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 술은 새 부대에(3) >
“어떻게 비서실장님이 이걸 가지게 됐습니까?”
“석달 전에 찍힌 영상이야· 감사실장이랑 나만 알고 있지· 물론 양 전무님도 알고 있겠지만· 원래는 그냥 삭제하려고 했는데 혹시나 해서 내가 가지고 있었어·”
“혹시 다른 분 것도 가지고 있습니까?”
홍 실장은 아쉬운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영상을 가진 건 없어· 소문이나 들은 이야기야 많지만 그게 도움이 될만한 건 아닐거고·”
“양 전무님께서 실장님이 이 영상을 가지고 있는걸 압니까?”
“모르지· 알면 날 그냥 뒀을까? 양 전무님은 감사실장이 CCTV 영상을 지운 걸로 알고 있을거야· 역시나 감사실장도 내가 보고 지웠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뭐 아니어도 상관 없고·”
“감사실장님이 양 전무님 라인입니까?”
홍 실장의 얼굴이 굳어졌다·
“양 전무님 라인은 다 걷어내려고 하는건가?”
영훈은 잠시 생각하고나서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하면 전 사내 정치싸움에 관심 없습니다· 믿으실지 모르겠지만 정말 관심 없어요· 그저 제 일을 하고 싶을 뿐입니다· 회사가 잘 되는 것보다 다른 곳에 열정을 쏟는 몇몇 분들이 계시더라구요· 뭐 그거야 사람마다 가치관이 다른거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신경 쓰고 싶지도 않고· 그런데 회사의 일을 방해하면서까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려고 하는 분들이 있죠·”
“양 전무님처럼?”
“맞습니다· 이런 쓰레기인 줄은 몰랐지만 어쨌든 전 이런 사람들이 회사에 있는게 순수하게 가정과 회사를 지키기 위해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을 욕보이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양 전무님 라인이라서 걷어내는게 아니라 그런 생각에 일조하는 사람이라면 전부 걷어내야 회사가 건강해지는 거 아니겠습니까·”
조금의 협상 여지도 남겨 놓지 않는 칼 같은 말이었다·
“그렇군· 어쨌든 이걸로 조용히 잘 처리했으면 해·”
홍 실장은 굳이 양 전무나 그 라인들을 구제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저 영훈이 쥔 칼이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속마음이 궁금했을 뿐이다·
영훈은 홍 실장이 준 USB를 들고 감사실로 향했고 홍 실장은 느긋하게 등을 기댔다·
피곤이 몰려왔다·
아무래도 잠시 눈을 붙여야 할 것 같았다·
아마 한숨 자고 일어나면 꽤 재미있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등받이를 뒤로 눕혔다·
*
양철기 전무는 엄습하는 불안감으로 계속 시계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다 결국 못 참고 차지열 상무에게 전화를 했을 때 교육 갔던 모든 여직원들이 복귀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우려하던 일이 벌어졌음을 직감했다·
평소에 허리가 남아나지 않을 것처럼 인사하며 자신의 앞길 좀 열어달라고 애원하던 감사실장은 전화를 받지 않고 있었고 5시에 예정돼있던 회의까지 취소된 상태였다·
아무래도 감사실로 직접 내려가야 할 것 같다고 벌떡 일어난 순간 문이 벌컥 열렸다·
“전무님·”
놀랍게도 문을 열고 들어선 이는 감사실장인 박운재 부장이다·
그가 직접 나타난 것에 양 전무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야 너 뭐야!”
“죄송합니다· 함께 가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뭐? 너 이 새끼가 지금···”
“죄송합니다· 모셔·”
박운재 부장의 말에 직원들이 전무의 양 팔을 잡고 끌고가려했다·
“어딜 만져! 손 안 떼? 내가 내발로 가!”
박운재 부장이 눈짓하니 직원들이 양 전무에게서 손을 뗀다·
양 전무는 끓어오르는 분노로 죽일 듯 박 부장을 노려보았지만 박 부장은 그저 고개를 숙이며 ‘죄송합니다’만 말할 뿐이었다·
“너 이대로 내가 가만 있을 것 같아? 너 당장 옷 벗긴다· 내가 헛소리 하는 것 같아?”
“가시죠·”
박 부장은 대꾸하지 않고 감사실로 향했고 양 전무는 어쩔 수 없이 그의 뒤를 따라 감사실로 향했다·
그 멍청한 년이 뭐라 말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감사실에 가서 유미애와 대질하면 결국 이 모든 일이 무마될거라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감사실에 들어서니 유미애는 기다리고 있지 않았다·
조사실에 앉은 양철기 전무는 불안한 마음에 맞은편에 앉은 박운재 부장에게 말했다·
“이제 말해봐· 뭐야?”
박운재 부장은 한켠에 비치된 카메라 위에 손을 올리고는 말했다·
“죄송합니다 전무님· 저는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대응하셔야 합니다· 제가 드릴수 있는 말씀은 이것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카메라를 작동시켰다·
그리고···
“양철기 전무님 5월 13일 밤 10시 반에 사무실에 계셨던 것 맞습니까?”
“너 너··· 이 새끼···”
“거기서 유미애 씨를 강제로 성폭행 하려고 했던거 맞습니까?”
“무슨 말이야! 내가 언제! 증거 있어?”
“5월 13일을 제외하고 다른 때에도 그런 적 있습니까?”
“이 개새끼가···”
양 전무가 막 고함을 치려 할 때 박 부장이 탁자를 쾅 치며 소리쳤다·
“양철기 전무님! 사실대로 대답하세요· 지금 이 상황이 장난으로 보입니까? 당신 제대로 해명 못하면 옷 벗는 걸로 끝나지 않아요· 지금 법무팀에서 당신 상대로 고소 절차 진행하고 있습니다·”
양 전무는 너무 놀라 감히 박 부장이 버릇없이 굴었다는 사실도 잊어버리고 말았다·
“뭐 뭐라고?”
“위력을 이용한 성추행이나 성폭행은 굉장히 심각한 범죄입니다· 회사에서는 이 일을 결코 묵과하지 않을 것이고 당신에 대한 민‧형사상 가능한 모든 법적 조치를 취할 예정입니다· 그렇기에 있었던 사실을 사실대로 말하고 피해자와···”
양철기 전무는 참지 못했다·
“이 개새끼가!”
짝!
박 부장의 뺨을 후려친 그가 막 박 부장에게 달려들려 할 때 문이 열리며 우르르 사람들이 들어와 양 전무를 말렸다·
그런데 뺨을 맞은 박 부장은 오히려 한결 편해진 얼굴로 뺨을 부여잡으며 말했다·
“일단 알겠습니다· 해당 내용은 법무팀에 인계하겠습니다· 전무님은 조사가 완료될 때까지 출근하실 수 없습니다· 가지고 계신 핸드폰 반납 부탁드립니다·”
“이··· 이 새끼···”
“꺼내·”
직원이 양 전무의 품을 뒤져 핸드폰을 꺼냈다·
회사에서 지급한 핸드폰이기에 당연히 퇴사하면 반납해야 하는게 맞았다·
박 부장은 이 핸드폰에 어떤 폭탄이 들어있을지 혹시 자신과 관계된 안 좋은 사항이 없기만을 빌었다·
당장 핸드폰을 뒤져보고 싶었지만 이 모든 사항은 감사실이 아닌 비서실에서 진행하는 것이었고 이제 비서실에서도 감사실을 주시하는 걸 느끼고 있었기에 감히 핸드폰을 뒤질 엄두도 내지 못했다·
“지금 이대로 회사를 나가시면 됩니다· 필요한 물건이 있으시면 댁으로 보내드리겠습니다· 옷가지 등 당장 가지고 나와야 할 게 있으십니까? 직원 올려보내서 가져오겠습니다·”
“···”
“없으면 지금 나가시면 됩니다·”
박 부장을 비롯한 감사실 직원들이 길을 비켜주었다·
이제 공은 법무팀으로 넘어갔고 피해 여직원과 상의해 법적조치를 취할거다·
“이 핸드폰 비서실로 갖다줘·”
“알겠습니다·”
박 부장은 이 피의 숙청이 어디까지 뻗칠지 무서워졌다·
*
차지열 상무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양철기 전무가 누군가?
수십 년을 넘게 현진물산과 함께 성장해왔던 양 전무는 사실상 성주훈 부사장과 더불어 회사를 실질적으로 이끌어온 쌍두마차라고 할 수 있었다·
임지훈 사장이 있긴 했지만 임 사장은 사장직에 올라선지 10년도 채 되지 않았었다·
당연히 양철기 전무 밑에서 일을 배운 이들이 얼마겠으며 부장급 이상 임직원 중 그의 도움 한 번 안 받은 사람이 드물거다·
그만큼 회사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이 양철기 전무였기에 임지은 사장이 그를 믿고 있었던 거다·
현진물산을 자신에게 안겨줄 사람이라고·
그런 사람이 손 한 번 못쓰고 단번에 날아갔다·
막말로 찍소리 한 번 못했다·
전쟁으로 치면 적군이 기습하는데 정찰병이 종을 울리기도 전에 장수의 목이 떨어진 셈이다·
너무 놀라서 이게 현실인지 꿈인지도 헷갈릴 정도였다·
한참을 고민하던 차 상무는 결국 회사를 나왔다·
어차피 회의도 취소된 마당이고 이제 곧 퇴근시간이었기에 누구 눈치 볼 것도 없었다·
“논현동으로·”
수행기사에게 목적지를 알려준 그는 급하게 전화를 돌렸다·
이미 회사를 나와 어디에 있을지 알 수 없는 양 전무에게 자초지종을 들어야 임지은 사장에게 설명이라도 할 거 아닌가?
그런데 전화조차 받지 않는다·
아무래도 개인 핸드폰을 집에 두고 온 것 같았다·
“씨발···”
아마 양 전무도 지금 상황이 믿기지 않아 거의 패닉 상태나 다름없을 게 뻔했지만 일단 그가 패닉이든 아니든 자신부터 살고 봐야 했기에 그의 개인 핸드폰에 문자를 남겨 빨리 연락해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논현동에 도착할 때까지 양 전무에게선 연락이 없었다·
참혹한 마음으로 임지은 사장의 집으로 들어선 그는 놀랍게도 거실 한 가운데서 무릎 꿇고 앉아 있는 양철기 전무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왔어요?”
임지은 사장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린다·
이미 그녀의 앞에는 얼음만 남겨진 물컵이 한 잔 놓여 있었다·
보아하니 이미 자신이 오기 전에 한바탕 했으리라·
“늦었습니다·”
“퇴근시간도 전에 출발했는데 늦을게 있나· 그나저나 차 상무?”
“네·”
차 상무는 임 사장이 그냥 물어보는 것인데도 살이 떨려오는 긴장이 느껴졌다·
“우리 양 전무가 크게 실수했나봐· 있어서는 안 되는 실수긴 한데··· 왜 사람이 살다 보면 실수도 하고 그러잖아?”
“네? 네 그렇습니다·”
“양 전무가 그렇게 힘이 정정한지 몰랐는데 어쨌든 뭐 그렇다니 어린 여비서에 마음이 동했을 수 있지· 그런데 그걸 어떻게 알았을까? 그 여비서가 입이 그렇게 쌌대?”
사실 차 상무도 양 전무가 어떻게 한순간에 목이 날아간건지 정확한 정황을 모르고 있었다·
그저 성희롱 예방 교육이 있었고 조금 소란이 있다가 양 전무가 바로 쫓겨났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었을 뿐·
당연히 임지은 사장이 물어본다고 한들 아는 게 있을리 없었다·
“그 그건···”
“모르겠지? 차 상무는 우리 양 전무가 그렇게 정정한지 알았어?”
“몰랐습니다·”
“왜? 룸싸롱도 자주 다녔을거 아니야?”
차 상무는 속으로 욕을 내뱉었다·
아무리 룸싸롱을 자주 간다고 해도 차 상무는 같은 회사 사람과 발가벗고 그 짓거리하는건 결코 하고 싶지 않는 짓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양 전무는 다를지 모르겠지만·
“그쪽으로는 저도 잘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 의외네? 뭐 어쨌든 차 상무도 잘 모르는 일을 올케가 어떻게 알고 그렇게 빠르게 처리했을까? 나도 우리 양 전무가 이렇게 이팔청춘처럼 살고 있는지 몰랐는데 말이야·”
그건 그렇다·
임 사장의 말에 틀린게 없었다·
“맞습니다· 분명 이상합니다·”
“그래~ 설마 성희롱 예방 교육을 했다가 우연찮게 걸려서 양 전무 목을 날렸다고 순진하게 생각하는 건 아니지?”
“그랬으면 지금까지 수많은 성희롱 교육에서 말이 안 나왔을 리 없습니다· 특히 감사실장은 양 전무님과 무척 가까웠고 오히려 조금이라도 더 눈에 들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한 인간입니다· 작년에 김장 담글 때도 감사실장 부인이 찾아와 도와줬다고 알고 있습니다·”
“아이고 그 정도야? 그런 감사실장이 우리 양 전무 모가지를 직접 날려버렸네? 그 감사실장이 양 전무한테 원한이라도 품어서 그럴까?”
“그럴 리가 없습니다·”
“그래· 그럼 결론은 우리 깜찍한 올케님께서 양 전무가 경우 없이 허리를 막 놀린다는 걸 알고 그 빌어먹을 교육인가 뭔가로 목을 날렸다는 거잖아?”
차 상무는 침음성을 흘렸다·
임지은 사장의 입에서 뒤를 이어 나올 말이 무엇인지 예측했기 때문이다·
“맞습니다·”
“알아와 그게 뭔지· 올케 옆에서 옆구리 찔러대는 놈· 그놈이 누군지 알아오라고· 그걸 알아야 뭔가 대책을 세울거 아니야? 안 그래?”
“알겠습니다·”
“제대로 알아오지 못하면 차 상무도 여기 이 인간처럼 이러고 있게 될 거야·”
양 전무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이미 다 쉰 목소리로 처절하게 입을 열었다·
“살려주십쇼· 한 번만 기회를 주십쇼·”
“내가 뭘 어떻게 도와줘요? 검찰에 고발한다면서요? 내가 검찰총장이라도 움직여줄까요? 그럴 힘이 있었으면 현진그룹이 재계 10위권 내에서 아등바등 하지도 않겠지· 이봐요 양철기 전무님·”
“네·”
“집에 가서 오랜만에 와이프 엉덩이 두드려 주면서 식사나 해요· 우리 착한 올케 손에 아무것도 없길 빌면서· 이제 가족들하고 헤어지면 언제 볼지도 모르잖아· 혹시 알아요? 별일 없이 지나가면 나중에 당신을 써먹을 날이 올지· 그러니까··· 그만 질질짜고 나가·”
얼려버릴 듯 차가운 임 사장의 말에 양 전무는 입술을 깨물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절뚝거리며 천천히 거실을 빠져나갔다·
“저런 걸 믿고 내가···”
임지은 사장의 말이 축 늘어진 그의 등을 할퀴었다·
< 새 술은 새 부대에(3) > 끝
ⓒ 영완(映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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