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준비단계(3) >
이형준 본부장과 점심을 먹고 돌아온 직후 바로 사장실로 들어가 송 사장에게 회의 결과를 보고 했다·
송 사장은 바로 영훈의 제안을 수락했고 재무팀에게 지시해 결제계좌를 신영은행으로 바꾸도록 했다·
기존에 결제계좌를 쓰고 있던 우성은행 쪽에서 재고를 요청할 것이 예상됐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사장실을 나와 홍 실장으로부터 고 부장이 세운 계획을 전해 듣고 바로 홍보팀 세영에게 추가 내용을 알려주었다·
연희는 돌아가는 사정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다가 감탄하며 말했다·
“와··· 고승현 부장님이라는 이분 능력이 대단하네요· 진짜 머리가 좋은 가봐요?”
“태어나기를 총명하게 태어난 사람입니다·”
“그런데 왜 지방대를 나오셨지?”
“어렸을 때 원하는 학업을 끝까지 마칠 수 있는 것도 복입니다· 집안 형편이 어려웠을 수도 있고 당시 공부가 아닌 다른 곳에 흥미가 있었을 수도 있죠·”
“부사장님과는 다르게 이번 일을 잘 해결할만한 운이 있을까요?”
영훈은 고개를 갸웃하다가 말했다·
“딱히··· 노형석 대리님처럼 손에 대는 일마다 성공하는 운이 들어온 건 아닙니다·”
“그럼 불안한거 아니에요?”
“하려는 모든 일을 어떻게 대운이 들어온 사람들하고만 같이 하겠어요· 다만 고 부장님 같은 경우는 직감력 판단력이 뛰어나고 근 10년간 크게 흉살이나 악운이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면 크게 빛을 발할 사주니 이 사람은 상사를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인
생이 바뀔 사람입니다·”
“오오··· 그럼 우리 엄마가 좋은 상사일까요?”
“글쎄요· 그거야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되겠죠· 그런데 잘 해낼 것 같습니다· 그냥 느낌이 그래요·”
“영훈 씨 느낌만큼 확실한게 또 없죠·”
이때 김민희가 다가와 파티션을 톡톡 두드렸다·
“주임님 잠시 말씀 좀 드릴게 있는데요·”
“아 네· 말하세요·”
어차피 연희는 사장 딸이기에 민희는 신경 쓰지 않고 말했다·
“오늘 점심 때 양준기 씨가 누군가와 지나가는 걸 봤습니다· 눈에 익은 사람이라 뒤따라가면서 누군지 한참 생각하다가 겨우 생각해냈습니다·”
“누구였습니까?”
“현진중공업 비서실 직원이었습니다· 작년 그룹 창립기념일에 한번 봤었기 때문에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음··· 대놓고 트롤 하려는건가?”
“네?”
“아니에요· 고마워요·”
“아닙니다·”
민희는 이번에는 제대로 성공했다는 생각에 환하게 웃으며 떠났다·
그런 그녀를 보고 연희가 물었다·
“내가 개인적인 일 시키는 사람들보다 능력이 더 나은 것 같은데요?”
“그럴지도 모르죠·”
“그나저나 준기 그 인간··· 확 짤라버려야 하는거 아니에요?”
“그냥 둡시다·”
“왜요?”
“원래 첩자인 걸 몰라야 우리한테 치명적인 거지 알면 첩자가 아니라 조력자가 될 뿐입니다· 그냥 두죠· 그런데 무슨 정보를 줬을라나?”
“봉선동 프로젝트 아닐까요?”
“그거 알아서 뭐 할게 있을까요? 건설업을 가진것도 아니고··· 오히려 달려들어주면 감사할 겁니다· 아 이러지 말고 아예 일을 줘버릴까요?”
잘하면 통째로 엮어서 정리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일이요?”
“흐음··· 일단 생각 좀 해봅시다·”
아직 시간은 많으니 급하게 진행할 것 없다고 생각했다·
*
사흘 뒤 혜성기업이 현진건설로 간판을 바꿔달았고 그날 바로 봉선동 아파트 개발 사업에 관한 청사진을 발표했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처음에는 전라도 쪽 부동산에 관심 있는 사람들만 관심을 가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었다·
지방 부동산 가격을 급등시키는 사람들이 지방 사람들만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었다·
“조감도는 언제 나오는 거야? 지금 경제지쪽에서 문의 엄청나게 들어오는거 알지?”
홍 실장의 물음에 고 부장이 실실 쪼갠다·
“흐흐··· 제가 뭐라 했습니까? 이거 반응 좋을거라고 했죠?”
“대신 지방 부동산 흔드는거 아니냐는 말도 나오고 있어·”
“말만 그렇게 하는 겁니다· 속으로는 좋아 죽을걸요? 대전이고 광주고 부산이고 지금 집값 올리는 사람들은 전국 단위로 움직이는 사람들입니다· 정보력이 보통 아니거든요· 아마 이번에 우리가 시공사로 선정되면 청약 경쟁률 엄청날 겁니다·”
“자신하지 마· 다른 데도 조식 서비스 넣으려고 할 수도 있어·”
“쉽게 못 할 겁니다· 각 건설사의 대표적인 브랜드에 조식 서비스를 넣기 시작하면 모든 지역에 똑같은 서비스를 해달라고 할 테니까요· 그렇다고 초고가 브랜드를 넣자니 기존에 살고 있던 사람들이 용납하지 못할 겁니다·”
“그럴까?”
“예를들어 가장 큰 경쟁사인 다보건설의 하이퀄리티 브랜드 ‘디브이 아너힐스’도 호텔급 조식서비스를 선보이고 있지만 평당 8·000만 원 이상의 초고가 브랜드입니다· 국내에서 한남동 딱 한 군데에만 있는데 그걸 광주에 넣을까요? 아무리 높아도 평당 5천 이상 받기 힘든 곳인데?”
“그건 그렇네· 결국 건설사의 대표 브랜드와 붙으면 해볼만하다는 거네?”
고승현 부장은 코끝을 문지르며 시큰둥하게 말했다·
“물론 우리의 일방적인 예상일 뿐입니다· 어제부로 현진건설로 직장이 바뀐 친구들한테 물어보니까 선정에 평가되는 항목이 굉장히 많더라구요· 그런데 어차피 상관없는거 아닙니까?”
홍 실장이 피식 웃었다·
“그렇지· 크게 중요한 건 아니지· 현진건설 친구들은 언제 합류해?”
“그쪽에서 아파트 쪽 전문가들 다섯 명 정도 추려서 보내주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좀 부담스러워졌어요·”
“왜?”
“이번에 우리가 발표한 내용이 꽤 마음에 들었나봅니다· 목소리에 기대감이 어찌나 가득한지··· 이거 엎어지면 굉장히 실망할 것 같던데요?”
“이거 우리가 따내면 수익이 얼마나 날 것 같아?”
“미분양은 생각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만약 생각대로 된다면···”
“된다면?”
“최소 1조 이상 수익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홍승대 실장이 혀를 내둘렀다·
“휘유~ 굉장한데? 그래서 주가가 이렇게 뛰는 건가? 어제 하루에만 14% 오른거 알지? 만약 이거 우리가 따내면 주가가 얼마나 갈려나?”
“최소한 지금보다 열배는 더 올라도 그리 비싼게 아닐 겁니다·”
“이 정도면 현진관광이고 나발이고 여기에 올인해야 하는거 아닐까 싶다만··· 어쨌든 잘 해봐· 사장님도 그렇고 최 과장도 그렇고 생각보다 그림이 그럴듯하게 나와서 잘만 진행되면 이것도 밀어줄 생각인거 같더라고·”
“밀어줘요? 여기서 더 어떻게 밀어줍니까?”
“최 과장이 있잖아· 혹시 알아? 우리가 모르는 드라마틱한 전개로 어떻게 밀어줄 수 있을지?”
“그것까지는 기대 안 합니다· 솔직히 전 아직도 최 과장 속을 짐작 못하겠습니다· 그러니 백프로 믿기가 힘드네요·”
상사의 말만 철썩같이 믿고 일하다가 뒤통수 맞고 회사를 떠나게 된 이들이 얼마나 많던가?
그렇기에 홍 실장은 고 부장의 저런 조심성이 더 마음에 들었다·
“그래 넌 너 할 일 최선을 다하면 된다· 나중에 억울한 일 생기면 내 바짓가랑이 붙잡고 늘어져· 난 너 원망 안 할거니까·”
“각오하셔야 할 걸요? 절대 떨어지지 않게 꽉 잡을 겁니다·”
“흐흐··· 그러시든지·”
*
며칠 뒤 영훈의 집들이 날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회사를 방문했다·
“형님이 여긴 어쩐 일이세요?”
앞으로 안 볼 것만 같았던 임지은 사장이 도도한 얼굴로 찾아왔다·
그녀는 비서실에서 연희의 인사를 받는둥 마는둥 하며 사장실로 들어서더니 휘적 둘러보고는 말했다·
“마실 것도 안 줄거야?”
“좋은 일로 찾아왔으면 마실거 내드리구요·”
“됐다· 여기선 물 마셔도 체할라·”
그녀는 소파에 몸을 던지듯 앉고 말했다·
“혜성기업 인수 축하해· 이제 현진건설인가? 지분은 얼마나 가졌어?”
“기사 나갔는데 안 보셨어요?”
“아니다· 됐고 내용 들었어·”
“무슨 내용 말이에요?”
“봉선동에 아파트 짓는거· 거기에 호텔식 조식 서비스 넣을 거라며? 우리 염두에두고 준비하는거 아니야?”
송은채 사장은 시치미를 뚝 뗐다·
“조식 서비스야 꼭 호텔을 가지고 있지 않아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는데요?”
“거짓말 하기는··· 호텔 뷔페라는게 쉬워 보여도 신경 쓸게 한 두가지가 아니야· 재료의 퀄리티나 쉐프의 능력 뭐 하나 문제 생기면 컴플레인 감당 안 돼·”
“그래서요?”
“같은 계열사잖아? 내가 도와줄게·”
“원하는 게 있으신건가요?”
임지은 사장은 뻔뻔하게 말했다·
“우리가 얼마 전에 페이먼트 호텔 인수했잖아· 조금 무리를 해서 그런지 자금사정이 빡빡해· 올케네 얼마 전에 신영은행에서 돈 들어왔잖아· 그것 좀 빌려 쓰자·”
“그 돈 어디에 써야 하는지 아시잖아요?”
“걱정 마· 골든브릿지 1조 없어· 내가 그거 모르겠어?”
송 사장은 그녀의 말도 안 되는 소리에 고개를 저었다·
“미안하지만 전 이번 프록시아 인수전에 모든 걸 걸어야 해요· 쓸 수 있는 입찰가격을 내 손으로 깎을 수는 없어요· 그러지 말고 아버님 한테 부탁해보세요·”
“현진중공업 살아난지 얼마 안 된 거 몰라? 쌓아둔 현금 가지고 지금까지 겨우 버틴거야· 돈을 빌려달라고 하면 하셨지 우리한테 빌려줄 현금이 있을 리가 없어·”
“그럼 다른 계열사한테 말해보세요·”
“몰라서 물어? 다른 계열사들 자금줄 바짝 마른지 2년이 넘어가· 그런 와중에 현금 2천억을 빌려줘도 휘청이지 않을 계열사가 어디 있어? 다 현진중공업이 쓰러지지 않도록 지원해왔잖아·”
현진그룹은 현진중공업을 중심으로 한 대기업이었다·
중국발 조선업 불황이 시작되고 나서 대한민국 대기업 중에 가장 크게 흔들린 재벌그룹이 바로 현진그룹이었다·
어쩌면 지금껏 계열사 정리 하나 없이 버텨온 게 용하다고 할 수 있었다·
“형님 사정은 알지만 우린 우리 나름대로 절박해요· 그러게 골든브릿지 가지고 왜 장난 치셨어요? 지금이라도 세원 인터내셔널이 이번 입찰에서 빠진다면 고려해볼게요·”
임지은 사장은 입술을 깨물었다·
현재 2천억이 급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송은채 사장이 프록시아 인수에 성공한다면 그것도 큰 출혈 없이 인수한다면 현진물산은 그야말로 현진그룹 계열사 중에 넘버 2 자리를 굳히게 될 게 틀림없었다·
그 이야기는 곧 자신의 아들인 태민이가 현진물산을 곱게 얻어올 가능성이 없어진다는 말과 다를바 없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장난치긴 누가 장난쳤다고 그래? 그리고 말했잖아· 도련님이 하는 일을 내가 어떻게 해라 마라 간섭할 수 있겠어? 대신 말은 해볼게· 다른 쪽으로 수익날 곳이 있는지 알아봐달라고·”
씨알도 안 먹힐 소리다·
“죄송하지만 그건 어렵네요· 전 문서로 확답을 받지 않으면 빌려드릴 수 없어요·”
급기야 임지은 사장이 버럭 소리질렀다·
“정말 이렇게 나올거야? 우리 아빠가 이 일을 알고 그냥 넘어가실 것 같아?”
“이미 아버님은 제게 회사 경영권을 넘기셨어요· 전 회사 이익을 위해서 하는 결정이구요·”
임지은 사장은 몇 번이고 자리를 박차고 나가려 했다·
하지만 돌아올 2천억 만기 채권을 막지 못하면 다른 모든 걸 떠나서 임창호 회장에게 실망감을 주리라는 것 때문에 일어나지 못했다·
자신에 대한 실망이 곧 자식에게 이어질까 염려했기 때문이다·
“그럼 어떻게 하면 빌려줄래?”
송은채 사장은 손발을 저릿하게 만들 정도의 전율을 느꼈다·
최 과장이 혹시 이런 상황이 벌어질지도 모른다고 했던 말들이 고스란히 진행되고 있었다·
“현진고속이 가지고 있는 현진관광의 주식을 교환하는 조건이면 생각해볼게요·”
당연히 임지은 사장이 극렬히 반대했다·
“올케! 그렇게 안 봤는데 응큼하네? 주식을 달라니?”
“우리가 가진 분당에 있는 건물 어제부로 매각공고 냈어요· 그렇게 확보한 자금 8천억과 2천억에 해당하는 현진관광 주식으로 1조 원 입찰 맞추려구요· 그리고 그렇게 해야 시공사 선정할 때 점수를 유리하게 할 수 있어요· 말로 서비스를 해준다는 것보다 주식교환이 됐다면 신뢰도를
더 높일 테니까·”
“진짜 이러기야? 그러지 말고 주식을 담보로···”
“주식 담보는 의미 없어요· 현진관광 주식을 시장가 2천억으로 교환하는 게 아니면 전 거절하겠어요· 받아들이시겠어요?”
분노한 임지은 사장은 주먹을 쥐고 부르르 떨었다·
< 준비단계(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