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피하지 못한 화살(4) >
강 실장이 나간 사장실은 제법 무거운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송은채 사장은 생각지 못한 물건 때문에 머리를 짚으며 고민에 빠져 있었다·
“그러니까 군산조선소를 매각시켜서 현진중공업에 붙인다는 거지?”
“일단 그렇게 그리고 있습니다·”
“고 부장은 현진중공업이 이걸 받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고?”
“맞습니다·”
“우리가 이걸 해줘서 괜히 위험을 무릅쓰게 될까봐 난 걱정이 되는데?”
“덩치가 커진 현진중공업이 현진물산을 위협할까봐 걱정 되십니까?”
“후··· 아니라고는 못하겠네·”
“군산조선소는 1조 원이 넘는 큰 덩치입니다· 소화하는 데만 시간이 꽤 걸릴 겁니다· 그리고 생각을 바꿔보시는게 어떨까요?”
“어떻게?”
“군산조선소를 현진중공업에게 제시할 때면 현진관광이 현진물산의 소유가 된 이후일 겁니다· 저는 임창호 회장님에 대해 잘 모르지만 만약 제가 임창호 회장이라면 현진물산이 내가 잡아먹을 상대라기보다는 내 것을 더 빼앗아 가지 않을까 걱정할 것 같습니다·”
송 사장은 차분히 커피를 마시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수많은 고층빌딩 숲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창가로 가며 말했다·
“회장님은 무서운 분이야· 아직 단 한 번도 우리 연희한테 살가운 표정을 지어준 적 없었어· 친정이 어려워지고 내가 동생을 도와줄 때도 명동 사채시장 따위에 현진그룹 냄새도 안 나게 하라고 불호령을 내렸었지· 그때는 어찌나 서럽던지··· 연희 아빠가 저렇게 되고 내가 이 자리에 앉
을 때 말씀하셨어· 회사에 단 1원이라도 손해를 보게 하면 당장 사장을 교체하겠다고·”
영훈은 그녀의 넋두리에 그저 가만히 앉아 있었다·
송 사장은 영훈을 보고 피식 웃으며 재차 말을 이었다·
“최 과장은 복에 겨웠다고 생각하고 있지?”
“사실 사장님의 아픔이 잘 와닿지 않는 건 맞습니다·”
“하하 맞아· 그럴 거야· 미안해·”
“미안해하실 것까지는 없습니다·”
“그냥 불안해서 그랬어· 난 솔직히 최 과장이 오기 전만 해도 여기만 잘 지키면 우리 식구 잘 먹고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했거든·”
“제가 불청객인 셈이네요·”
“내가 초대한 불청객이라고 해야 맞을까? 그런데 그 불청객이 너무 고마워· 자꾸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이끌어주고 있는데 내가 거기에 따라가지 못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그게 좀 문제지만 말이야· 일단 군산조선소는 어차피 지금 당장 움직일 수 있는게 아니니까 눈앞의 것부터
하나하나 처리해볼까?”
“그러시죠·”
“중국어 할 줄 모르지?”
“네·”
“강 실장이랑 같이 다녀오는거 어때? 차 상무 대신에 주췬이라는 사람과도 안면이 터 있고·”
“그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연희도 데리고 가면 도움이 될 거야· 중국어도 꽤 잘하고 센스도 있으니까·”
“알겠습니다·”
“그리고 이번 일··· 아니다· 그럼 나가봐·”
송 사장은 이번일을 잘 처리하면 보너스를 두둑하게 준다고 하려다가 연희가 예전에 했던 이야기를 기억해내며 그만두었다·
속을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지만 적어도 일을 맡겨놓으면 그처럼 안심이 되는 사람이 없다·
그렇기에 송 사장은 마음이 복잡했다·
우명그룹의 제안을 받는 순간 이상하게 최 과장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우선 중국에 출장을 보냈으니 생각할 시간은 생긴 셈이었다·
송 사장은 그동안 연희에 대한 생각도 정리해야겠다고 다짐했다·
*
사장실을 나온 영훈에게 연희가 다가가 물었다·
“광주 건 보고 했어요?”
“네· 아마 저랑 중국으로 가게 될 겁니다· 준비하세요·”
“중국이요? 갑자기? 둘이서만요?”
“아니요· 기조실 강노식 실장님과 같이 가게 될 겁니다· 며칠 다녀올지 모르니까 준비 충분히 하셔야 합니다·”
“우움··· 그렇구나·”
고개를 끄덕이며 슬그머니 영훈의 안색을 살피는 그녀는 지나가는 듯이 질문을 던졌다·
“엄마가 무슨 말 안해요?”
“무슨 말 말입니까?”
“아니 뭐··· 아니에요· 언제 출발할 거예요?”
“나야 언제 떠나도 상관없을 사람이라 강 실장님과 의논해보고 떠나려고 합니다· 강 실장님은 미국 다녀온지 얼마 안 되셨는데 또 나가게 돼서 그게 좀 걱정이네요·”
“그럼 바로 떠난다는 말이네요? 저 잠깐 집에 좀 다녀올게요·”
“다녀올 필요 없습니다· 준비 되고 연락하면 바로 나 데리러 오면 됩니다·”
“아··· 차가 없으시죠?”
영훈은 잠시 연희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다음 주에 필기시험입니다·”
“요즘 필기 어렵다는데··· 그리고 예전하고 달라져서 도로주행 힘들어요·”
“제가 안 해서 그렇지 운동신경이 제법 됩니다·”
“아~ 그 도끼질?”
“그거 운동신경 없는 사람이 했다간 바로 허리 나가···”
“네네~ 알겠구요· 전 이만 출장 준비하러 가볼게요·”
연희는 눈썹을 씰룩거리며 웃더니 재빨리 짐을 챙겨서 후다닥 회사를 떠나버렸다·
*
양 전무 이제는 퇴직해서 자연인 신분인 그는 뻘개진 얼굴로 달려와 신세 한탄을 늘어놓는 준기를 보고 너무 놀라 화도 낼 수 없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강노식 실장이 자신의 아들을 다른 곳도 아닌 인도 오지 주재원으로 보내버릴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홍승대 실장이 돌아섰고 이제 강노식 실장 역시 돌아섰다·
이제 현진물산에 임지은 사장과 연결되는 사람은 손에 꼽을 지경이고 그 중에서 회사에 막강한 힘을 발휘할 사람으로는 차 상무만이 남았다·
양철기는 분노를 토하는 아들을 내버려두고 일단 논현동으로 향했다·
자신들을 구제해줄 사람은 임지은 사장밖에 없음을 아는 까닭이다·
다행히 논현동 자택에 임지은 사장이 자리하고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임 사장이 양철기 전 전무를 살갑게 대한건 아니었지만 말이다·
“검찰 조사 받으시는 분이 자꾸 여기 들락거리면 좋지 않아요· 사방팔방에 저랑 친분있다고 광고할 생각이에요?”
“그게 아니라··· 제 아들놈이 글쎄 인도 주재원으로 발령났다고 합니다·”
임 사장은 짜증이 솟구친 표정으로 쏘아붙였다·
“아이 정말··· 내가 당신 아들래미 인사발령까지 신경써야 해!”
“그게··· 그 인상발령을 주도한 사람이 강노식 실장이라고 합니다·”
“어? 뭐라구요?”
그제야 임지은 사장도 뭔가 이상하다는 걸 알아챘다·
“인도에 있는 주재원이 변형재라는 친군데··· 실은 예전에 제가 추진했던 우크라이나에서 철광석 들여오는 사업을 그 친구가 반대해서 쫓아낸 적이 있습니다· 그런 사연이 있는 걸 뻔히 알면서 변형재 밑으로 보낸건 제 아들더러 사표를 쓰라는 말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걸 강노식 실장이 지시했다고?”
“맞습니다·”
“확실해요?”
“확실합니다· 강 실장이 직접 제 아들에게 인도 가기 싫으면 사직서 책상 위에 올려놓으라고 했다고 합니다·”
“하··· 아줌마! 나 냉수 좀 갖다줘!”
임지은 사장은 가정부가 가져다준 냉수를 벌컥벌컥 마시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한동안 서성거렸다·
당황스러웠음이 틀림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양철기 전무가 날아가고 홍승대 실장이 고무신을 거꾸로 신었다·
차 상무가 뭔가 일을 벌이는 이 와중에 갑자기 강 실장이 마음을 돌렸으니 상황이 심각해졌음이 드러났다·
무엇보다 임창호 회장이 이 사태를 알게 되면 그녀에 대한 신뢰를 다시금 생각하지 않을 수 없을게 분명했다·
사장이 된 이후에 아랫사람을 완전히 자신의 수족으로 만드는 송은채 사장의 수완에 완전히 당한 셈이었으니 말이다·
안 그래도 현진관광이 다가오는 2천억 채권을 막기 위해 현진물산과 현금 주식을 교환할 걸로 크게 실망한 상황이니 말해 무엇할까?
한참을 고민하던 임지은 사장은 양철기에게 말했다·
“알겠으니까 이만 돌아가봐요· 당신 아들 문제는 천천히 생각해볼테니까·”
“감사합니다·”
여기서 더 채근했다가는 죽도 밥도 안 된다는걸 아는 그는 조용히 논현동 집을 빠져나왔다·
남은 임 사장은 차 상무에게 은밀히 연락했다·
이제 현진물산에 남은건 차지열 상무밖에 없다·
차 상무까지 날아가기 전에 치명적인 일격이 필요했다·
*
흑룡강성의 하얼빈시에 도착한 영훈과 연희 그리고 강노식 실장은 두꺼운 점퍼를 더욱 여미며 미리 예약한 호텔로 가기 위해 택시를 잡았다·
“후··· 엄청 추운데요?”
영훈이 으슬으슬 몸을 떨며 말하자 강 실장이 말했다·
“곧 적응 될거야· 그것보다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지?”
“주췬이라는 사람을 만나야죠·”
“아무 계획도 없이?”
“주췬이라는 사람이 연기를 하는 건지 우리와 의사소통에 문제가 있는 건지 잘 모르겠다고 하셨잖습니까· 그럼 만나봐야 정확히 원하는게 뭔지 알겠죠·”
어차피 강 실장은 여기에 오면서 최 과장의 서브로 왔다는 걸 알고 있었다·
실망하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반대로 호기심도 가지고 있었다·
도대체 어떤 능력으로 일을 처리하는건지 궁금한 와중에 송은채 사장이 최 과장과 같이 중국으로 가서 일을 해결하라는 지시에 내심 잘 됐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영훈에게 하는 질문은 그저 궁금해서 하는 질문만이 아니라 영훈의 생각이 궁금해 떠보는 것이 절반이었다·
“그렇군· 저녁에 주췬이 신바이(新百) 백화점 개장 축하 행사에 모습을 보인다고 알고 있어· 일단 그곳에서 만나서 추후 약속을 잡기로 하지·”
전화로는 약속을 잡을 수 없기에 어쩔 수 없이 정면승부를 해야했다·
그 와중에 연희는 미리 준비해온 주췬에 대한 인적사항과 가족관계 서류를 건네주었다·
강 실장은 이미 여러번 봤던 자료라 슬쩍 보고 관심을 다른데 두었지만 영훈은 한참을 보고 생년월일을 다 외웠다·
한국인이나 중국인이나 사주를 보는 것에는 차이가 없다·
애초에 기원을 따지자면 중국 역학에서부터 시작된 학문이 여러 갈래로 퍼져 그 중 하나가 사주명리가 되고 또 한국으로 넘어와 토정비결이 된 게 아니겠는가?
어쨌거나 그렇게 홀로 준비를 하면서 호텔에 도착해 체크인을 하고 나서는 저녁까지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
강 실장은 혼자 무언가를 열심히 준비하는 모양이었고 연희는 호텔 로비에서 한가롭게 시간을 보내는 영훈 옆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댔다·
그리고 호텔에서 이른 저녁을 먹고 신바이 백화점에 도착했을 땐 이미 개장 축하 행사가 한창 진행되고 있을 무렵이었다·
“어? 저기 저 사람·”
연희가 행사장 어느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영훈이 그녀의 손끝을 따라 시선을 옮기니 풍채가 넉넉한 대머리 중년인이 눈에 들어왔다·
인자한 눈웃음을 흘리며 사람들과 악수를 하고 있는 그뿐만이 아니라 그의 옆에는 부인과 자녀들이 서 있었다·
키가 아버지보다 한 뼘은 더 커 보이는 아들은 부루퉁한 표정으로 서 있고 이제 고등학교에 들어갈법한 딸은 아들과 반대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강 실장이 빠르게 걸음을 옮기자 영훈과 연희도 재빨리 따라붙었다·
“안녕하십니까· 현진물산 강노식 실장입니다·”
강 실장이 얼른 다가가 정중하게 허리를 굽히고 인사를 건네자 그의 얼굴이 삽시간에 굳어졌다·
“난 당신들과 할 이야기가 없는데?”
연희가 실시간으로 영훈에게 통역을 해주는 상황에서 강 실장이 말했다·
“일단 저희도 상황이 어떻게 되는 건지 잘 모르고 있습니다·”
“모른다고? 그리고 차지열 상무는 어딨나?”
“한국에서 일을 처리하고 있는데···”
여기까지 강 실장이 말했을 때 영훈이 한 걸음 나섰다·
“반갑습니다· 현진물산에서 나온 최영훈이라고 합니다· 회사의 전권을 가지고 나왔으니 불만이 있다면 제가 다 해결해드리겠습니다·”
영훈의 말을 연희가 빠르게 통역하자 주췬이 미심쩍은 눈빛으로 한참 바라보다가 말했다·
“조금 기다리지· 행사가 마무리되면 위층에서 조용히 차를 하자고·”
“기꺼이 기다리겠습니다·”
영훈이 한 걸음 물러서서 조용히 기다리려는 자세를 취하다가 이번에는 주췬의 가족들에게 다가갔다·
역시 이번에도 정중하게 인사를 건네고는 한명씩 악수를 하더니 주췬의 아내에게 말했다·
“한국의 현진물산에서 나왔습니다· 주췬 인민대표님께서 잘 봐주셔서 편히 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주췬은 무슨 수작인가 해서 계속 눈길을 고정했다·
옆에서 연희가 통역을 해주는 상황이라 의심할 만한 상황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궁금한 마음이었을거다·
“아 그런가요?”
주췬의 아내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할 때 영훈이 멀뚱히 서 있는 아들을 칭찬했다·
“아드님이 훤칠하니 잘 생기셨군요· 혹시 한국에 관심이 있습니까?”
“예? 아니 뭐···”
아들이 당황하면서 대답할 때 영훈은 그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뒤로 물러났다·
옆에서 연희가 고개는 돌리지 않고 다른 사람은 들리지 않게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어떻게 할 거예요?”
“아들이 문제인 집안이네요· 문제는 쉽게 풀리겠습니다· 다만··· 강 실장님이 어떻게 받아들일지가 걱정이네요·”
“네? 왜요?”
“회사에 한중교류 유학 프로그램 하나를 이 자리에서 만들어야 할 것 같거든요·”
< 피하지 못한 화살(4)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