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초전(2) (여기서부터 유료) >
호주에서 출발한 항공기가 아침 10시에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이 때문에 현진물산의 비서실과 기조실 전략기획총괄부서 전 직원은 아침부터 초긴장 상태에 들어갔다·
양철기 전무가 강제 퇴사한 직후 넘버 2나 다름없는 성주훈 부사장의 입성이 어떤 후폭풍을 몰고 올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성주훈 부사장이 몰고 올 사태만을 걱정하던 현진물산 직원들은 점심 전 11시에 뜬 기사를 보고 혼란에 빠져버렸다·
[(단독)신영은행 현진물산에 5천억 지원·]
[현진물산이 신영은행으로부터 5천억 자금을 수혈받기로 결정됐다· 이는 앞으로 있을 코발트 광산 업체 인수전을 위한 포석으로 해석되며···]
“이 기사 뭐야? 찌라시야?”
“한국일보잖아· 찌라시일 리가 없지·”
“검토중인게 아니라 확정 난 거 같은데?”
“진짜 5천억 들어오는거야?”
이 기사만으로도 놀랍기 그지 없었는데 성주훈 부사장이 인청공항에서 서울로 출발한 그 시각 추가 기사가 터졌다·
[(단독)현진물산 혜성기업 인수 확정]
[현진물산이 워크아웃중인 혜성기업을 신영은행으로부터 인수하기로 결정했다· 총 인수자금은 2500억으로 대출받을 5000억에서 1000억을 선금으로 지불하고 이후 3년간 500억씩 분할납부한다는 조건이다· 혜성기업은 국내 도급순위 39위에 해당하는 건설업체로···]
그야말로 빅딜이다·
공항에서 출발한 차 안에서 성주훈 부사장은 핸드폰으로 뜨는 기사를 확인하고는 경영기획총괄부서의 박재윤 부장에게 물었다·
“이거 뭐야? 어떻게 된 거야?”
“실은 저희도 잘 모르겠습니다·”
“몰라? 왜 몰라? 5천억 대출은 뭐고 그중에 천억으로 혜성기업을 사오는 건 무슨 경우야? 그런데 이걸 몰랐다고? 야 인마 너 내가 호주간 사이에 놀고 있었냐?”
걸걸한 목소리의 성주훈 부사장은 호탕하고 화끈한 성격이지만 그게 조금 과해 욕설도 서슴치 않는 성격이었다·
지금은 부사장이 돼서 조금 덜해졌지만 예전 팀장급 시절에는 툭하면 개새끼 소새끼 xx새끼가 난무했었다·
요즘처럼 인터넷 문화가 발달하고 인권이 중요했던 시절이었다면 문제가 됐겠지만 예전에는 이런 사람들이 수두룩했기에 그의 이런 성격이 흠이 되지는 않았다·
지금은 아주 화나야 욕설이 튀어나오는 정도라지만 그래도 박재윤 부장은 그와 함께 있을 때는 항상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아닙니다· 이번 신영은행 대출은 임원들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는 말이 파다했습니다· 퇴사 처리된 양철기 전무님 역시 모르고 있었다고 합니다·”
“양 전무도 모르고 있었다고? 그럼 이 대출을 누가 준비해서 신청한건데? 사장님이 신영은행 찾아가서 대출 서류 작성했겠냐? 사장님이 번호표 뽑고 기다렸대?”
뻔히 말도 안 되는 걸 알면서도 톡톡 쏘아 붙이지만 원래 저런 식으로 농담하듯 말하는 걸 알기에 박 부장은 기분이 나쁘다기보다 이 난감한 상황을 어떻게 벗어나야 할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홍승대 실장이 이 딜을 주도했을 거라는 소문이 있습니다·”
성주훈 부사장은 코웃음을 쳤다·
“그건 또 무슨 개소리야? 걔가 이런 걸 어떻게 해? 홍승대 그런 스타일 아니야· 혹시 오재식 아니고?”
“오 상무는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홍승대 실장이 주도했다는 소문이 기조실에서 나온 이야기라···”
그제야 성주훈 부사장의 표정에 흥미가 돌았다·
“기조실에서?”
“네·”
“홍승대가 그렇게 파이팅 있는 스타일이 아닌데··· 새로운 사장님이 기를 많이 불어줬나?”
“그게 끝이 아닙니다·”
“그럼?”
“이번에 양 전무님 퇴사에 관여한 곳이···”
“그것도 흥승대라고? 야! 그건 말도 안 되는 거지· 홍승대가 양 전무한테 얼마나 비벼댔는데 뒤를 깠다고? 그것도 기조실 쪽에서 나오는 소문이야?”
“네·”
성 부사장은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허··· 이거 뭐지? 홍승대가 그런 칼을 숨기고 있었다?”
“저희도 듣고 믿기 어려웠지만 기조실은 거의 확신하는 분위기라고 합니다·”
“그럼 아예 없는 소리는 아니라는 건데··· 무서운 놈이네?”
“저도 실장님을 그렇게 안 봤는데 조금 무섭긴 합니다·”
“그래도 좋은거야· 양 전무 그렇게 간 거야 쫓겨날 짓을 했으니까 쫓겨난거고 신영은행을 구워 삶았건 어쨌건 우리한테 동아줄 내려준 거잖아· 내가 궁금한 건 그런 능력을 왜 숨기고 살았을까 하는거지·”
성 부사장은 깊은 고민을 담은 채 창밖을 내다보았다·
*
기획조정실 강노식 실장은 홀로 회의실에 앉아 상념에 빠져 있었다·
신영은행으로부터 5천억 대출이 진행중이라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솔직히 절대 이루어질 수 없는 루머로 생각하고 있었다·
소스를 준 사람이 차지열 상무였기에 그래도 마냥 흘려듣지 않고 나름 알아보려고 시도하는 와중이었는데 이렇게 빨리 결과가 나올줄은 몰랐다·
그리고 단돈 천억에 혜성기업 인수는 또 무엇인가?
아무리 혜성기업이 부실한 건설사라고 하더라도 가진 자산만 갖다 팔아도 2500억은 충분히 나오고도 남을게 분명했다·
선금 천억에 500억 씩 3년 분할이면 거저 먹었다고 봐도 무방했다·
상황이 좋지 않았다·
이때
똑똑···
“어?”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목소리를 들어보아 양준기다·
“어 그래· 들어와·”
양 전무가 그렇게 쫓겨난 뒤로 얼굴이 시커멓게 죽은 것처럼 죽상으로 다니던 그는 오늘 아침부터 그나마 생기가 돌고 있는 상태였다·
다행스럽게도 모든 조사가 끝나면 아버지를 그룹 계열사 고문으로 위촉시켜주겠다는 회장님의 말씀 때문이었다·
“잠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래· 앉아·”
양준기는 잠시 강노식 실장의 눈치를 보다가 입을 열었다·
“오늘 기사를 보니 아무래도 사장님께 힘이 많이 실릴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인사이동이 있다면 우리에게 불리하게 진행될···”
강 실장이 준기의 말을 끊었다·
“준기야·”
“네·”
“이번에 아버님 그렇게 되시고 마음 고생 심했을거야· 이해하고 있어· 그런데 이제 양 전무님도 회장님께서 잘 봐주신다고 하셨으니까 이제 일에 집중해야지·”
“네? 아 네· 그런데···”
“너 아직 신입 딱지도 못 뗐어· 지금까지 전무님 아들이라고 많이 배려해준게 있었지만 이제는 선을 지켜야지· 감히 대리도 못 단 사원이 임원 인사에 왈가왈부한다는게 말이나 돼?”
“죄송합니다·”
“그런 얘기 할 거면 나가·”
“알겠습니다·”
양준기가 다시 어두운 얼굴로 나갔지만 강 실장의 얼굴은 펴지지 않았다·
따끔하게 혼내긴 했어도 준기의 걱정을 본인도 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번 대출건으로 사장에게 힘이 실리면 누군가 올라가야 할 임원 승진에 사장쪽 인물이 발령날 가능성이 높아졌다·
지금까지 양 전무를 비롯한 회장파에 힘이 실리던 상황에서 이제는 임원 면접 통과를 위한 과반수가 사장쪽에 힘이 실리게 될 수 있었다·
회장님이 양 전무를 살려줬다고는 하지만 아직까지 검찰 조사가 시작도 되지 않은 상황에서 과연 이길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는 거다·
이럴 때 호주에 있어야 할 성주훈 부사장이 한국으로 들어왔다·
그도 송 사장이 원하는 인사에 손을 들어준다면 대표이사 해임 건의안으로 송 사장을 밀어내는건 불가능해질지도 모른다·
“후··· 죽겠구만·”
강 실장이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날 때 문이 열리며 직원이 들어와 말했다·
“실장님 성주훈 부사장님 도착하셨다고 합니다· 30분 뒤에 임원회의 시작하니까 참석하라고 하십니다·”
“알겠어·”
강 실장은 입술을 깨물고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
“어서 와요· 먼 타지에서 고생 많았어요·”
송은채 사장이 반가워하며 손을 내밀었다·
성주훈 부사장은 송 사장의 손을 맞잡으며 환하게 미소지었다·
“제가 뭐 한게 있겠습니까· 오면서 신영은행 5천억 대출 이야기 들었습니다· 뒤에서 이렇게 서포트 해주시니 이번 인수전에서 크게 힘을 받을 것 같습니다·”
성 부사장은 마음 같아서는 거의 성공한거나 다름없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큰 사업을 앞두고서 입을 함부로 놀릴 수 없기에 겸손하게 표현한 거였다·
“부사장님이 어련히 알아서 잘 하시겠지 생각하면서도 자금적으로 많은 제한을 받을 것 같아서 최대한 노력했어요· 혜성기업을 인수하는 조건이라 실질적으로 받아올 자금이 4천억이긴 하지만 내년에 돌아올 5천억 만기 채권을 1년더 연장했기 때문에 회사 자금 사정에도 꽤나 많은 여
유가 생겼어요·”
“허··· 내년에 돌아올 채권까지 연장하셨습니까? 대단하십니다· 정말 놀랍습니다·”
“우리 직원들이 힘써준 덕분이죠· 어머 멀리서 오셨는데 앉으라는 얘기도 못 드렸네요· 앉으세요·”
성주훈 부사장이 자리에 앉자 송 사장이 말했다·
“중요한 사업을 진행하는 와중에 오시라고 해서 미안해요· 하지만 상황이 상황이다보니까 부를 수밖에 없었어요·”
“아닙니다· 오면서 대략적인 상황을 들으니 제가 한가하게 외부에 나가 있을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더 빨리 들어올 걸 그랬습니다· 그런데··· 양철기 전무는 어쩌다가 그런 일을 저질렀다고 하던가요?”
송 사장이 머리를 부여잡고 말했다·
“어휴 모르겠어요· 일단 법무팀에서 심각한 범죄라는 사실이라고 전해듣고 알아서 진행하라고 했어요· 자세히 듣고 싶지도 않은 일이라···”
“그 심정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양 전무가 나가면서 경영지원본부장 자리가 공석이 됐어요· 그리고··· 양 전무가 놓고간 업무용 핸드폰에서 회사에 해가 될만한 내용이 몇 개 파악됐다고 해요·”
“심각한 일이군요·”
“부사장님의 조언이 필요해요·”
이미 증거도 있고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잘라낼수 있으면서 조언이 필요하다는 걸 보면서 성 부사장은 사장이 도움을 청하고 있음을 알았다·
자신의 도움이 있어야 임원면접에서 원하는 사람을 통과시킬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성 부사장은 회사로 오는 내내 고민을 했다·
과연 이 상황에 송은채 사장을 도와주는게 맞는 건지 아니면 회장님의 뜻에 따라 움직이는 양 전무 라인을 밀어주는게 좋을지 말이다·
“그럼요 도와드려야죠·”
물론 대답은 시원시원하게 했지만 아직도 결정을 내리지는 못했다·
“아 벌써 회의 시간이 다 됐네요· 일어날까요?”
사장실의 문이 열리고 송은채 사장과 성주훈 부사장이 나왔다·
비서실 직원들은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났고 민희가 재빨리 엘리베이터를 잡았다·
이동하는 둘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는 영훈의 곁으로 홍승대 실장이 다가왔다·
영훈이 슬쩍 홍 실장을 보며 말했다·
“임원회의라는데 안 따라가십니까?”
“사장님 수행해야 하지 않냐고? 지금 상황에 그럴 필요가 있나? 뭐 원한다면 가서 공개적으로 다구리 맞아줄 수는 있어·”
안 그래도 오늘 기사로 모든 관심이 홍승대 실장에게 쏠렸을 텐데 회의에 얼굴을 드러낸 순간 질문들이 마구잡이로 쏟아질 거라는 말이었다·
영훈은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장단을 맞춰주려면 오히려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편이 좋겠네요·”
굳이 모습을 드러내서 호기심을 해결해줄 필요는 없었다·
“왜? 내가 5천억 대출도 받아오고 양 전무도 날린 것처럼 연기하면 되지 않겠어?”
“어설픈 거짓말은 오히려 사장님을 곤란하게 만들겁니다·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면 연기할 필요도 없죠·”
“하지만 성주훈 부사장은 계속 피한다고 피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닌데? 당장 회의 끝나고 식사라도 하자고 부르면 달려가야 한다고·”
“흠··· 글쎄요· 생각 좀 해볼게요·”
영훈은 그렇게 애매하게 말을 끝내곤 자리를 옮겨 연희 옆으로 다가갔다·
그녀는 영훈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은밀히 A4 크기의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일단 가족관계사항이랑 사주예요· 부사장 와이프가 가끔 점을 보러 다녀서 알아낼 수 있었어요·”
영훈은 주변을 살펴보며 부사장의 사주를 살폈다·
계산을 끝내고 입을 열 찰나 홍 실장이 손에 핸드폰을 쥔 채로 빠르게 다가왔다·
“일났다·”
“네? 왜 그러십니까?”
“세원 인터내셔널에서 골든 브릿지라는 사모펀드랑 손잡고 이번 코발트 광산 인수전에 뛰어든다는 기사가 떴어·”
홍 실장이 핸드폰으로 기사를 보여주었다·
영훈은 기사를 읽지도 않고 물었다·
“갑자기 왜요?”
“골든 브릿지 사모펀드는 임지은 사장 남편의 동생이 운영하는 펀드야· 이번 코발트 광산 업체 인수가격을 절대 헐값에 사지 못하게 하려는 것 같아·”
“그럼 돈이 얼마나 더 들거라 생각하십니까?”
“글쎄··· 만약 정말 경쟁이 붙게 되면 못해도 3~4천억 정도는 더 들어갈걸? 게다가 세원 인터내셔널은 몽골 구리광산이랑 호주 철광석 광산까지 가지고 있어· 옆구리는 골든 브릿지가 찔렀을지 몰라도 세원 인터내셔널은 진짜로 욕심을 낼 수도 있지·”
영훈이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뭘 하려고 하면 자꾸 방해를 하려고 달려드는 사람들·
그리고 성주훈 부사장의 사주·
“이거 꼭 해야 하는 겁니까?”
“뭐?”
“이거 광산업체 꼭 인수 해야하는 거냐구요·”
< 전초전(2) (여기서부터 유료)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