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 술은 새 부대에(6) >
강 실장은 영훈을 슬쩍 보더니 홍 실장에게 말했다·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을까?”
평소의 홍승대 실장이라면 당연히 자리를 피해 따로 이야기를 나눴을 테지만 지금 상황이 참으로 얄궃었다·
홍 실장이 생각했을 때 사장의 최측근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영훈이었고 자신과 강 실장은 양철기 전무와 상당히 친했던(?) 사람이었다·
아마 양 전무가 남기고 간 핸드폰에 강 실장과의 수많은 대화와 기록이 남아 있을게 뻔했다·
그런 이유로 홍 실장으로서는 절대 영훈 앞에서 자신을 의심할만한 행동을 할 수 없었다·
특히나 방금 전에 좌천이 아니라 핵심 부서 임원으로 계약을 하게 될 수 있다는 말까지 들은 상황 아니던가?
자중하고 또 자중해야 할 때였다·
“그럼요·”
강 실장은 홍 실장이 그대로 그 자리에 딱 붙어서 움직이지 않는걸 보고 ‘이 새끼가 왜 저러지?’하는 생각이 들었다·
“잠깐 얘기 좀 해·”
“네 하세요·”
그제서야 강노식 실장은 홍 실장이 지금 다른데 정신 팔려서 개념 없이 행동한게 아니라 일부러 이러는 것임을 알았다·
강 실장은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 친구는···?”
“안녕하십니까· 며칠 전에 비서실로 발령받은 최영훈이라고 합니다·”
“아 그런가?”
고작해야 신입사원·
사실 강 실장으로서는 아직도 감을 못 잡고 있는게 당연했다·
연희가 비서실로 올라가고 바로 양 전무가 날아가면서 이 모든 일을 비서실에서 주도했다는 말이 돌았지만 그 모든 일을 송 사장이 주도했다고 생각했지 설마 신입사원 하나가 주도했으리라고 누가 생각할 수 있겠는가?
혹시나 홍 실장이 배신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는 있지만 그가 신입사원의 눈치나 보는 처지라고 생각하는게 오히려 비상식적이었다·
당연히 강 실장으로서는 이제 홍 실장과의 대화가 필요 없다고 판단했다·
“아니야· 바쁜 것 같으니까 다음에 얘기하지· 가자·”
“네···”
양준기는 홍 실장에게 뭐라도 할 말이 있는것처럼 보였지만 옆에 영훈도 있고 강 실장이 가자고 하니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묵묵히 따라갔다·
영훈은 멀어져가는 그들을 보다가 물었다·
“왜 가서 대화해주지 그랬습니까?”
“옛말에 오얏나무 아래에서는 갓도 고쳐쓰지 말라고 했지· 괜한 오해를 받고 싶지 않았을 뿐이야· 그리고 굳이 따라가서 할 이야기도 별로 없어· 강 실장한테 양 전무를 날린 사람이 신입사원이라고 말할 수도 없는 일이잖아·”
“그건 그렇네요·”
“어차피 따라가봤자 서로 핵심은 못 잡고 빙빙 돌아야 하는데 자네한테 오해 사가면서까지 그럴 이유가 없으니까 그냥 깔끔하게 선을 그은 것 뿐이야·”
“그것까지는 좋았는데 이제 양 전무님을 날린게 실장님이라는 오해를 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되겠지· 그런데 그건 그것대로 나쁘지 않을 것 같아·”
영훈은 그가 말하는 의미를 알아들었다·
“의지를 보여주는거군요 사장님한테·”
“맞아· 이제는 죽으나 사나 송은채 사장님께 충성하는 수밖에 없어졌거든·”
“으음···”
영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생각을 존중해주었다·
그런데 그런 영훈이 의아한지 홍 실장이 물었다·
“왜? 이상한가?”
“아닙니다· 그저 조직의 장에게 충성한다는 그 마음이 특별해 보여서요·”
“너도 사장님께 충성하는거 아니었나?”
“그렇게 보였습니까?”
“아니라고?”
“전 충성하는게 아니라 회사를 위해 할 일을 하는 것 뿐입니다· 지금 하는 일이 좋고 그저 이 회사가 나와 같이 일하는 직원들에게 계속 좋은 환경을 만들어주었으면 하는 마음이에요·”
“그런데 양 전무는 그런 환경을 해치려고 했다 이 말이지?”
“적어도 제가 보기에는 그랬습니다·”
“그렇군·”
홍 실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적어도 기준은 확실하게 알았으니 그것만으로도 만족하는 것 같았다·
다시 비서실로 내려오니 민희가 다가왔다·
“주임님 사장님께서 찾으십니다·”
“알겠어요·”
영훈이 사장실로 들어가니 송 사장이 미소를 지으며 반겼다·
“어서 와 앉아·”
“어제 일 때문에 걱정 많으시다고 이야기 들었습니다·”
“연희가 그래? 현재 사장이 아니고 전 사장· 하하 연희 아빠가 걱정이 많아서 그래·”
“사장님은 걱정 없으십니까?”
“걱정 왜 없겠어? 그런데 난 기분 좋아· 솔직히 일방적으로 얻어 맞다가 끝날 줄 알았거든· 그런데 눈엣가시 같던 양 전무를 쫓아냈잖아·”
“양 전무를 안 좋아하셨군요·”
“시아버지의 눈과 귀 그리고 입이었거든· 좋아할래야 좋아할 수 없었지· 어쨌든 고생했어· 난 무슨 마술 보는 것 같아· 이렇게 단번에 양 전무를 잘라낼 수 있는 근거를 찾아낼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어”
“운이 좋았습니다·”
송 사장은 빙그레 웃더니 양 전무의 핸드폰을 내밀었다·
하지만 영훈은 굳이 그걸 보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양 전무와 엮인 사람들이 많아· 그래서 고민도 많고·”
“홍 실장님한테 다른 자리를 원하는지 물으셨다구요?”
그녀는 피식 웃더니 물었다·
“홍 실장이 애가 많이 닳았나봐? 최 과장한테 벌써 떠볼 줄은 몰랐네· 그래서 뭐라고 했어?”
“아직 사장님께서 내치려고 하는 것 같지는 않다고 말했습니다· 몇몇 비는 자리가 생길거고 그쪽으로 이동하게 될지도 모른다구요·”
“그랬구나·”
송 사장의 표정이 묘했다·
“혹시 아니었습니까?”
“사실 고민을 하기는 했어· 이번에 양 전무를 쳐내는데 그 공이 대단하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 날 밀어내려고 했던 사람이잖아· 고민이 안 된다고 하면 거짓말이지·”
“그건 이해합니다·”
“그래서 홍 실장은 곁에 둘만한 사람이다?”
“곁에 두기 찜찜하시면 말씀드렸던대로 다른 부서로 옮기는 게 어떻습니까? 그리고 홍 실장님 같은 사람은 남의 밑에서 묵묵히 돕는 일을 잘하기도 하지만 조직의 장을 맡으면 더 좋은 성과를 낼만한 사람 같은데요·”
송 사장은 가만히 영훈을 보더니 말했다·
“그래 최 과장이 봤을 때 그렇다는 거지? 음··· 또 물어보고 싶어· 양 전무가 저렇게 가고 이제 조직 개편에 들어가야 할 텐데 어떻게 해야 좋을까?”
사람을 잘 본다는 이유로 채용됐기에 어쩌면 지금 이 질문은 회사에 들어온 이후로 가장 적합한 질문을 받은 것일지도 모른다·
“어려운 질문입니다· 아직 못 만나본 임원분들이 많습니다·”
“그렇겠지? 답답하네· 최 과장한테 면접을 보라고 할 수도 없고··· 일단 그래서 호주에 있는 성주훈 부사장이 내일 들어올거야· 내가 최 과장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게 좋을까?”
“잘 모르겠습니다·”
“성주훈 부사장이 어떤 사람인지 몰라서?”
“네·”
“흠··· 그럼 일단 만나보고 생각할까?”
“그러는게 좋겠습니다·”
“좋아 알겠어· 어제 고생 많았고 민희한테 차량 지원에 관해서 이야기 들었지?”
“네· 쇼핑을 권했다는 말도 전해 들었습니다·”
송 사장은 빙그레 웃었다·
“최 과장이 꾸미지 않아서 그렇지 꾸미면 훨씬 보기 좋을거야· 그리고 이제 홍 실장이 다른 부서로 가면 비서실장 자리가 비는데 혹시 최 과장이 맡아볼래?”
“부담스럽습니다·”
“그래? 흠··· 난 좋을 것 같은데· 아니다· 나랑 계속 같이 있어야 하면 최 과장이 따로 움직여야 할 때 불편하겠구나· 어쨌든 비서실장 아니라고 해도 앞으로 나랑 외부에 자주 나가야 할 수 있어· 그러니까 돈 아끼지 말고 쇼핑 좀 해·”
“알겠습니다· 조만간 면허도 따겠습니다·”
“그래· 그럼 낮에 별 다른 일 없으면 백화점이라도 다녀와·”
“네·”
영훈은 사장실에서 나와 겉옷을 챙기며 나갈 채비를 했다·
그러자 연희가 따라 일어서며 물었다·
“어디 가요?”
“오전에 딱히 스케줄 없어서 백화점이라도 다녀올까 합니다·”
“아···”
연희가 뜨뜨미지근한 표정으로 입을 삐쭉 내미는데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민희가 슬쩍 다가와 말했다·
“미래 백화점에 오늘 Nodri Clare 입점 인테리어 공사 시작했다고 합니다· 한번 보러 가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
사실 영업 2팀의 일을 민희가 어찌 알고 있는지도 궁금했지만 설사 알고 있다 해도 이제는 부서를 옮겼기에 굳이 가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우리의 일이 아니었지만 연희가 퍼뜩 생각이 났다는 듯 말을 받은거다·
“아 맞다· 고마워요· 내가 깜빡하고 있었다· 백화점 가는 김에 미래 백화점으로 가죠?”
가깝기는 뉴월드 백화점 본점이 회사에서 훨씬 가까웠지만 여기서 굳이 강남 미래 백화점까지 갈 필요있냐는 말을 할 정도로 눈치가 없지는 않았다·
“그럼요· 괜찮습니다·”
“가요 그럼·”
백화점에 가는 내내 연희는 영훈에게 요즘 정장 브랜드가 어떤게 있고 어느 연령대에서는 어떤게 먹힌다는다는 내용을 풀어놓았다·
공부한다는 심정으로 묵묵히 들으며 백화점 신사복 매장에 도착하니 그녀가 줄줄이 읊어주었던 브랜드들이 눈을 어지럽혔다·
“저기로 가요·”
그녀는 이미 마음속에 정해놓고 왔는지 바로 한 매장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점원에게 영훈이 알아듣기 힘든 패션용어를 섞어가며 이것저것 주문했다·
남자 직원은 나이가 좀 있는 사람이었는데 능숙하게 연희의 주문을 캐치해서 영훈에게 가져다 주었다·
“평소 관리하시나 봅니다· 군살 하나 없이 탄탄한 몸이어서 핏이 살아나네요·”
자고로 몸 좋다는 칭찬에 약해지지 않는 남자는 없는 법이다·
그리고 영훈은 평소 자신의 몸에 대해 은근히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영훈은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가 옆으로 그려졌다·
“하하 좀 그렇죠? 제가 산을 좋아해서···”
“네? 아 등산을 즐기시는 군요· 역시 관리한 몸은 다릅니다·”
백화점 점원의 말에 연희는 고개를 돌려 옷을 갈아입고 나온 영훈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정말 그랬다·
느긋한 말투의 소유자 답지 않게 살이 찌지는 않았다라는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슬림한 라인의 세련된 슈트를 입으니 그럴싸했다·
사실대로 말하면 그럴싸한 정도가 아니라 꽤 매력적이었다·
참 특이한 남자다· 오리엔테이션 때부터 줄곧 연희의 머릿속에 들어앉아 자꾸만 새로운 세계를 보여준다·
연희의 머릿속엔 본래 남자가 들어앉을 만한 자리가 전혀 없었다·
병중인 아빠와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된 엄마를 지키기 위해 굳게 다짐하고 입사한 연희였다·
그런 연희가 남들 다 아는 건 하나도 모르면서 세상사 다 꿰고 있는 이 특이한 남자에게 자꾸만 신경이 쓰이던 참이었다·
점원이 다른 옷을 가지러 사라지자 연희의 시선을 느꼈는지 거울을 보고있던 영훈이 뒤돌아 물었다·
“어때요? 괜찮아요? 확실히 비싼 거라 그런가 동대문 거랑 촉감이 다른데요?”
“뭐··· 나쁘지 않네요·”
“역시 칭찬에 야박하네· 아까 저분 말 들었죠? 관리된 몸이라고· 이게 헬스장에서 만든 근육이랑은 다르거든요· 장작을 팰 때 도끼를 딱 이 자세로 들어서 정확하게 내리쳐야 하는데 그렇게 하니까 여기 등근육이···”
영훈은 몸이 좋다는 점원의 말에 몸소 장작을 패는 자세까지 해본다·
“칫 고객 기분 좋으라고 한 립서비스에 너무 우쭐해 하는 거 아니에요?”
새침하게 말하긴 했지만 연희의 시선이 자꾸 영훈의 뒷모습에 꽂혔다·
어깨 팔뚝 허리 허벅지까지·
주인 몰래 훔쳐보고있는 자신에 놀라면서도 연신 시선이 가는건 어쩔 수 없었다·
한 명은 괜히 신났고 한 명은 괜히 부끄러워하는 묘한 상황이었다·
*
김민희는 요즘들어 무료했던 인생에 뭔가 새로운 엔진이 돌아가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밀려오는 카드값과 월세 공과금 그리고 이제는 점점 지쳐가는 남자친구와의 싸움으로 그저 쳇바퀴처럼 의미없이 회사생활을 하고 있을 때 단 한 번 호기심으로 한 행동이 그녀의 무언가를 깨웠음을 느꼈다·
이전까지 회사는 그저 시키면 시키는대로 하는 나를 옥죄는 공간이었다면 지금은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상황들을 하나하나 살피고 의미를 부여했다·
개안을 한다는게 이런 느낌일까?
기계처럼 수동적으로 흘러가던 삶에서 자신을 중심으로 능동적으로 생각하려고 하자 죽었던 세포가 살아난 것처럼 몸에 활력이 돌았다·
단순한 업무 지시로 보였던 것들이 특별한 의미가 있음을 깨닫기 시작했고 스치듯 지나가는 질문에도 깊은 의도가 있음을 깨달았다·
지금처럼···
“민희 씨 요즘 어때?”
식사를 마치고 항상 들리는 커피전문점에서 만난 기획조정실 강노식 실장·
예전에는 종종 사장실로 업무차 방문하면서 얼굴을 익혀뒀었고 가끔 점심시간에 만나면 계산을 해준다거나 하면서 비서실 직원들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그렇기에 이렇게 우연히 만나 근황을 물어보는건 별다를 것 없는 일상에 해당했었다·
아마 예전이었다면 그렇게 생각했을게 분명했다·
“어머 실장님· 식사 하셨어요?”
“그럼~ 뭐 마실거야? 내가 살게·”
“아니에요· 전에도 식사 사주셨잖아요·”
“그건 그거고~ 하하하· 뭐 아메리카노? 라떼?”
“그냥 아메리카노요· 차가운걸로·”
“그 정도 쏘는 거야 일도 아니지· 요새 비서실 분위기는 어때?”
민희는 인상을 구기며 무언가 생각하는척했다·
“비서실이요? 음··· 솔직히 좀··· 아니다· 아유 뭘 이런걸 얘기해·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니 뭔데? 응?”
“그게··· 아니에요·”
애가 닳은 강 실장이 진열장에 곱게 비치된 조각케잌을 가리켰다·
“민희 씨 요새 저런게 맛있다며? 여기 이거 하나 할래? 이름도 희한하네·”
“어머~ 마리아쥬 화이트카망베르치즈· 완전 맛있는데·”
민희가 소녀처럼 두 손을 꼬옥 모으고 좋아하자 강 실장이 얼른 같이 계산하고는 그녀를 데리고 가장 안쪽의 자리로 데리고 와 앉혔다·
“요즘 정신 없었지? 사장님 따님도 들어오고·”
“그랬죠· 좀···”
“홍 실장은 어때?”
민희의 눈빛이 찰나간 번뜩였다·
“실장님이야 뭐 사장님 방에 들어가서 나올줄 모르시죠·”
“그래? 그 정도야?”
< 새 술은 새 부대에(6) > 끝
ⓒ 영완(映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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