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상치 못한 가지 하나(1) >
자택으로 돌아온 임지은 사장의 얼굴은 의외로 평안했다·
그녀의 곁에는 임창호 회장이 마지막으로 기회를 준 양철기 전무가 자리하고 있었다·
임지은 사장이 그를 부른건 그가 예뻐서가 아니라 그가 현진물산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검찰에서는 연락 왔어요?”
“네 조만간 출석하라고···”
“참 어렵게 사시네· 그건 그렇고 올케가 내가 알던 그 순둥이가 아니던데? 양 전무가 있을 때도 이랬어요?”
양 전무는 황급히 손을 저었다·
“아닙니다· 처음에 사장 자리에 앉았을 때는 아무것도 모르니까 그저 잘 가르쳐달라고 했었고 조금 시간이 지난 후에도 주로 우리가 의견을 내고 송 사장은 결재만 하는 정도였습니다· 저희가 내는 의견에 반대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을 정도입니다·”
“그래요? 이상하네? 어디서 저런 배짱이 갑자기 생겼을까?”
“홍승대 실장이 옆에 붙어 있으면서 바람을 집어넣은 것 같습니다· 차지열 상무도 그렇고 기조실에서도 홍 실장이 이번 신영은행건에 깊숙이 개입했다고 보고 있습니다·”
“홍 실장이 그 정도라고?”
“이빨을 숨기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양 전무가 호랑이 새끼를 키웠네?”
양 전무는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죄송합니다·”
“사람을 잘 보는 것도 능력이에요· 그러고 보면 양 전무 능력에 대해서 나나 우리 아빠나 다시 생각해봐야 하는거 아닌가?”
“다시는 이런 일 없을 겁니다·”
“그럼 앞으로 어떻게 될 것 같은지 한번 예상해봐요·”
그녀의 시험과도 같은 질문에 양 전무는 침을 한번 삼키고 입을 열었다·
“아무리 현진물산과 현진건설에서 기를 쓰고 시공 사업권을 따내려고 해도 결코 쉽게 되지는 않을 겁니다· 나름 야심차게 준비하고 있기는 하지만 어디 다른 건설사들이 호구도 아니고 쉽게 넘겨줄 리가 없지요· 지금이야 뭐라도 할 것처럼 건방 떨지만 프록시아 입찰 건만 실패하면 줄
줄이 허점들이 드러날 겁니다·”
“그런데 세원 인터내셔널에서 입찰 따낼 수 있을까?”
그녀는 세원 인터내셔널이 입찰을 방해하는게 아니라 아예 따낼 걸 예상하고 있었다·
“본래도 자금력이라면 상사 업체들 중 최고였습니다· LS화학이 배터리에 목숨을 건 상황에서 코발트 광산을 확보한다는 건 충분히 매력적인 투자라고 생각할 겁니다· 골든 브릿지 사모펀드에서 충분할만큼 자금 지원을 못해주면 자체적으로 자금을 조달해서라도 이기려고 할 겁니다·”
“그 정도로 자금력이 큰가?”
“세원에서 가진 부동산과 주식만 가지고도 마음만 먹으면 골든 브릿지 사모펀드 도움 없이 입찰을 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단지 지금까지는 관심이 없었다가 프록시아가 가진 코발트 광산의 매장량과 생산능력을 보고 마음을 바꾼 것 같습니다·”
“마음만 확실히 먹어준다면야 그보다 좋을 수 없지· 어쨌든 양 전무는 지금도 세원 쪽이랑 계속 채널 유지하는 건 맞아요?”
“그럼요· 제가 마음만 먹으면 세원 대표이사도 사장님과 만남을 연결시켜드릴 수 있습니다·”
임 사장은 코웃음을 쳤다·
“흥 됐어요· 선보는 것도 아니고 만남은 무슨··· 그리고 내가 거기 사장 얼굴 한번 안 봤을까 봐· 그것보다 세원 인터내셔널 쪽 반응 계속 보면서 체크해주세요· 주식을 넘겨주는 건 이제 필연적이라서 이거 그대로 가져오려면 이번 입찰에서 현진물산이 반드시 실패해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임지은 사장은 주먹을 움켜쥐며 마음을 다잡았다·
이번에 준 주식은 그저 빌려준 것일 뿐이라고···
*
영훈은 돌아가는 상황이 참으로 공교롭다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그저 현진관광을 인수하기 위해 조직을 구성해야 했고 그 조직을 눈가림하기 위해 고 부장이 어떤 사업을 하든 관여할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고승현 부장이 거기에 혜성기업을 엮어 아파트 사업권을 노리면서 상황이 묘하게 변해버렸다·
고승현 부장이 아파트 시공사로 선정되기 위해 꺼내든 칼이 호텔급 조식 서비스를 비롯한 프리미엄급 아파트를 건설하겠다는 것이었고 그게 눈덩이처럼 굴러서 현진관광의 주식에까지 이르렀다·
아직 2천억 원어치의 주식을 교환하는 게 확정되지는 않았지만 만약 그게 성공한다면 손 안 대고 코푸는 수준을 넘어서게 되는 거였다·
참으로 인생 모르는 거라고 생각됐다·
그렇게 새삼 겸손하게 살아야 한다고 자각하는데 홍승대 실장이 슬그머니 다가와 말했다·
“최 과장 전에 노드리 뭐시긴가 하는 명품 브랜드 가져온 게 영업 2팀이었지?”
옆에서 연희도 듣고 바짝 다가왔다·
“네· 저희가 계약했습니다·”
“그때 서가은이랑 전속모델 계약했다며?”
“네 맞습니다·”
“혹시 말인데··· 서가은이랑 한번 연결 가능할까?”
옆에서 연희가 물었다·
“왜 그러시는데요?”
“현진건설을 고급 브랜드 전략화 해보려고· 서가은이가 굉장히 고급스러운 이미지잖아?”
“그렇긴 하죠·”
가끔 나오는 예능에도 차분한 말투와 어떤 옷을 입어도 고급스럽게 소화하는 모습 때문에 그녀의 이미지는 절대 가볍거나 싼티나지 않았다·
“현진건설 모델로 쓰고 싶은데 소속사에다가 공식적으로 제안할 생각도 있지만 그래도 안면 있는 최 과장이나 연희 씨가 가서 말 좀 해주면 어떨까 하고· 바쁘면 그냥 현진건설쪽에서 제안 해보고·”
“말해보는 거야 문제가 아닌데 그러면 좋은 이유가 있나요?”
“지금이야 현진건설이 됐다고는 하지만 그 전에 혜성기업이었던게 어디 가는게 아니거든· 규모도 작았고 아파트도 지방에서나 짓던 수준인데 서가은 소속사가 쉽게 받아들일 것 같지가 않아· 물론 모델료를 퍼부어주면야 가능하겠지만 나중에 좋은 이야기도 안 나오고·”
안 그래도 형준을 만나고 와서 이제 할 일이 없을 것 같던 와중이라 잘 됐다고 생각했다·
“알겠습니다· 그 쪽 회사에 연락해보고 미팅 결과 알려드릴게요·”
“그럼 고맙지· 아마 고 부장이 무척 좋아할거야·”
“회사일인데 고마워할거 있습니까? 다 같이 하는 일인데요·”
연희는 홍 실장이 가고 바로 서가은의 소속사에 전화를 걸었다·
마침 그녀는 곧이어 들어가는 드라마 때문에 집에서 준비중이라고 했다·
집으로 찾아갈까 물어보니 회사로 오라는 말에 내일 그녀를 만나기로 약속을 잡았다·
“그럼 전 먼저 나갑니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매일 이어지는 외부 강의 때문에 영훈은 4시 이전에 회사를 나가곤 했다·
외부 강의는 6시가 된다고 칼처럼 끝나는건 아니었고 저녁 이후에 스케줄이 없을 때는 강사와 같이 저녁을 먹고 와서 계속 이어가기도 했다·
강사료를 많이 줘서인지 강사들도 흔쾌히 시간을 연장해주면서까지 강의에 임했다·
“공부는 잘 하고 있는 거예요? 땡땡이 치는 거 아니죠?”
의심해서 그러는게 아니라 괜히 물어보는 거다·
“의심되면 따라오실래요?”
“아니에요· 그럼 이따가 봐요·”
“그럽시다·”
오늘이 그녀와 약속했던 집들이 날이었기에 이따가 만나자고 하는 거였다·
영훈은 6시에 칼같이 강의를 마치곤 서둘러 백화점 식품코너에서 간단히 조리할 수 있는 음식과 후식 등을 사서 집으로 향했다·
연희는 남은 일을 마저 마무리하고 조금 늦게 출발하기로 했다·
집에 도착해 어질러진 옷가지들을 정리하고 적당히 청소를 마친 후 음식을 준비하고 있을 때 연희가 왔다·
“어서 와요· 아직도 차가 막히는 시간이죠?”
“조금요· 여기 집들이 선물이에요·”
그녀가 내민 선물은 주먹만한 크기의 유리병이었다·
유리병 안에 액체가 담겨 있어 막대기 몇 개 꽂혀 있는 걸 본적 있었기에 이 유리병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그냥 와도 되는데··· 이거 향기 나는 그거 맞죠? 뭐라고 하더라?”
“디퓨저요· 남자 혼자 사는 집엔 필수품이죠· 와··· 어쩜 이렇게 예상을 빗나가지 않는지· 더 채워진 것 없이 집이 처음 그대로네· 딱 이렇게 살고 있을 것 같더라구·”
“풀옵션인데 더 살 것도 없죠· 아주 만족합니다·”
연희는 집을 휘휘 둘러보며 영훈에 대해서 다 꿰고 있다는 듯 쫑알댔다·
영훈은 그런 연희를 바라보며 빙긋 웃고는 재빨리 저녁 준비를 했다·
직접 다 요리할 거라는 기대는 안 할 것이기에 미리 ‘메이드 인 백화점’이라는 사실을 실토했고 다행히 연희는 맛있게 먹어주었다·
“이 집 주인님을 위해 특별히 와인을 준비해봤는데· 한 잔 할래요?”
“준비한 성의를 봐서 맛 좀 볼까요?”
연희가 기분이 좋은지 화색을 띠며 답하자 영훈이 잠깐 뜸을 들이다 말했다·
“음··· 그럼 저쪽으로 갈래요? 요즘 내 취미생활인데 연희 씨한테 보여주고 싶어서·”
영훈이 와인잔을 들고 창가로 향하자 연희도 따랐다·
창가 옆 테이블의 의자 두 개를 당겨 창밖을 바라보도록 나란히 놓고는 연희에게 앉으라는 손짓을 했다·
“이 집에서 제일 마음에 드는 겁니다·”
연희에게 와인잔을 건네며 옆자리에 앉은 영훈이 리모컨으로 전등과 조명을 모두 껐다·
한강 다리와 그 위를 지나는 차들의 불빛 서울의 수많은 빌딩들의 조명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우와 우리 집보다 야경이 더 멋진데요? 월세 받아야겠어요 후훗·”
연희는 옆의 영훈을 보며 쌩긋 웃고서는 다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영훈은 와인을 한 모금 마시고 등을 의자에 기대었다·
매일 봐도 질리지 않는 야경과 함께 어둠 속 연희의 실루엣이 눈에 들어왔다·
어깨와 그 아래로 내려오는 머리카락 가녀린 허리· 영훈은 연희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애써 눈을 창밖으로 돌렸다·
*
“어머~ 너무 반가워요~”
연희가 서가은을 향해 양 손을 흔들며 반가워했다·
서가은도 연희의 손을 맞잡으며 환하게 웃었다·
“우리 몇 번 안 봤는데 이상하게 되게 친한거 같은 느낌이에요· 나만 그런거 아니죠?”
“나도 가은 씨가 안 바빴으면 몇 번이고 찾아왔을 거예요·”
“하나도 안 바빠요· 그러니까 연락 자주해도 돼요· 영훈 씨도 반가워요·”
“네 반갑습니다· 그런데 우리 때문에 괜히 회사에 나온거 아닌가 모르겠네요·”
“아니에요· 집에만 있으면 괜히 우울해져서 일부러라도 밖에 나와야 해요· 배역에 계속 파고들면 나도 모르게 기분이 다운되거든요· 그런데 오늘 어떻게 오셨어요? 아무 용건 없이 그냥 놀러 오셨으면 좋겠지만 직장인 분들이라 그러지는 않겠죠?”
영훈이 머쓱하게 대답하려는데 문이 열리고 박현승 실장이 들어왔다·
서가은의 모든 스케줄을 관리하는 임원급 관리자인 그는 연희를 보고는 눈웃음을 지으며 인사한다·
“오셨다는 말 들었습니다· 종종 인사드렸어야 했는데··· 이번에 하는 파티 오실거죠?”
연희는 어색하게 웃었다·
“하하 네 뭐···”
이때 서가은이 박 실장에게 말했다·
“오빠 나 만나러 오신 분들이라 대화 좀 할게·”
쓸데없는 소리 말고 나가라는 말이다·
그는 민망한 얼굴로 바로 들어온 문을 다시 열었다·
“그럼 말씀 잘 나누다 가시고 혹시 계약과 관련된 사항이 있다면 말씀 부탁드립니다·”
괜히 자기 없이 계약에 관한 이야기 하지 말라고 경고(?)한 그가 나가자 서가은이 눈살을 찌푸렸다·
“미안해요· 원하는 거 있으면 나한테 이야기해도 돼요· 자꾸 나 대신에 뭘 하려는게 싫어·”
마침 잘 됐다 싶었다·
영훈은 얼른 현진건설의 새 모델을 구하고 있으며 고급스럽고 지적인 그녀가 딱이라고 줄줄이 설명을 해주었다·
그런데 그녀의 얼굴이 조금씩 어두어졌다·
“혹시 조금 어려운 부분이 있을까요?”
“제가 싫어서가 아니라··· 솔직히 난 CF 한 개 더 찍고 말고 큰 상관이 없어요· 아직 건설회사 모델은 해본적이 없어서 크게 문제될 것 같지도 않구요· 그런데 내 후배 중에 조금 어려운 친구가 있어서 혹시 그 친구를 밀어줄 수는 없을까요?”
서가은은 천생 여자다우면서도 자기 일은 자기가 직접 처리할 정도로 강단이 있는 성격이다·
다정하면서도 의리가 있다고 할까?
그냥 이번 광고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거절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게 누굽니까?”
가은은 얼른 핸드폰으로 앨범을 뒤적여 사진을 보여주었다·
사진에는 굉장히 아름다운 미인 두 명이 식당에서 셀카를 찍은 모습이 찍혀있었다·
가은은 그 중 왼쪽의 여자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김예서라고 아시죠? 데뷔한지는 7년 정도 됐는데 관계자분들이 하나 같이 감탄해요· 예쁘기는 정말 예쁘다구요· 그런데 이상하게 뜨질 않아서··· 미안해요· 친한 동생인데 너무 안타까워서 그래요· 안 된다고 하면 그냥 제가 할게요·”
김예서는 영훈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산에 있으면서 놀 때는 게임하거나 드라마 영화 따위를 보았으니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녀가 왜 뜨지 못했는지 영훈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죄송한데 이분은 우리 회사 모델로 어울리지 않습니다· 회사가 원하는 이미지가 아니라서요· 그런데 오른쪽 분은 누굽니까? 연예인인가?”
안 된다는 말에 가은이 실망하면서 답했다·
“대학 후배예요· 연극영화과라서 이곳저곳 오디션을 보기는 하는데 여의치가 않네요·”
“차라리 저 분이 조금 인지도가 있는 분이라면 모르겠는데 말씀드렸듯이 예서 씨는 힘들 것 같아요· 그럼 아까 실장님이랑 세부적인 내용 토의하면 될까요?”
서가은은 눈빛을 빛내며 물었다·
“주희요? 주희는 괜찮던가요?”
“보니까 곧 잘 될 것 같은데요? 그냥 제 느낌입니다· 신경 쓰지 마세요·”
그녀는 이상하게 영훈의 그 느낌이라는 말이 가슴에 와서 박혔다·
< 예상치 못한 가지 하나(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