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상치 못한 가지 하나(3) >
식사가 끝나고 영훈은 자리를 길게 끌고가지 않았다·
이 자리의 목적에 걸맞게 남자친구와 다음 미팅 일정 잡고 바로 나와버리자 연희가 물었다·
“너무 도망치듯이 헤어진거 아니에요?”
“어차피 저쪽도 불편했을 겁니다· 막상 연희 씨가 입 꾹 다물고 있으니 초조했겠죠·”
“네? 제가 왜요?”
“가은 씨는 내가 아니라 당신에게 남자친구를 보여주고 싶었던 겁니다· 당신이 현진물산 사장의 딸이라고 하니까 지금 어려운 사정에 있는 남자친구 투자처를 알아봐주고 싶었겠죠·”
연희도 입을 삐죽이다가 말했다·
“사실 인사하면서부터 느낌을 받긴 했어요· 남자친구에 대한 의구심 있는 표정이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아직 결혼도 안 한 남자친구한테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요?”
“결혼하고 싶어서 그러는 겁니다·”
“네?”
연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예전에 그랬죠? 가은 씨가 다부지면서도 천생 여자 같다고· 그런데 아무리 천생 여자라고 해도 자기 수준에 안 맞는 남자와 결혼하고 싶지는 않을 겁니다· 남자 입장에서 최고의 신부감이지만 결코 쉬운 여자는 아니에요· 당신 만큼은 아니라고 해도 그 기준이 굉장히 높을 겁니다·”
“아··· 그럼 지금 별볼일 없는 남자에서 꽤 잘 나가는 벤처 사업가로 만들고 나서···?”
“그런 이후에 멋들어진 예비신랑에 대해서 발표하겠죠· 똑똑한 여자입니다·”
“똑똑하다기보다는 영악하다고 표현하고 싶은데요? 후··· 조금 그렇네·”
연희는 자신과 잘 맞는 친구를 만나서 좋았는데 왠지 배신당한 느낌을 받은 것 같았다·
“화났습니까?”
“난 친구가 생겼다고 좋아했단 말이에요·”
“친구 없어요?”
“10년 넘게 외국에만 있었어요· 한국에 들어올 때는 기껏해야 한 달 정도? 친구를 사귄다기보단 그냥 한국에서 휴가를 즐기는 수준이었죠· 그래서 지금도 남들이 말하는 친구라고 할 만한 사람은 주변에 없어요· 그냥 알고 지내는 사람들이지·”
“안타깝긴 한데··· 그래도 나보다 낫네요·”
연희는 투덜거리려고 튀어나왔던 입이 다시 쏙 들어갔다·
그녀가 아무리 힘들었다고 한들 산에서 20년을 넘게 살았던 영훈의 발끝도 따라가기 힘들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미안해요·”
“미안할 건 없습니다·”
영훈은 이미 충분히 행복해하고 있고 예전의 일들로 인해 누군가를 원망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런 과정 덕분에 지금 이렇게 인정받으며 풍요롭게 살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까 그 남자친구가 그렇게 매력적이던가요? 난 잘 모르겠던데?”
연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남자친구··· 이름이 뭐였더라?”
“김학수요·”
“아 그래요· 김학수· 학수 씨는 얼굴만 봐도 딱 학자처럼 생겼습니다· 콧대가 살아 있고 코가 크죠· 체격이 크지는 않지만 단단하고 눈빛이 바르기 때문에 아마 가은 씨는 그런 학수 씨의 성품에 반했을 겁니다·”
“사주는 어떤데요?”
“더 좋을 수 없는 사주를 타고 났습니다· 사주에서 삼기귀인이라고 하는데 이런 사주는 인격이 드높아서 사람들의 존경을 받으며 또한 머리도 좋아 박학다식합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삼기가 삼합을 이루니 국가의 동량이 될 사람입니다·”
연희는 입을 떡 벌렸다·
“네? 그 정도예요?”
“네· 저도 지금까지 배우기만 했지 실제 이런 사주를 타고난 사람은 처음 만납니다· 만약 관에 뜻을 두고 있으면 능히 장관까지 갈 사람인데 벤처 사업가가 됐으니··· 수백억 이상의 투자 가치는 충분할 만큼 대단한 인재는 맞습니다·”
“와··· 가은이 좋겠네· 그럼 당신도 투자할래요? 아마 당신이 원한다고 하면 당장 엄마가 십억··· 아니다 만약 빌려달라고 하면 당장 수십억 정도는 빌려줄 수 있을 것 같은데?”
영훈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됐습니다· 전 돈에 욕심 없습니다·”
사주는 아무리 많이 봐도 상관 없지만 돈을 벌 욕심으로 사주를 봐줘서는 안 된다·
아예 몰랐으면 모를까 나중에 크게 될 사람이라는 사주가 나왔는데 돈을 투자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진짜 무슨 돈에 대해 결벽증이라도 있는 것 같네요?”
“결벽증 아닙니다· 나도 돈 좋아하고 좋은 차에 풍요로운 삶 좋아합니다· 단지 내가 열심히 노력한 일 덕분에 자연스럽게 따라온다면 모르지만 돈을 목적으로 일을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해서도 안 된다는 말은 굳이 하지 않았다·
“뭔가 되게 어렵네요· 어쨌든 그런 사람이란 말이죠? 흐음··· 엄마가 이해할 수 있을까?”
“설명할 수 없다면 그냥 포기하세요·”
혹시나 투자를 하고 싶은 마음에 자신의 능력을 알려줄까 걱정돼 그렇게 말하니 연희가 목소리를 높였다·
“왜요? 이렇게 좋은 기횐데? 에이~ 설마 내가 엄마한테 영훈 씨 능력 가지고 뭐라고 말할 것 같아서 그래요?”
“솔직히 좀 불안하긴 합니다·”
“원래 정보라는 게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가치가 올라가거든요· 내가 알면 되는데 굳이 엄마까지 알아야 할 필요는 없죠·”
생긋 웃는 걸 보니 괜한 우려를 한 것 같기도 했다·
“그것 참 다행입니다·”
“일단 엄마한테 말하기 전에 김학수 씨 회사에 대해 알아보자구요· 여기 알아온 내용은 그냥 회사 설립 연도나 대표이사 생일 정도고 진짜 뭘 하는 회산지 얼만큼 유망한 업종인지 등등·”
“그럽시다·”
연희도 잘 모르는 분야였기에 그녀도 섣불리 어떻다고 단정짓지는 않았다·
그래서 다음날 가장 먼저 찾은 이는 현재 봉선동 TFT를 이끌고 있는 고승현 부장이었다·
뭐 말이 찾았다는 거지 실제로는 고 부장을 비서실로 불러 올린게 맞았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홍승대 실장도 같이했다·
“반도체 설계? 엄청 똑똑한가 보네?”
고 부장은 이야기를 듣자마자 대뜸 그렇게 되물었다·
“거의 천재 정도는 돼야 할 수 있는 겁니까?”
영훈의 물음에 그가 팔짱을 끼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걸 설명하려면 우선 비메모리와 메모리 반도체 차이를 알아야 해· 쉽게 설명하면 비메모리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CPU나 그래픽카드 같은걸 말하는거야· 메모리는 RAM 같은 걸 말하고·”
“아 네· 그건 알고 있습니다·”
고 부장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설명을 시작했다·
“오케이· 음~ 우리나라가 메모리 반도체 시장을 선도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진짜 돈이 되고 앞으로도 계속 세계시장을 주도하게 되는 건 비메모리 반도체야· 인공지능이라든지 자율주행 같은 거·”
“그렇군요·”
“우리나라도 비메모리 쪽으로 진출하고 싶은데 딱 한 가지 약한 게 있어· 그게 바로 설계 분야야· 이해하기 쉽게 말하면 반도체 설계도를 사서 공장에서 만들어 판다고 보면 되는데 요 반도체 설계 분야를 선도하는 곳은 다 해외업체란 말이지· 근데 요게 돈 때려 박고 공장 들입다 짓는
다고 키울 수 있는 사업이 아니야·”
“어지간한 머리가 아니면 할 수 없다는 거죠?”
“그렇지· 수만 명의 인력을 몇 명의 천재가 이겨 먹는 분야거든· 벤처 사업하기 딱 좋긴 한데 그만큼 실패하기도 딱 좋아· 투자된 돈은 돈대로 들어가고 매출 1원 한 푼 일으키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니까· 설계 한 번 팔아먹으면 수백 수천 억을 벌지만 못하면 그냥 끝이잖아·”
“그렇군요·”
“설마 여기 투자하고 싶어서 그러는거야?”
고 부장은 영훈과 연희를 슬쩍 돌아보고는 말도 안 된다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에이~ 이건 아니지· 돈 날리기 딱 좋아·”
어쩌면 이런 반응이 당연한거다·
아마 지금껏 매출 한번 일으키지 못했을 텐데 정상적인 방법으로 이들을 설득할 수 있을 리 없다·
그렇기에 영훈은 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그렇죠?”
조금 아깝기는 하지만 이해하지 못한다니 어쩌겠는가?
영훈은 굳이 설득하려는 생각을 접었다·
그런데 연희는 달랐다·
“일단 알겠어요·”
담담히 고개를 끄덕이는데 눈빛을 보니 결의가 가득 담겨 있었다·
아마 송 사장에게 담판을 짓고 싶은 모양이다·
연희의 기색을 읽었는지 홍 실장이 말했다·
“연희 씨 이 회사의 미래를 확신하고 있는 것 같은데 일 이십억이 들어가는 간단한 투자가 아니야· 아무리 몇 명의 천채가 이겨먹는다고 하지만 그래도 회사를 더 키우려면 인력을 추가 스카웃해야 할 건데 여기에 들어가는 돈만 수십억일걸? 만약 정말 투자하고 싶은 회사면 혼자 결정
하지 말고 회사에 맡겨보는게 어때?”
그녀도 무작정 우길 수만은 없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맡기는 건데요?”
“이런 거 잘하는 데가 기조실이거든·”
“네?”
연희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기조실이 회사 내의 엘리트 집단으로 알아준다고는 하지만 문제는 그쪽에 정보가 넘어가는 순간 비밀은 없다고 봐도 좋았기 때문이다·
“기조실을 못 믿는 건 알겠는데 그래도 회사 일이잖아· 그럼 회사 시스템을 따라야지· 아무리 기조실 쪽이 믿음이 떨어진다고 해도 회사 기밀을 외부에 누설하면 당장 검찰에 불려가는 걸 모르는 사람들이 아니야·”
“하지만 프록시아에 대한 정보를 양 전무가 누설했을 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고 있는 상황이고 아들인 양준기 역시 마찬가지로 의심되는 상황이에요·”
홍 실장은 처음 듣는 이야기에 눈살을 찌푸렸다·
“양준기? 고작 신입사원 주제에?”
“고작 신입사원이라고 하기에는 처음 입사했을 때부터 주목을 많이 받았죠· 그리고 기조실장님도··· 아니에요· 이건 내가 말하기 주제 넘은 것 같네요·”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홍 실장이나 고 부장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인사이동을 서둘러야겠군·”
결국 결론은 하나· 이대로 회사의 엘리트 조직 하나를 괴사시킬 수는 없는 일이라고 판단한 듯했다·
“긍정적으로 생각해주셔서 고마워요·”
“이게 내가 할 일인데? 내용 정리해서 사장님께 보고하지· 자네는 더 할 이야기 있나?”
홍 실장이 영훈에게 시선을 돌렸다·
사실 이 자리에서 가장 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사람이 영훈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영훈은 곰곰이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강노식 실장님이 기조실장님이죠?”
“맞아·”
“제가 한번 뵐 수 있을까요?”
홍 실장은 우려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혹시 이번 투자 때문에···”
“아 오해하지 마세요· 전 솔직히 이 투자 되면 좋지만 안 돼도 상관 없다고 생각하니까·”
“정말?”
“네· 제가 할 일은 다 했으니 이제 남은 건 여러분들의 몫이죠·”
홍 실장은 영훈의 말을 이해 못해 얼굴을 찌푸렸다·
영훈이 했다는 일이 뭔지 몰랐으니 당연했다·
영훈은 빙그레 웃으며 말을 이었다·
“다만 강노식 실장님을 만나보려고 하는 건 홍 실장님과 뜻이 같기 때문입니다· 다만 능력 없는 분이 아닐 테니 제가 직접 보고 싶어서요·”
“혼자?”
“에이~ 혼자 되겠습니까? 고 부장님 뵐 때처럼 같이 자리해주셨으면 합니다·”
“그러지·”
마다할 이유가 없으니 홍 실장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게 자리를 정리하고 1시간 정도가 흘렀을 때 홍 실장이 자리로 찾아와 어딘가로 가자고 손짓했다·
그를 따라 봉선동 TFT팀이 위치한 15층의 빈 회의실로 들어가니 스쳐가듯 보기만 했었던 강노식 실장이 앉아 있었다·
“늦었습니다·”
“어? 아니야·”
강 실장은 따라들어온 영훈을 보고 의아한 표정으로 번갈아 쳐다보았다·
“안녕하십니까· 비서실 최영훈입니다·”
“그래· 나 강노식이야·”
얼결에 악수를 나눈 강 실장이 해명을 원하는 눈빛으로 홍 실장을 돌아보았다·
홍 실장은 머쓱한 표정으로 말했다·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어서 여기로 오시라고 했습니다·”
“그랬으니까 불렀겠지· 그런데··· 이번에 공채 신입사원으로 입사한 친구를 여기에 왜 대동했지?”
강 실장이 묻자 홍 실장은 슬쩍 영훈을 돌아보았다·
이때 영훈이 뜬금없이 홍 실장에게 말했다·
“잠시 자리 좀 피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강 실장은 이게 무슨 개똥 같은 경우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더 황당한 건 이후에 일어났다·
“그럼 전 잠시 나가 있겠습니다·”
나가 있으랬다고 진짜 나가는 홍 실장을 보며 강 실장은 잠시 머리가 하얗게 굳어졌다·
뭔가 자신이 중요한 걸 놓쳤다는 생각과 그게 무엇인지 캐치해내려고 치열하게 머리를 굴려야 하는 걸 알고 있음에도 이 상황 자체를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영훈은 잠시 강 실장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었다·
“넌 뭐야? 너 전에 옥상에서 홍 실장 옆에 있었던 그 친구 맞지?”
그렇게 강 실장이 입을 열었을 때 영훈이 말했다·
“이제 곧 인사이동이 있을겁니다·”
“그런데?”
“이대로라면 실장님은 해외부서로 발령나게 될 겁니다·”
강 실장은 인상을 일그러뜨렸다·
당장 네 까짓게 뭔데 그딴 소리를 지껄이냐고 소리지르고 싶었지만 돌아가는 상황을 봤을 때 눈앞의 젊은 녀석이 자신이 모르는 엄청난 권력을 가지고 있음을 눈치채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고작 이 말이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반응이었다·
“어디로 가고 싶으신지 여쭤보고 싶어서요· 이왕이면 최대한 원하는 곳으로 보내드리려고 합니다·”
“이런 씨발···”
이런 개같은 경우를 당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차라리 홍승대 실장이 이렇게 나왔다면 제법 인정하는 후배였기에 깨끗하게 승복이라도 했을 텐데···
“이야기를 들어보니 아내분이 자녀들과 미국에서 유학중이시라구요· 미국 주재원으로 나가 있는건 어떠십니까?”
“회사를 나가고 말지 그딴 개소리를···”
그런데 이어지는 영훈의 말이 그의 혼을 통째로 흔들었다·
“미국에 한번 가보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왜 요즘 기러기 생활하다가 바람나서 이혼당하는 그런 경우 많다던데·”
“너··· 뭐야? 뭔가 알고 있어?”
강 실장이 떨리는 목소리로 묻자 영훈은 상체를 앞으로 기울이며 진지하게 말했다·
“실장님 실장님은 지금 인생의 중요한 변곡점에 와 계시는 것 같습니다· 배짱부리다가 정말 미국 주재원으로 나가서 퇴사 당하고 이혼까지 당하면 그때 실장님께 남는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지금 실장님이 잡고 있는 줄은 현진물산이라는 걸 알아야 합니다· 그걸 놓으면 천길 낭떠러지
만 있을 뿐입니다·”
< 예상치 못한 가지 하나(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