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래를 위협하려는 사람들(2) >
“우리가 너희랑 경쟁 관계인 거 알고는 있는 거니?”
연희가 황당한 표정으로 묻자 그가 어깨를 으쓱였다·
“아 들었어· 현진물산이 혜성기업을 인수해서 현진건설로 탈바꿈했다고· 맞지?”
창훈이 옆을 돌아보며 물었다·
그의 옆에는 창훈과 나이가 비슷해 보이는 남자가 서 있었다·
그는 절도있게 상체를 기울이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알고 있었어· 하지만 네 손에 쥔 사업인지는 전혀 몰랐고· 정말이야· 나도 널 여기서 만나게 될 줄은 몰랐으니까· 네가 야심차게 진행하는 사업이었다면 미안하게 됐다·”
“아직 결정난 것도 아닌데 벌써부터 미안해할 건 없어·”
“글쎄 난 벌써 미안한데? 실은···”
창훈은 연희의 귀에 얼굴을 들이밀고 속삭였다·
“오늘 저녁에 약속까지 잡았거든·”
이미 게임은 끝났다고 선언하는 그를 보며 연희가 코웃음을 쳤다·
“넌 한결같구나· 여전히 성급하고 가벼워· 그러다 몇 번 혼쭐났던 거 기억 안 나니?”
“난 안 좋은 기억은 쉽게 잊거든·”
“그 자신감 이번에는 얼마나 가는지 한번 볼게·”
창훈은 품 속 명함지감을 열어 검지와 중지로 멋들어지게 명함을 꺼내 연희에게 내밀었다·
“연락해·”
“나도 여기·”
연희도 명함을 주자 그가 연희의 명함을 받아 보고는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비서실? 사원? 뭐야 서민 체험이라도 하는 거야?”
“밑에서부터 차근차근 배워가려고·”
“하하 내가 이래서 널 좋아한다니까? 하여튼 열심히 해 봐· 아마 잘 안 되겠지만·”
그가 손을 흔들며 멀어져가는 걸 보고 영훈이 말했다·
“원래 저렇게 대사를 만화 주인공처럼 합니까?”
“네· 본인이 세상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는 애거든요· 성격이 악한 건 아닌데 뭐랄까··· 좀 유치하다고 해야 하나? 애 같은 면이 있어요·”
“신기한 친구네·”
“아 생년월일은 바로 확인할 수 있는데· 잠깐요·”
그녀는 얼른 핸드폰으로 그의 SNS를 검색해 생년월일을 빠르게 찾아냈다·
영훈은 그걸 보고 사주를 계산하는데 연희는 태연하게 이곳에 참석해 줄 서있는 사람들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의아해 물었다·
“결혼하자는 말을 들었는데 너무 태연한 거 아닙니까?”
“아이 여태 내 말을 어떻게 들었어요? 내가 결혼하자는 말 처음 들었을 것 같아요?”
생각해보니 그런 이야기를 그녀에게 얼핏 들었던 것 같기는 했다·
“고백은 많이 받았었다고 들은 것 같은데···”
“고백뿐이겠어요? 고등학교 때 백인 선생님이 이런 고~져스한 동양인은 처음 봤다고 사귀자고 무릎을 꿇지를 않나 대학 들어가서는 아랍 왕자가 자기 세 번째 부인이 되겠냐고 제안해 오기도 했어요· 첫 번째 부인에다가 더 이상 부인을 안 들이면 생각해보겠다고 했는데 그건 안 된다
고 해서 거절했죠·”
“진짜 할 생각이었습니까?”
“그 때는 진심이었어요· 그 아랍 왕자가 가진 재산이 얼마였더라? 80조 정도 되는 것 같았는데··· 어쨌든 그것 말고도 창훈이 쟤 오늘까지 한 것 빼고도 서너 번은 더 저랬어요· 그래도 급하게 만나서 다행이지 내가 여기에 오는거 알고 있었다면 꽃다발이라도 준비했을걸요? 아유···”
연희는 생각만해도 소름이 끼치는지 몸을 감싸며 부르르 떨었다·
“경험이 많으시네요?”
“말해 뭐해요? 장담하건데 나만큼 청혼 많이 받아본 여자는 많지 않을걸요? 그냥 예쁘기만 했으면 이 정도는 아닐 텐데 예쁜데다가 집에 돈까지 많으니 날 가만 둘 리가 없었던 거죠· 당신 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내 인생 역시 쉽지는 않았답니다·”
“흠··· 아까는 뭐라고 했습니까?”
“아~ 귓속말 한거요? 조재민 의원이랑 저녁 약속을 잡았다고 하던데요?”
“빠르네·”
“오늘 와서 후원금 전달한 건 그냥 의례적인거고 이미 며칠 전에 약속을 잡아두었을 거예요· 정치인들 목이 뻣뻣해서 당일에 약속 잡는 건 힘들거든요·”
“그럼 이미 이야기가 많이 진행됐을 수도 있겠습니다·”
“그래도 쉽지 않을 거예요· 보는 사람도 많고 많은 이권이 걸려 있어서 정치인 한 둘로는 결정적 힘을 쓸 순 없을 테니까·”
“우리도 그거 알고도 온 거 아닙니까? 한 둘로는 힘들지만 셋 넷이 되면 또 다르니까·”
“더군다나 조재민 의원 사촌동생이 LH공사 임원이기도 하고··· 다 알고 왔을 거예요· 광주에서 조재민 의원의 영향력은 무시할 수 없다는 것도 아마 우리보다 더 잘 알 거예요· 일단 우리는 우리 할 일 합시다· 약속장소 찾아가서 깽판칠 수도 없으니·”
“하핫! 진짜 그래볼까요?”
연희는 창훈이 얄미운 듯 주먹을 휘두르며 깽판을 놓는 시늉을 하다 주변 눈치를 보고 그만두었다·
*
“봤냐? 졸라 멋있었지?”
창훈이 호텔 로비의 거울을 보며 자뻑에 빠져있는 사이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윤희찬 부장이 옆에서 초를 쳤다·
“아까는 너무 성급했어· 그 여자 표정 제대로 본 거 맞아? 심지어 당황하지도 않고 심드렁하던데?”
그는 놀랍게도 상관에게 반말을 해댔고 창훈은 반말을 듣고 있음에도 아무렇지도 않아 했다·
“네가 몰라서 그러는데 연희 걔가 원래 그래요· 쉬운 여자 아니야· 그래서 내 여자가 될 만한 여자인 거지·”
“너무 급하게 다가서다가 일을 그르칠 수 있어· 여자는 그렇게 막무가내로 들이대면 오히려 튕겨 나가·”
“에헤이~ 네가 연희를 몰라서 그런다니까· 학교 다닐 때 남자들한테 얼마나 도도했는데·”
“네가 몰랐던 거 아니야? 너만 모르고 연애 몇 번은 했을 수 있어· 너 원래 눈치 없잖아· 그것도 드럽게···”
“이번엔 달라· 그리고 평범한 여자라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연희는 그렇지 않다니까·”
윤 부장은 인상을 찡그리다가 대답했다·
“만약 정말 그렇다면 더욱 가볍게 다가서면 안 될 걸? 대개 연애를 잘 하지 않는 여자일수록 남자친구나 배우자에 대한 기대감이 크기 때문에 여자가 가진 환상을 충족시켜주지 못하면 이루어지기 힘들거든· 모태솔로인 남자나 여자가 연애를 시작하기 힘든게 눈이 높아져서이기도 해·”
창훈은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느냐는 듯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나 말고 도대체 누가 연희의 기대감을 채워줄 수 있다고 생각하냐? 이 외모와 배경과 여자를 배려하는 나 같은 신사 말고 누가 연희 짝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냐구?”
“재수 없긴 하지만 그건 또 맞는 말이긴 한데···”
창훈은 드디어 긍정적인 대답을 한 윤 부장의 말 덕분인지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이건 인정을 안 할래야 안 할 수가 없지· 그런데 하필 우리랑 붙는게 문제네· 아니 뜬금없이 현진물산에서 아파트 시공 사업을 왜 욕심 내는 거야? 꼴랑 도급능력 39위 인수해놓고 이렇게 대규모 아파트 시공 사업권을 진짜 따낼 수 있다고 믿는건가?”
“그래도 이번에 저쪽에서 내민 한 수가 담당자들이나 주민들의 귀를 간지럽힌 건 사실이야· 아파트 단지 전체에 제공하는 조식 서비스는 전라도 부동산 일대에 파란을 일으키고 있는 중인데 이걸 틀어막고 들어가려면 고생 좀 할 것 같아·”
창훈은 그제야 거울에서 시선을 떼고 발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조재민 의원 부친부터 우리랑 맺은 인연이 보통 인연이 아니야· 게다가 우리 아버지랑 초등학교 때부터 동창이었어· 아 그때는 국민학교였지? 어쨌든 절대 우리가 미끄러질 수가 없는 일이야·”
“지방 부동산 시장이 들썩인지 얼마 안 됐어· 지방 사람들은 서울이나 수도권 집값 올라갈 때 남 이야기로만 알고 살았거든· 이런 분위기를 계속 타고 싶을거야·”
“이거 왜 이래? 우리 브랜드도 만만치 않아·”
“알지· 그래서 일반적인 상황이었다면 나도 걱정하지는 않았을 거야· 그리고 오늘 현진물산 외동딸까지 직접 내려왔어· 마음을 놓을 단계는 아닌 것 같은데?”
“흥 그래 봤자지· 지네가 언제부터 건설회사였다고 조 단위로 남겨먹는 아파트 시공권을 따려고 해? 이건 선을 넘어도 한참 넘은 거야· 어쨌거나 난 이번 일 걱정 안 한다~ 그건 그렇고 여기서 연희를 만나게 된 건 하늘의 뜻이다· 이래서 인연이라는 말을 하는 건가봐· 연희를 여기서 만
날 줄 알았으면 꽃다발이라도 준비하는 거였는데··· 아까 너무 건조하게 말했나?”
윤희찬 부장은 심드렁하게 말했다·
“난 이상하게 아까 옆에 있던 남자가 신경 쓰이던데?”
“남자? 누구?”
“그 연희 씨 옆에 서있던 남자 말이야·”
“최영훈이라는 비서실 직원?”
“어·”
창훈은 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하! 인마 너 안 본 사이에 감 많이 죽었구나· 걔가 어딜 봐서 연희 스타일이야? 딱 봐도 내 동생 스타일도 아니구만· 내 동생이 딱 연희랑 비슷해· 잘 생기고 완벽해야 하거든· 그런데 비서실 직원? 말이 되냐?”
“아까 네가 결혼할거라고 했을 때 순간적으로 그 남자 눈치 봤어· 넌 눈치 못 챘지?”
“비서실 직원이라며? 회사 직원이 옆에 있으니 괜히 민망했을 수 있지·”
“그런 느낌이 아니었는데··· 너 유부남이 괜히 유부남 된 게 아니야· 여자들 눈치를 기가 막히게 본다고· 그래서 여자들이 유부남인 거 알면서도 빠져드는 거야·”
“네가 평소에 눈치 빠른 거 인정하는데 이건 아니야· 최영훈이면 내가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인데 아무리 잘 봐줘야 재벌 서자 아니냐? 그런데 재벌 서자가 남의 회사 비서실에 왜 가있냐?”
“그건 그렇지·”
“그럼 일반인이라는 건데 로열패밀리가 일반인하고 결혼하는 게 말이 되냐? 남들은 그런 순수한 사랑을 꿈꾸겠지만 연희는 그렇게 말랑한 성격 아니야· 걔가 얼마나 독하고 야무진데? 나 정도 아니면 눈에 차지도 않을걸?”
윤 부장은 짜증나는 표정으로 투덜거렸다·
“아··· 내가 씨발 이 꼴 보기 싫어서 다른 데 지원했던건데···”
“크크크· 그래도 나 아니면 누가 그 나이에 부장 타이틀 다냐? 넌 친구 잘 만나서 운이 트인 거야· 가자 내가 오면서 죽이는 간장게장 집 봐 놨다·”
“나 운전할 때 뒤에서 그거 찾고 있었냐?”
“여기까지 왔는데 맛있는 거라도 먹어야지· 가자!”
김창훈과 윤 부장은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빠른 걸음으로 호텔을 벗어났다·
*
“축하드립니다· 잘 읽을게요·”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평소에 팬이었습니다· 의원님 너무 멋지세요·”
“하하하 감사합니다·”
조재민 의원은 다가오며 인사를 건네는 사람들 한명 한명에게 감사를 표했다·
사람들이 너무 많이 와서 지칠 수도 있을 텐데 돈이 들어오는 자리여서인지 아니면 성품이 좋은 건지 연신 호탕한 웃음으로 사람들을 반겼다·
드디어 차례가 된 연희와 영훈도 조재민 의원에게 다가가 악수를 하며 인사를 건넸다·
“출간 축하드립니다·”
“축하드립니다·”
조재민 의원이 한눈에 기업에서 나왔음을 알아챘다·
“아이고 젊은 분들이 찾아주셨네요 고맙습니다· 오늘 이렇게 미인이 찾아주시고 눈까지 호강하는군요· 어디서 오신 분들인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현진물산을 경영하시는 분이 제 어머님 되십니다·”
연희의 말에 조재민 의원의 눈빛이 반짝였다·
“오~ 현진그룹 자제분이시군요· 반갑습니다· 일전에 아주 흥미로운 기사가 떴었는데 재밌게 읽었습니다·”
조 의원은 며칠 전 현진물산에서 봉선동 아파트 시공을 따내기 위해 올린 홍보기사를 바로 기억해내며 언급해주었다·
이 자리에서 바로 언급했다는건 이미 그도 현진물산을 주목하고 있었다는 이야기였다·
“감사합니다· 그냥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그래요· 정정당당하게 노력하면 결과는 따라올 겁니다·”
“명심하겠습니다·”
의미심장한 말에 연희는 그렇게 대답하고 물러났다·
그리고 조 의원의 뒤에서 묵묵히 곁을 지키고 있는 여성에게 또 다가가 인사를 건네고 물러나는데 영훈은 그 여인에게 간단히 목례하고 말했다·
“의원님 사모님 되십니까?”
“아 그래요· 오늘 날이 날이라고 도와주러 나왔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영훈이 뜻밖의 말을 건넸다·
“몸도 안 좋으신데 날이 추우니 들어가셔야 하지 않을까요?”
그 말에 조 의원의 아내가 무슨 말이냐는 듯 말했다·
“네? 제가요?”
“심장이 안 좋으시면 추위를 조심하셔야 할 텐데··· 괜찮으시다면 제가 착각을 한 모양입니다·”
영훈이 그렇게 말하며 물러설 때 조 의원의 아내가 영훈을 붙잡았다·
“저기 잠시만요·”
< 미래를 위협하려는 사람들(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