많으시네?”
“본인의 것을 찾는 건데 욕심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이형준 본부장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니아니··· 욕심이 맞아요· 능력이 안 되는데 더 가지려고 하면 욕심이지·”
양철기 전무의 얼굴이 굳어졌다·
“말씀이 과하시군요·”
“이봐요 전무님· 거래를 하고 싶으면 내가 원하는 게 뭔지를 알고 들이밀어야 하는거 아닌가요? 내가 지금 협상의 ABC도 모르는 사람하고 앉아있는건가?”
“회사 전 직원이 내 시야에 있습니다· 비서실 기조실이고 전부 말입니다· 말씀만 해주시면 본부장님께서 원하시는···”
“하하하!”
양 전무는 이형준 본부장의 웃음에 말을 끝맺지 못했다·
형준은 한참동안 웃어대다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자신감이 너무 지나치시네· 등잔 밑이 어두운 것도 정도가 있는 겁니다·”
“그게 무슨···”
“날 찾아온 게 비서실이었어요· 당신 시야에 있다는 비서실· 그렇게 안 봤는데 완전히 허당이시네·”
양철기 전무는 충격에 엉거주춤하게 일어난 자세 그대로 얼어붙었다·
그리고 이형준이 나가자 이를 갈며 중얼거렸다·
“비서실장 이 개새끼가···”
< 비서실의 고스트 사원(1) > 끝
ⓒ 영완(映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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