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령에서 사람으로(2) >
인사팀 민경훈 과장은 담배 하나를 준비해서 옥상으로 올라갔다·
옥상에서도 옆 건물 때문에 그늘진 곳은 조용한 이야기를 하기에 안성맞춤인 곳이었다·
“웬일이냐? 나를 다 찾고?”
민 과장은 담배에 불을 붙이며 물었다·
홍승대 실장과 입사 동기인 둘은 어느 순간부터 차이를 보였다·
아무런 빽없는 민 과장과 연대 라인을 탄 홍 실장은 어쩌면 승진속도가 비슷한게 이상한 일일지도 몰랐다·
철강팀에서 기조실을 거쳐 비서실까지 회사 핵심 라인을 거친 홍 실장은 현진물산을 넘어 그룹 핵심에 가장 가까이 갈 수 있는 인재라는게 주변의 평가였다·
어쨌거나 홍승대는 비서실장이 된 이후로 입사 동기인 민경훈을 찾는 일이 거의 없었던 건 물론이고 그가 회사 동기 그 누구를 따로 만나서 회사 일을 의논한다든지 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민 과장은 그렇게 알고 있었기에 오늘 그가 대면을 요청한게 의아하면서도 호기심을 자극했다·
“뭘 그렇게 날을 세워? 연락 한 번 없어서 섭섭했냐?”
“우리가 연락 뜸하다고 섭섭해할 사이는 아니잖아· 그냥 신기해서 물어본건데 너야 말로 좀 예민한 것 같다?”
“그런가? 뭐 내가 그렇게 느꼈나보네· 아들래미 잘 크고?”
“어· 날 닮아서 그런지 학교에서 공부는 안하고 사고나 쳐서 그렇지 크기야 잘 큰다· 궁금하지도 않은 얘기 그만 물어보고 본론을 말해봐· 흐흐··· 나도 궁금해서 그래·”
홍승대 실장은 궁금해 죽겠다는 얼굴로 쪼개는 민 과장을 보며 팔짱을 끼고는 물었다·
“인사과 발령난 거 언제 지시 받았냐?”
민 과장은 놀란 눈으로 쳐다보다가 씨익 미소를 그렸다·
“새끼··· 너 몰랐구나?”
“어·”
“비서실장이 모르는 인사였다 이 말이지?”
민경훈 과장은 담배를 깊게 빨아들이며 생각에 잠겼다·
홍 실장은 민 과장이 입을 열 때까지 가만히 기다렸다·
잠시 후 민 과장이 눈썹을 긁적이며 입을 열었다·
“아가씨에 대해서 궁금한 건 아닐테고 최영훈이가 궁금했구나?”
“맞아·”
“안 돼·”
“뭐가?”
“최영훈이에 대해서는 알려줄 수 없어·”
홍 실장의 표정이 굳어졌다·
“뭔데 알려줄 수 없다는거야?”
“난 당연히 네가 알고 있을 줄 알았거든? 그런데 아니라면 알려줄 수 없어· 이건 내 권한을 넘어선 거야· 인사기록카드도 인사과 내에서 열 수 있는 사람이 몇 안 돼· 이건 기조실에서도 내 허락 없이는 못 열어· 그리고 내 허락은 곧 사장님의 허락이지· 안 된다는 말이야· 솔직히 난 네가 알고 있을 줄 알았는데 좀 놀랐다·”
“인간적으로 힌트라도 좀 주자·”
“힌트? 흠 힌트라··· 학력이 그다지 좋지 못하다는거?”
“어느 정도나?”
“대학은 그리 좋지 못하고 영어도 못해·”
어차피 같이 지내면 당연히 알게 될 내용이라 말하는데 어려움은 없었다·
“영어도 못하는데 어떻게 입사를 할 수 있어?”
“나도 궁금하다·”
“좋아 입사는 할 수도 있겠지· 그런데 입사한지 얼마나 됐다고 과장급 대우야? 진짜 과장급이야?”
“맞아· 그리고 과장급 대우라는 거 인사과에서도 나 빼고 한 명밖에 몰라·”
“이런 진급이 어떻게 가능해? 로열패밀리야?”
“말했잖아 말해줄 수 없다고·”
“맞네· 그치?”
민 과장은 미간을 한껏 찌푸렸다·
“왜 그래? 너 답지 않게· 너 지금 굉장히 급해보여·”
“그런가? 좋아 찬찬히 생각해보자· 학력이 지방대 수준에 영어도 못하는데 로열패밀리가 아니면 불가능한 진급을 보여줬단 말이지·”
“그렇지 그것부터 시작해야지·”
“씨발··· 힌트가 너무 적어· 하나 더 줘라·”
“뭐가 이쁘다고?”
“아 쫌!”
민 과장은 담배를 빨면서 누가 오는지 다시 확인하고는 말했다·
“이건 순전히 내 느낌이야· 증거도 없고 아무것도 없어· 그냥 내 느낌인데···”
“알겠으니까 빨리 꺼내 봐·”
“재무팀에서 신영투증 주식 가져올 때 가서 도장만 찍어줬다고 한 거 알고 있지?”
“어·”
“그거 누가 양념쳤는지 알아?”
“모르지·”
“비서실장이 몰라? 그럼 누가 한 건데?”
순간 홍 실장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 되어 민 과장을 바라보았다·
“그걸 최영훈이가 했을 거라고?”
“그냥 느낌이 그래· 그게 아니면 이 진급 속도가 이해가 돼?”
“아 그래그래· 좋아· 씨발 말도 안 되지만 그걸 입사한지 석달도 안 된 최영훈이가 혼자 신영투증과 담판 지어서 가지고 왔다고 쳐· 그걸로 과장까지 단다고? 영어도 못하고 출입증에 잉크도 안 마른게? 그게 가능했으면 나 대리 때 우즈베키스탄에서 철광석 가져온 걸로 과장 달았어야지· 그게 얼마짜리였는지 알지?”
“나도 그게 이해가 안 된단 말이야· 한 단계는 이해가 가는데 세 단계를 올라간 게 이해가 안 가·”
“한 단계는 뭔데?”
“어? 아니 그건 몰라도 돼·”
민 과장은 애초에 정규직이 아닌 인턴으로 입사했다는 사실은 말할 생각이 없었다·
“어쨌든 그 주식을 최영훈이가 손 댔을 것 같다는 게 네 느낌이다?”
“그래· 순전히 내 느낌이야·”
“씨발··· 믿을 수도 없고 안 믿을 수도 없고···”
민 과장은 고민하는 홍 실장에게 말했다·
“승대야 내가 오랜만에 입사 동기 만난 기념으로 순수하게 충고 하나만 할게·”
“그래 말해봐·”
“사장님 만만하게 보지마·”
민 과장은 그렇게만 말하고 담뱃불을 껐다·
“그게 끝이야?”
“그래 끝·”
“고맙다· 충고 가슴에 새길게·”
홍 실장이 떠나려 하자 민 과장이 말했다·
“그리고 너···”
“왜?”
“잘 생각해· 바람이 바뀌고 있어· 바람이 바뀌면 돛을 조정해야 해·”
민 과장은 홍 실장의 어깨를 툭 치며 자리를 벗어났다·
홍 실장은 자리를 뜨지 못했다·
지금껏 10년 넘게 인사과를 지키면서 무수한 사람을 겪었던 민 과장은 결코 가벼운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 그가 송 사장이 만만한 사람이 아니며 회사의 분위기가 바뀌고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양철기 전무를 버리라고 말한다·
쉽게 납득할 수 없는 말이다·
양철기 전무 라인은 그로서 끝나는 게 아니다·
지금 양 전무는 그룹 회장이 밀어주고 있는 임지은 현진고속 사장과 연결되어 있었다·
그룹 전체를 장악한 회장에 비해 송은채 사장의 힘은 미약한 수준·
현진 물산은 현진 그룹의 울타리 안에 있는 작은 계열사임을 다시 한번 자각한 그는 민 과장의 충고를 애써 지웠다·
다만 한 가지는 확인해야 했다·
정말 바람이 바뀌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우연찮은 날씨의 변덕인지···
*
“최 주임님 17층 3번 회의실에서 3시부터 회계원리 교육 잡았습니다· 간단한 음료수와 과자 세팅해놨으니까 편하게 드시면서 교육 받으시면 되세요·”
“아 네···”
영훈은 예전에 명함을 받을 때 민희를 한번 보긴 했었다·
그 때는 그저 무표정하게 명함을 전해줬었는데 오늘 만나보니 상냥하기가 백화점 VVIP를 대하는 직원들이 이럴까 싶을 정도였다·
“더 필요한거 있으시면 언제든지 저 찾으시면 됩니다·”
“그래요 고마워요·”
민희가 자리로 돌아가자 옆 자리에 앉은 연희가 쓰윽 몸을 디밀었다·
“왜 저래요?”
“뭘 말입니까?”
“저 김민희라는 여자요· 언제 봤다고··· 저러는 게 이상하지 않아요?”
“그런가요? 그건 그렇고··· 비서실 온 거 후회 안 합니까?”
어제만해도 연희가 비서실로 같이 온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노형석 대리와 같이 Nodri Clare 브랜드 사업을 지속적으로 관리하면 내년 영업 2팀에서 상당한 매출을 올리며 인정받을 수 있을 텐데 자신과 같이 비서실로 올 줄이야·
“당연히 안 하죠·”
“왜요?”
“당신 옆에 있는게 훨씬 더 재미있을 것 같아서요·”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그렇게 말하는데 순간 가슴이 덜컥했다·
하지만 티내지 않고 퉁명스레 말했다·
“이젠 재미보다 실리를 택할 나이 아닙니까?”
“그거야 모르는 거죠· 그나저나 말 돌리지 말고 저 김민희라는 사원 어때요?”
“악의는 없어요· 내 명함을 만들어준 사람이라 비서실에서 유일하게 나에 대해서 아는 사람일 겁니다· 그러니까 잘 보이려고 하는 거겠죠·”
“흐음··· 아까 보니까 다른 직원들이 민희 씨한테 눈치 주던데 너무 대놓고 저러면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싫어하는 걸 모르고 저럴까요?”
“신경 쓰지 않을 겁니다·”
“네? 왜요?”
“민희 씨 상을 보면 눈썹이 진해서 자신의 주관이 확실하고 두 눈썹 사이의 인당과 눈두덩이의 전택궁이 밝아서 남의 시선을 신경쓰지 않고 자신의 판단을 믿고 추진해나가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가장자리의 천창이 발달해서 관찰력과 결단력이 뛰어나죠· 눈치도 빠르고 행동력이 좋으니 아랫사람으로 두기에 이보다 좋을 수 없는 사람입니다·”
“오호라~ 그래서 종합해보면 민희 씨는 당신을 비서실의 새로운 실세라고 확신했다 이 말인거네요?”
“그렇지 않을까요?”
“오···”
연희는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다시 물었다·
“홍 실장님은요?”
“그분은 좀 지켜봅시다·”
“왜요?”
“직책이 직책이다보니까 단순히 상으로 판단하기 그래서요· 실수하면 안 되니까·”
무엇보다 영훈은 내편과 상대편으로 나누어 싸우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순진한 생각이고 아니고를 떠나 같은 회사 직원들끼리 서로에게 상처를 남기면서 싸우는 행위에 자신까지 끼어들어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회사의 주요한 이익이 걸린 일도 아니었고 피할 수 없는 급박한 상황인 것도 아닌데 이제 처음 본 사람을 평가해서 결론을 내버리고 싶지는 않았던 거다·
“만약 홍 실장이 당신을 견제하려고 하면요?”
“어떻게 견제하느냐에 달렸지만 그게 회사의 이익에 반한다면 가만 있을 수는 없겠죠·”
영훈은 그렇지 않기를 바랐다·
그는 양 전무처럼 배가 부름에도 먹이를 탐하는 스타일은 아닌 것 같으니까·
홍승대 실장은 얼굴이 전체적으로 크고 튼실하며 코도 크고 입도 큰 전형적인 토형(土形)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었다·
속이 깊고 입이 무거워 오너를 보좌하는 비서실장에 제격이라고 할 수 있고 신의가 두터워 한번 맺은 인연은 끝까지 가는 성격이라고 할 수 있는데···
과연 그 인연을 변화시켜 나갈지 영훈은 그게 궁금했다·
*
인사과 민경훈 과장을 만나고 돌아온 홍승대 실장은 아무렇지도 않게 일을 해나갔다·
언제나처럼 송은채 사장의 스케줄을 체크하고 보고하며 일과를 보냈기에 겉으로 봐서는 비서실에 새로운 사람이 들어왔는지 모를 정도였다·
6시가 넘어 송은채 사장이 퇴근하자 홍 실장은 새로 온 직원들을 환영하는 회식을 한다고 근처 식당으로 데려갔다·
그렇게 적당히 환영파티를 한 그는 회식이 끝나기 전에 계산하고 회식자리를 벗어났다·
택시를 타고 그가 도착한 곳은 논현동의 한 고급 저택·
대지만 300평이 넘는 그곳은 삼엄한 감시카메라가 주변을 감시하고 있었다·
초인종을 누를 때도 혹시 누가 보고 있지는 않을까 신중하게 주변을 둘러본 그는 문이 열리자 얼른 들어갔다·
“기다리고 계십니다·”
일하는 아주머니의 말에 걸음을 빨리 옮겨 응접실로 가니 여러명의 사람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늦었네?”
서릿발 같이 냉막한 표정으로 가운데에 앉아 있는 여성·
임강철 회장이 애지중지하는 딸이자 그룹 핵심인 임지은 현진고속 사장이다·
“죄송합니다·”
변명 없이 고개를 숙인 그는 빈 자리에 가서 앉았다·
그의 옆에는 익히 잘 알고 있는 양철기 전무와 차지열 상무까지 자리하고 있었다·
“오늘 갑자기 오라고 한 이유를 알아요?”
홍 실장은 회식 때 갑자기 연락을 받았기에 영문을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의 심정은 다른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였다·
양 전무나 차 상무나 전혀 짐작을 못하는 표정들이었으니까·
“이것봐 이것봐··· 내가 이런 사람들 믿고 일할 수 있겠어요?”
“무슨 말씀이신지···”
임지은 사장이 가지고 있던 서류 파일 하나를 던지듯 내려놓았다·
“신영은행에서 5천억 대출 심사한다고 하는데 몰랐어요?”
차지열 상무는 고개를 갸웃하면서 물었다·
갑자기 신영은행 이야기를 왜 꺼내는 것일까?
“5천억이요? 그걸 어디에 준다고 합니까?”
임 사장은 코웃음을 치다가 어이가 없는지 얼굴을 가리면서 웃었다·
“하! 하하하··· 진짜 미치겠네· 이봐 당신네 회사에 대출해준다잖아· 신영은행에서 현진물산 5천억 대출 심사가 들어갔다잖아!”
마지막에 분노가 차오른 임지은 사장의 고함소리에 누구 하나 움직이지 못했다·
싸늘하게 식은 공기가 주변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 유령에서 사람으로(2) > 끝
ⓒ 영완(映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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