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서실의 고스트 사원(4) >
송은채 사장은 연희에게 그 이야기를 전해 듣고 고민했다·
수천 억의 자금을 빌려보겠단 말이 어디 신입사원이 할 만한 말인가?
그 가당치 않은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그 친구가 황당하기도 하고 어이가 없었지만 그렇다고 닥치고 할 일이나 열심히 하라고 하기에는 이번 혜성기업 건으로 확실하게 자신의 능력을 입증해 보였다·
한참을 고민하던 송 사장은 결국 결정을 내렸다·
해보지도 않고 깔 수 없는 사안임을 말이다·
그렇다고 엄청난 기대를 가진 것도 아니었다·
어디 한 번 해보라는 정도?
”민희 들어와 볼래?“
인터폰으로 민희를 콕 찍어 불렀다·
잠시 후 살짝 긴장 어린 표정의 여비서 하나가 들어왔다·
아직 입사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지만 다른 무엇보다 눈치가 빠른게 마음에 들었다·
“부르셨습니까?”
“요즘 홍 실장 어떠니?”
짧은 물음에 마치 기다렸다는 듯 민희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며칠 전 퇴근할 때 영업팀 본부장인 차지열 상무님과 만나는 걸 확인했습니다·”
송 사장은 재주도 좋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평소 퇴근이 늦어질 때면 간단히 샌드위치를 먹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항상 다 같이 먹는데 그 날따라 안 드시겠다고 해서 이상하다고 생각해 퇴근할 때 뒤따라 갔습니다· 시키신 일은 아니었기 때문에 만약 잘못된 행동이었다면 다시는 그러지 않겠습니다·”
“아니야 괜찮아· 계속해·”
김민희는 안도한 듯 옅은 미소와 함께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홍 실장님이 종로 유미관이라는 식당에 들어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차지열 상무님의 차가 들어가는 걸 확인했습니다· 차량번호 확인했으니 틀림없다고 생각합니다·”
“둘이 다른 방에 들어갔을 수도 있잖아·”
“다음 날 아침에 법인카드 결제내역 확인했는데 결제된 게 없었습니다·”
“원래 개인적인 식사는 결제 안 할 수도 있는 거 아니야?”
“고자질 하는 것 같아 송구하지만 업무 외적인 식사에 종종 결제하는 걸 본 적이 있습니다·”
모름지기 대기업 비서실장인데 법인카드 결제내역 가지고 하나하나 따지고 들지는 않는다·
“그럴 사람이 아닌데 자기 돈으로 결제했다?”
“네· 차지열 상무님 법인카드 결제내역도 확인했는데 깨끗했습니다·”
송 사장은 내심 감탄했다·
눈치만 빠른줄 알았는데 의외로 똑똑하고 꼼꼼하기까지 하다·
“확실히 이상하긴 하다· 그치?”
“네·”
“음··· 수고했어·”
“감사합니다·”
“나가서 비서실 직원들 아무도 모르게 신영투자증권 이형준 본부장한테 약속 좀 잡아·”
“네? 아 네· 알겠습니다· 사장님께서 만나시는···”
“내가 아니야· 그냥 조용히 만나고 싶다고 하면서 회사에서 멀리 떨어진 곳 아무 식당이나 예약해서 알려줘· 연락처는 연희 번호 알려주면 되고·”
“알겠습니다·”
“그래 나가봐·”
민희는 인사하고 종종 걸음으로 사장실을 나왔다·
그런데 나가자마자 홍승대 실장이 떡하니 기다리고 있는게 아닌가?
“뭐야?”
“네?”
“왜 놀라고 그래?”
“갑자기 그렇게 서 계시니까 놀랜겁니다·”
민희는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의 자리로 걸어가는데 홍 실장이 따라온다·
“사장님이 왜 불렀어?”
“별 다른거 없었습니다· 사장님께서 새로 나왔다는 허브차 직구할 수 있냐고 물어보셔서 대답해 드렸습니다·”
“그래? 무슨 허브차?”
“에몬스 사에서 나온 쟈스민 차를 드시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그런 회사가 있어?”
“네·”
“그 외에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왜 널 찍어서 불렀지? 보통 그냥 직원 들어오라고 하잖아?”
홍승대 실장은 뭐 하나라도 허점이 보이면 물어뜯을 기세로 민희의 표정을 살폈다·
민희는 그 살벌한 기세에 떨렸지만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제가 전에 차에 대해서 잘 설명해드렸습니다· 저도 차에 관심이 많아서요·”
이래 뵈도 대학 다닐 때까지 연극동아리 소속이었고 한때 연기하라는 말을 들을 만큼 외모도 자신 있었던 그녀였다·
그때 배웠던 연기를 이때 발휘하게 되자 민희는 역시 뭐 하나라도 배우면 언젠가는 써먹게 된다며 뿌듯해했다·
“그래? 혹시 뭐 특별한게 있으면 빼먹지 말고 말해·”
“정확히 어떤걸 말씀하시는 건지···”
그냥 넘어가도 되는걸 일부러 짚은건 최대한 홍 실장의 생각을 알아내고자 함이었다·
“그냥 뭐라도· 난 비서실장으로서 사장님이 요즘 어떤 부분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 다 알아야해· 그게 내가 할 일이야·”
“알겠습니다·”
“그럼 일 봐·”
홍승대 실장은 그렇게 쌩 찬바람을 내고는 자리를 떴다·
민희는 이번에 홍 실장과 차 상무와의 만남을 보고하면서 자신에 대한 사장님의 신뢰가 더욱 올라갔다는걸 확신했다·
이대로만 쭉 가면 앞으로 홍 실장 자리는 자신의 것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민희는 하늘처럼 높은 산으로 보이던 홍 실장이 갑자기 우스워 보이기 시작했다·
*
“약속장소를 바꿨어요· 이태원으로 오라는데요?”
연희는 자신의 핸드폰으로 온 문자를 영훈에게 전송했다·
“이태원이라··· 말로만 듣던 덴데 이제야 가보네요·”
“별거 없어요· 그건 그렇고 만나면 뭐라고 할 거예요? 안 빌려주면 확 불어버리겠다고 협박할 거예요?”
영훈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연희를 바라보았다·
“협박을 왜 합니까?”
“네? 그럴 생각 아니었어요?”
“미쳤어요? 말했잖아요 그냥 물어본다고·”
“헐··· 그럼 정말 순수하게 물어볼 생각이에요?”
“내가 뭐 바봅니까? 그래서 자료 모아 달라고 했잖아요?”
영훈은 연희에게 말을 꺼낸후 바로 이형준 본부장과 그룹 지배 현황에 대해 조사해달라고 부탁했다·
지금 그의 손에 들린 자료 역시 그룹 오너의 가족관계도였다·
“그럼요?”
영훈은 잠시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진지하게 말했다·
“연희 씨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손해를 보면 손해본 쪽은 원한을 가집니다· 아무리 손해를 본 쪽이 약자라고 해도 원한을 많이 사면 그 악의가 언제 어느 순간 강자에게 닥칠지 모르는 거예요· 이건 당신이 언젠가 회사를 이끌어 갈지도 모르는 사람이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명심해두세요·”
연희는 억울한지 잠시 볼을 부풀렸다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명심할게요· 이럴땐 진짜 산에서 도 닦은 사람 같다니까?”
“도는 안 닦았습니다· 게임했지·”
“어쨌든 그래도 난 이해가 안 가요· 당신 말대로라면 그쪽에서 우리한테 원하는게 있어야 거래가 성립된다는 건데 신영투자증권에서 우리한테 원하는게 있을 리 없어요·”
“그래서 찾아보는 겁니다·”
“지금요?”
“네·”
“그럴거면 시간을 더 달라고 하지 그랬어요? 약속을 미룰까요?”
“됐습니다· 시간이 많이 주어진다고 다 해결되는 건 아니니까·”
“충분해요?”
“네·”
본인이 괜찮다는데 연희도 더는 권하지 못했다·
영훈은 따라오고 싶다는 연희를 말리고 혼자 약속한 술집에 도착했다·
이태원에 있는 술집이라고 해서 처음에는 외국인들이 오는 술집인줄 알았는데 도착해서 보니 흔히 볼 수 있는 룸싸롱이었다·
웨이터의 안내를 받아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한 방 문을 열고 들어가니 전에 봤었던 이형준 본부장이 벌써부터 술을 여러병 까놓은 상태로 마시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결혼식장에서 뵙고 두 번째입니다·”
“빈 말이라도 반갑다는 말은 못 하겠군· 그런데 혼자 왔나?”
“네·”
“뭐 그것도 나쁘지 않지·”
“여기서 선약이 있으셨나 봅니다?”
“영양가 없는 만남이라 신경쓸 필요는 없고··· 그래 언젠가 또 만나자고 할 줄은 알았어· 아 나보다 나이 어리지? 말 놔도 되나?”
사실 나이 차이가 한 살밖에 안되긴 하지만 어쨌거나 그의 나이가 많은건 맞았다·
“이미 놓고 계신데 여기서 올리라고 하면 분위기 이상해지지 않겠습니까·”
이형준 본부장은 영훈이 재미있다는 듯 바라보았다·
“신기하네· 내가 누구인지 알 텐데··· 현진물산 비서실에 있다고? 나이를 보면 비서실장은 아니고 전에 명함 줬었나?”
영훈은 양복 안 주머니에서 명함 하나를 꺼내 내밀었다·
“그때는 경황이 없었습니다·”
“직책도 없고 그냥 비서실 최영훈이라··· 졸라 희한하네? 하나만 묻자· 어떻게 알았어?”
“그건 영업 비밀이라서 말해드리기 곤란합니다·”
영훈이 웃어 넘겨도 형준은 뭐라 하지 않았다·
“그래? 뭐 그럴수 있지· 순순히 알려줄거라는 생각은 안 했어· 근데 졸라 궁금해· 씨발 우리 아빠도 모르는걸 어떻게 알았을까? 내가 그것 때문에 술과 여자가 없으면 잠이 안 와·”
“본의 아니게 죄송하게 됐습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아는 사람 몇 없으니까·”
“그거 듣고 닥치고 안심하고 있으라는 말인가?”
“진짭니다· 그 자리에 있었던 연희 씨랑 사장님 말고는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으니까요·”
실제로는 사장님도 모르지만 그렇게 말했다가는 대화가 이상한 방향으로 흐를 것 같아 그냥 사장님은 알고 있는 것처럼 말했다·
형준도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했다·
“그래· 그러니까 그렇게 날 뻔질나게 찾아왔겠지· 송 사장이 내 목에 개목걸이를 채운지도 모르고 말이야·”
“개목걸이라니요· 자학이 심하십니다·”
“개목걸이가 아니다? 좋아 만나자고 했으니 이제 용건을 꺼내보지?”
영훈은 쑥스럽게 웃다가 입을 열었다·
“우리 회사 직원들이 열심히 일을 하기는 하는데 남는게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장기적인 수익창출을 위해 자원개발사업에 주력하고 있습니다·”
“내가 성격이 급해서 본래 이런 잡설은 안 듣는데 오늘 내 처지가 처량하네? 큰 소리 한 번 못 치고···”
“하하· 그럼 계속 이야기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서 호주에···”
“코발트 광산 업체 인수한다고?”
“어? 아셨습니까?”
“뻔질나게 드나드는 인간 하나가 말해주긴 했지· 그래서?”
다 알고 있다니 말하기 편해졌다·
“인수자금이 만만치 않은 상황입니다·”
“그러니까 나더러 인수자금을 빌려달라?”
“맞습니다·”
“하하하· 이건 씨발 컨소시엄 만들어서 같이 참여하자는 말보다 더 황당하네?”
“꽤나 흥미로운 말을 하고 갔군요·”
“왜? 누가 왔는지도 알려줘?”
“관심 없습니다·”
“거짓말하고 있네· 가장 궁금한 게 그거 아니야?”
“아닙니다· 사실 전 사내 정치보다 회사의 미래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거든요· 그리고 누가 찾아왔을지 짐작이 가기고 하고···”
형준은 빙그레 웃는 영훈을 보며 허튼 소리가 아님을 알았다·
“씨발 재미없네· 그럼 그 얘긴 됐고 내년에 신영은행에서 5천억 채권이 만기가 돌아오는 건 알고 있나?”
“그렇다고 하더군요·”
“그런데도 빌려달라는 말이 나오나?”
“원래 힘들 때 친구가 진짜 친구 아니겠습니까?”
“내가 왜 친구가 되어야 하지?”
“그럼 적이 되고 싶으신가요?”
“하하 이 새끼 말 잘하는 거 보게? 내가 개목걸이 개목걸이 하니까 진짜 개로 보이나 보지?”
“그렇게 흥분하실 필요 없습니다· 현진물산도 큰 회사예요· 저희 회사랑 친해지면 본부장님도 나쁘지 않을 겁니다·”
“혀에 기름을 쳐도 정도가 있는 거야· 내가 얻을 게 뭐가 있어?”
영훈은 앞에 놓인 양주 대신 작은 매실음료 캔을 따서 한 모금 마시곤 말했다·
“부친께서 모를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순간 언더락 잔을 움켜쥔 형준의 손이 바르르 떨린다·
“뭐라고?”
“부회장님 동생분이 신영카드 사장님이시죠? 들어보니 그 자제분 능력이 출중하다고 소문 났다고 하던데· 신영카드의 시장점유율을 얼마나 올렸다더라? 하여튼 본부장님이랑 사촌 되시는 분이죠? 그래서 본부장님이 부실한 혜성기업을 우리한테 넘기려 한다고 하던데 맞습니까?”
“그래서?”
“당신만이 우리를 도와줄 수 있다고 생각하시면 착각한 겁니다· 전 지금 본부장님을 도와주려고 온 거예요· 다만 그냥 도와드리면 서로간에 신뢰가 쌓이지 않으니까 하나씩 주고 받으면서 상부상조하자는 말입니다·”
< 비서실의 고스트 사원(4) > 끝
ⓒ 영완(映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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