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맞춰지는 퍼즐조각(1) >
기분 좋게 맛있는 식사를 하고 강 실장은 생각할 게 있다며 먼저 방으로 들어갔다· 자연스레 남은 영훈과 연희는 그냥 들어가기가 아쉬워 호텔 라운지에서 한잔하기로 했다·
둘은 조금 전까지 강 실장이 곁에 있어서 말하지 못하고 참아왔던 얘기들을 쏟아냈다·
“난 정말 영훈 씨랑 일하면서 놀란적이 한두 번이 아니지만 오늘은 진짜 너무 놀랐잖아요! 와··· 어쩜···”
연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마작판은 처음이지만 어차피 사람을 보는 건 거의 비슷합니다·”
“그래도 그런 장소와 분위기에서 하나도 안 쫄고 할 말 다하는 걸 보면 영훈 씨는 진짜 강심장이라니까요·”
‘귀신보다는 사람이 낫죠’라는 말을 속으로 삼키며 영훈은 빙긋이 웃기만 했다·
속을 알 수 없는 영훈의 미소를 보며 연희는 와인을 홀짝였다·
술이 들어가고 하얼빈의 야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자 연희는 애써 외면하고 있던 기억이 슬며시 떠올랐다· 아까 마작이 끝날 때 갑자기 영훈이 연희의 손을 잡은 것 말이다·
손을 왜 잡았을까? 꼭 잡을 필요가 있는 상황이었던가?
영훈이 자신의 손을 잡은 것에 대해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를 열심히 고민하고 있는데 여자의 마음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알 턱이 없는 영훈이 일어서며 말했다·
“배도 부르고 술도 들어가니 좀 덥고 답답하네요· 밖에서 잠깐 바람 쐬고 들어가려고요· 연희 씨는 더 마시고 들어갈 겁니까?”
영훈에 대한 야릇한? 생각을 하던 중 영훈이 말을 거니 순간 당황한 연희는 얼굴이 확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뭐··· 혼자서 뭐 하겠어요? 나 잠깐 손 좀 씻고 따라 나갈게요·”
영훈이 고개를 끄덕이고 라운지에서 이어지는 바깥 정원쪽으로 향하자 연희는 후다닥 화장실로 향했다· 술 때문인지 부끄러워서인지 진짜 얼굴이 발그레해 보였다· 거울을 보며 손 부채질로 얼굴을 식히고 메이크업을 다시 손보는데 갑자기 짜증이 치밀었다·
‘저렇게 눈치도 없는 남자가 뭐가 좋다고···’
속으로 투덜대면서도 지워진 립스틱을 다시 예쁘게 발랐다·
소복이 눈이 쌓인 야외 정원은 조명만 열심히 반짝여댈 뿐 고요했다· 영하 10도의 날씨에 춥지도 않은지 우두커니 서서 먼 곳을 바라보고 있는 영훈에게로 다가갔다·
“안 추워요?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는 거예요?”
추워서 손을 비비며 다가오는 연희를 바라보며 영훈이 담담하게 말했다·
“차가운 공기를 마시면 머리가 상쾌해지죠· 복잡한 생각 정리하는 데에는 좋은 방법입니다·”
“복잡한 생각이요? 뭐가요?”
영훈은 대답 대신 연희의 눈을 바라보았다·
몇 초간의 짧은 순간이었지만 연희는 너무 당황스러웠다· 그의 눈길을 피하기도 그렇다고 계속 마주하기도 어려워 그냥 얼어버렸다·
그 순간 영훈이 추워서 맞잡고 있던 연희의 손을 잡아 살며시 아래로 내리며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입맞춤을 했다·
놀라 토끼눈이 된 연희를 보며 영훈이 빙긋 웃고는 말했다·
“내가 가장 잘하는 게 사람 보는 겁니다· 그러게 왜 아까부터 자꾸 내 입술을 보고 있어요?”
“···”
영훈이 연희의 볼을 살짝 쓰다듬은 후 키스를 했다·
*
조재민 의원은 요즘 아침에 눈을 뜨는게 예전처럼 어렵지 않았다·
대개 일반인들은 국회의원들이 일은 안하고 탱자탱자 놀면서 세비만 축내는 세금벌레라고 생각하기 쉬우나 일의 효율과는 별개로 굉장히 바쁘게 살고 있다·
아침 7시 조식 모임부터 시작하려면 새벽 5시에 일어나야 시간을 맞출 수 있었고 10시 전에 집에 들어간적이 없으니 하루에 자는 시간이 5시간도 채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요즘엔 한창 군대에서 구르던 이십대 초반처럼 새벽에도 눈이 번쩍번쩍 떠지는게 마치 젊을적 호기가 다시 차오른 것 같은 느낌이 들곤 했다·
본인도 자신이 이렇게 달라질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강주원 의원이 자신의 앞길을 잘 닦아줄 수 있게끔 보좌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는데 현진물산의 그 이상한 친구를 만난 이후로 아래에서 위를 바라보는게 아니라 위에서 아래를 바라보기 시작했던 거다·
이런 조 의원의 변화를 가장 먼저 알아챈 사람은 당연하게도 김시원 보좌관이었다·
요즘 얼마나 여의도 상황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지 너무도 잘 알기 때문에 자신의 서울대 동창과 선
그런데 오늘 아침 같은 당 사무총장의 보좌관을 하고 있던 선배에게서 카톡을 통해 전해진 소식은 충격적이기까지 했다·
“의원님!”
아침 일찍 광주의 한 기업 식당에서 강연을 끝내고 구내식당에서 직원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 조재민 의원에게 김시원 보좌관이 급히 다가왔다·
조 의원은 식판에 한가득 담은 밥과 국을 먹다가 김시원 보좌관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혼자 있는 자리가 아니고 많은 직원들이 몰려 있는 와중에서 급하게 전할 이야기가 있냐는 물음이 담긴 눈빛이었다·
김시원 보좌관은 남들이 듣지 못하게 조 의원에게 귓속말로 소식을 전했다·
“허허허··· 이거 죄송합니다· 갑자기 급하게 집안에 일이 생겼네요· 이거 참 마누라가 정말···”
“집에 일이 생기셨으면 들어가보셔야죠·”
조재민 의원은 머쓱하게 웃으며 직원들에게 양해를 구하고는 다 먹지 못한 식판을 회수하는 곳에 두고 빠른 걸음으로 식당을 빠져나왔다·
처음에는 조금 빠른 걸음이었지만 회사를 나올 즈음에는 거의 뛰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아는 사람은?”
차 뒷자석에 타자마자 묻자 운전석에 앉은 김시원 보좌관이 빠르게 대답했다·
“민재원 사무총장 보좌관한테 다이렉트로 받은 연락이라 아직 아는 사람이 많지 않을 겁니다·”
“허··· 이래서 정치하는 사람은 구린 짓을 하면 언젠간 탄로난다니까? 중앙에서는 어떻게 할 것 같아?”
“아무리 강주원 의원이라고 해도 뇌물혐의가 수면 밖으로 드러나면 당규에 의해 처리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인 것 같습니다· 민재원 사무총장이 그 이야기를 듣고 불같이 노하면서 바로 진상을 조사하라고 했다니까요·”
“만약 이게 기사로 터지면···”
“강주원 의원은 다음 선거 걱정은 하지도 못하게 공천에서 배제될 겁니다·”
“그럼 끝이군·”
일흔이 넘은 노회한 정치인에게 말년에 뇌물혐의가 터진다?
정치인생은 끝났다고 봐도 좋다·
말년이 깨끗하면 뒤로 물러나서 후배 양성에 주력한다는 명목으로 있는 듯 없는 듯한 권력을 향유하겠지만 더럽게 물러나면 누가 그를 찾을 것인가?
“당장 다음주에 강 의원님 손녀 결혼식이 있습니다· 참석하시겠습니까?”
“당연하지· 양반집 대감이 하야했다고 해도 양반이 어디 가지 않아· 경조사는 기본중에 기본이니까· 다만 내가 전에 지시했던거 잊지 않았지?”
“군산 버스터미널을 공약화 하자는 말씀 말입니까?”
“그래 현진건설에 조감도 미리 신청해놓고 그럴듯하게 구상 좀 해봐· 최 과장한테 연락하면 잘 만들어서 줄 테니까 그걸 가지고 요리하는 건 자네가 돼야지·”
“알겠습니다· 그럼 봉선동 아파트 시공 사업권은 현진물산에 밀어볼 생각이십니까?”
“그렇게 해야겠지· 이번주에 확답 받아놔야겠어· 이럴 때 보면 처남이 LH공사에 입사했던게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단 말이야·”
“만약 처남 되는 분께서 어렵다고 하면 어떻게 됩니까?”
“어려울게 뭐가 있어?”
“입찰이라는게 수많은 종목마다 다 점수를 메기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밀어줬다가 나중에 말이라도 나오면 의원님께 피해가 가지 않겠습니까?”
“강주원 의원 때문에 걱정하는 마음이 이해가 가는데 이건 강 의원 건이랑 달라· 객관적인 점수만 가지고 어디 입찰이 진행 되던가? 법원 판결이 어디 법리만 가지고 해? 왜 전문 용어로 비가격 점수라는것도 있잖아·”
조 의원은 자신 있었다·
봉선동 시공권 정도는 자신이 해결할 수 있다는 자신도 있었고 군산조선소를 이용해 군산경제를 다시금 정상으로 되돌릴 수 있다는 자신도 있었다·
그렇게만 된다면 자신의 정치 인생은 완전히 새로운 전기를 마련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럼 이제 군산 지역에 차츰 모습을 보이셔야겠습니다·”
“마침 내가 어렸을 때 잠깐 군산에 살다가 다시 광주로 갔거든? 한 5년 살았나? 잘 됐지·”
“5년 살았으면 군산 사람이나 마찬가지네요·”
“하하 자네도 이제 정치인 다 됐구만· 맞아· 5년 살았으면 군산 사람이지·”
조재민 의원은 뛰는 가슴을 차분히 가라앉히려고 애쓰며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오늘 어쩐지 군산조선소가 보고 싶어졌다·
힘차게 돌아가는 조선소의 풍경을 상상하고 싶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확히 4박 5일간의 중국 출장이 끝낸 영훈 일행이 중국 출장에서 돌아온 이후 현진물산은 대대적인 인사이동이 벌어졌다·
*
“사장님···”
“어휴···”
임지은 사장은 자신 앞에 침통한 표정으로 두 손을 모으고 있는 두 양반을 바라보며 머리를 짚었다·
이미 냉수 한 컵을 비웠지만 답답해오는 가슴을 달래기엔 그 시원함이 한참이나 부족했다·
“죄송합니다· 뭐라 드릴 말씀이···”
임지은 사장은 고개를 푹 숙인채 변명하는 차지열 상무의 말을 잘랐다·
“아니 무슨 일을 그렇게 안일하게 처리해요? 얼마나 안일하게 했으면 고작 몇 명이 중국 가서 차 상무가 벌인 일이라는걸 다 밝혀내냐구요!”
“제가 직접적으로 지시했는지는 밝혀내지는 못했습니다· 그저 제 실수로 인해 회사에 피해를 끼쳐···”
“그게 뭐 달라요? 어쨌든 계약 해지 됐잖아요! 도대체 어느 한 명이라도 제 역할을 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어요? 나 너무 실망이야· 내가 정~말 사람을 잘 못 봤다니까? 얘! 너 무슨 말 좀 해봐라·”
오랜만에 거제에서 서울로 올라온 김태민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후··· 제가 무슨 할 이야기가 있겠어요? 이미 알아서 사고 다 쳐놨는데?”
“···”
차 상무는 김태민 상무의 지시가 있었기에 한 일이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가까스로 참았다·
문제를 일으키라고만 지시했지 정확히 어떤 방법으로 하라는 말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게 본래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더러운 일을 시킬 때 하는 수법이다·
나중에 지시한 사람이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에 아랫사람이 충성심에 한 일이라고 대충 둘러대기 위해 방법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지 않는 거다·
결국 문제 생기면 자기가 책임지기 싫어서 알아서 처리하라고 해놓고 이제 와서 문제가 생기니 자신더러 멍청한 놈 취급하는 것에 차 상무는 속이 부글부글 끓어 올랐다·
“됐고 이제 어떻게 해야 하니?”
임 사장의 물음에 태민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지금 현진물산에 손을 댔다간 괜히 일만 더 키울 수 있어요· 일단 코발트 광산 인수가 어떻게 되는지 지켜보고 생각해요·”
“후··· 괜히 내가 너한테 짐만 된 것 같다·”
“아니에요· 엄마도 잘해보겠다고 하다 그렇게 된 거잖아요· 이제 며칠 뒤에 입찰이니까 한번 보자구요· 그리고 요즘 할아버지를 쭉 지켜보니까 현진물산에는 아예 관심을 두고 계시지 않아요·”
“그래? 그럼 뭐에 관심을 가지고 계시는데?”
“카타르 LNG선 수주에 일단 올인하고 계시거든요· 일단 가장 큰 일은 그거니까· 이번 수주경쟁에서 최대한 많은 선박수주를 받는걸 목표로 하고 있어요· 예상대로 받으면 수주액만 2조 원이 넘어가니까 현진물산을 인수하고 말고는 할아버지 머릿속에 없는 것 같아요·”
“그렇겠지· 남의 회사도 아니고 어차피 며느리가 운영하고 있는데 자기거라고 생각할 거 아니니? 하여튼 속도 좋아· 그 난리를 치며 본다 안 본다 하더니 이제는 좀 잘하는 것 같으니까 말도 안 꺼내· 내가 이래서 네 할아버지 안 믿는거다·”
“하하 너무 그러지 마세요· 일단 입찰결과 보고 결장하기로 해요·”
“그래 그 수밖에 없겠구나·”
임지은 사장은 이상하게 기분이 찜찜했다·
젊었을 적 태민이 아빠와 연애할 때 귀걸이를 짝짝이로 하고 나섰을 때가 딱 이런 기분이었다·
< 맞춰지는 퍼즐조각(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