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초전(4) >
옆자리에 앉아 있던 홍승대 실장은 생각지도 못한 영훈의 발언에 갑자기 숨이 턱 막히는 느낌이 들었다·
아무리 예상을 뛰어넘는다지만 현진관광의 적대적 인수합병을 거론할 줄이야···
하지만 여기서 생전 처음 듣는 이야기처럼 반응하면 고승현 부장 앞에서 체면을 구기는 짓이기에 허벅지를 틀어쥐며 표정을 관리했다·
반대로 고승현 부장은 자신이 왜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에 처하게 됐는지 곰곰이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최영훈이라고 했나? 입사한지 얼마나 됐지?”
“아직 3개월이 좀 안 됐습니다·”
“아··· 이번 공채 신입사원?”
“맞습니다·”
갈수록 기가 차고 코가 막힌다·
자기가 입사했을 때를 생각하니까 한창 선임을 따라다니며 보고서 작성하는 방법부터 배우고 있을 때다·
“사장님하고 관계가 어떻게 되나? 혹시 인척관계?”
“전혀 아닙니다·”
“전혀?”
“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완전 남입니다·”
이쯤이면 민망해하거나 죄송해하는 표정이라도 지어야하는데 이 놈은 ‘그게 뭐 어때서?’하는 표정이다·
오히려 질문한 스스로가 더 이상해지는 묘한 상황·
그래서 고 부장은 말이 안 통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나마 상식이 통하는 홍승대 실장에게 시선을 돌렸다·
“실장님 지금 몰래카메라 찍는거 아니죠?”
“그럴 리가 있나·”
“그럼 저 이거 진지하게 답변해야 합니까?”
“답변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장담하건데 답변하지 않는다고 해서 자네한테 그 어떤 불이익도 없을거야· 다만···”
“다만?”
“이곳에서 나눴던 대화 내용은 자네 와이프한테도 꺼내선 안 돼·”
“그러니까 장난은 아니다 이거네요? 후···”
받아들이기 어려웠지만 받아들여야 했다·
출입증에 잉크도 안 마른 꼬맹이가 사장의 인척은 아니면서도 비서실장을 움직일만큼 대단한 힘을 가졌다는걸 인정해야 했다·
잠시 숨을 고르며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받아들인 고승현 부장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호텔업은 세계적인 공유숙박업체가 나왔음에도 꾸준히 안정적인 매출을 올리고 있는 사업이야· 물론 5성급 이상의 고급 호텔에 한해서지· 현진관광이 소유하고 있는 호텔은 종로의 리츠 칼튼 강남의 켄싱턴과 제주의 포시즌 호텔이고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페이먼트 호텔을 얼마 전에
인수했어· 매출흐름 견고하고 조금씩이지만 계속 성장하고 있어· 솔직히 내가 호텔에 대해 쥐뿔도 모르지만 이렇게 말해줄 수 있는 건 현진관광이 우리 계열사이기 때문이야· 모르고 싶어도 모를 수가 없지· 매력적이냐고? 그래· 솔직히 코발트 가격에 따라 수익이 들쭉날쭉한 프록시아보
다 리스크 적고 안정적인 현진관광이 더 알짜배기일 수 있어·”
“그렇군요·”
“‘그렇군요’가 아니야· 너 이거 적대적 인수합병을 노리고 물어본 거지?”
“맞습니다·”
“1조가 큰 돈이긴 해· 아마 그거 가지고 현진관광 매수 들어가면 주가 폭등할거고 그룹이 요동칠거다· 그런데 그거 놀래키기만 하고 가지지는 못해· ‘타초경사’라고 알아? 괜히 풀을 건드려 뱀을 놀라게 하는거야· 회장님이 두고 보지 않을 거라고·”
고승현 부장의 경고에도 영훈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리고 무덤덤하게 대꾸했다·
“신영은행에서 흑기사로 참여할겁니다·”
꿀꺽···
홍승대 실장이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파르르 떨리는 손가락을 진정시키며 남모르게 심호흡을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고 부장이 눈빛을 번뜩였다·
“얼마나?”
“기존에 가지고 있던 지분 13%에 추가 4천억 가능하다고 확답받았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마· 신영은행이 무슨 현진관광 주식을 13%나 가지고 있어?”
“신영은행에서 2% 신영투자증권에서 3% 신영생명에서 4% 신영모건스탠리 자산운용에서 4% 총 13%가 맞습니다·”
당연히 이형준 본부장의 친절한 설명을 들었기에 가능한 말이었다·
“그게 끝이야?”
“모건스탠리에서 운용하는 아시아코어펀드에서 현진관광 주식을 8%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확실해?”
“신영금융지주 사외이사 중 한 명이 모건스탠리 일본 현지법인 CEO라고 하던데요?”
고 부장은 감탄하며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흑기사 하나는 기가 막히게 물어왔군· 아버지가 정치권에 계시나?”
“아닙니다·”
“이제는 그 아니라는 말도 믿지를 못하겠군· 어쨌든 총 21% 가지고 시작하는거네? 플러스 1조 4천억?”
“맞습니다·”
고 부장은 다시 시선을 홍 실장에게 돌렸다·
“할 겁니까?”
“사장님께서 허락하신다면···”
“성주훈 부사장님이 가만 있지 않으실 겁니다·”
“그렇겠지? 그런데 프록시아 인수 가능하겠어? 어차피 같은 해외자원사업부라 정보는 다 파악하고 있을 거잖아?”
“세원 인터내셔널이 정말 입찰에 참여하면 장담하기 힘듭니다·”
“4천억 들어온거 물론 좋긴 한데 그거 이자도 생각해야지· 1년에 금융비용만 얼마인지 감이 오지? 그리고 외상이면 소도 잡아먹는다고 하지만 혜성기업 때문에 신영은행에다가 매년 500억씩 상환해야 해· 그거 못 갚으면 가진 자산 다 팔아치워야 하고·”
“그걸로 납득하지 못할 겁니다·”
“그건 어쩔 수 없지·”
고 부장은 안타까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부사장님을 마땅히 설득할 방법은 없는 거군요·”
“맞아·”
“사장님을 설득할 방법은?”
이번에는 홍 실장이 영훈에게 고개를 돌렸다·
영훈이 언제나처럼 담담히 말했다·
“제가 설득할 수 있습니다· 뭐 설득이 안 되면 어쩔 수 없이 프록시아 인수를 지켜보면 되겠죠·”
고 부장은 최영훈이라는 인간이 사장과 인척은 아니라고 해도 최소 비서실장 이상의 총애를 받고 있음을 알았다·
회사가 사력을 다해 집중하고 있는 일을 포기하고 그룹 계열사를 적대적 인수합병하자는 어처구니없는 소리를 해도 송은채 사장이 미친놈 취급하지 않는 위치에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영훈이 물었다·
“그냥 입 꾹 다물고 하시던 일 하실 겁니까? 아니면 저희를 도와주실 겁니까?”
“지시가 아니라 권유라 이 말이지? 내가 안 한다고 해도 문제 없는?”
“물론입니다· 다만 한 가지는 알아두셔야 합니다· 어쩌면 이번 일이 회사에 아주 큰 변환점이 될 수도 있는 일인데 고 부장님은 그 일을 회피하신 게 됩니다· 그 이유가 뭐가 됐든 부장님이 임원으로 성장하기 힘들지 않을까요? 아 이건 협박하는게 아닙니다· 그냥 순수하게 걱정이 돼서
말씀드려본 겁니다·”
고승현 부장은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이게 협박이 아니면 뭐란 말인가?
더 이상 줄다리기는 필요 없다고 판단했다·
“내가 해야할 일은?”
“일단 사장님께 결재를 받겠습니다·”
“보아하니 결재 받는데 문제될 건 없어 보이네? 그 이후에는?”
“현진관광을 문제 없이 인수하기 위한 작전을 짜주세요· 팀은 원하는 대로 꾸리되 외부에 절대 알려져서는 안 됩니다·”
“당연하지· 알려지는 순간 무슨 후폭풍이 불어닥칠지 모르는데· 그런데 인원은 정말 내가 원하는 대로 잡아도 되는 거지?”
“법무팀 재무팀 홍보팀 아무나 잡아가셔도 됩니다· 외부인력이 필요하면 그렇게 하셔도 됩니다· 비밀엄수만 할 수 있다면·”
“무슨 명목으로?”
“아무거나 하나 잡으시죠? 너무 황당한 건 말고 적당히 내세우기 좋은 걸로요·”
“사이즈가 작으면 팀원 빼가는 걸 용납 못할 거야·”
“그럼 큰 프로젝트에 적당히 내세우기 좋은 걸로·”
잠시 생각하던 고 부장이 말했다·
“혜성기업을 엮자·”
“어떻게 말입니까?”
“광주 봉선동에 추가 아파트 단지를 건설하겠다는 얘기가 있어· LH공사가 부지 매입 끝냈고 시공사 선정만 남았는데 알다시피 봉선동 아파트 값이 미쳤거든· 고급 단지로 만들어야 하는데 당연히 선정만 되면 엄청난 이익이 생길 거야· 전에 기사 보고 그냥 넘겼는데 여기에 혜성기업을
끌어들이자고· 건설업체 인수해서 알맹이만 쏙 빨아먹고 팔거라는 인식이 있으니까 보여주기에는 더 없이 좋지·”
“좋긴 한데··· 그럼 혜성기업에서 단독으로 들어가도 되는거 아닙니까?”
“아니지· 도급능력 39위가 어딜 끼어들어? 이거 평당 분양가가 최소 3천은 넘어야 해·”
“우리는요?”
고 부장은 피식 웃었다·
“역시 신입은 신입이네· 그렇죠?”
홍 실장도 여기에는 쓴웃음을 지었다·
“우리한테도 옛날이잖아·”
고 부장은 찬찬히 설명을 시작했다·
“5년 전에 우리도 외부 인력 스카웃해서 건설 부분에 잠깐 진출한 적이 있었어· 대규모는 아니었고 상류층들을 위한 초고가 빌라 단지를 청담동에 지은 적이 있는데 현진이라는 이름을 안 넣었기 때문에 우리가 지은지는 모르지· 현재 1채에 50억에서 70억이 넘는 초고가로 거래되고 있
어·”
“그렇군요· 그런데 왜 이후로 건설에 손을 안 댄 겁니까?”
“조직도 없고 잘 모르는 상태에서 너무 힘을 많이 줘서 그런지 막상 남는 게 많지 않았거든· 그래서 전 사장님께서 조직 개편할 때 깔끔하게 우리가 잘하는 부분으로 집중하자면서 정리했지· 어쨌든 혜성기업과 현진이라는 우리의 이름 그리고 초고급 디자인 설계 능력을 합치는 거야· 건
설비용만 6천억이 넘는 대단지야· 보여주기에 딱 좋아·”
“그렇네요· 뭘 하려는 듯이 보이기는 하네요·”
“어차피 이거 우리가 못 따· 의욕만 가지고 달려들다가 헛 힘 쓰기에 딱 좋은 건데··· 나 이거 완전 바보 되겠구만·”
“어차피 못 하는거 알고 하는 거라 괜찮습니다· 어쨌든 외부에는 그렇게 알리는 걸로 하고··· 그리고 제가 서포트 할 겁니다·”
“업무 지휘가 아니라 서포트를 한다고?”
“제가 업무 지휘하면 팀이 돌아가겠습니까?”
“알긴 아네· 그런데 팀원으로는 들어오지 않겠다?”
“일하는 방식이 다릅니다·”
“어떤 방식?”
“저는 좀 특이한 방식입니다· 숫자보다 사람을 상대하는 게 편하거든요·”
“그게 무슨 소리야?”
“아닙니다· 그냥 저만의 인맥을 통해 알아내는 방식이라고만 생각해주시면 됩니다·”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며 이해한다·
“아~ 인맥··· 그렇지· 그런데 그럼 이번에 신영은행 5천억 대출도 혹시···?”
“맞습니다· 제가 받아왔습니다·”
그깟 일은 자랑할 거리도 안 된다는 듯 대수롭지 않은 표정이다·
“그럼 혜성기업 건도?”
“네·”
옆에서 홍승대 실장이 거든다·
“내년에 막아야 할 5천억 채권도 연장한게 이 친구야· 아 이 내용은 모르고 있었지? 기사로 안 나갔던데·”
“···”
*
“최 과장의 말은 그러니까··· 프록시아 입찰을 포기하자는 거지?”
“네·”
임원회의에 들어갈 때 만면에 미소를 띠었던 송은채 사장의 얼굴은 회의가 끝나고 돌아왔을 땐 무척 굳어져 있었다·
회의에 들어갈 때 들었던 세원 인터내셔널의 입찰 참여 소식 때문이었다·
그런데 회의를 끝나고 돌아오자마자 영훈이 찾아와 건넨 이야기에 안색이 굳어지다 못해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돈으로 현진관광을 인수하자는 거고?”
“맞습니다·”
“꼭 그렇게 해야 할까?”
“아니요· 그냥 코발트 광산 업체 인수를 계속하셔도 됩니다· 조금 난관이 있겠지만 지금까지 수많은 직원이 준비한 만큼 위기를 겪어도 슬기롭게 헤쳐 나갈 수 있을 겁니다·”
“그럼에도 최 과장이 입찰을 포기해야 한다는 이유는 뭐지?”
“광산 업체 입찰을 끝으로 이 싸움이 끝날 것 같지 않거든요· 상관 없다고 생각하시면 제 의견은 안 들으신 걸로 하시면 됩니다·”
송은채 사장은 고민에 빠졌다·
분명 영훈의 말은 틀린게 없지만 그렇다고 그룹을 향해 선전포고 하나 없이 적대적 M&A에 들어간다면 그야말로 뉴스 헤드라인에 오를만한 일이 될 거다·
부담이 안 되고 걱정이 안 된다면 거짓말일거다·
하지만 영훈의 말을 무시한다는 것 역시 힘들었다·
그가 지금까지 했던 일을 생각한다면 거절을 하려고 해도 이유가 필요했다·
적어도 그냥 싫어서 거절할 수는 없으니까·
“만약 세원 인터내셔널이 중간에 입찰을 포기할 수도 있잖아? 아니면 어제 기사가 오보일 수도 있고·”
“물어보셨습니까?”
“아직·”
“그럼 물어보시죠? 가까운 사이니까 그거 물어보는 것 정도야 할 수 있지 않으십니까?”
“좋아· 만약 세원 인터내셔널이 지금 손들고 빠지거나 골든 브릿지가 포기한다면 입찰은 예정대로 진행하는 거야·”
“당연합니다·”
“만약 그게 아니면 이거 결재하도록 할게·”
송 사장의 앞에는 홍승대 실장이 작성한 ‘봉선동 시공사 선정을 위한 TFT 조직안’이라는 결재서류가 올라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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