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령에서 사람으로(3) >
“몰라요? 지금 처음 들어요?”
뒤통수를 너무 호되게 맞아서 그런지 세 사람은 서로의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다·
오가는 눈빛의 대화에 임지은 사장의 얼굴이 더욱 굳어졌다·
“시가총액 7천억이 안 되는 회사가 5천억 대출을 신청했는데 경영지원본부장 영업본부장 비서실장이 모르고 있었다? 당신들 호구야? 아니면 지금 내 앞에서 쇼하는 건가? 나 물 먹이려고 단체로 짰어?”
양철기 전무는 일단 탁자 위에 올려진 서류를 후다닥 펼쳤다·
빠르게 서류를 살펴본 양 전무는 그대로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당연히 죄송해야지· 회사에서 5억만 펑크나도 줄줄이 경위서를 올리고 관련자 책임소재 파악해야 하는데 경영지원본부장이 회사에서 5천억 대출을 신청한 것도 모르면서 죄송하지 않으면 월급 너무 날로 먹는 거잖아요?”
“죄송합니다·”
“그러니까 그 당연한 소리는 그만하고··· 왜 죄송한 상황이 생겼는지 설명이라도 해야 내가 당신을 계속 믿을지 아니면 이 자리에서 싹다 잘라버릴지 결정이라도 하지 않겠어요? 아 나 머리 아파· 아줌마! 나 시원한 냉수 좀 줘·”
일하는 아주머니가 급하게 얼음물을 대령했다·
임지은 사장은 그 차가운 냉수를 벌컥벌컥 마시더니 어서 말을 하라는 눈빛을 양 전무에게 보냈다·
하지만 양 전무라고 딱히 할 말이 있겠는가?
결국 양 전무의 곤혹스러운 눈빛에 차 상무가 마지못해 나섰다·
“아직 심사 중이니까 거절날 가능성도···”
차 상무가 미처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어디에선가 젊은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절나면 걱정할 필요도 없는 거네요? 그쵸? 우리 엄마 괜히 소리 질렀다· 아저씨들 민망하게 그게 뭐야?”
2층에서 느긋하게 내려오는 사람은 임지은 사장의 큰아들인 김태민·
그룹의 중추인 현진중공업에서 경영기획본부장을 맡고 있었다·
사실상 임지은 사장이 그룹을 다 차지해 물려주고 싶은 근원적인 이유이자 차기 대권주자인 셈이다·
그리고 아저씨들이라니···
한 마디로 그룹 계열사 임원으로 생각지도 않는다는 말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는 임지은 사장의 옆에 앉더니 말을 이었다·
“그렇죠? 거절나면 끝이잖아·”
일이 그렇게 쉽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일부러 기를 죽인다·
말 한번 잘못했다가 옴팡지게 덤탱이 쓰게 생긴 차지열 상무는 얼른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다·
“죄송합니다· 생각이 깊지 못했습니다·”
거절될 상황이었으면 임지은 사장이 이리 난리를 치지 않았을 것인데 너무 당황한 마음에 급하게 상황을 모면하려고 하다가 크게 실수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애초에 연매출이 7조원이 넘는 거대 기업이 은행에 대출신청을 할 때는 이미 실무자와 협의를 다 하고 진행한다·
어느 대기업이 서민들처럼 대출 신청해놓고 나오면 좋고 안 나오면 망한다는 마음으로 기도나 하고 있을까?
대부분의 심사는 요식행위나 다름없는 것·
결국 대주주나 경영자가 태클을 걸지 않는 이상 대출이 진행되는데는 큰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임지은 사장은 냉수를 마시고 치솟는 화를 잠시 가라앉혔는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이제 정신들 차렸을 테니까 말해봐요· 일이 어떻게 이렇게 된 건지·”
양 전무는 책임을 피할 수 없는 상태라는 걸 직감햇다·
“아무래도 송은채 사장이 오재식 상무를 시켜서 몰래 진행한 것 같습니다·”
“재무팀 오재식 상무? 아··· 오 상무가 경영지원본부장이랑 비서실장 모르게 조용히 진행했다? 하··· 이봐요 전무님· 둘이 싸웠어요? 회식때 어디 주먹이라도 날렸나?”
“네? 아닙니다·”
“싸운게 아닌 다음에야 입 싹 다물고 어떻게 이렇게 조용하게 진행될 수 있지? 이걸 설마 하루이틀만에 속전속결로 처리할 수 있다고 보는 건가요? 태민아 이게 가능한 거였니?”
김태민은 입꼬리를 한 쪽으로 올리면서 말했다·
“신영은행을 하루이틀만에 찜쪄먹을 실력자가 오재식 상무였나 봅니다· 이 정도 인재라면 그룹 핵심인 미래전략본부장에 앉혀도 되겠는데요?”
양 전무는 이런 상황에 몰린 것 자체가 억울했다·
신영은행에 가까운 사람이 있다면 모르겠지만 하필 신영은행에는 아는 사람도 없었고 회사 차원에서 대출을 받아야 한다는 어떤 시도 조차 말이 나온적도 없었다·
나올 수가 없었다·
회사입장에서는 막말로 코발트 광산 업체 인수 때문에 허리띠 박박 졸라가며 이면지까지 아껴 쓰는 마당에 대출 생각 한번 안 해봤을까?
내년 신영은행에서 돌아오는 5천억 만기 채권이 있는데 어느 은행에서 그 위험을 감수하고 추가로 대출을 해줄까?
안 될 거 뻔히 아니까 안 하는거였다·
그런데 그걸 시도했다는 것 자체로 감이 없다고 욕먹을 상황에 몇 백억도 아니고 5천억이라는 금액을 대출받겠다고 마음먹는다?
“혹시 정권에서 움직이지는 않았을까 싶습니다·”
양 전무가 생각했을 때 가장 현실적인 가정은 이것밖에 없었다·
당장 내년에 막아야 하는 5천억 채권을 들고 있는 상황에서 추가 자금으로 5천억을 지원한다는 건 권력의 입김이 아니고서는 상상할 수 없으니까·
“음··· 그건 일리가 있네· 올케네 집안이 정치권과 인연이 깊었지 아마? 어디보자··· 여당 이건호 사무총장이 올케 부친 동창이지?”
“맞습니다·”
“접촉해봐· 진짜 이건호 의원이 손을 쓴 건지· 아니면 여당 다른 의원이 움직인 건지 말이야·”
“기조실 통해서 움직여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때 차지열 상무가 입을 열었다·
그의 입장에서 이대로 입 닫고 가만있으면 그저 바보 멍청이로 남을게 뻔했으니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려 자신의 유용성을 증명해야 했다·
“혹시··· 혜성기업으로 딜을 했을 수도 있습니다·”
“혜성기업?”
임지은 사장이 고개를 갸웃하자 김태민이 끼어들었다·
“신영은행에서 워크아웃해서 매각시도 중인 혜성기업 말이죠?”
“맞습니다·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신영투자증권에서 가지고 있는 지분을 쥐고 흔들면서 혜성기업을 사달라고 압박했습니다·”
임 사장이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그래 이형준 본부장 만나서 담판을 짓겠다고 하더니 빈 손으로 밥만 먹고 눈뜬 장님 됐잖아· 그리고 주식을 시장가 그대로 사왔었지? 그래· 지금 생각하니 그것도 말이 안 되지· 그럼 그것도 오재식 상무 작품인가?”
“그것까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 이후로 갑자기 혜성기업을 인수하라는 압박이 사라졌습니다· 만약 혜성기업을 우리가 사고 대신 대출을 받는 제안을 했다면 어쩌면···”
김태민이 손바닥으로 탁자를 착 내려쳤다·
“혜성기업을 주면서 폭탄을 제거하는 대신에 대출을 내준다? 말이 되긴 하네· 그럼 저 5천억 대출 중에 실제로 현진물산으로 들어가는 건 어느 정도가 되지?”
“전에 인수가격을 3500억 제안했습니다·”
“그럼 1500억이 들어간다? 흐음··· 그래도 성주훈 부사장이 들으면 좋기는 하겠네·”
김태민은 씁쓸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현진물산 전략기획총괄을 맡고 있는 성주훈 부사장은 현재 호주 레버턴의 코발트 광산 업체 인수를 위한 TFT를 진두지휘하며 현지에 가있는 상태였다·
입찰을 따내기 위해 치열한 물밑작업을 벌이고 있을 이런 중차대한 시점에 회사에 5천억 자금이 수혈된다는 소식을 들으면 아마도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일 게 뻔했다·
그런데 들어오는 자금이 5천억이 아닌 1500억에 혜성기업이라는 폭탄을 떠앉을 걸 알게 되면 과연 좋아할까? 싫어할까?
임지은 사장은 차 상무에게 말했다·
“혜성기업을 정말 딜에 넣었는지 알아봐요· 만약 딜에 넣었다면 인수가격도 확인해보고·”
“알겠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혜성기업을 끼워넣었다고 해도 왜 자기들 돈 빌려주고 그걸 팔겠어요? 정치권의 입김 아니었으면 말이 안 되는 딜이니까 그것까지 확실하게 파악하세요·”
“네·”
임지은은 지금껏 입 한번 안 열고있는 홍승대 실장에게 시선을 돌렸다·
“우리 비서실장님은 조용하시네? 무슨 할 말 없으세요?”
“죄송합니다·”
“흐음··· 실망이네· 그렇게 안 봤는데· 늦었는데 가봐요· 그리고 앞으로 오늘처럼 당신들에게 실망할 일들은 만들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잘 하시겠지· 일하다 보면 실수할 수도 있고 그런거 아니겠어?”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고 좌불안석인 임원들은 속으로 김태민에 대한 욕설을 퍼부었다·
그렇게 지옥 같았던 훈계시간이 끝나고 집을 나온 세 사람은 양철기 전무의 수행비서가 운전해 온 차를 타고 논현동을 벗어났다·
홍 실장이 불편한 마음에 말했다·
“전 그냥 가까운 지하철에 내려주십시오·”
양 전무는 조수석에 앉은 홍 실장에게 말했다·
“홍 실장 왜 그래? 내가 전에 오해해서 섭섭했던 게 아직 남아있는거야?”
전에 비서실장을 의심하며 한번 크게 혼을 냈는데 혹시 그것 때문이 아닌가 했지만 홍 실장이 침묵하는 건 그런 것 때문이 아니었다·
“아닙니다·”
“홍 실장은 뭐 아는거 없어?”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사실 홍 실장은 아까 그 자리에서 5천억 대출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 순간 비명을 지를 뻔 했었다·
딱 맞아 떨어졌다·
이형준 본부장이 비서실 사람이 자신의 목을 잡고 있다고 했었고 오늘 비서실에 새로운 사람이 들어왔다·
양 전무는 오늘 너무 갑작스러운 상황에다가 이형준이 투자증권 사람이라 신영은행과 연관을 못 짓고 있을 뿐이지 조금만 시간을 가지고 생각한다면 결국 이 모든 딜의 키가 이형준 본부장임을 알아챌 것이다·
새로 들어온 비서실 직원이 입사한지 석달도 안 돼 과장급으로 초고속 승진한 걸 알게 된다면 이 엄청난 딜을 주도한 사람이 최영훈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하게 될 건 불문가지·
입사한지 석달도 안 된 신입사원이 과장급 대우를 받게 된 이유 이 거래가 그토록 은밀하게 진행됐던 모든 이유가 모두 설명 가능해졌다·
문제는 최영훈이 어떻게 그런 능력을 가졌는가 일 뿐
“너 다른 생각하는 거 아니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아닙니다·”
아니라고는 했지만 홍 실장은 갈등하고 있었다·
민 과장이 말한 바람이 바뀌는게 피부로 느껴졌다·
“중요한 시기야· 임지은 사장님이 마음을 굳게 잡수셨어· 여기서 실수하면 너나 나나 앞으로 치킨집 사장 되는거야· 정신 똑바로 차려·”
“알겠습니다· 전 여기서 내리겠습니다·”
“그래 조심해서 들어가고 내일부터 바쁘게 움직이자고·”
“조심해서 들어가십시오·”
홍 실장은 양 전무가 탄 차를 향해 90도로 인사하며 배웅했다·
*
“어때?”
차지열 상무는 이제는 빈 자리인 조수석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전무님이 처음에 생각하셨던 게 맞는 것 같습니다· 애초부터 비서실에서 움직였고 홍 실장이 우리 뒤통수를 친게 틀림 없습니다·”
“그래 이 와중에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는 사람은 이형준 본부장 밖에 없지· 그 어린놈이 자신을 찾아온게 비서실이었다고 했단 말이야· 그게 거짓말이 아니라면 처음부터 우리가 잘못 생각한게 아니었던거야· 이 개새끼가 나를 농락하고 있는 거였어·”
“그런데 홍 실장이 어떻게 신영은행과 딜을 할 생각을 했을까요?”
“아까 임지은 사장님 말씀하셨던거 못 들었어? 정치권에 부탁했겠지· 신영은행이 선택된건 아직 좀 더 알아봐야겠지만 확실한건 송 사장 수완이 만만치 않다는 거야· 홍 실장을 구워 삶은것만 봐도 한 칼 있다는 거겠지·”
“그렇겠네요·”
“그리고 홍 실장 이 새끼···”
“그냥 두면 안 되겠습니다·”
“일단 모르는척 해· 결정적인 상황이 왔을 때 다 같이 쳐야 해·”
“네·”
양 전무는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면서 이를 갈았다·
< 유령에서 사람으로(3) > 끝
ⓒ 영완(映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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