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초전(3) >
홍 실장은 그게 무슨 얼토당토 않은 말이냐는 듯 말했다·
“이거 인수에 매달린 기간만 6개월이 넘고 호주 현지에 나간 직원들 숙식이랑 업무에 쓰인 비용만 수억이야· 그런데 그냥 엎자고?”
“수억이 개인에게는 굉장히 큰 돈이 맞긴 하지만 기업 입장에서는 푼돈 아닙니까? 우리회사 영업이익이 수백억이 넘는데 그깟 수억이 아까운가요?”
“순수하게 손해가 된 비용만 그렇다는거야· 그 시간에 다른 사업에 매진했다면 들어왔을 기회비용까지 생각하면 단순히 푼돈이니까 엎자는 말이 나올 수 없을걸?”
홍 실장의 말이 일리가 있긴 했지만 영훈은 돌아가는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안 그래도 광산 업체 인수가 큰 돈이 들어가는 일인데 이제 이거 파토내려고 경쟁자까지 붙었습니다· 상대는 먹으면 좋고 안 먹으면 경쟁회사 자금줄 말려버리겠다는 생각에 여유있게 들어올 텐데 우리는 여기에 사활을 걸어야 한다는 게···”
“그래 어떻게 보면 외통수에 걸린 것 같은 느낌이긴 하지· 하지만 사장님은 이 프로젝트 포기하지 않으실거야·”
그 이유는 전에 사장과 이야기하면서 들은 바 있다·
코발트가 배터리 핵심소재이기도 하지만 그녀가 사장으로 취임한 이후 맡게 된 첫 프로젝트였기에 무조건 성공해야 한다고 말이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건 불리한 싸움을 자처하는 겁니다·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어요·”
“그럼 어쩌게?”
“사장님과 대화를 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다짜고짜 임원회의에 들어가서 이 사업은 무효라고 외칠 수도 없으니까요·”
“하··· 그러면 볼만은 하겠네·”
영훈은 손가락으로 파티션을 톡톡 두들기다가 물었다·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회사에?”
“네· 머리가 좋은 사람으로요·”
“머리가 좋은 사람? 머리가 좋은 사람이라···”
솔직히 이런 대기업에 입사한 사람치고 머리 나쁜 사람이 있을까?
다들 어렸을 때 수재 소리 들었던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머리가 좋은 사람을 찾으니 홍 실장은 쉽지 않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기조실 친구들은 강노식 실장한테 꽉 잡혀 있을 테고 경영기획총괄 쪽은 이 프로젝트 놓는 걸 수용하지 않을게 분명해· 법무팀이 똑똑하기는 한데 그런 쪽을 원하는 건 아닐 테고?”
“맞습니다·”
“그럼 내가 생각했을 때 머리 좋고 믿을 만한 사람이 딱 한 명 떠올라· 석유화학팀 고승현 부장· 이 친구가 스카이 출신은 아닌데 번뜩이는 게 있거든· 지방대 출신인데 동기들 중에 가장 먼저 부장 달았어· 그렇다고 사내 정치에 관심이 있냐? 그것도 아니야· 그냥 일을 잘 해·”
“좋네요· 혹시 만나볼 수 있습니까?”
“당연히 조용히겠지?”
“맞습니다· 둘이서만 만나면 이야기 진행이 안 될 테니까 실장님도 같이 있어야 합니다·”
“오케이· 아 그리고 하나만 묻자·”
홍 실장이 옆에서 계속 지켜보고 있는 연희를 슬쩍 바라보았다·
비서실장이 사원에게 계속 지시를 받는 이 아이러니한 상황을 옆에서 보면서도 당연하다는 듯 불편한 기색 하나 내비치지 않고 있었다·
“자리 비켜드릴까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사장 딸이다·
이 자리에서 안 듣는다고 그녀 귀에 이 내용이 안 들어갈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아니야· 사장님이 어떻게 하실 것 같아?”
영훈은 질문의 의도를 파악했다·
“걱정하실 일 없을 것 같습니다·”
“그렇군· 잘 알겠어·”
홍 실장의 얼굴이 밝아진다·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계속 불안했던 것 같다·
아무렴 불안하지 않는 게 이상하다·
자신이 그렇게 애타게 붙잡던 끈을 그 스스로가 잘라가며 노선을 바꿨는데 이 상황에서 토사구팽을 당한다면 회사를 나가야 할 수밖에 없을 터였다·
홍 실장이 사라지자 연희가 물었다·
“어쩌려고 그래요?”
“상황이 좋지 않아요· 이대로 가다간 회사가 큰 어려움을 겪을 겁니다·”
이형준이 그랬다·
양 전무를 쫓아낸 건 임창호 회장의 콧털을 건드린 셈이라고·
형제 간의 싸움에 불을 지폈다고 했으니 고작 인수가격 조금 올리고 그만둘 리가 없다·
코발트 광산 업체 인수는 전초전에 지나지 않을 게 분명했다·
“그렇다고 코발트 광산 업체 인수를 포기할 수는 없어요· 회사 미래가 달린 거니까요·”
“회사 미래가 꼭 코발트 광산에만 있는 건 아니잖습니까· 누구는 석탄에 누구는 구리에 누구는 태양광에··· 현진물산은 수많은 미래 중에 하나를 선택했을 뿐입니다· 상황이 여의치 않다면 잠깐 미뤄두어야 마땅합니다·”
“임원들이 납득하지 못할 거예요· 특히 이번 코발트 광산 업체 인수를 진두지휘했던 성주훈 부사장은 결코 이 프로젝트를 중단하려 하지 않을 거라구요·”
“그게 문제입니다· 성주훈 부사장·”
“네? 왜요?”
“운이 다했어요· 이 사람은 나이 쉰에 이를 때까지 이룬 것으로 남은 평생을 먹고 살아야 할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주도하는 사업이에요· 솔직히 코발트가 미래에 얼마나 유망한 소재인지 난 모릅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게 알 수 있어요· 성주훈 부사장은 이제 운이 다했습니다·”
연희는 단호한 영훈의 말에 보통 심각한 상황이 아님을 깨달았다·
“그럼 이대로 둘 수 없잖아요?”
“내 말이 그 말 아닙니까?”
“아··· 당신이랑 있으면 내가 바보가 된 것 같아요· 그럼 머리 좋은 사람은 왜 찾은 거예요?”
“주머니에 돈이 들어왔는데 그냥 쟁여놓자고 하면 처음에는 그러자고 하면서도 엉덩이가 들썩들썩 하는 게 사람입니다· 하물며 지갑에 돈 빵빵하게 쟁여놓고 눈앞에 미래 먹거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걸 포기하자고 하는데 순순히 포기하겠습니까? 돈 쓸 곳을 만들어줘야 수긍하고 넘
어갈겁니다·”
“그걸 머리 좋은 한 명에게 물어보자는 건가요? 집단 지성을 무시하면 안 돼요·”
“집단 지성이 좋은 말이긴 한데 그 집단 지성이 준비한 사업이 코발트 광산 업체 인수 아닙니까? 지금은 집단 지성보다 한 개인의 번뜩이는 생각이 더 좋은 결과를 낼 수 있다고 봅니다· 뭐 근데 만나고 나니까 부사장님이랑 별다를 게 없다면 어쩔 수 없는 거구요·”
“후··· 알겠어요· 석유화학팀 고승현 부장이라고 했죠? 인사기록 확인해볼게요· 언제 만나실거예요?”
“홍 실장님이 연락 주시겠죠· 난 잠깐 전화 좀 하겠습니다·”
영훈은 조용한 곳으로 가 형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
임원회의가 생각보다 길어지고 있었다·
오늘 아침에 뜬 신영은행 대출건으로 회사 분위기가 모처럼 살아난 상황에 갑자기 세원 인터내셔널의 입찰 참여는 다시금 회사 분위기를 얼어붙게 만들기 충분했다·
임원회의의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다들 초조하게 기다리던 와중 해외자원사업부의 석유화학팀 고승현 부장은 뜬금없는 전화를 받았다·
“고 부장 나 홍승대인데·”
“아 네· 실장님·”
“다른데 알리지 말고 조용히 비서실로 올라와·”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고승현 부장은 바짝 긴장했다·
그도 눈이 있고 귀가 있는데 지금 비서실이 회사를 뒤흔드는 태풍의 눈이라는 걸 모르겠는가?
게다가 지금 세원 인터내셔널이 사모펀드를 물고 들어와 참전을 선언한 마당에 갑자기 자신을 은밀하게 부른다?
아무리 생각해도 심상치가 않았다·
사내정치는 딱 질색이라 괜한 일에 말려들고 싶지 않지만 그렇다고 부르는데 가지 않을 수도 없다·
혹시 괜한 오해를 살까 걱정하면서도 일단 부하직원들 모르게 계단을 타고 비서실로 향했다·
“실장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비서실에 도착하니 똘망똘망한 여직원이 묻지도 않았는데 기다렸다는 듯 다가와 안내한다·
얼떨떨한 마음으로 따라가니 안쪽 작은 회의실에 홍 실장과 처음보는 젊은 직원 하나가 앉아 있었다·
“어서와·”
“안녕하십니까· 비서실에서 근무하고 있는 최영훈이라고 합니다·”
홍 실장은 앉아서 반겼고 최영훈이라는 직원은 벌떡 일어서서 허리를 꾸벅 숙였다·
고 부장은 얼결에 영훈에게 악수를 건네고는 물었다·
“아 네· 선배님· 그리고 최영훈이라고? 반가워· 이 친구는···?”
홍 실장이 고개를 돌리고 영훈을 바라보며 잠시 뜸을 들였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영훈이 만나는 자리에서 잠시 시간을 달라고 했었기 때문이다·
“잠시만··· 일단 자리에 앉을까?”
“네? 알겠습니다·”
고 부장은 덜컥 떨리기 시작했다·
필사적으로 과거를 되짚으며 내가 무슨 실수를 한 게 아닌지 떠올리려 열중할 때 영훈의 싸인을 받은 홍 실장이 입을 열었다·
“사실 자네에게 볼 일 있는게 내가 아니고 이 친구야·”
“네?”
얼굴도 모르는 친구니 아마 회사에 입사한지 1년도 채 되지 않는 사원이 분명했다·
그런데 고작 그런 녀석이 석유화학팀장인 자신을 오라가라한다는 게 말이나 되는 일이던가?
순간 ‘사장님께 숨겨놓은 아들이 있었던가?’하는 생각이 들 때 영훈이 말했다·
“당황스러우시겠지만 제가 부장님을 뵙고자 했던게 맞습니다·”
“나를 만나고 싶었다고? 왜?”
“부장님의 고견을 듣고 싶어서요·”
“의견? 무슨 의견?”
“만약에 말입니다· 만약에··· 이건 정말 만약입니다·”
“아니 거 참 뜸들이지 말고··· 응? 뭐?”
“만약에··· 코발트 광산 업체 입찰을 포기한다면 다른 대안이 있을까요?”
고승현 부장은 영훈의 물음에 눈만 껌뻑여댔다·
질문의 의도를 감히 짐작할 수 없어서였다·
만약 둘만 자리한 상황에서 저렇게 물었다면 무슨 개소리냐고 꾸짖으며 혼냈겠지만 지금 눈앞에 다른 누구도 아닌 비서실장이 자리하고 있었다·
입사 5년 선배인 홍승대 실장은 평소에 입이 무겁고 임원급이 아니면 얼굴도 잘 보여주지 않는 사람으로 유명했다·
그런 사람이 괜히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리가 없는데 문제는 질문을 한 대상이 고작 대리급도 안 돼 보였고 질문의 내용도 황당했다는데 있다·
“질문이 잘못됐어· 우리가 왜 포기해야 하지?”
“세원 인터내셔널이 참여하면 인수가격을 생각보다 많이 높여야 할 거라고 하더군요·”
“원래부터 입찰은 경쟁이야· 경쟁이 없었으면 우리가 뭐하러 호주까지 가서 그 지랄을 했겠어? 세원 인터내셔널만 경쟁업체인가?”
고 부장은 목구멍까지 차오른 욕을 가까스로 참으며 최대한 경건한 마음으로 설명했다·
그리고 계속해서 눈앞의 인간이 사장의 숨겨둔 아들이라고 세뇌하고 있었다·
숨겨둔 아들이 아니면 이 상황은 말이 안되는 거니까·
“다른 경쟁업체는 광산 업체인 프록시아의 가치를 6천억에서 7천억으로 보고 있지만 우리 회사는 최대 1조 원까지 보고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원 인터내셔널 역시 그렇구요·”
“세원이 1조원까지 보고 있다고? 누가 그래?”
고 부장이 코웃음을 치자 영훈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골든 브릿지라는 사모펀드 운용주체가 김우진이라는 사람인데 임은진 현진고속 사장님 남편의 동생분 되신답니다· 그리고 지금은 퇴사하신 양철기 전무님이 그간 김우진과 몇 차례 연락한 정황이 있구요· 당연히 우리가 가진 정보가 흘러들어갔을겁니다·”
고승현 부장은 어이가 없어 입을 떡 벌렸다·
내용을 믿을 수 없는게 아니라 일개 사원이 할 수 없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역시 눈앞의 인간은 사장의 숨겨둔 아들이 분명하다고 확신했다·
“그게 진짜인가?”
“네·”
“그럼 인수가격을 최소 1조를 써야 한다는 말인데 골든 브릿지가 그정도 자금력이 된다고?”
“그건 저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만약 1조 원을 쓸 수 있다면요?”
“그럼···”
고승현 부장도 쉽게 입을 떼지 못했다·
1조원 이상이 비싼가 하면 분명 비싼 건 맞지만 미래에 얼마만큼 돈을 벌어다줄지는 또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다만 확실한건 1조 원의 현금을 동원하는게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4천억이 들어온 현진물산에게도 결코 쉬운 금액은 아니라는 거였다·
고 부장은 저 젊은 놈의 의도가 궁금했다·
“그래서 그냥 덮는다고 치면?”
“어차피 장기적으로 꾸준히 회사를 먹여살릴 사업을 찾는거 아닙니까?”
“그래서?”
“호텔업은 어떻습니까?”
“호텔? 아니 무슨···”
고승현 부장은 갑자기 무슨 뜬금없는 헛소리냐는 듯 헛웃음을 터뜨리려다가 표정이 점차 싸늘하게 굳어졌다·
설마···
“설마··· 그 호텔이 현진관광을 말하는 건 아니지?”
“만약 그렇다면 매력있는 매물은 맞는 겁니까?”
“이런 미친···”
< 전초전(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