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준비단계(1) >
현진물산 홍보팀은 어제부터 각종 경제지와 언론사에서 걸려오는 전화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회사에서 내려온 공문이나 지시사항 하나 없는 상태에서 터진 기사 때문이었다·
임원회의가 끝나고 오후가 되어서야 내려온 신영은행 대출과 혜성기업 인수에 관한 지시사항으로 간신히 한숨 돌렸지만 결코 한가해진 건 아니었다·
바로 며칠 앞으로 다가온 현진건설과 혜성기업의 합병식 때문이었다·
준비할게 한 두 가지가 아니라서 한 달 전부터 준비해도 여유롭지 않은데 바로 어제 이야기를 듣고 준비하기 시작한 일정이다·
당연히 화장실 갈 때도 눈치를 보아야 했고 칼퇴근은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었다·
그때 비서실에서 공문이 내려왔다·
혜성기업과의 합병식에 ‘광주광역시 봉선동 아파트 단지 시공사 선정 참여’에 관한 내용을 발표할 것이라는 지시였다·
안 그래도 일이 터져 나가는 와중에 떨어진 지시에 홍보팀 정혜숙 부장은 이 프로젝트를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을 보내달라고 요청했고 한 시간 뒤 사람 한 명이 내려왔다·
“안녕하세요· 비서실에 근무하는 최영훈이라고 합니다· 업무협조 때문에 내려왔습니다·”
기다리고 있었던 홍보팀 정혜숙 부장은 눈살을 찌푸렸다·
“처음 보네?”
“네· 이번에 공채 신입사원으로 입사했습니다· 영업 2팀에서 근무하다가 얼마 전에 비서실로 이동했습니다·”
“홍 실장님은 많이 바쁘시지?”
“아무래도 요즘 정신 없는 사건들이 연달아 터지다 보니까 그런 것 같습니다·”
“혹시··· 아니다· 이 사업 내용은 정확히 파악하고 있지?”
아마 이번 신영은행발 대출건 때문에 단단히 뿔이 난 것 같다·
미리 알려줬으면 곤란한 일을 당하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인 것 같은데 그녀의 말이 틀린건 아니지만 어쩔 수 없었던 건이다·
“물론입니다· 광주 봉선동에 LH 공사가 대규모 아파트 단지를 건설하려고 추진중인데 우리 회사가 혜성기업과 합병한 후 첫 프로젝트로 시공사 선정 경쟁에 뛰어들려고 합니다·”
정혜숙 부장이 안 그래도 궁금했었던 내용을 물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 와중에? 하필 프록시아 입찰 때문에 펑크난 해외자원사업부 인력까지 빼내면서까지 해야할 일인가?”
정 부장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되는 듯했다·
“네· 사장님께서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고 진행하는 사업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다··· 이거 제안자가 누군데?”
“죄송한데 그것까지는 저도 잘 모르곘습니다·”
그녀는 따지고 싶은게 한 가득이었지만 하필 내려온게 고작 입사 석달도 안 된 신입사원이라 물어보고 싶어도 물어볼 수 없었다·
“그래 그럼 합병식 때 해당 내용을 발표할 계획이야?”
“네 맞습니다·”
“할 일이 계속 느네? 알았어· 일단 저 안쪽에 들어가면 박세영이라고 있어· 걔한테 설명하고 보도자료 만들어 달라고 해· 합병식 때 보여줄 내용은 보도자료 보고 만들어서 올릴 테니까· 이거 결재권자가 누구니?”
“홍승대 비서실장님입니다·”
“그런데 왜 이걸 비서실에서··· 아니다· 네가 뭘 알겠니? 그래 가 봐·”
“감사합니다·”
영훈이 빙그레 웃으며 인사하고는 정혜숙 부장이 정해준 자리로 갔다·
그런데 거기서 업무에 열중하고 있는 사람은 익히 알고 있던 사람이었다·
“어머···”
“안녕하세요·”
박세영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영훈을 보고 깜짝 놀랐다·
고시원을 나간 이후로 얼굴을 보지 못했는데 이곳에서 만나게 될 줄 몰랐던 거다·
영훈도 그녀가 홍보팀에서 일한다고 듣긴 했었지만 오늘 만날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지금 워낙 바쁘고 중요한 일이 산적해있기에 그녀에 대한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었다·
“여기 어쩐 일이세요?”
“비서실에서 나왔습니다· 정혜숙 부장님께서 박세영 씨에게 업무 설명하라고 말씀하셨거든요·”
“아··· 네· 일단 앉으세요·”
그녀가 얼른 옆자리를 권했다·
영훈이 앉자 그녀가 물었다·
“그런데 어떤 일이에요?”
“광주광역시 봉선동에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섭니다· 혜성기업을 인수한 우리 현진물산은 이 사업에 참여해서 사업권을 따낼 계획입니다· 아무래도 부실한 건설회사를 인수해서 알짜배기 자산을 매각할거라는 세간의 예상이 있는데 우리는 앞으로 혜성기업을 현진건설로 바꾸고 새
로운 프로젝트로 사업을 확장할거라는 식의 보도자료를 뿌려주시면 좋겠어요· 최대한 깔끔하고 그럴듯하게·”
“그럴듯하게요?”
“네· 현진물산과 현진건설이 역량을 총 동원해 진행할 예정이라고 해주세요·”
“역량을 총 동원이요?”
박세영은 고개를 갸웃했다·
지금 회사의 역량을 총 동원한 프로젝트가 무엇인지는 회사 사람 중에 모르는 이가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뜬금 없이 역량을 총 동원할 다른 프로젝트가 등장했으니 어리둥절할 수밖에·
“네·”
“음··· 진짜 맞는 거죠?”
“맞습니다· 박세영 씨가 만든 자료로 위에 올려서 결재 받아야 할 겁니다·”
“그렇다고 마구잡이로 만들어서 올릴 수는 없잖아요?”
“그렇죠· 그래서 제가 직접 왔잖아요· 가이드라인 잡아주려구요· 제가 잡은 가이드라인이 맞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세영은 빙그레 웃으며 자신하는 영훈을 보며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분명 고시원에서 봤던 그의 모습은 찌질하고 미래가 없어보이는 모습이었고 현진물산에 취직했다고는 해도 겨우 계약직에 얼마 안 있어 퇴사할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었다·
정규직이 됐다고 할 때도 완전히 믿지 못했는데 지금 이런 모습은 그녀가 예상했던 그의 모습이 아니었다·
“알겠어요·”
“일단 가장 중요한 부분은···”
무려 20분 정도를 자세히 설명한 영훈은 바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수고하세요· 모르는거 있으면 비서실로 전화해서 김민희 씨에게 물어보면 설명해줄 겁니다·”
이 사업의 진짜 목적을 아는 건 아니지만 모든걸 혼자서 처리할 수 없기에 민희에게 대략적인 사업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김민희 씨요? 혹시 입사 3년차인 그 김민희 맞나요?”
“그럴걸요? 그리고 비서실의 김민희는 한 분이라 아마 생각하는 그분이 맞을 겁니다· 두 분이 동기셨나 봐요?”
“네···”
“잘 됐네요· 그럼 전 가보겠습니다·”
영훈이 자리를 뜨자 한동안 멍 때리던 그녀는 후다닥 문자를 보냈다·
화장실 갈 때도 눈치를 보아야 하는 상황이지만 도저히 궁금해서 그냥 넘어갈 수 없었던 거다·
[오늘 점심 같이 먹을까?]
[오케이]
답장을 받은 이후에야 박세영은 일에 집중할 수 있었다·
물론 그녀가 가장 먼저 한 일은 광주 봉선동 집값 상승률에 놀라는 거였지만 말이다·
“아니··· 여기가 왜···”
*
성주훈 부사장은 계속 뚱한 표정으로 생각에 빠져 있었다·
아마 아침에 인사공고가 떴을 때부터 였을거다·
박윤재 부장은 무슨 이유로 부사장이 저러는지는 몰랐지만 사실 알고 싶지도 않고 그저 그게 안 좋은 방향으로 직원들에게 터져나오지 않기만을 빌었다·
하지만 안 좋은 예감은 언제나 빗나가지를 않는다·
“야 윤재야·”
“넵·”
박 부장이 후다닥 달려가 부사장 앞에 서자 그가 계속 뚱한 표정을 풀지 않은채 말했다·
“갑자기 사장님이 왜 이러시는 것 같냐?”
“광주 봉선동 때문에 그러십니까?”
“그래· 혜성기업? 그래· 천억에 홀랑 먹어치웠지만 그래도 보는 눈이 있는데 인수하자마자 가진 부동산 팔아치울 수는 없겠지·”
“팔고 싶어도 구도욱 사장의 경영권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고 그가 가진 지분이 상당해서 팔 수도 없습니다·”
“어쨌거나· 생색은 내고 싶은거 알겠는데 지금 상황이 상황 아니냐? 안 그래도 내가 해외자원사업부 인력 빼서 호주에 갖다 박았는데 인력이 펑크난거 모를 것도 아니고··· 그런데 해외자원사업부 에이스인 고승현이를 쏙 빼간다고? 왜?”
박윤재 부장도 곰곰이 생각하다가 무언가 아다리가 맞지 않는다는 걸 발견했다·
“생각해보니 이상하긴 합니다· 고승현이를 빼간다는 건 이 사업을 제대로 만들어 보겠다는 생각 같은데 아무리 그래도 경쟁사들 면면이 우리와 비교가 안 된다는 걸 알 겁니다· 상식적으로 시공사 선정이 될 리가 없다는 걸 모르지는 않을 텐데··· 아무래도···”
“아무래도?”
“정부와 연결된 끈이 있지 않을까요?”
성 부사장은 쉽사리 이해되지 않는지 고개를 모로 꼬며 말했다·
“지금이 90년대도 아니고 정치인 몇몇이 기라성 같은 건설사 다 제끼고 우리를 잡아 준다고? 우리야 좋지만 이거 선정에 참여한 사람들은 그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고?”
“그게 아니고서는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사실 신영은행 대출건도 그렇습니다·”
“그건 그렇지· 따지고 들면 그것부터가 말이 안 되긴 하지· 그런데 이것과 그건 경우가 달라· 은행 대출이야 은행장 마음이지만 시공사 선정은 민감한 문제거든· 몇 명 구워삶아서 될 문제가 아니란 말이야·”
“그럼 도대체 무슨 뜻일까요?”
“그걸 모르겠단 말이야· 흠··· 이것도 홍승대가 설계했을까?”
“그렇지 않겠습니까?”
“홍승대가 이 정도 능력자였다고? 믿을 수가 없는데? 야 봉선동 TFT팀이 쓸 사무실 어디라고 했지?”
“15층에 마련된 걸로 알고 있습니다·”
“홍 실장더러 15층으로 내려오라고 해라· 삼자대면 한번 해야겠다·”
“알겠습니다·”
박윤재 부장은 곧장 전화를 돌렸고 성주훈 부사장은 거침없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15층으로 내려갔다·
분명 자신 모르게 무슨 수작을 부리고 있는건데 제아무리 머리를 굴려봤자 부처님 손바닥 위에서 놀고 있다는걸 깨닫게 해주겠다고 마음 먹었다·
15층에 내려 새로 붙은 표지판을 따라 들어가니 창밖을 향해 서 있는 고승현이 보였다·
“훤하고 좋네·”
고승현은 뒤를 돌아보고 화들짝 놀랐다·
“부사장님 오셨습니까·”
“여기가 네 책상이냐?”
“네 그렇습니다·”
“책상도 좋고 경치도 좋고··· 내 방보다 좋다·”
“하하 어떻게 부사장님 방보다 좋을 수 있겠습니까· 앉으시죠· 제가 혹시 몰라서 소파는 직접 깨끗하게 닦았습니다·”
“반질반질하네· 너도 앉아봐라·”
고 부장은 감히 바로 앉지 못하고 물었다·
“차라도 드시겠습니까? 마침 조금전에 음료수랑 차를 세팅해왔습니다·”
“그럼 병으로 된 음료수나 세 개 꺼내와·”
“알겠습니다·”
고승현 부장은 음료수 세 개라는 말에 한 명이 더 올거라는 걸 알았다·
작은 매실음료 세 개를 챙겨 자리에 놓는데 문이 열리고 홍승대 실장이 들어왔다·
“왔어? 빨리 왔네? 앉아·”
“네·”
홍 실장은 가타부타 별 말 없이 성주훈 부사장이 앉은 상석 바로 옆에 앉았다·
고승현 부장이 둘의 눈치를 보며 슬그머니 엉덩이를 붙이는데 성 부사장이 말했다·
“자 셋 다 모였으니까 우리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해보자· 승대야·”
“네·”
“봉선동 이거 누가 만진거냐?”
고 부장이 눈치를 보려는 찰나 홍 실장이 즉각 답변했다·
“제가 만들었습니다·”
“그래? 진짜 네가?”
“네· 혹시 부사장님께서 이번 코발트 광산 입찰에 걸릴돌이 될까 염려하실 수 있는데 전혀 그럴 일 없을 겁니다·”
고 부장은 양 손에 촉촉하게 땀이 배어오고 있음을 느꼈다·
지금 홍 실장은 이번 인수전에 성 부사장을 완전히 제외할거라고 선언해버린거다·
도대체 이유가 무엇일까?
아마 홍 실장의 판단만이 아닐 게 분명했다·
그 혼자만의 판단이라면 저렇게 뻔뻔하게 연기할 수 있을리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최소 송은채 사장님의 결단이 있었던 게 틀림없다·
점점 자신이 올라탄 줄이 얇아지는게 느껴졌다·
조금이라도 중심을 잘 못 잡으면 바로 천길 낭떠러지로 떨어질거다·
“진짜야?”
“물론입니다·”
성주훈 부사장이 고개를 돌렸다·
“승현아· 넌 이 프로젝트 알고 있었냐?”
“그냥 이야기만 들었지 제가 담당자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그래? 네가 생각할 때 어때? 이거 가능할 것 같아?”
부사장의 입꼬리가 뒤틀린다·
당연히 쉽지 않을 거라는 말이 나올 거라고 믿고 있는 거다·
“가능합니다·”
어차피 주사위는 던져졌다·
후진은 곧 낭떠러지나 다름없었다·
“어떻게? 간판 바꿔 달아봤자 도급능력 39위가 어디 가는거 아니고 우리가 고급 빌라 단지 하나 지어봤다고는 하지만 그런 경험 하나 없는 건설사가 어딨어? 이게 무조건 할 수 있다고 파이팅 하면 내가 넘어가 줄거라고 생각해?”
부사장의 부리부리한 눈이 부릅 떠졌다·
여기서 더 가면 당장 쌍욕이 터져나올 분위기·
“3850 가구 입주자 전원에게 호텔급 조식 서비스 제공할 예정입니다·”
“뭐?”
“어차피 이곳은 분양가 상한제 적용 지역이 아닙니다· 분양가 4천만 원 이상으로 올리고 서울에서도 진짜 부자들만이 누리는 호텔급 조식서비스를 제공한다고 하면 전라도에서 내로라 하는 부자들 전부 몰려들 겁니다· 분명 승산 있습니다· 이거 우리가 따낼 수 있습니다·”
순간 반박을 못하는 부사장을 보며 홍승대 실장은 벌떡 일어나 박수를 칠 뻔했다·
고 부장 저 새끼는 혹시나 모를 가능성까지 생각해 정말로 이 프로젝트를 성공시킬 계획까지 짜고 있었던 거다·
< 준비단계(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