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 술은 새 부대에(4) >
연희의 손에는 양철기 전무의 핸드폰이 들려 있었다·
본래 연희가 영훈에게 주려고 했지만 영훈은 그녀에게 알아서 쓰라며 아예 받지도 않았다·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하라는 거죠?”
“그 정도는 할 수 있잖아요?”
“맞아요· 그런데 궁금한게 있어요· 어떻게 피해자를 한번에 찍었어요? 목에 출입증이 걸려 있었던 것도 아니었는데·”
“설문지를 보면서 고민하고 있었기도 하고··· 상을 봤을 때 느낌이 오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딱 저 여자가 경영지원본부장 비서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어요 운이 좋았던 겁니다·”
“유미애 씨 상이 어땠는데요?”
영훈은 잠깐 생각하다가 말했다·
“관상은 우리처럼 배운 사람들만 보는게 아니라 당신이나 사장님도 무의식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꼭 보려고 노력한다기보다 살아온 세월을 통해 경험적으로 까칠할 것 같다 위험하다 또는 가까이 지내고 싶다라는 마음이 들게 하죠·”
“뭐 주는 것도 없이 보면 좋은 사람이 있고 말도 섞기 싫은 사람들이 있긴 한 것 같아요·”
“그게 다 맞다거나 틀리다는게 아니라 그 살아온 세월 동안 겪었던 경험들이 축적돼서 본능적으로 사람들을 평가하게 되는 겁니다· 그런 면에서 생각해봤을 때 양 전무 같은 인간 쓰레기도 사람을 볼 때 본능적으로 건드려도 될 것 같은 사람과 아닌 사람을 판단하게 될 겁니다· 이건 순전히 내 개인적인 생각이니까 꼭 맞다고는 할 수 없을 것 같지만요·”
“어쨌든 그래서요?”
“대개 눈이 크고 동그라며 귓볼이 두툼하고 광대가 살아 있으면 남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기 마련입니다· 이런 분들은 보통 착하게 생겼다는 말로 평가되며 실제 감정이 섬세하면서 인정에 약하고 애착과 미련이 많은 편에 속합니다· 특히 눈동자가 까맣고 깊으면 눈물이 많은데 이런 분들은 뭔가 꼭 억울한 일을 당할 것 같고 슬픔이 많아 보이기도 합니다·”
연희는 고개를 갸웃하면서 물었다·
“알 것 같기도 하고 모를 것 같기도 하고··· 애매하네· 그런데 유미애 씨가 이렇게 생겼다는 거죠?”
“네· 남자들도 대개 이런 상을 좋아합니다· 귀엽고 보호해주고 싶은 마음을 자극한다고 할까요? 아마 학창시절에 남자들에게 인기 꽤나 있었을겁니다· 그런데 이 상은 여자 본인에게 있어 꼭 그렇게 좋은 상은 아닙니다·”
“왜요? 이번 일처럼 억울한 일을 당하게 되니까?”
“이번 일은 굉장히 안 좋은 쪽으로 발현됐지만 어쨌든 비슷합니다· 남자를 만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상대를 맞춰주고 억울해도 그냥 삭히고 넘어가는 편이 됩니다· 남들이 보기엔 현모양처 같아 보이지만 남자를 잘못 만나면 우울증 걸리기 딱 좋은 상이라고 할 수 있죠·”
“아···”
“당신과는 딱 반대라고나 할까요?”
연희의 눈썹이 역팔짜로 확 꺽인다·
“내가 왜요?”
“당신은 마음에 안 들면 바로바로 말해야 직성이 풀릴 테니 적어도 말 못해서 생기는 홧병은 안 걸릴겁니다· 대신 상대를 배려하는 태도가 부족하니 크게 다툴 가능성이 있죠·”
“허··· 와··· 이렇게 멕이는 거예요?”
“자신의 성격을 아는건 굉장히 중요한 겁니다· 자신을 모르면 본인의 잘못을 알지 못하고 무엇을 고쳐야 할지도 모르죠·”
“아 예~ 그러겠죠·”
연희가 눈을 흘기자 영훈은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피했다·
“크흠··· 어쨌든 그래서 감사실 직원에게 말해봤는데 딱 걸린 거였습니다· 나도 놀랐어요· 한 번에 찍을 줄은· 사장님은 어떻습니까?”
양 전무가 감사실에서 바로 쫓겨날 때 당연히 송은채 사장의 허락이 있었다·
다만 현재 외부 미팅건으로 출타중이어서 아마 이 좋은 소식을 듣고도 대놓고 기뻐하지는 못하고 있을 것 같았다·
“나도 따로 연락해보지는 않았어요· 어차피 집에서 만나면 물어보면 되니까· 모르긴 몰라도 엄청 좋아하겠죠·”
영훈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연희가 그 모습을 보고 물었다·
“지금 가는 거예요?”
“네· 지금 나가야 얼추 시간을 맞출 것 같습니다· 일 더 하다가 갈겁니까?”
“그래야죠· 오늘 일도 그렇고 당신이 나한테 준 일거리도 다 체크해야 하니까· 한동안 빡세겠어요·”
“수고해요·”
영훈이 움직이려고 할 때 민희가 다가왔다·
“주임님 퇴근하시는 건가요?”
“아 네·”
“혹시 운전면허증 있으신가요?”
“아직 없습니다·”
“그럼 운전면허증을 최대한 빨리 따시는걸 추천할게요· 앞으로 계속 운전 안 할건 아니시죠?”
“그럼요·”
근사한 차를 타고 도심을 누비는 그런 광경이야 말로 영훈이 산에 있을 때 꿈꿔오던 바가 아니겠는가?
지금까지는 차를 살 형편도 안 됐었고 과장급으로 올라선 이후에는 시간이 없어서 공부를 못했을 뿐이다·
“그럼 면허증 따시면 말씀해주세요· 차량 신청해야 하니까요·”
“어? 회사에서 차 지원해주시는 건가요?”
“네· 사장님께서 특별히 주임님께 3000cc 차량이랑 주유 지원 지시하셨습니다· 그리고 시간 나실 때 쇼핑 좀 하는게 어떠냐고 물어보셨는데···”
“쇼핑이요?”
“네· 이제 외부 미팅이 잦을 수 있으니까 복장에 신경을 쓰셔야 할 것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민희 씨를 통해 이야기를 전달하는 걸 보니 면전에서 직접 말하기가 조금 그랬나보다·
조금 민망하긴 했지만 그거 하라고 전에 법인카드까지 줬으니 할말이 없었다·
“알겠어요· 언제 시간 내서 백화점 한번 갈게요·”
“알겠습니다· 그럼 편히 쉬세요·”
“네· 수고해요·”
영훈은 괜히 입고 있는 자켓을 툭툭 털며 회사를 나왔다·
하긴 이 정장이 동대문에서 산 거라 아무래도 명품을 많이 접하는 사람들이 보기에 조금 부족해 보이는게 맞는 것 같았다·
이형준 본부장이 만나자고 한 곳은 방배동에 위치한 고깃집이었다·
택시를 타고 도착해보니 대로변에 커다란 간판이 달려 있고 외제차들이 줄지어 주차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꽤 비싼 가게인 듯 싶었다·
“예약하셨습니까?”
“이형준으로 예약돼있을 겁니다·”
“아 네· 이쪽으로 오시겠어요·”
직원의 안내를 따라가니 가장 안쪽에 방으로 안내되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형준이 영훈을 보며 툴툴거렸다·
“왜 이렇게 늦어?”
“퇴근 시간이니까요· 누구처럼 퇴근 전에 마음대로 오갈 수 있는게 아니잖습니까·”
“나 안 그래· 나도 출퇴근 칼 같이 지키기로 했어·”
“지금까지는 안 그랬다는 것처럼 들립니다?”
“예전에는 그럴 필요가 없었으니까· 고기는 내가 알아서 시켰어· 괜찮지?”
“얻어 먹는 입장에서 그런거 따지겠습니까?”
“내가 사라고 하면 어쩌려고?”
“그건 그것대로 좋죠· 선물 한 가득 안겨주고 고깃값 계산하라고 하면야 그거 못하겠습니까?”
“내가 내 돈 빌려주고 밥 사라는 소리도 마음대로 못하겠네·”
엄밀히 말하면 신영은행 고객의 돈임에도 그는 당연히 자신의 돈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는 툴툴거리다가 직원이 고기와 음식 숯불을 세팅하고 나가자 고기를 불판에 올렸다·
“고기는 제가 구울까요?”
“됐어· 이런건 원래 을이 해야 하는 거거든·”
“거 참 상하관계 확실하게 정해놓으시네요?”
“그래야 언제고 내가 너 제대로 부려먹을거 아냐? 원래 엎드려야 할 때는 어설프게 엎드리면 안 되거든· 너도 언젠가 그 때가 오면 내 앞에서 납작 엎드려야 한다· 크크크···”
농담인지 진심인지···
그런데 이형준 본부장의 얼굴을 보니 전에 룸싸롱에서 만났을 때보다 얼굴이 좋아 보였다·
어째 결혼식 때만큼이나 활력이 돌아 보인다고 할까?
“뭐 좋은일 있습니까?”
“그래 보여?”
“네·”
“그래 보이면 다행이고· 사실 속은 썩어들어가고 있다· 씨발 언제 눈뜨고 일어나면 납치돼서 통통배 타고 있는거 아닌가 하는 생각에 잠도 편히 못 자·”
“그건 좀 너무 가신 것 같은데요? 누가 보면 조폭하다가 배신하는줄 알겠습니다·”
“둘 다 돈 있고 힘 있는 사람들인데 다를게 없지· 한 잔 해·”
주전자에 어떤 술이 담겨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주는 거니 받았다·
그는 시원하게 한 잔 꺾고는 고기 한 점을 입에 넣으며 말했다·
“현진그룹쪽에서 신영은행을 계속 찔러보고 있어· 들었어?”
“네· 대충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고 있습니다·”
“지금이야 적당히 무마하고 있지만 아버지 귀에 계속 이야기가 들어가면 이거 엎어질 수 있어·”
영훈이 술잔을 내려놓고 물었다·
“계산 다시 하고 싶으신 겁니까?”
“다시 하자고 하면 할 거야?”
“아니요· 우리쪽에 더 얹어 준다면 모를까·”
“현실적인 상황을 이야기해준거야· 네가 말해준 거지만 아버지는 날 완전히 신뢰하지 않아· 어쩌면 지금도 내가 실수하기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지· 그래서 뭘 하려고 해도 이게 함정인지 아닌지 끊임없이 의심하고 체크해야 하거든·”
“혹시 양철기 전무 쪽에서 움직인걸 말씀하시는 건가요?”
형준은 영훈이 알고 있는게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아· 자꾸 쑤시고 들어오면 곤란해· 방법은 찾은 거야?”
“양 전무 오늘부로 회사에서 나갔습니다·”
“나가? 어딜 나가?”
“성추행 혐의로 퇴사 조치했습니다· 앞으로 현진그룹쪽에서 찔러오는게 아니라면 우리쪽에서는 문제 생기게 할 일 없을 겁니다·”
형준은 경악스러운 표정으로 영훈을 바라보다가 웃는건지 우는건지 모를 기묘한 표정을 지었다·
“씨발··· 너 진짜 무서운 새끼구나·”
“뭐 어쩌다 보니까 그렇게 됐습니다·”
“그래그래 어쩌다가··· 매출 7조가 넘는 대기업 넘버 3가 어쩌다가 재수없게 걸려서 날아갔다 이거지? 인생 졸라게 파란만장하네·”
“그런 셈이죠·”
“휘유··· 씨발 목에 땀나는거 보게·”
그는 손수건으로 목덜미를 닦고는 말을 이었다·
“싹 정리하고 나면 이제 네 세상 되는건가?”
“전 그런거 관심 없습니다·”
“씨발 도 닦았나·”
“뭐 그런 이야기는 됐고 오늘 절 보자고 한 이유가 뭡니까? 진짜 고기 먹을 친구가 없어서 만나자고 하지는 않았을 텐데요·”
형준은 씁쓸하게 웃었다·
“친구가 없기는 해· 나랑 같이 술 마시려는 놈들 천지이긴 하지만 다들 뭐 하나 얻어 먹을거 없나 눈이 벌게서 달려드는 놈들밖에 없거든·”
“저도 오늘 뭐 하나 얻어 먹을까 해서 온 겁니다·”
“크크··· 그런데 미안하게도 오늘 너한테 줄게 없다· 그리고 오늘은 나도 그런 놈들처럼 너한테 뭐 하나 얻어 먹을게 없나 해서 왔다·”
“그래요?”
“우리 꼰대· 뭐 약점 같은거 없냐?”
영훈은 황당한 표정으로 쳐다보다가 형준의 진지한 얼굴을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진심이십니까?”
“장난 같냐?”
“장난은 아닌 것 같지만··· 설마 그걸 대놓고 물어볼 줄은 몰랐습니다· 양 전무처럼 여자를 밝힌다거나 했으면 하는 마음이겠죠?”
“솔직히 쉽게 마무리 할 수 있으면 그렇게 했으면 좋겠다·”
“부회장님 쉬운 분 아닐 겁니다·”
“네가 보기에도 그렇지? 맞아· 지금 아버지 오른팔이나 다름 없는 사람이 은밀하게 움직이고 있는데 단번에 승부를 볼만한게 안 나와·”
솔직히 이세준 부회장과 결혼식장에서 본 게 처음이지만 잘 모른다고 할 수도 없었다·
“조언을 원하는 겁니까?”
“맞아·”
“내가 왜 그래야 하죠? 이미 할만큼 해드린거 같은데· 그리고 혹시 나중에 그···”
그는 영훈이 무슨 말을 하려는건지 알아채곤 버럭 소리를 질렀다·
“미친! 설마 아까 통통배 얘기 때문에 내가 아버지를 그렇게 할 거라고 생각하는거냐? 미친거야?”
“그런건 아니죠?”
“당연하지· 아버지가 가진 재산만 수백억이 넘어· 난 그거 털끝만큼도 관심없다· 내가 신영금융을 가지면 그걸로 충분해· 난 살아남기 위해 이러는거야· 반대 상황이 되면 그때는 정말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
“흠··· 그래도 좀···”
“돈 드냐?”
“솔직히 공짜로 해주기에는 아깝긴 합니다·”
“말로는 원하는거 다 해준다고 하고 싶은데 현실적으로 지금 진행하는 대출만으로도 버거워· 이것도 잡음 나오는거 최대한 틀어 막으면서 진행하느라 골치 아프거든· 하지만 난 계산은 확실하다·”
“외상으로 하시겠다는 거네요?”
“이자는 확실히 쳐줄게·”
“흐음···”
영훈이 대답 없이 고기를 먹자 형준도 더는 재촉하지 않고 묵묵히 고기를 구웠다·
그렇게 기묘한 침묵이 흐르며 4인분이 넘는 고기의 절반을 먹었을 때 영훈이 말했다·
“상환계획 먼저 들어볼까요?”
형준은 하얗고 작은 잔에 담긴 술을 단번에 들이키고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너 양철기 전무 날린거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지? 아니야· 너 임창호 회장한테 경고한거야· 현진물산 넘보지 말라고· 크크크큭··· 너 이 새끼 네가 눈치만 보던 형제들 싸움에 불을 질렀어·”
“그래서요?”
“내가 친구가 돼주지·”
단순히 밥 먹고 술 마셔주는 친구가 아니라는 건 둘 다 알고 있다·
영훈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말뿐인 약속은 상환계획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좋아· 진짜 친구라면 먼저 양보할 수 있어야지· 내가 네 친구가 되는데 뭐가 필요해?”
영훈은 그제야 웃으며 술이 든 주전자를 들었다·
“일단 한 잔 하시죠·”
< 새 술은 새 부대에(4) > 끝
ⓒ 영완(映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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