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래를 위협하려는 사람들(4) >
윤희찬 부장은 너무 놀라 엉덩이를 들썩일뻔한 걸 겨우 참았다·
저 최영훈이라는 자의 말은 결국 돌려 말했지만 군산 버스터미널을 봉선동 아파트 시공권과 묶어버리겠다는 말과 다를바 없었기 때문이다·
뒤통수를 제대로 맞았다·
자신들은 이번 사업을 잘 봐달라고 왔는데 저 최영훈이라는 자는 군산 버스터미널을 묶어서 조 의원에게 던지며 선심을 쓰는 상황을 만들었다·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너무 세게 맞아서 ‘억’ 소리도 내지 못할 것 같았다·
조재민 의원이 아무리 이번 사업에 힘을 쓸 수 없다고는 했지만 정치인이 몇 번 만난적도 없는 기업인을 상대로 진실을 말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만약 이대로 현진물산이 조재민 의원의 마음을 사로잡는다면 이번 시공사 선정에 우명건설이 탈락될 가능성이 높다·
절대 안 될 말이었다·
“의원님· 잠시만···”
윤희찬 부장이 말을 하려할 때 조 의원이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주 한 잔에 대한 이야기는 충분히 들었습니다· 다음에 봅시다·”
조 의원은 다른 사람들과 인사도 나누지 않고 그대로 방을 나가버렸다·
오히려 지금까지 영훈의 말을 계속 듣고 있었던 게 이상했을 만치 도망치듯 나가버리자 윤 부장이나 창훈의 얼굴에는 당혹감이 어려 있었다·
반대로 연희는 뿌듯함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웃음을 참기 위해 애써 노력하는 모습이었다·
창훈이나 윤 부장이 없었다면 이 자리에서 소리라도 질렀을 얼굴이었다·
창훈은 얼굴이 벌게져서 날카로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이거 문제 될 수 있는거 알지?”
연희가 입꼬리를 한쪽으로 올리며 목소리를 높였다·
“무슨 문제? 현진물산이 군산 시민들을 위해 조금의 손해를 감수하고 버스터미널을 현대화 하겠다는데? 그게 마음에 안 들면 너희가 하면 되잖아·”
“···”
창훈은 반박하지 못했다·
그깟 수십억 손해 보는 게 아까워서가 아니다·
지금껏 우명건설이 시민들을 위해 손해를 보면서 뭘 해본적이 있던가?
하고 싶어도 그걸 제안할 명분이 없었다·
그렇다고 현진건설처럼 간판을 바꿔 단 것도 아니고 창립 몇 주년을 걸고 쇼한다는 것도 웃긴다·
무엇보다 그렇게까지 해서 봉선동 사업권을 따낼 수 있다는 확신이 없다·
적어도 이걸 결정하려면 회사 임원회의의 결정이나 최고 경영자의 허락이 떨어지지 않은 이상 자신이 혼자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저 놈은 어떻게 이걸 이 자리에서 결정했을까?
창훈은 물어보고 싶은 게 한두 개가 아니었지만 연희는 그의 궁금증을 풀어줄 생각이 없었다·
“우린 이만 가볼게· 우리 상황이 저녁까지 같이 먹을 정도로 가깝지는 않잖아? 더덕구이는 나중에 먹어야겠다· 가요·”
“오늘 감사했습니다· 덕분에 좋은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영훈은 창훈에게 살짝 고개를 숙이고는 연희를 따라 나갔다·
창훈은 어이가 없는 얼굴로 콧김을 씩씩 뿜어대다가 종업원을 불러 음식과 술을 시켰다·
“시발 뭐가 뭔지 엉망진창이네·”
창훈이 자리에 앉아 소주 마시는걸 보면서 윤희찬 부장이 말했다·
“상황이 심각하게 됐어· 회장님께 말씀드려야 하는거 아닐까?”
“고작 이거 가지고?”
희찬은 답답한 표정으로 말했다·
“‘고작 이거’라고 할 게 아니야· 군산 버스터미널을 봉선동 사업에 엮은 거란 말이야·”
“군산이 조재민 의원 지역구도 아니잖아· 뭘 그렇게 흥분해?”
“아까 조 의원에게 예산을 못 가져왔다고 말하는걸 보니까 조 의원 지역구가 군산이 아니라는 걸 잘 몰라서 그랬는지 아니면 일부러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하필 핵심을 짚었어· 군산 지역구 국회의원이 누구야?”
“강주원?”
“그래 그 백년 묵은 여우 같은 강주원이 군산 지역구 의원이라고· 전라도에서 강주원 입김이 얼마나 센지 알지? 그 양반 한 마디면 안 되는게 없다는 곳이 바로 이곳이야· 그리고 강주원의 정치적 후계자가 조재민이지· 알고 그랬다면 제대로 찌른거라고·”
“그래도 안 돼· 뭐 하나 터졌다고 아버지한테 쪼르르 달려가서 도와달라고 하면 내 체면이 뭐가 되겠어?”
윤 부장은 답답했지만 이해하기로 했다·
사업이 엎어지는 것보다 본인들 체면이 더 중요할 수도 있는게 로얄패밀리 아니던가?
어쩌면 자신들과 보는게 다르기에 그런 결정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럼 대책을 세워야 해· 진짜 강주원 의원을 노린 거라면 우리도 조재민 의원이나 강주원 의원을 사로잡을 뭔가를 제시해야 한다고· 막말로 강주원 조재민 의원이 LH 간부들 모아놓고 요즘 호텔급 조식 서비스가 그렇게 좋다더라고 칭찬 한 마디만 해도 게임 끝나는 거야·”
그런데 창훈의 관심사는 다른데 있는 것 같았다·
“이상해· 미리부터 버스터미널을 준비했다면 모르겠는데 아까 좋은 가르침이 어쩌고 하는 말 들었지? 씨발 내가 아까 정부 발주사업을 노려보라고 한 걸 가지고 그런 말을 한 걸까?”
“설마 그랬겠어?”
“그리고 고작 비서실 과장이라며? 주택영업본부장인 나도 아까 같은 제안은 쉽게 할 수 없어· 우리 아버지나 돼야 즉석에서 그런 제안도 할 수 있는 거라고·”
“확실히 그건 이상하긴 해·”
“그것뿐이 아니야· 건설비만 7천억에 달하고 분양 후 수익이 조 단위에 달하는 이번 사업을 가지고 그깟 시공사 선정 떨어지면 그만이라고? 이게 고작 과장 타이틀을 가진 놈이 할 수 있는 말인가?”
윤희찬 부장은 확실히 일이 성사되는지에 주목했던 자신과 다르게 일을 주도하는 사람이 누군지에 관심을 가지는 창훈을 보고 사안을 보는 시야가 다름을 느꼈다·
“과장은 물론이고 어느 임원급도 쉽게 할 수 없는 말이지·”
“그럼 결론은 이미 군산 버스터미널을 가지고 딜을 해보자고 미리부터 작전을 짜왔다는 말이잖아? 그게 아니고서는 말이 안 되는거 맞지?”
윤 부장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정보도 부족한 상황에서 너무 세게 얻어맞아서 그런지 그림이 잘 그려지지도 않았다·
겨우 상황을 정리한 윤 부장이 말했다·
“근데 그것도 이상해· 내가 알기로 현진물산에서 현진건설 인력 데려와서 본격적으로 TFT를 꾸린 거로 알고 있거든· 시공사 선정 사업에 뛰어든다는게 학교 반장선거처럼 그냥 손들고 나선다고 되는 일이겠어? 수많은 인력이 여기에 붙었을 거야·”
“당연하지·”
“그런데 너도 알겠지만 버스터미널을 봉선동에 묶었다고는 해도 정치인이라는게 어디 받은 만큼 족족 돌려주는 족속인가?”
“그랬으면 우리가 벌써 버스터미널 열 번은 넘게 지어줬겠지·”
“그럼 현진물산 경영진에서는 봉선동이 안 된다고 해도 버스터미널만 손해보고 해주자고 결론을 내렸다는건데 어떤 경영자가 이딴 식으로 결정해?”
“씨발 뭐가 뭔지 모르겠네·”
“정말 그 최영훈 과장이라는 사람이 네 조언 때문에 그런 임기응변을 발휘했다고 친다면 그냥 과장은 아닐거야·”
창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아까 봤어? 국회의원을 상대하는데도 여느 옆집 아저씨 대하는 것처럼 긴장도 하지 않더라고· 우리 아버지 동창인 걸 알고 있는 나도 긴장하고 있었는데 말이야·”
“그럼 뭘까? 혹시··· 연희 씨라는 여자 약혼자 아닐까?”
창훈의 눈썹이 역팔자로 휘었다·
“약혼자? 그게 말이 돼?”
“그게 아니면? 외동딸인 연희 씨의 약혼자라면 현진물산 차기 경영자잖아· 그럼 이 모든 판단을 즉석에서 결정할 수 있지· 즉석에서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면 말이 돼· 협상이라는 건 자리에 앉은 사람의 판단을 믿고 도박하는 거니까·”
“그럼 네가 호텔에서 연희가 그 놈 눈치를 봤다는게 진짜 그 뜻인건가?”
“아무래도 둘 사이가 그냥 직원 사이 같지 않아· 현진물산 외동딸이 이 중요한 자리에서 제대로 된 말 한마디 안 했어· 고작 과장 따위한테 발언을 넘기면서까지·”
“씨발···”
창훈은 화가 치밀었는지 소주를 음료수잔에 반쯤 따르고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는 사업권을 못 따낸다는 것보다 연희와의 사이 때문에 더 화난 듯 보였다·
윤 부장은 그 모습을 안타깝게 보다가 말했다·
“만약··· 정말로 임기응변이라면 하필 군산 버스터미널을 지목한 것도 임기응변이었을까? 다른 지역도 아니고 군산이면··· 진짜 소름인데·”
그는 아무래도 이번 사업권을 따내는게 생각보다 쉽지 않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
“강주원 의원? 그래요? 진짜 몰랐습니다·”
연희는 뚱한 얼굴로 대답하는 영훈을 보며 입을 떡 벌렸다·
아까 그 자리에서 말하는걸 옆에서 보며 소름이 끼쳤었는데 아무것도 모르고 그냥 한 말이었다니···
“정말요? 전 강주원 의원의 영향력을 생각해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는데···”
“솔직히 말하면 광주에 조재민 의원이라는 국회의원이 있었는지 그제 연희 씨가 알려주면서 처음 알았습니다· 그런데 강주원이라는 국회의원에 대해서 알고 있었을 리 없잖아요·”
하긴 산에서 게임만 하고 산 사람이 정치에 관심이 있을까 싶었다·
“그럼 군산 버스터미널은 정말 뭐였어요?”
“오면서 그 조재민 의원에게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까 계속 생각했는데 마땅히 떠오르는게 없었습니다· 출판기념회 때 보니까 뭘 주면 받은 값은 하겠다는 생각에 계속 기사를 뒤져봤는데 뭐가 보이는게 없더라구요· 사주로 봐도 크게 걸리는게 없었고·”
“그런데 군산 버스터미널이 눈에 띄었다구요?”
“사실 그걸 보고서도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넘겼습니다· 그런데 아까 김창훈 상무가 한 이야기 덕분에 번뜩 떠올랐습니다· 혜성기업이 잘하는 것· 그래서 던져본 겁니다·”
“던져요?”
“군산 버스터미널이 그가 원하는 건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우리는 이런 걸 해줄 수 있다고 던져본 거죠· 받으면 좋은 거고 아니면 마는 거고·”
“네가 뭘 좋아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린 이렇게 도와줄 수 있다?”
“네· 그런데 바로 받더군요· 당신 말대로 군산이 그렇게 영향력 있는 국회의원이 있는 지역구면 버스터미널에다 자신이 원하는 거 하나를 더 가져오겠네요· 난 그냥 예를 든 거였는데···”
연희는 양손을 흔들며 그게 무슨 문제냐는 듯 말했다·
“됐어요· 괜찮아요· 어차피 버스터미널 현대화 사업한다고 해도 까짓것 손해 얼마나 나겠어요?”
“그것도 그렇지만 조재민 의원이 뭘 들고 오냐에 따라 부담이 좀 생기겠는데요?”
“그냥 원하는 것만 많고 입 싹 다물 것 같아서요?”
“그럴 사람 같아 보였으면 그 자리에서 그런 말 안 했을 겁니다· 강주원 의원은 모르겠지만 조재민 의원은 말했듯이 외부에 보여지는 이미지를 굉장히 중시해요· 그리고 남에게 받은 게 있으면 그 이상으로 보태서 갚아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입니다· 오히려 그렇기에 잘 받지 않으려고도
해요· 그런데 아까 덥석 받은 걸 보면 뭐가 필요하긴 한 것 같은데 말이죠···”
영훈은 질러놓기는 했는데 자신의 예상을 뛰어넘는 짐을 들고 올까 걱정이 되긴 했다·
오히려 연희는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다·
“그럼 뭐가 걱정이에요? 그거 받아서 아무것도 안 된다면 모를까 봉선동이 된다면 걱정할게 하나도 없죠 히힛···”
그때 영훈의 핸드폰으로 전화가 걸려왔다·
저장되 있지 않은 핸드폰 번호·
누군지 짐작이 갔다·
“현진물산 최영훈입니다·”
“조재민 의원님 보좌관입니다· 조금 늦었지만 군산항의 벽란도라는 음식점에서 뵐 수 있을까요?”
“알겠습니다· 지금 출발하겠습니다·”
전화를 끊자 연희가 바짝 다가왔다·
“바로 보자고 해요?”
“그래도 배려를 할 줄 아네요· 서울에서 내려왔다고 일정이 빡빡할거라고 생각했나봅니다·”
“그것도 그렇지만 일단 선물을 주는 건 우리니까요· 가요!”
“아 대리 부르세요· 아까 술 마셨으니까·”
그렇게 두 사람이 광주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낼 때 서울의 현진물산 사옥에서는 긴급 임원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요?”
송은채 사장이 보기 드물게 언성을 높였다·
그리고 왼편에 자리한 임원들 중 한 명인 영업본부장 차지열 상무가 참담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죄송하고 말고 일단 상황을 설명해봐요!”
“갑자기 흑룡강성 대표회의에서 유연탄 광산의 개발과정 문제점을 들고 나오면서 작업을 중지시켰습니다·”
“그럼 대책이 있어야 할 거 아닌가요?”
“성급 인민정부에 보고가 올라간 상황이라 국무원에서 지시가 내려오기 전까지는 제 인맥으로도 막기가 쉽지 않은 상황입니다·”
“작업이 얼마나 중지될 것 같아요?”
“최소 6개월에서 최대 1년이 걸릴 수도 있습니다·”
송은채 사장은 머리를 감쌌다·
그때 홍승대 실장이 허겁지겁 달려오더니 말했다·
“큰일입니다· 흑룡강성 유연탄 광산 작업 중지된 사실이 증권시장에 흘러나갔습니다· 내일 오전부터 주식이 급락할 겁니다·”
“우리도 방금 안 일 아닌가요? 그게 어떻게 벌써 증권시장으로 빠져나갔죠?”
“누군가 일부러 정보를 흘렸을 가능성이 큽니다·”
홍 실장은 그게 누군지 알 것 같았지만 감히 입 밖으로 내지 못했다·
증거도 없이 범인을 지목했다가 나중에 증거를 찾지 못한다면 그 뒷감당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건 송 사장 역시 마찬가지였다·
흑룡강성 유연탄 광산 개발 사업을 이뤄낸 핵심 키맨은 다른 누구도 아닌 차지열 상무였다·
이 문제를 풀 유일한 열쇠가 바로 그다·
< 미래를 위협하려는 사람들(4)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