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령에서 사람으로(1) >
연희는 미래 백화점과의 미팅을 끝내고 와서 종일 초조하게 기다렸다·
미래 백화점과의 입점 계약을 맺기로 확정짓고 온 세상을 얻은 것처럼 기뻐하는 노형석 대리와 이은성 사원과는 다르게 혼자 세상 심각한 얼굴로·
그러다 어느 순간 도착한 메시지에 그녀는 퇴근하고 바로 움직였다·
목적지는 한남동에 위치한 하얏트 호텔·
그녀가 도착하니 아직 영훈은 오지 않았고 엄마만 있었다·
“오늘 미래 백화점하고 입점 계약 하기로 했다며?”
“응 법무팀에 계약서 검토 요청했어· 어려운 내용 아니니까 내일 검토 끝날거래· 입점일은 12월 3일· 딱 좋지?”
“미래 백화점에서 왜 갑자기 입점 제안서를 보냈다니?”
“서가은 때문이지· 원래 우리가 뉴월드 백화점이랑 계약 얘기 중이었으니까 급하게 진행했나봐· 오늘 미팅 내내 뉴월드랑 깨졌다는 말 안 꺼냈거든· 그래서 지금 우리가 뉴월드보다 더 좋은 조건 때문에 계약한 줄 알고 있잖아 헤헤···”
“뉴월드가 그래도 입은 안 싼가 보구나·”
“엄마랑 내가 뉴월드 VVIP잖아· 거래는 깨져도 깽판을 칠 수는 없겠지·”
“어쨌든 수고했다· 매출 100억 기대해도 되는 거니?”
“못해도 100억 이상은 나올 거라고 기대하고 있어· 솔직히 서가은 모델료만 10억이 넘는데 연매출 100억도 안 나오면 헛고생하는 거지·”
송 사장은 고개를 갸웃했다·
“얘는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미래 백화점 강남점 입점 계약한거 아니야? 난 Nodri Clare 전체 매출을 물어본게 아니라 강남점 하나에서만 100억 나올 수 있냐고 물어본 거였어·”
연희는 당황한 표정이 역력했지만 이내 그게 당연한 거라는 듯 대답했다·
“나도 그 말이었어· 강남점에서만 100억 보고 있지·”
“그렇지?”
“그럼~”
그때 문이 열리며 영훈이 들어왔다·
“늦었습니다·”
“괜찮아요· 다 같이 버스 타고 왔는데 늦는게 당연하죠· 앉아요·”
영훈이 자리에 앉자 시큼한 땀냄새가 미미하게 퍼졌다·
약간 헝클어진 머리와 조금은 지친듯한 표정을 보니 오늘 꽤 힘든 하루를 보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연희는 혼자만 편히 회사생활을 한 것 같아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 영훈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오랜만에 힘 좀 썼더니 좋더라구요·”
“그렇게 말해주니 고마워요 힘들었을 텐데·”
“동기들 다 같이 일해서 그런지 별로 힘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오면서 보내주신 연락처로 이형준 본부장과 통화했습니다·”
오늘 저녁 식사에서 가장 궁금한 내용이라 송 사장과 연희의 눈빛이 반짝였다·
“어떻게 됐나요?”
“잘 해결됐습니다· 말씀드렸듯이 천억 지불하고 나머지 1·500억은 3년간 500억씩 분할납부하기로 했습니다·”
별거 아니라는 듯한 태도에 이제는 송 사장도 더는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했길래 이형준 본부장이 그런 딜을 받아줄 수가 있죠? 이건 은행 입장에서 대단히 부담스러운 대출이에요· 게다가 혜성기업 인수대금 분할납부를 허락한다는건···”
“이게 알고 보니까 혜성기업에 신영은행에서 많은 돈을 집어 넣었고 앞으로도 회생 가능성이 안 보이다보니까 돈 먹는 하마가 되기 전에 빨리 털어버리는 게 낫다고 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일이 쉽게 진행된 것 같습니다·”
이형준 본부장에게 들은 더 자세한 사정이 있었지만 최대한 축약한 내용이다·
“그건 그럴 수 있는데 어느 누가 회사 내부 사정까지 다 밝히면서 이런 불리한 계약을 할 수 있죠?”
영훈은 미간을 찡그리며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죽을 뻔한 이형준 본부장을 살려줬습니다· 그리고 그는 제가 언제든지 자신을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구요· 그래서 조금 유리한 계약을 진행할 수 있었습니다·”
“설마 죽고 산다는 말이 비유가 아니라 진짜는 아니겠죠?”
“물론입니다· 그런데 아마 이형준 본부장에게는 이게 비유만이 아닐 겁니다· 그에게는 죽음이나 다름 없거든요·”
“도대체 그게 어떤 일인데 그러죠?”
영훈은 슬쩍 연희를 바라보았다가 말했다·
“앞으로 신영그룹에서 후계자 싸움이 벌어질지도 모릅니다· 이형준 본부장은 위기감을 느끼고 있구요· 제가 드릴 수 있는 답변은 이게 답니다·”
송은채 사장도 바보가 아니라 이 정도만 이야기해줘도 대부분 알아 들은 것 같았다·
“그러니까 누가 이형준 본부장을 밀어낼 생각이었고 본부장은 그걸 모르고 있다가 당신이 알려준 거군요·”
“맞습니다·”
송 사장은 그걸 어떻게 알았냐고 물어보려다가 그만 두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처리였지만 그의 그런 방식은 익히 알고 있었고 또 물어본다고 알려줄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쨌든 신영은행과의 거래는 환상적이었고 회사는 한단계 더 올라설 일만 남았다·
호주 레버턴 코발트 광산 업체 인수는 현진물산의 10년 20년을 내다본 사업이기에 이번 입찰이 가지는 압박감이 너무 컸는데 아마 이 소식이 회사로 전해지면 전 사원이 펄쩍 뛰면서 기뻐할 거다·
“그렇군요· 고생했어요· 혹시 원하는 게 있나요? 말해봐요·”
이때 연희가 송 사장의 다리를 툭 때렸다·
그제야 송 사장은 자신의 실책을 인지하곤 지갑에서 카드 하나를 꺼냈다·
“미안해요· 돈에 연연하지 않는걸 깜빡했어요· 이걸로 식사나 교통은 물론이고 사고 싶은게 있으면 언제든지 보고 없이 사도 괜찮아요·”
“이건 돈이나 마찬가지 아닙니까?”
“우리는 돈을 최고로 알고 살아와서 이것 말고는 생각나는게 없어서 그래요· 그리고 부서를 옮겼으면 좋겠어요·”
왠지 이 말은 나올 것 같았다·
“비서실로 말인가요?”
“그래요· 오늘처럼 중요한 상황에서 갑자기 불려나가 일하는 사태는 없어야 하니까요· 솔직히 굉장히 당황했어요· 직원이 내 전화를 먼저 끊을 거라고는 상상도 안 해봤거든요·”
“아 그건···”
“아니에요· 책망하는게 아니라 그때 확실히 느꼈어요· 영업 2팀 신입사원의 신분으로 있을 사람이 아니라구요· 당신의 능력은 이미 충분히 봤어요· 하나의 사업부서에서 잡일을 하며 천천히 배울 사람은 아니라는 게 내 판단이에요· 꼭 영업 2팀에 남아야 할 이유가 없다면 옮겨 줬으면 하는데 어때요? 싫다면 더 말하지 않겠지만 이건 부탁하는 거기도 해요·”
연희는 영훈에게 어서 승낙하라고 연신 눈짓을 보냈다·
사실 너무 빨리 승진하는 것 같아 조금 불안하기도 했지만 기분이 좋기도 했다·
사장이 부탁한다는 말을 할 정도로 인정받았다는 말이니까·
“알겠습니다·”
“직급은 과장급으로 하되 승진 속도가 기형적으로 빨라서 외부에는 알리지 않도록 할게요·”
과장이라니···
직장인의 성공으로 한 걸음··· 아니 몇 걸음 나아간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산에서 지내온 세월이 전부 아무것도 아닌게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사주와 관상이라는 건 곧 사람의 인생을 말함이다·
인생의 희로애락에 통달하지 못한다면 사주를 제대로 볼 수 없다·
이번 일도 이형준 본부장과 이세준 부회장의 희로애락애오욕을 완전히 꿰뚫어 보지 못했다면 아마 술집에서 어설프게 대화하다 얼간이 취급을 당했을 게 분명했다·
20년 넘는 세월 동안 사람을 공부했던 건 결코 낭비한 삶이 아니었음에 영훈은 뿌듯하고 감사함을 느꼈다·
“그럼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말하세요·”
“비서실에 가면 일반 직원들이 자연스럽게 배우는 일들을 못하게 될 것 같기도 합니다· 그래서···”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특별한 일이 없을때는 회사 업무와 필요한 지식을 잘 배울수 있도록 강사를 붙여 줄게요· 무역 회계 언어 M&A 원하는 것 다 배울 수 있도록요·”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제 비서실 소속이 됐으니까 계속 존대를 하시면 제가 불편할 것 같습니다·”
송 사장은 빙그레 미소지었다·
“그래 그럼 말 놓은 김에 과장 진급 축하주를 건네도 되겠지?”
“감사합니다·”
송 사장은 직원을 불러 이름을 알아듣기 힘든 와인을 시켰다·
호텔 서빙 직원이 와인을 가지고 와서 따라주려고 하자 송 사장이 와인을 내려놓고 나가라고 하고는 병을 직접 들었다·
“이번 일 고생했어· 원래 이런 일은 소주를 줘야 하는데 여기는 소주가 없어서 와인으로 줄게·”
“비싼 와인 한번 마셔보고 싶었습니다·”
“너도 한 잔 따라주리?”
연희가 냉큼 와인잔을 들어 올린다·
“당연하지· 한 병에 500만 원 짜린데·”
영훈은 깜짝 놀랐지만 비싸서 어쩌냐고 하지는 않았다·
애초부터 저 사람들은 자신과 살아온 인생이 달랐고 물건을 보는 가치도 다를 것이기에·
흐믓하게 와인을 마시고 나니 송 사장이 말했다·
“마음 같아서는 기조실로 보내서 회사의 컨트롤 타워를 맡게 해주고 싶지만 임원들 생각이 다 나 같지는 않아· 그리고 아마 기조실로 보내놓으면 견제한다고 아무것도 못하게 할 것 같기도 하고··· 그냥 비서실에서 하고 싶은 일 하면 될거야·”
“제가 어떤 일을 하길 원하십니까?”
“무리한 건 원하지 않아· 자네 능력껏 회사가 더 좋은 방향으로 갈 수 있도록 노력해주면 돼· 거기에 필요한 지원은 내가 해줄게·”
“알겠습니다·”
이미 송은채 사장은 이번 일로 완전히 영훈에게 신뢰를 보내고 있었다·
“식사하면서 이야기하겠지만 일단 비서실 상황에 대해 말해줄게· 홍승대 실장이라고 있는데···”
이날 호텔 식사는 생각보다 오랜시간이 지나서야 끝날 수 있었다·
*
[인사발령 공고]
홍승대 실장은 점심 잘 먹고 느긋하게 아메리카노를 들고 회사로 돌아왔을 때 느닷없이 뜬 공고에 속된 말로 놀라 자빠질 뻔했다·
사장님이 단 한번의 상의도 없이 비서실로 두 명의 직원을 올리고 기존 직원 두 명을 다른 부서로 내리는 인사발령을 조치했기 때문이다·
영업 2팀 노형석 대리가 과장으로 진급하고 다른 팀의 직원들이 영업 2팀으로 발령난 건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중요한건 비서실로 발령받은 사람들이니까·
하나는 오너의 자식이었고 다른 하나는 오너의 자식과 같이 입사한 동기였다·
오너의 자식을 승진시키는 거라면 놀라지도 않았을 거다·
입사할 때부터 쥐뿔도 아는 것 없는 상태로 임원으로 턱 들어앉아 아랫사람 똥개훈련 시키는거야 너무 흔해 따로 언급을 하기에도 입 아플 지경이지만 비서실로 오너 자식을 들여앉혔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회사의 핵심 업무를 배우려면 기획조정실로 가야지 속된 말로 사장 딱까리인 비서실로 와서 뭘 배우겠는가?
“야! 이거 뭐···”
홍 실장이 비서실 직원들에게 물어보려는 찰나 문이 열리며 박스에 한 짐을 안고 두 명이 들어왔다·
한 명은 익히 알고 있는 임연희였고 다른 하나는 뭐 하는 놈인지도 잘 모르겠는···
“안녕하세요· 오늘부터 비서실로 발령받은 임연희라고 합니다· 자리는 어디로 잡을까요?”
비서실 직원들도 방금 본 공고 때문에 당황하는데 일단 홍 실장이 나섰다·
“저기 일단 짐은 저기 안쪽에 내려놓고 오늘 빈자리 날 거니까 그 자리 쓰도록 하면 돼요· 그런데 인사발령 날 줄 알고 있었나? 공고가 뜬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짐을 빨리 쌌네요?”
홍 실장의 물음에 연희가 빙그레 웃었다·
“점심 때 공고나서 점심 안 먹고 챙겼습니다·”
“어? 그래요· 반가워요· 나 홍승대 실장이에요· 언제 한 번 본 적 있죠?”
비서실 직원들도 연희가 사장의 딸인 걸 알고 있기에 그가 높임말 하는걸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네· 사장님 취임식 때 뵌 적 있습니다·”
“여기에 올 줄은 몰랐네· 연희 씨가 사장님께 부탁했어요?”
“으음~ 글쎄요·”
연희가 긍정도 부정도 아닌 묘한 웃음으로 대답을 넘길 때 갑자기 사장실 문이 열리며 송은채 사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비서실 직원들이 일제히 일어서자 송 사장이 말했다·
“앞으로 같이 일하게 될 사람들이에요· 여기는 알 사람들은 알겠지만 임연희· 내 딸이지만 신입사원으로 대해줬으면 좋겠어요· 아직 배워야 할 게 많으니까·”
“잘 부탁드려요·”
연희가 인사하자 비서실 직원들은 박수를 치면서도 허리도 같이 숙이는 재밌는 광경을 연출했다·
“그리고 여기는 최영훈 씨· 임연희 씨와 같은 신입사원이지만 임연희 씨와는 다르게 과장급으로 대우 부탁해요· 외부에는 비밀이고 공식적으로는 사원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죠?”
홍승대 실장은 순간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았다·
“네? 과장급 말입니까?”
“그래요· 다들 새로온 사람들이 잘 적응할 수 있게 도와주세요· 그럼···”
송 사장은 그렇게 말하고 다시 사장실로 들어가버렸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 이해를 못하고 있을 때 누군가 쌩하니 영훈에게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김민희라고 합니다· 짐은 여기다 내려놓으시면 되구요· 성함을 부르긴 그러니까 주임님으로 불러도 될까요?”
영훈은 그녀의 순간적인 판단력에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네 그래주세요·”
“식사 못하셨다고 하니까 샌드위치라도 시켜드리겠습니다· 괜찮으시죠 주임님?”
홍 실장은 3년이나 먼저 입사했음에도 거리낌 없이 주임님이라고 불러대는 민희를 보며 멍청한 년이라고 속으로 욕하곤 바로 비서실을 나왔다·
아무래도 인사과에 가서 무슨 사정이 있는지 물어봐야 할 것 같으니까·
그리고 그런 홍 실장의 행동을 영훈은 유심히 지켜보았다·
< 유령에서 사람으로(1) > 끝
ⓒ 영완(映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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