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서실의 고스트 사원(2) >
휘문중-휘문고-연세대·
서울대에 진학을 못한게 조금 안타깝기는 하지만 양철기 전무는 자신의 출신학교를 무척이나 자랑스러워하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과 똑같은 과정을 밟으며 입사한 친구가 바로 홍승대였다·
얼마나 예뻐했던가?
좀 된다 싶은 사업은 밀어주고 리스크가 큰 사업은 다른 팀을 주면서 최대한 경력에 흠집이 없도록 도왔다·
하지만 서운한 적도 있었다·
그렇게 돌봐줬는데도 비서실장이 된 후에는 어느 선 이상의 정보는 결코 주지 않으면서 임지훈 사장에게 철저하게 충성했으니까·
하지만 임지훈 사장이 쓰러지고 송은채 사장 취임 이후 홍승대는 완전히 돌아섰다·
아니 돌아섰다고 생각했다·
양 전무는 다시 자리에 앉아 핸드폰을 들고 고민했다·
이걸 바로 전화해서 조져야 하나 아니면 모른척 넘어가야 하나···
양 전무는 차 상무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난데· 바쁘지 않으면 좀 보지·”
양 전무는 아무래도 오늘 저녁이 길어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보이는 천장에서 위화감을 느낀 영훈은 자신을 둘러싼 고급스러운 인테리어에 다시 한번 당황하다 이내 집이 바뀌었음을 생각해내곤 서둘러 씻었다·
항상 다니던 지하철 노선도 달라졌고 길거리의 풍경도 달라져서인지 영훈은 오늘따라 출근길이 즐겁기 그지 없었다·
다만 졸음이 쏟아지는 게 흠이랄까·
“오늘 엄마가 저녁에 한번 보자고 하세요· 그런데 어제 잠 못 잤어요? 왜 그렇게 아침부터 하품을 쌕쌕하고 그래요?”
침대는 또 어찌나 좋은지 괜히 신숭생숭한 마음에 새벽 3시를 넘겨 잠이 들었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아침에 출근해서 연신 하품을 하고 있으니 연희가 눈치를 준다·
“어제 잠을 좀 못 잤나봐요·”
“왜요? 오피스텔이 마음에 안 들었어요?”
행여 누가 들을까 소리 죽여 묻는다·
“마음에 안 들긴요· 내 생전에 그렇게 좋은 집은 처음 봅니다·”
“그런데 왜 잠을 못 자요?”
“그냥 이런저런 생각 하다가요·”
“으흥~ 집이 너무 좋았구나? 솔직히 영훈 씨가 욕심을 조금만 냈으면 그냥 지내는게 아니라 달라고 해도 줬을 거예요· 그만큼 이번에 영훈 씨가 너무 큰 도움을 줬거든요·”
“됐습니다· 그 얘기는 그만해요·”
필요 이상으로 받는 건 좋지 않았다·
아직도 자신에 대한 확신이 없었으니까·
영훈이 안 좋은 안색으로 이야기를 듣지 않으려 하자 연희도 눈치껏 얼른 화제를 돌렸다·
“어쨌든 오늘 저녁 약속 없으시죠?”
“네 다행히도·”
“다행히도라니 솔직히 좀 그렇다· 보통 우리 회사 정도 되는 큰 회사 사장이 같이 저녁 먹자고 하면 있던 약속도 취소하는게 보통인데·”
“원래 내가 보통과는 좀 거리가 있지 않습니까·”
연희는 그가 지방에서 올라와 가족도 없이 고시원에 살고 있는걸 아는데 약속이 많다니 쉽사리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럼 평소에 무슨 약속들이 있는데요?”
“얼마 전에 동호회 하나 가입했습니다·”
“무슨 동호회요?”
“미식 동호회요· 첫 오프라인 모임에서 육회집을 갔는데 와··· 육회를 처음 먹어봤는데 맛이 새롭더라구요· 새로운 세계를 맛본 것 같았습니다· 두 번째 오프가 모레인데 꽃게찜 잘하는 곳으로 가기로 했어요· 오늘이 아니라서 다행입니다·”
“하아··· 그것 참 다행이네요· 꽃게찜을 놓칠 수는 없잖아요?”
“맞습니다·”
연희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
비서실에서 근무하는 김민희는 아침부터 기분이 좋지 않았다·
출근하자마자 홍승대 실장으로부터 점심 전에 모이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소위 ‘한딱가리’ 할 때마다 직원들 모아놓고 훈계 및 군기를 잡았었기에 오늘은 또 무슨 트집을 잡고 혼낼까 걱정이었다·
어쨌든 모이라고 했기에 현재 다섯 명의 직원이 서 있는 상황인데 선배인 유호정 대리가 팔짱을 끼며 투덜거렸다·
“오늘은 또 뭔 일이라니?”
“요즘 우리가 뭐 실수할 일이 있었나요?”
민희의 물음에 그녀가 입을 삐죽거리며 신경질을 부렸다·
“그럴 일이 어디어? 며칠 전에 신영투증한테서 주식 사오는 이후로 사장님 얼굴에 미소가 떠나지 않는거 너 못봤어?”
“봤죠·”
“그런데 왜 불러모은거야? 짜증나게···”
이때 가장 오른쪽에 서 있는 장규종 대리가 말했다·
“이유가 있겠지· 이제 오실 때 됐으니까 조용히 해·”
“알겠습니다·”
장규종 대리는 이중에 가장 연장자이자 선배였다·
이제 과장 진급을 눈앞에 두고 있었기 때문인지 떨어지는 낙엽도 조심할 만큼 실수를 저지르지 않는 철두철미한 일처리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렇게 한 10분 정도를 기다리자 홍 실장이 들어섰다·
“내가 왜 모이라고 했는지 모를거야· 그런데 내가 오늘 기분이 굉장히 안 좋아·”
홍 실장이 스스로 기분이 안 좋다고 말하기 전부터 직원들은 바짝 얼어있었다·
진짜 화가 날 때면 항상 귀부터 빨개지는 그의 특성을 직원들은 모르지 않았는데 지금 홍 실장의 귀가 빨개진 상태로 씩씩대고 있었기 때문이다·
“···”
“난 우리 비서실은 다른 부서와는 달리 가족같은 분위기를 지향해야 한다고 누누이 말했다·”
가’좆’같은 분위기겠지·
민희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가족이라는 게 뭐야? 비밀이 없어야 하는 거야· 적어도 이 비서실 내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은 내가 몰라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그런데 그런 일이 생겼어· 그래서 난 지금 참을 수가 없다·”
“···”
“저번 토요일 점심 때 아가씨와 같이 신라호텔 결혼식장 간 사람· 여기서 아가씨가 누군지 모르는 사람 없지?”
당연히 모를 수가 없다·
연희가 입사하기 전부터 미리 알고 있었고 입사하고 나서는 어느 부서에 배치돼있고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해 누누이 설명 들었으니까·
그런데 뜬금없이 연희랑 결혼식장을 갔냐니···
궁금함을 참지 못한 유호정 대리가 물었다·
“저희가 아가씨랑 왜 결혼식장을 가나요? 여기서 아가씨랑 대화 한 마디 해본 사람도 없을 텐데요?”
“시끄러· 질문은 내가 하는거야· 간 적 있어? 없어?”
유 대리는 괜히 질문했다가 혼만 난 상황에 입을 삐죽 내밀며 말했다·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없습니다·”
있을 리가 있나···
그리고 다른 일반적인 결혼식장도 아니고 무려 신라호텔 결혼식장이다·
재벌이나 톱스타들의 결혼식에 갈 일이 뭐가 있을까?
민희는 괜한 오해를 받는 이 상황이 억울하기만 했다·
“없어?”
“네·”
“좋아· 그럼 저번 토요일 점심 때 자신이 어디에 있었는지 증명할 수 있는 사람? 사진이나 카톡 또는 영수증 같은 걸로 증명 가능한 사람·”
이때 가장 연장자인 장규종 대리가 손을 번쩍 든다·
“토요일 1시에 봤던 영화표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홍 실장의 표정이 와락 일그러진다·
그리고는 잠깐 한숨을 쉬더니 말했다·
“후··· 그래· 나머지 사람들은?”
“찾아보겠습니다·”
“친구랑 점심 약속 하는 카톡 있는데 제출하도록 하겠습니다·”
홍 실장은 여전히 불만스러운 얼굴로 자리를 떴다·
당연히 직원들의 입에서는 탄식이 흘러나왔고 유 대리는 기다렸다는 듯 짜증을 냈다·
“뭐야 왜 저래? 이거 엄연히 개인정보야·”
“내기 싫으면 회사 나가든지·”
장 대리의 말에 유 대리는 입을 다물었다·
민희는 다행히 남자친구와 뮤지컬을 예매했던 기록이 있을 거라는 생각에 안도하다 문득 사장님이 얼마 전 명함을 하나 파달라고 했던 일이 생각났다·
방에 차를 가져다 달래서 가지고 들어갔을 때 은밀하게 했던 부탁·
혼자만 알고 있으라는 말에 본래 명함을 파주던 곳이 아닌 회사에서 좀 떨어진 곳에 디자인을 주고 만들었던 그 명함이 마음에 걸렸다·
아가씨와 똑같은 부서에 근무하는 그 신입사원이 설마 이번 주말 같이 결혼식장을 갔던 사람일까?
민희는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펼치면서도 이걸 실장에게 보고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점심을 먹으면서도 계속 고민하던 그녀는 식사 후 항상 차를 즐기는 사장의 부름에 결정을 내렸다·
원래 모르면 물어보면 되는 거니까·
최소한 물어보기라도 하면 나중에 문제가 생겨도 책 잡히지 않는다는 걸 짧지 않은 회사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똑똑···
“들어와·”
민희는 조심스럽게 차를 내려놓고 모니터에 시선을 집중하고 있는 송은채 사장에게 말했다·
“사장님·”
“응? 왜?”
“실은 오늘 홍승대 실장님이 토요일에 아가씨와 같이 신라호텔 결혼식장에 갔던 사람이 있었는지 물었는데요·”
민희는 송 사장의 안색이 변하는 걸 놓치지 않았다·
“그런데?”
“홍 실장님은 우리 비서실 직원들 중에 아가씨와 같이 간 사람이 있다고 확신하는 눈치였습니다· 그래서 사장님께서 지시하신 명함에 대해···”
“말했니?”
“아닙니다· 말해야 할지 몰라서 여쭤보려고 했습니다·”
“잘했어· 앞으로 모른척 해·”
“알겠습니다·”
역시나 물어보는게 현명했다고 생각한 민희는 송 사장의 이어진 말에 척추에 짜릿한 전기가 흐르는 걸 느꼈다·
“그리고 앞으로 홍 실장이 무슨 말을 하고 무슨 일을 하는지 빠짐 없이 은밀하게 보고하도록 해·”
“알겠습니다·”
민희는 무료했던 회사 생활이 갑자기 달라 보이기 시작했다·
*
업무를 끝내고 연희와 헤어졌다가 다시 광화문에 있는 포시즌 호텔에 들어선 영훈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약속된 식당으로 향했다·
오늘 음식은 또 얼마나 맛있을까 생각하면 즐겁기 그지 없었다·
회사의 오너를 만난다는 부담감 따위는 애초부터 없었으니 호텔의 고급스러운 인테리어에도 눈이 가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옷차림에도 눈이 갔다·
눈이 호강하는 느낌으로 식당에 들어서니 역시나 이번에도 송 사장님이 먼저 기다리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좀 더 서두를껄 그랬습니다·”
“아니에요· 사장이 되니까 업무보다는 생각할 시간이 많이 필요한 것 같아요· 그래서 좀 일찍 움직였죠· 앉아요·”
“네·”
송 사장의 옆에 앉아 있던 연희가 투덜댔다·
“난 뭐 보이지도 않아요?”
“30분 전까지도 같이 있었지 않습니까·”
“에휴···”
연희가 한숨을 내쉴 때 송 사장이 말했다·
“딸아이한테 들으니 미식하는 걸 즐겨한다고 해서 이곳으로 정했어요· 여기 도미 스테이크가 괜찮거든요·”
“잘 먹겠습니다·”
지금껏 생선은 날것으로 먹거나 구이로 먹었는데 스테이크라니 기대되지 않을 수 없다·
한 입에 먹을 음식부터 차례로 나오는데 송 사장이 말했다·
“여긴 코스라서 천천히 말하면서 먹도록 해요·”
“네 잘 먹겠습니다·”
“영훈 씨 덕분에 일이 잘 풀렸어요· 특히 내가 말하지도 않았는데 주식을 우리가 살 수 있게 해줘서 굉장히 고마웠어요·”
“좋게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냥 운이 좋았습니다·”
“궁금 한게 있어요· 혹시···”
“제가 어떻게 이형준 본부장을 설득했는지 궁금하십니까?”
“맞아요·”
영훈은 처음으로 얼굴에서 미소를 지우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죄송하지만 그건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궁금하실 거라는 건 충분히 알고 있지만 제 입장에서도 이건 좀··· 그냥 영업비밀이라고 생각해주시면 제 마음이 편할 것 같습니다·”
사장이 물어보는데 자기 마음 편하자고 그냥 묻어달란다·
정말 상식을 뛰어넘는 행태였지만 송 사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지었다·
“좋아요· 그렇게 할게요· 입이 무거우면서도 능력 있는 사람은 존중해줘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거든요·”
“감사합니다·”
“딸아이에게 듣기로 혜성기업 사장이 그렇게 쉽게 망할 것 같지 않은 사람이라고 했다던데 맞나요?”
연희가 어찌저찌 둘러대며 말한게 저런 식이었나보다·
“비슷합니다· 다만 확실하진 않습니다· 제가 잘 못 본 것일수도 있으니까요·”
“확실하지 않다··· 좋군요· 선을 지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니까· 그리고 혹시···”
“네?”
“비서실로 부서를 옮기는 걸 진지하게 생각해봤으면 좋겠어요· 강요는 아니에요· 다만 그렇게 해주면 과장급 대우를 해줄게요· 물론 지금처럼 없는듯 움직이셔도 괜찮아요·”
“생각해보겠습니다·”
영훈의 대답에 송 사장이 빙그레 미소지었다·
< 비서실의 고스트 사원(2) > 끝
ⓒ 영완(映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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