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 술은 새 부대에(1) >
연희가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가 다시 주변을 둘러보곤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아니 여자 문제까지 어떻게 알아내요? 그건 좀···”
“힘들어요?”
“여자문제면 통화내역도 봐야 할거고 차명 부동산이나 계좌내역도 봐야 할 텐데 어떻게 그걸 다 찾아내요? 감사실에서 움직이지도 못할 텐데···”
연희의 말을 들으니 그녀가 자신의 말을 다른 쪽으로 생각하고 있음을 알았다·
“내가 말하는 여자 문제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따로 집 해주고 차 사주고 그런 첩같은 걸 말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그럼요?”
“양 전무님의 눈을 보면 검은자위가 몽롱하면서 눈꺼풀이 두텁고 눈 전체가 어둡습니다· 이런 눈을 관상에서 돼지눈 저안(猪眼)이라고 하는데 성품이 거칠고 흉폭한 경우가 많죠·”
“네? 그렇게 보이지는···”
“그래서 저 눈을 가진 사람들은 보통 저 자리까지 오르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다· 자신의 거칠고 흉악한 성정을 자제하지 못하면 저 자리까지 오르지 못할 테니까요·”
“그럼요?”
“저안의 또다른 특징 하나가 음욕이 강하다는데 있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풍족하게 살았다면 여자가 부족하지 않았을 테고 자신의 거친 성향을 음심으로 풀면서 달래왔을 겁니다·”
“아~ 그래서 여자가 많을거다?”
“단순히 많을 거다라는게 아니라··· 어쩌면 가진 권력을 이용해서 지금도 자신의 음욕을 풀고 있을지도 모르죠·”
연희는 영훈의 말을 듣고 잠시 생각하다가 크게 놀랐다·
무슨 말을 하는건지 이해했기 때문이다·
“그럼 어떡해요?”
“뭘 어떡합니까? 사실 사주를 봐야 정확하지만 아까 당신을 쳐다볼 때 흘리는 음심으로 보건데 아마 맞을 것 같다고 생각했던 거니 당신이 알아서 방법을 강구해야죠· 뒤를 밟든 은밀히 수사를 하든·”
“날 볼 때 음심이 흘렀다구요? 진짜?”
“보기보다 감이 없으시네· 그런데 계속 여기에 서 있을겁니까?”
“아 미안해요· 정신이 없어서··· 멸치국수 국물 끝내주게 하는데 있는데 어때요?”
“국수만 먹기에는···”
“그 집 왕만두도 죽여요·”
“갑시다·”
*
양철기 전무와 차지열 상무는 회사에서 좀 떨어진 관철동 먹자거리의 한 일식집에 들어갔다·
엄청나게 고급스러운 곳은 아니었지만 룸이 나눠져 있어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하기에 적당하고 음식 맛도 나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셨습니까·”
먼저 와서 기다리는 사람은 차 상무 나이쯤 되어 보이는 남자였다·
그는 신영은행 기업여신심사부 도한수 부장이었다·
“만나자고 부른 사람이 늦으니 이거 영 염치가 없습니다·”
“고작 몇 분 차이에 늦고 빠름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어서 앉으시죠·”
양 전무와 차 상무가 자리에 앉고 나서 얼마 후 회덮밥 세 그릇이 들어왔다·
도한수 부장이 무거운 표정으로 천천히 회덮밥을 비빌 때 차 상무가 입을 열었다·
“아직 우리 현진물산이 신영은행에서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는데 이렇게 5천억이나 되는 큰 대출을 진행해주시니 뭐라 감사의 말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도한수 부장은 비비던 숟가락을 탁자에 내려놓더니 퉁명스레 말했다·
“감사하다구요?”
“그럼요·”
“그럼 절 만나자고 한 건 무슨 이유입니까?”
“그거야···”
“5천억 대출이 어떻게 진행된거냐 물어보시려고 한 거 아니었습니까? 저도 눈이 있고 귀가 있습니다· 괜히 없는 시간에 찔러보느라 시간낭비 마시고 허심탄회하게 말씀하시죠·”
이렇게 나오니 차 상무가 머쓱하니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양 전무가 나섰다·
“좋습니다· 우선 가장 중요한 거 먼저 물어보겠습니다· 그거 정말 나오는겁니까?”
도한수 부장은 불만 어린 표정으로 물을 한번 마시고는 말했다·
“나갑니다·”
“5천억 전부?”
“1원 한 장 안 빼고 다 나갑니다·”
“누가 개입한 겁니까?”
“위에서 내려온 겁니다· 전 정확히 누가 개입한 건지 알지 못합니다·”
“위? 어느 위를 말하는 겁니까?”
“다시 말씀드리지만 누가 개입한 건지 알지 못합니다·”
정말 모르는 건지 아니면 말하고 싶지 않은 건지 모르겠지만 양 전무가 봤을 때 누가 이 대출을 주도했는지 알아내는건 힘들어 보였다·
“혹시 정치권이 개입했습니까? 이 정도는 말해줘도 되는 거 아닙니까?”
“그건 모릅니다·”
“흠··· 이거 뭐 알고 계시는 게 없군요·”
“우리 같이 시키면 시키는대로 할 수밖에 없는 인생이 뭘 알고 하겠습니까? 그래서 만나자고 하셨을 때 도움을 못 드릴 것 같다고 말씀드렸습니다만·”
“그럼 이건 아십니까? 혹시 5천억 대출 딜에 혜성기업이 들어가있습니까?”
도한수 부장은 이번에는 신기하다는 눈빛을 띄며 양 전무를 바라보았다·
“생각보다 회사가 재미있게 돌아가고 있군요· 같은 회사 사람에게 이렇게 혜성기업 인수까지 감쪽같이 속이고 진행할 줄이야·”
양철기 전무는 황당하고 쪽팔려서 당장이라도 자리를 박차며 나가고 싶었다·
병신도 아니고 기업 경영지원본부장이라는게 워크아웃 기업 인수가 확정됐는데 매각주관사 직원에게 여태껏 회사를 인수하는것조차도 모르고 있었냐고 질문을 받으니 쪽팔려서 살 수가 있나·
“이거 영 부끄러워서 얼굴을 들고 있을 수가 없습니다·”
양 전무의 말에 노기가 묻어 있음을 알았는지 도 부장은 그가 원하는 말을 해주었다·
“아닙니다· 5천억 대출이 나가는 대신 혜성기업을 현진물산에서 인수하기로 결정됐습니다· 인수대금은 2500억· 대출금 5천억에서 우선 인수대금 천억만 먼저 제하고 입금될거고 나머지 1500억은 3년간 500억씩 상환하는 조건입니다·”
양 전무와 차 상무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3500억에서 2500억으로 천억이나 날아간 것만으로도 황당한데 분할상환으로 실질적인 인수대금을 천억으로 틀어막아 놓았으니 말이다·
“그게 정말입니까? 왜···?”
왜 그 따위 거래에 응했느냐는 물음에 도한수 부장도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왜 그런지 제가 제일 궁금합니다· 제가 이 얘길 듣고 그날 하루 종일 일이 손에 안 잡혔어요· 어떤 등신··· 아니 어떤 이유로 이런 딜을 지시했는지 멱살을 잡아다 그 이유를 물어보고 싶은 마음입니다·”
“허··· 천억 플러스 500억 분할납부라···”
“제가 해드릴 수 있는 이야기는 다 해드린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시장하실 텐데 어서 드시죠·”
그렇게 셋은 어색한 분위기로 식사를 마무리하고 헤어졌다·
양 전무와 차 상무가 어두운 얼굴로 떠나갈 때 도한수 부장은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네 전무님· 방금 헤어졌습니다· 아직 감을 못 잡고 있지만 곧 알아낼 것 같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도 부장은 바쁘게 걸음을 옮겼다·
*
“흐음··· 짐작도 안 가네· 아 정말 생년월일 확실한 거예요?”
영훈의 짜증에 연희도 억울한 얼굴로 목소리를 높였다·
“맞아요· 몇 번이나 확인했다니까요?”
영훈은 혜성기업 리포트를 계속 들여다보았지만 애초부터 어떤게 어느만큼 가치가 있는지 볼 줄 아는 능력은 다른 사람들에 비해 나을 게 없었다·
그러니 하루 종일 들여다 본다고 뭐 알아낼게 있을까·
자신이 알아낼 정도면 이미 전문가인 다른 사람들이 진즉 알아내고도 남음이 있을 거라는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유 모르겠다·”
결국 영훈은 혜성기업 리포트를 던져버리곤 의자를 힘껏 젖혀 누웠다·
이때 김민희가 다가와 말했다·
“주임님 오늘 4시 강의는 14층 회의실을 잡아놨습니다· 그리고 내일부터는 을지로입구역 6번출구 나가서 5분 거리에 있는 스터디 카페에서 하시면 됩니다· 한달간 예약해놨기 때문에 따로 비용을 지불하실 필요는 없고 드시고 싶은 음료나 간식 있으시면 말하고 드시면 됩니다·”
“회사 사람들한테 안 보이게 일부러 그렇게 하는 거죠?”
“맞습니다· 아무래도 불필요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으니까요·”
단어 선택이나 눈치가 확실히 보통이 넘는다·
“혹시 또 알아둬야 할 게 있나요?”
“현재는 없습니다· 보고할게 있으면 바로 말씀드리겠습니다·”
“고마워요·”
민희는 살포시 웃으며 고개를 숙이고 멀어져간다·
그 모습에 연희가 입을 툭 내밀고 투덜거렸다·
“아니 자기보다 한참 후배인데 주임님~ 주임님~ 화도 안 나나?”
“날 배려해주는 것 같긴 한데 확실히 굽혀야 할 땐 확실히 굽히는 성격이 보이네요· 어떻게 생각하면 살아남기 위한 최선의 방책이라고 느껴서 후배라는 사실은 그리 중요하지 않을 겁니다· 그것보다 혹시 질투하는 거 아니죠?”
연희가 눈을 동그랗게 뜬다·
“내가요? 왜요? 왜? 뭐 때문에?”
“아니 뭐··· 과하게 반응하는 것 같아서·”
“하~ 아니 그냥 좀 많이 흘리고 다니는 스타일을 안 좋아하긴 하거든요· 상대가 영훈 씨라서 그러는게 아니라 그냥 내 취향이랄까?”
“그래요? 나랑 취향이 반대시네요·”
연희의 고개가 홱 돌아간다·
“어 어허··· 아~ 그런 스타일 좋아하셨구나?”
“네 전 좀 많이 흘리셔서 제가 주워다 줄 수 있는 분 좋아합니다·”
“잘해보세요· 그러면···”
쌍심지가 확 올라가는 것이 단단히 삐친게 분명했다·
이제 그만 놀릴까 하는데 핸드폰으로 문자 하나가 왔다·
[안 바쁘면 저녁에 나랑 술 한잔 하지?]
영훈이 핸드폰을 바라보자 연희가 물었다·
“뭐··· 민희 씨가 밖에서 보자고 해요?”
“그만 삐쳐요· 이형준 본부장이 한번 보잡니다·”
“그 사람이 왜요? 다 끝난 거 아니었나?”
“계산을 다시 하고 싶은 건 아닐 테고··· 만나봐야 알 것 같습니다·”
“궁금하네· 나도 가면 안 돼요?”
“안 됩니다·”
“왜요?”
“난 괜찮아도 이형준 본부장이 싫어할 수도 있으니까요· 그로서는 들려주기 싫은 이야기일 수 있거든요·”
“아··· 궁금하다·”
“그런데 양 전무님은 어떻게 하기로 했습니까?”
“영훈 씨 말을 듣고 계속 곰곰이 생각해봤어요· 그런데 막 뒤를 밟거나 하는게 큰 의미가 없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지 뭐에요? 만약 양 전무가 영훈 씨가 말한 그런 성격이라면 회사에서 뭔가를 해도 했겠다는 그런 생각?”
“그래서요?”
“교육 한 번 하자고 건의했죠·”
“응? 교육이요?”
*
양철기 전무는 불편한 점심 이후로 이 상황을 어떻게 타개해 나가야 할지 고심중에 있었다·
일단 혜성기업을 천억 플러스 분할납부 형식으로 인수하기로 결정난 걸 들은 이상 임지은 시장에게 보고해야 하는데 이 이야기를 들은 임 사장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눈에 선했기 때문이다·
바보 멍청이 소리를 듣는 거야 좀 참으면 그만이지만 이 이야기가 회장님 귀에 들어간다면 이후에 현진물산이 임 사장 손에 들어가도 자리를 보전하기 힘들게 뻔했다·
대출을 막든 혜성기업에 폭탄을 하나 더 얹어서 회사에 부담을 주는 방법을 만들든 뭔가 대책을 세워야 했다·
일단 도 부장이 자신도 잘 모르는 윗선이라고 한 걸로 보아 오너가 직접 지시를 내렸을 가능성이 컸고 그렇다면 결국 돌고돌아 이형준 본부장의 손에 닿았을 거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이형준 본부장을 다시 만나야 했다·
피가 바짝바짝 마르고 온 신경이 머리로 곤두서는 느낌이 그의 가슴을 옥죄여 왔다·
“야 시원한 냉수 좀 가지고 와·”
양 전무는 언제나 그랬듯 왕처럼 인터폰으로 고함쳤다·
그런데 잠시 후 그가 총애하는 여비서가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냉수를 떠오며 말했다·
“지금 전 여직원 빠짐 없이 대회의실로 모이라고 해서 잠시 다녀오겠습니다·”
“뭐? 왜?”
“긴급 성희롱 예방교육을 실시한다고···”
“뭔 소리야 짜증나게· 기다려·”
양 전무는 짜증이 치솟았다·
성희롱 예방 교육이라니·
“그냥 못 간다고 할까요?”
인터폰으로 교육담당자를 찾아 혼내주려던 양 전무의 손길이 순간 굳어졌다·
어쩌면···
양 전무는 들었던 수화기를 내려놓고 말했다·
“다녀와·”
“알겠습니다·”
“그리고··· 어리석은 이야기는 하지 않을거지?”
양 전무 앞의 비서는 비맞은 새처럼 오들오들 떨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양 전무는 그 모습을 보며 혹시나 했던 마음을 내려놓았다·
< 새 술은 새 부대에(1) > 끝
ⓒ 영완(映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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