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서실의 고스트 사원(6) >
“엄마! 엄마!”
연희는 전화기를 붙잡고 우두두 계단을 내려오며 소리질렀다·
거실에서 와인을 마시던 송은채 사장은 미간을 찌푸렸다·
“넌 아무리 집이라고 해도 좀 조심해· 그러다 넘어지면 어쩌려고 그러니?”
“엄마 대박···”
연희는 신경도 쓰지 않고 송 사장 옆에 앉았다·
심각하기도 하고 귀신을 본 것 같기도 한 그 묘한 표정에 송 사장이 물었다·
“뭐니? 그 표정?”
“영훈 씨가 방금 이형준 본부장 만나고 왔대요·”
“그래서?”
“신영은행에서 5천억 대출 가능할 것 같대요·”
송 사장의 입가로 가져가던 잔의 움직임이 거짓말처럼 딱 멈췄다·
“뭐라고?”
“대신 조건이 있대요· 혜성기업 인수해야 한다는 조건· 대신 그거 받으면 내년 5천억 만기 채권 연장해주겠대요·”
“진짜야?”
“이런걸 장난으로 말하는 사람은 아니에요·”
“혜성기업을 얼마에 인수하는 조건이라니?”
“전에 인수제안 금액보다는 조정 가능하지만 정확한 가격은 실무자와 협의해보래요· 그리고 부채 일부 탕감에다가 말을 잘하면 더 얻어올게 있을 거래요·”
송 사장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이 일을 고작 신입사원이 혼자 가서 결정짓고 왔다니 누가 들어도 말도 안 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송 사장은 가장 먼저 떠오른 질문을 던졌다·
“왜? 이형준 본부장이 왜 우리한테 돈을 빌려주니? 그렇게 해야 할 이유가 뭐가 있어? 그것도 5천억이나? 만약 우리 회사가 잘못되면 만기될 채권까지 합해서 신영은행에서 물어야 할 자금만 1조 원인데?”
“그건 나도 모르죠·”
“이게 말이 되는 건가? 이형준 본부장이 장난 치는거 아니니? 신영그룹을 물려받을 손자가 왜 이런 거래를 해?”
연희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이 상황에 그녀라고 달리 할 말이 있을 리가···
그리고 그녀도 지금 이 상황이 완전히 믿기지는 않았다·
“···”
“일단 내일 되면 정확히 알게 되겠지· 진짜인지 거짓인지···”
송 사장은 최대한 냉정한 판단을 하려고 노력했다·
고작 신입사원의 말에 흔들려서 잘못 판단해버리면 회사가 흔들릴 테니까·
그리고 다음날 송 사장은 바로 재무팀 오재식 상무를 불렀다·
그리고 홍승대 실장은 송 사장이 또다시 오재식 상무를 불렀다는 것에 주목하곤 은밀하게 양 전무와 차 상무에게 연락했다·
*
“입점제안서랑 PPT 자료 챙겼지? 샘플은 가방 하나만 챙기고 서가은 화보파일 잊어먹지 마·”
노형석 대리는 아침부터 활기가 넘쳤다·
어제만 해도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어깨가 축 쳐졌던 그는 아침에 미래 백화점에서 입점제안 메일을 받고 생기를 되찾았다·
그렇기에 연희는 아침에 출근하자마자 영훈에게 뭐 하나 물어보지도 못하고 정신 없이 움직여야 했다·
윤성우 부장이 미팅을 하러 떠나는 팀원들에게 당부했다·
“임대료 너무 퍼주지 마· 남 좋은 일만 시키지 말라고·”
“알겠습니다·”
“이거 잘 되면 과장 진급 눈앞이야· 잘하자·”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노 대리는 윤성우 부장의 격려를 받으며 보무도 당당하게 미래백화점 강남점으로 향하려 할 때 윤 부장이 영훈에게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최영훈이 맞지?”
“네 맞습니다·”
“야 얘도 데리고 가야 하냐?”
노 대리는 영문을 몰랐지만 영훈이 회의에 필요한 인물이 아니라는 건 확실히 알고 있었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내가 심부름 하나 시켜도 되지?”
“물론입니다·”
“그럼 나머지는 가 봐·”
연희는 같이 따라가지 못하는 것에 아쉬움을 담아 한번 눈빛을 마주치곤 힘 없이 나갔다·
윤성우 부장은 영훈의 위아래를 훑어보며 말했다·
“너 힘 좀 쓰냐?”
“솔직히 힘이 넘치는 스타일은 아닙니다·”
“그래 보이긴 한다· 그런데 가야 해· 너 ‘레이디 로렌’이라는 브랜드 알지?”
“네·”
“그거 우리 거거든· 이번 가을 신상으로 코트 하나가 나왔는데 이게 생각보다 반응이 좋아· 그래서 공장에서 지원을 요청했는데 각 팀의 막내들이 가야 할 것 같아· 연희는 로열패밀리인 거 너도 안다며?”
“알고 있습니다·”
“원래 그쪽 사람들이 허드렛일 시키면 죽는줄 알아· 해본적도 없을 테니까 가도 도움도 안 될거야· 네 동기들 다 갈 테니까 너무 억울해하지 말고·”
혼자 간다고 해도 그러려니 할 텐데 동기들이 같이 간다고 하는데 불만이 있을 리 없다·
“괜찮습니다· 가야죠·”
“그래 1층에 버스 불러놨으니까 가서 고생 좀 하고 와·”
윤 부장의 말대로 1층에 내려가니 대형버스가 기다리고 있었고 그 앞에는 약간의 불만 어린 신입사원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가 손을 흔드는게 보였다·
“아저씨!”
언제나 귀엽고 발랄한 이윤지였다·
그리고 그녀 옆에 같은 조원이었던 고대 경영학과 출신의 박찬기와 지방국립대 출신의 장가람이 서 있었다·
“늦지는 않았습니까?”
“아니에요· 버스 10분 뒤에 출발한대요·”
“그런데 그 옷 입고 일할 수 있겠습니까?”
이윤지는 무릎 위 허벅지로 올라오는 타이트한 치마를 입고 있어서 아무래도 일을 하기에는 적합한 복장이 아닌 듯 보였다·
“오늘 출근할 때 이럴줄 알았으면 바지를 입고 왔었을 텐데 어쩔 수 없죠· 힝···”
윤지는 울상을 지었지만 여자라고 봐주지는 않는 것 같았다·
연희는 여자라서 봐준게 아니라 로열패밀리라서 봐준 듯 싶지만·
그때 박찬기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뉴월드 어그러지고 어때요? 분위기 아직도 안 좋아요?”
오리엔테이션 단톡방에 수시로 글이 올라오는데다가 종종 일이 끝나고 술 한잔 하는 일도 있었기에 이미 각 팀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다 알고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오늘 아침에 미래 백화점에서 입점제안이 와서 미팅하러 갔습니다·”
“와~”
“잘됐다·”
“축하드립니다·”
동기들의 축하에 영훈이 빙그레 미소지었다·
“노형석 대리님이 다 한 일인데요· 그런데 다들 아침은 드셨습니까?”
“아니요 배고파요·”
윤지가 배를 문지르며 울상을 짓자 영훈이 말했다·
“우리 토스트나 먹고 갈까요? 가면 힘써야 하는데 배 속이 비면 힘쓸 수가 없잖아요?”
“토스트 완전 좋습니다·”
장가람이 가장 먼저 소리쳤다·
영훈은 그들을 데리고 회사 건너편에 위치한 푸드트럭으로 향했다·
*
재무팀 오재식 상무는 요즘 돌아가는 상황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전에 신영투자증권에서 15500원에 주식을 넘겨준다고 했을 때 그는 솔직히 송 사장의 딸인 연희와 이형준 본부장이 결혼이라도 하는줄 알았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형제의 난이나 다름 없는 이 상황에 얼마로 뛸지 모르는 그 주식을 그 가격에 팔 이유가 없어 보였으니까·
물론 나중에 그럴 일은 없을 거라고 말하면서 오해는 풀렸지만 오늘 받은 지시는 상상을 초월한 것이었다·
정말 재벌 3세들간의 결혼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이해가 안 갈 정도라고 할까?
“상무님 이거 의미가 있는 겁니까?”
오재식 상무의 지시를 받은 재무팀 이상명 부장이 이게 무슨 헛짓거리냐는 듯 물었다·
“너 건방지다? 내가 사장님이 내린 지시라고 그랬지?”
건방지다고 말했지만 오재식 상무나 이상명 부장은 상하관계로 꽉 막힌 사이는 아니었다·
이상명 부장이 입사했을 때 오재식 상무가 사수였고 이후 지금까지 찰떡같이 붙어 다니며 수많은 고난을 겪어왔다·
그렇기에 가끔 이 부장이 이렇게 대거리를 해도 괜찮은 거였다·
“사장님 지시 아니었으면 농담하시는 거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시끄럽고 혜성기업 얼마에 사야해?”
“계산해보니까 2500억 이상은 어렵습니다·”
“2500억이라··· 그럼 실질적으로 우리 통장에 들어오는 돈이 2500억이네? 큰 돈이긴 한데 애매해· 이 정도면 판교에 있는 빌딩 처분해야 하는거나 마찬가지니까· 흠··· 그건 그렇고 3500억을 불렀는데 천억을 후려쳐도 되는 걸까? 그쪽에서 이걸 받겠어?”
“신영은행에서 부채 일부를 탕감해준다고 해도 기본적으로 혜성기업이 가진 미래가치가 없습니다· 가지고 있는 부동산을 다 정리한다고 가정했을 때 가치가 딱 2천억이고 나머지 5백억은 아무 쓰잘데기 없는 시공능력이랑 경영권을 프리미엄으로 잡아준 겁니다·”
“아무 쓰잘데기 없다는 말은 이르지 않나? 우리 회사 건설업체 없잖아· 혜성기업을 우리가 인수하면 건설업체 시너지가 장난 아닐건데?”
“이론상으로는 그렇지만 당장 인수한 회사를 써먹을 데가 없다는 게 문제입니다·”
“하긴 인수해놓고 당장 공구리 칠 사업이 없기는 하지·”
“그래도 2500억이면 나쁘지 않을 것 같기는 합니다· 상무님이 말씀하셨던대로 나중에 시너지가 있을 수도 있으니까· 그런데 혜성기업은 그렇다 치고 진짜 5천억을 주긴 준답니까?”
“너 그 질문 전에 주식 산다고 했을 때도 그렇게 물었어·”
이상명 부장은 머리를 긁적이다가 다시 말했다·
“죄송합니다· 자꾸 의심이 돼서··· 그런데 이상하지 않습니까? 제가 만약 은행에서 근무하는데 아래 직원이 저 대출 허가해준다고 하면 쌍욕을 하면서 석달 열흘을 갈굴 것 같은데요? 그리고 내년에 돌아오는 5천억 채권 만기까지 연장해준다는 말을 어떻게 쉽게 믿겠습니까?”
“나도 너랑 똑같이 말했다·”
“사장님께요?”
“그래·”
“그러니까 뭐라고 하십니까?”
오 상무는 고개를 갸웃하면서 말했다·
“이게 진짜 골때리는 건데 사장님도 잘 모르는 것 같더라고·”
“예?”
이 부장은 인상을 팍 쓰며 무슨 개소리를 하느냐는 듯 바라보았다·
“그냥 느낌이 그래· 사장님이 돌려서 말하긴 했는데 결국 결론을 내보면 모른다는 말이더라고· 왜 모를까?”
“왜 모를까요?”
“씨발 그러니까··· 신영은행 애들이 미친 건가?”
“은행 애들 보통 똑똑한거 아닙니다· 돈 굴려서 돈 버는거에 미친 애들이에요·”
“내가 그걸 모르겠냐? 어쨌든 이거 들고 올라가보면 알겠지·”
오재식 상무는 이상명 부장이 정리한 서류를 들고 일어났다·
이 부장이 물었다·
“그런데 만약 이게 된다고 하면 진행하실 겁니까? 상무님 말씀대로 이거 대출 받아도 판교에 있는 빌딩 처분해야 하는건 마찬가진데요?”
“그래도 그게 어디야? 그리고 당장 내년에 갚아야 할 5천억 연장되는 것만으로도 우린 이걸 거절할 수 없어·”
“신영은행에서 금을 주는 건지 독을 주는 건지 아직 모르겠습니다· 이거 잘못하면 신영은행에 회사 통째로 넘어갈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따지만 은행거 아닌 회사 없다·”
오 상무는 단호하게 말하며 사장실로 향했다·
최소 2500억은 무조건 지켜야 한다는 마음으로 단단히 각오하며 들어섰는데 송은채 사장은 서류를 훑어 보고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니까 2500억이면 인수해도 된다는 말인가요?”
“그 정도면 괜찮을 것 같습니다· 제안서 보낼까요?”
“아니에요· 담당자를 통해서 다이렉트로 협의 볼 거니까요·”
“담당자요? 그게 누굽니까?”
보통 오재식 상무는 자신의 일이 아니면 어지간해서는 궁금해하지도 않았다·
무사안일주의를 표방하는 그의 성격상 사내정치는 극혐하는 것이었고 사내정치를 피하기 위해선 모르는 게 약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건 도저히 궁금해서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송 사장도 이 질문에 답변해주기 곤란했다·
“미안한데 이건 이야기해줄 수 없는 상황이에요· 이해하세요·”
어떻게 말해주겠는가?
지금 평택 공장에 내려가서 막노동을 하고 있는 신입사원 중 하나가 이 엄청난 딜을 이끌어낸 담당자라는 걸 말이다·
“큼 괜찮습니다· 무리 없이 잘 해결만 된다면야···”
“잘 해결될 거예요· 2500억은 최대한 지켜볼게요·”
“알겠습니다·”
오재식 상무가 나가자 송은채 사장은 고민에 잠겼다·
본래 영훈은 실무자가 직접 이형준 본부장에게 연락하면 된다고 했지만 송 사장은 오 상무에게 이 딜의 마무리를 맡길 수 없었다·
이 일방적으로 기울어진 계약이 어떤 이유로 성립된 것인지조차 모르기 때문에 뭘 거래에 껴도 되는지 어떤건 건들면 안 되는지 따위의 협상의 기준점을 잡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담당자인 영훈이 이 딜을 마무리했으면 하는 마음인데···
고민하던 송 사장이 결국 연희가 알려준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띵띵 띠딩띠!
몇 번의 신호가 가고 전화를 받았다·
“헉··· 헉··· 여보세요?”
“일하는 중이었죠? 나 송 사장이에요· 급해서 일하는 중인거 알면서 전화했어요·”
“아 네· 괜찮습니다· 무슨 일로 전화주셨습니까?”
송 사장은 이 상황이 어처구니 없으면서도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혜성기업 인수 때문에 그러는데···”
송 사장이 말을 다 끝나기도 전에 영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거 안 받으시면 거래 안 됩니다· 무조건 받아야 해요· 대신 너무 비싸서 걱정이시면 천억만 주고 나머지 금액은 분할납부 하면 안 되겠냐고 물어보세요·”
분할납부라니···
이 정도면 신영은행을 거의 벗겨 먹겠다는거나 마찬가지 아닌가?
“아니 그러면 좋긴 하지만 그건 너무 과한 제안 아닌가?”
“아마 받을 텐데요?”
“이걸 받을 거라구?”
평소 어지간히 친하지 않으면 결코 반말을 하지 않는 송 사장은 무심코 말을 놓았다는것도 인지하지 못했다·
“그럴걸요? 제 생각은 그렇지만 혹시 아닐수도 있으니까 정 그러시면 제가 일 끝나고 물어보겠습니다·”
그때 수화기 너머로 걸죽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이! 최영훈 씨! 농땡이 치지 말고 이거나 날라· 그리고 젊어서부터 전화로 막 허세 부리고 그러면 안 돼· 천억이 뉘집 애 이름인 줄 아나···”
이에 영훈이 난처한 목소리로 말했다·
“예! 바로 옮기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지금 끊어야 할 것 같습니다· 일 끝나고 연락 드리겠습니다· 그럼···”
“여보세요?”
뚜··· 뚜···
< 비서실의 고스트 사원(6) > 끝
ⓒ 영완(映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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