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초전(5) >
송은채 사장은 비교적 굳은 표정으로 광화문 포시즌 호텔에 도착했다·
수행기사는 차에 대기하게 한 채 홀로 올라가는 그녀는 링에 올라가는 격투가가 된 것같은 기분이 들었다·
쿵쾅거리는 심장을 억지로 내리 누르며 호텔 2층의 레스토랑에 들어서니 직원이 바로 알아보고 안내한다·
직원의 안내를 따라 룸에 들어선 송 사장은 임지은 사장과 그녀의 남편이자 현진기계 사장인 김대영이 앉아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늦지 않게 온다고 왔는데 빨리 와 계셨네요?”
“올케가 보자고 하니까 설레서 엉덩이를 붙이고 있을 수가 없지 뭐야?”
“안녕하세요 아주버님·”
“연희 엄마가 사장이 되더니 아주 포스가 줄줄 풍기시는데? 역시 미인은 나이 먹었다고 어디 가는게 아니라니까?”
송 사장은 대꾸 없이 자리에 앉아 천천히 물을 마셨다·
전투 전에 치르는 의식 같이 느껴져 괜히 웃음이 나오려 했다·
그걸 느꼈음인지 임 사장이 물었다·
“올케 기분이 좋은가봐?”
“기분이 뭐 좋을게 있나요? 식사 먼저 할까요? 저 배고프면 기력 딸려서 말 못 하는데·”
“하하 준비 단단히 하고 왔나봐? 그래· 자기야·”
“어 그래·”
“올케 배고프다니까 그냥 음식 다 가져다 놓으라고 해·”
“그럴까? 그게 좋지· 부산스럽게 왔다갔다 하지도 않고·”
김대영은 얼른 종업원을 불러 음식을 시켰다·
음식은 미리 준비하고 있었는지 곧바로 나왔다·
이번에도 송은채 사장은 맛으로 먹는게 아니라 허기를 채우려는 듯 입 한번 열지 않고 조용히 먹었다·
그게 은근히 압박이었는지 임지은 사장 역시 먹는데 집중했다·
“많이 배고팠나 봐?”
“그렇기도 하고 생각을 좀 정리하느라 그랬어요·”
“대충 먹었으니까 이제 말해봐· 명절에도 바쁘다고 얼굴 한 번 안 내미는 올케가 갑자기 무슨 바람이 들어서 만나자고 했을까?”
송 사장은 마지막으로 물로 입을 살짝 헹구고 입을 열었다·
“오늘 기사 봤어요·”
“아~ 나도 봤어· 축하해· 신영은행에서 5천억 대출 받았다며? 굉장하다· 어떻게 받았어? 나도 그 노하우 좀 받아보자· 나 이번에 페이먼트 인수한다고 자금줄 꽉 막혔잖아· 나도 올케 덕에 막힌 자금줄 좀 뚫었으면 좋겠는데?”
“뭐 어떻게 하다보니 그렇게 됐어요·”
“혜성기업인가? 그것도 인수한다면서? 천억에 홀랑? 어머··· 이제 보니까 지훈이보다 올케가 더 능력있었나봐· 괜히 지훈이가 현진물산을 경영한다 어쩐다 할 필요도 없었네·”
“그러게 말이에요· 그냥 아버님께 제가 받았으면 아무 문제도 없었을텐데···”
순간 임지은 사장의 얼굴이 굳어졌다·
“말에 뼈가 있네?”
“뼈 있는 말은 나중에 하려고 했는데 말 나온 김에 할게요· 이제 그만하면 되지 않았어요? 연희 10년 동안 해외에서 돌아다니느라 엄마 얼굴도 제대로 못 보고 자랐어요·”
“왜 나한테 그래? 연희 내쫓은거 아버지랑 지훈이야·”
“그런가요? 그때 아버님께서 연희 앞으로 주신 호텔 가지고 가셔서 현진관광 만드셨을 때 굉장히 좋아하셨던 것 같은데·”
임 사장 들고 있던 포크를 식탁에 던지듯 내려놓았다·
“이거 왜 이래? 내가 우리 아빠한테 연희 내쫓으라고 하기라도 했다는거야?”
“아님 말구요·”
“이봐 올케· 연준이 죽은거 솔직히 올케 책임이잖아· 어린애 간수 잘 했으면 그렇게···”
이때 김대영 사장이 임지은 사장을 말렸다·
“여보 그만해·”
“후··· 그래 옛날 일 말해 뭐해·”
“그래요· 지나간 일 말해봤자 무슨 소용 있겠어요· 죽은 애가 돌아오는 것도 아닌데···”
송은채 사장은 탁자 아래 쥔 주먹을 파르르 떨면서도 내색하지 않았다·
“그래 오늘 기쁜 날이잖아· 현진물산에 동아줄이 내려온 날 아니야?”
“그런 줄 알았어요· 단도직입적으로 물을게요· 프록시아 인수전 뛰어들 생각이에요?”
“프록시아? 그게 뭔데?”
뻔히 알면서 의뭉을 떠는 임지은 사장의 모습에 송 사장은 열이 뻗쳤다·
“호주 코발트 광산 업체요· 우리가 입찰에 참여하려고 굉장히 오래 공을 들이고 있던거 모르셨어요? 연희 아빠가 처음 추진했던 사업이니까 모를 리 없지 않아요?”
“내가 다른 회사 사업을 어떻게 다 알아?”
“그런가요? 아주버님은 아시죠?”
“어? 어··· 난 알고 있지·”
본인 동생이 골든브릿지 사모펀드 매니저니 모른다고 잡아뗄 수 없었던 거다·
“골든브릿지가 먼저 제안했나요? 세원 인터내셔널은 어제까지만 해도 코발트 광산에 관심 없었는데 왜 오늘 갑자기 기사가 떴을까요?”
“그건 나도···”
“모르면 지금 연락좀 해줄래요? 안 바쁘면 나 좀 보고 가라고 해도 좋구요·”
임지은 사장이 보다 못해 나섰다·
“올케 너무한 거 아니야? 아주버니 어려운 줄 모르는거야?”
“미안해요· 내가 좀 급하게 됐거든요· 어쨌든 여기에 오지는 못하더라도 전화로 물어볼 수는 있죠?”
“크흠··· 그건 좀 곤란한데·”
송 사장의 안색이 변했다·
“아주버님 그거 거절이라고 봐도 되는 거죠?”
“아무리 내가 형이라고 해도 동생 일에 다 간섭할 수는 없는거야· 솔직히 사모펀드가 해야하는 일이 뭐야? 어딘가에 돈을 투자해서 수익을 내야 하는거 아니야? 저들이 봤을 때 프록시아 인수가 수익률이 높다고 판단했는데 내가 전화해서 무슨 말을 하겠어?”
임 사장도 거들었다·
“이건 이이 말이 맞지· 들어보니까 올케가 인수하려던 회사 입찰에 도련님이 끼어들었나본데 그걸 사적으로 연락해서 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하는게 말이 돼? 억지가 너무 심하다·”
“그런가요? 그런데 난 억지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어쩌죠? 골든 브릿지가 하필 우리 경쟁사인 세원 인터내셔널 손을 잡고 프록시아 입찰에 뛰어든 이 상황이··· 현진물산을 노리고 이러는게 아닐까라는 불길한 생각이 들거든요·”
임지은 사장은 가볍게 와인을 마시고는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올케· 회사 운영하기 힘들잖아· 올케랑 지훈이 지분 내가 시장가보다 두배 쳐서 사줄게· 그 돈이면 평생 돈자랑 하면서 살 수 있어· 아마 나보다 돈 더 많을걸?”
“내가 그 제안을 받을 거라고 생각하세요?”
대기업 오너 자리를 포기하라는 건 결국 돈 많은 졸부가 되라는 말과 같았다·
수많은 엘리트 인재들과 조단위 매출을 올리는 기업을 운영하면서 가지는 권력은 가진 부를 수십 년 가져가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송은채 사장으로서는 결코 수용할 수 없는 제안이며 이는 오히려 현진물산을 가지겠다는 선전포고와도 같았다·
“아니면 할 수 없지·”
임 사장은 어깨를 으쓱이며 ‘아니면 말고’의 태도를 취했지만 송 사장은 그녀가 자기 마음대로 저럴리 없다는걸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아버님께서 그러라고 하셨어요? 이제 태민이에게 그룹을 주시겠다고 하시던가요?”
“글쎄··· 그 양반 속을 누가 알겠어?”
그렇게 말하면서도 입꼬리 한쪽이 말려 올라가는 걸 보면서 송 사장은 이번 세원 인터내셔널의 입찰 참여를 누가 주도했는지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송 사장은 치솟는 울분을 누르면서 말했다·
“참 너무하시네요· 누구보다 힘든 사람은 우리 가족인데··· 누가 보면 아버님이 가장 큰 피해자인줄 아시겠어요·”
“가장 예뻐하셨으니까·”
“알겠어요· 태민이한테 선물 잘 받았다고 말해주세요·”
송 사장은 그렇게 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왜? 벌써 끝난거야? 난 또 무슨 대단한 이야기라도 하려는 줄 알았잖아· 괜히 기대했네·”
“미안해요· 기대 충족 못시켜드려서· 그런데 조금 화나네요· 솔직히 연희 아빠 상태가 어떤지 지금 괜찮은지 정도는 물어야 하는거 아니에요? 아프니까 가족도 아닌건가요?”
“솔직히 우리가 못보면 서로 궁금하고 걱정되는 그런 사이는 아니잖아? 그리고 지훈이 몸상태는 아마 올케보다 우리 아빠가 더 잘 알고 있을걸? 굳이 내가 물어야 해?”
“네··· 생각해보니 형님 말이 맞네요· 굳이 서로 걱정할 필요가 없는 건데·”
“그러니까··· 이제 말이 통하네·”
“그래요· 오늘 식사 맛있었어요· 그리고 그 대단한 이야기 나중으로 미룰게요·”
“하고 싶은 이야기 다 한 거 아니었어?”
“다 했는데 이제 막 또 하나 생겼거든요·”
“그럼 앉아· 서서 그러지 말고·”
“아니에요· 이 자리에서 다 해버리면 재미 없잖아요· 아주버님도 건강 잘 챙기세요·”
“어? 어 그래· 조심해서 가고···”
송은채 사장은 매서운 눈빛으로 둘을 노려보고는 몸을 휙 돌려 나갔다·
“흥 지깟게 화내면 무서울 줄 아나?”
등 뒤에서 들려오는 임지은 사장의 목소리에 송 사장은 입술을 깨물었다·
*
석유화학팀 고승현 부장은 다리를 달달달 떨며 생각에 빠져 있었다·
어제 고 부장은 비서실로 불려 올라가 입사 후 가장 충격적인 지시 혹은 제안을 받고 외부에 약속이 있다는 핑계로 퇴근한 뒤 사우나에서 시간을 보냈었다·
도저히 회사 내에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표정 관리하며 평상시처럼 행동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 괴물같은 녀석의 제안이 사장님의 손에 커트될 가능성도 있었지만 완전히 나가리(?)되기 전까지 다른 일에 집중이 될 것 같지도 않았다·
그렇게 하루를 네 정신도 내 정신도 아닌 상태로 보내고 다음날 아침에 출근했음에도 그 긴장감은 떨쳐낼 수가 없었다·
“하필 여기서 또 세원이랑 붙을게 뭐야···”
“이러다 입찰에서 떨어지면 손해가 얼마인 거야? 빌린 돈 바로 상환해야 하는거 아니야?”
당장 고 부장 주변에서도 회사의 미래가 어찌될지 걱정하는 직원들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전 직원이 프록시아 인수가 되느냐 마느냐에 온 신경을 집중하는 상황·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십니까?”
갑자기 훅 들어오는 질문에 고 부장이 화들짝 놀랐다·
“아유 깜짝이야!”
“제가 더 놀랐습니다·”
석유화학팀 이철순 과장이 입을 삐쭉 내민다·
키가 190이 넘고 체격이 산만한 거구의 이철순 과장의 성격은 완전히 체격과는 반대여서 아무리 화가 나는 일이 있어도 욕 한 번 한 적 없고 시키면 시키는대로 다 하는 순둥이였다·
“갑자기 나오니까 그러지·”
“어제부터 무슨 일 있으십니까? 임원회의 이후로 갑자기 사라지시구···”
“별거 아니야·”
그때 ‘띠링’ 소리가 울리며 직원들에게 긴급공지가 떴다·
“어?”
“이거 뭐야? 고승현 부장님?”
고 부장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닐 수도 있다고 계속 생각하고 있었던 일이 현실이 되고 말았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고 부장은 떨리는 마음으로 공지를 클릭했다·
[인사발령 공고]
[봉선동 시공사 선정을 위한 TFT 조직안에 의해 석유화학팀 고승현 부장을 TFT 팀장으로 발령한다·]
“후···”
“어? 부장님 이거 뭡니까? 저희 모르게 무슨 프로젝트 진행하는게 있었습니까?”
10년 전에 끊었던 담배 한 모금이 절실했다·
이제 자신의 손을 거쳐 현진그룹이 두쪽으로 갈라지며 전쟁을 시작할 것이다·
자고로 지면 역적이고 이기면 공신이라 했다·
고승현 부장은 주먹을 움켜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도 모른다·”
미리 준비했던 박스에 짐을 옮기기 시작했다·
석유화학팀 과장급 인사들은 우르르 다가와 아무 말 없이 짐을 싸는 무거운 분위기에 그 모습을 그저 지켜보고 있었다·
경영진의 의도를 모르기에 이 인사발령이 좌천인지 승진인지조차 짐작을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 5분 정도가 흘렀을 때 누군가 사람들을 제치고 들어왔다·
“야 이거 뭐야?”
해외자원사업부 윤정환 상무다·
고 부장은 짐을 싸다 말고 대답했다·
“저도 모르겠습니다·”
“몰라? 몰랐다고? 나도 모르는데 이런 인사를 했다고?”
각 팀장급 직원들도 혼란이 오기 시작했다·
당연히 고승현 부장의 보스인 윤 상무의 허락이 떨어진 인사인 줄 알았는데 윤 상무 윗선에서 다이렉트로 내린 인사발령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네·”
“봉선동은 뭐야?”
“저도 모르겠습니다·”
“너 이 새끼 구라 칠거야?”
“죄송합니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진짜 모르는거지?”
“정말입니다·”
윤정환 상무는 인상을 긁으며 그대로 몸을 돌려 나갔다·
고 부장은 다시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짐을 싸서 인사발령 공고에 나온 15층으로 향했다·
이미 그곳에는 지원부서에서 나와 각종 전산 프로그램을 깔거나 탁자와 회의실 등을 세팅하고 있었다·
팀장 자리에 자신의 짐을 넣은 박스를 내려놓은 고 부장이 멍하니 지켜보고 있는데 전화가 걸려왔다·
홍승대 실장이다·
고 부장은 자리를 벗어나 조용한 곳에서 전화를 받았다·
“네 실장님·”
“어때? 햇볕 잘 드는 자리로 만들었는데·”
“제가 눈 부신걸 안 좋아하는데 귀신같이 고르셨습니다·”
“하하 그래? 그럼 어두운색 블라인드 달아달라고 해·”
“그래야겠습니다·”
“누구 고를지 생각해뒀어?”
“네·”
그냥 사우나에서 놀고만 있었던 건 아니다·
“누구 붙여줄까?”
“법무팀에 경력직으로 새로 온 직원 있죠? 법무법인 동해 다니다가 여기 왔다고 하던데···”
“그건 또 어떻게 들었어? 대학원 때 M&A를 배웠다고는 하던데··· 그런데 그 친구 가지고 되겠어? 나이가 서른 밖에 안 돼· 경력으로 왔지만 사실 경력이라고 할게 별로 없거든·”
“실력 있는 놈들은 많지만 믿을 수 있는 놈이 없잖아요· 이거 끝까지 입 꾹 다물고 있을 놈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하긴 가장 중요한건 보안이지·”
“나머지는 알아서 세팅해주세요· 그리고 한 가지 궁금한게 있습니다·”
“뭔데?”
“이거 어디까지 가는 겁니까? 현진관광이 끝입니까? 아니면···?”
“알면서 뭘 물어? 지금은 먼 미래 걱정하지 마· 당장 앞의 일만 생각해·”
홍 실장은 그렇게만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씨발···”
고 부장은 이제 공신이 아니면 역적이 될 수밖에 없는 위험한 줄타기에 올라탔음을 느끼고 있었다·
아무래도 담배를 다시 펴야 할 것 같았다·
< 전초전(5)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