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맞춰지는 퍼즐조각(2) >
성주훈 부사장은 기분이 내심 언짢았다·
차지열 상무가 중국에서 손 댄 일이 문제가 생겼고 그 일에 일정 부분 책임이 있다는건 이해하지만 바로 책임을 묻고 계약을 해지한건 섣부른 처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런 일련의 조치들이 자신의 의견은 전혀 묻지도 않은 채 사장실에서 일방적으로 이루어졌다는데 있었다·
아무리 회사의 오너라고 해도 절차라는게 있는데 어떻게 부사장의 의견을 하나도 묻지 않을 수가 있는가?
물론 프록시아 인수 때문에 정신이 없는 상태라고 생각해 물어보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영업본부장 목을 날리는데 부사장도 몰랐다는게 어떻게 보면 쪽팔리는 부분이기도 했다·
또 다르게 생각해보면 차지열 본부장이 조금 독하기는 해도 그 독한 맛으로 지금까지 수많은 사업을 일구어낸 장본인 아니었던가?
저 정도의 인재는 쉽게 구할 수 없다고 본다·
해직시키는 방식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
좋게 끝낸 것도 아니고 저렇게 해직시키면 분명 회사에 악감정을 가질 것이고 그렇게 되면 다른 회사에 들어가서 현진물산에 해가 될 비밀사항까지 마구 퍼트리게 될 거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인사 조치는 섣부른 결정이라는 생각에 성주훈 부사장은 오랜만에 사장실로 향했다·
그런데 송은채 사장은 마치 기다리고 있었던 듯이 그를 반겼다·
“오실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랬습니까?”
“차지열 상무 때문에 화가 좀 나셨죠?”
송 사장이 웃으며 묻자 성 부사장이 머쓱한 표정으로 물었다·
“알고 계셨습니까?”
“제가 부사장님이었어도 화가 났을 거예요· 영업본부장을 자르는데 부사장의 의견도 묻지 않았으니까·”
“그런데도 잘라야 할 이유가 있었다는 거네요?”
“맞아요· 이번 광산 영업 중단건에 차 상무가 깊숙이 개입됐다는 정황증거가 있어요· 하지만 이걸 드러냈다간 중국에서 우리를 신뢰하지 않을 수도 있고 말 그대로 정황 증거라서 법적으로 처벌할 방도가 없기 때문에 해직으로 그친거예요·”
“흐음··· 그 말이 사실이라면 골치 아픈 상황이 맞았군요·”
송 사장은 여전히 그에게 신뢰를 얻고 있지 못함을 느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이라는 단서를 달았다는 것 자체가 송 사장의 일방적인 주장이라는 뜻이었으니까·
예전이었다면 그런 어조 하나하나에 신경을 썼을 텐데 이상하게 최 과장과의 기상천외한 사건들 때문에 담이 커진 건지 별로 신경 쓰이지 않았다·
“그건 어차피 지난 일이니까 잊어버리기로 해요·”
“아 그럴까요?”
마음먹고 따지러 왔던 성 부사장은 사장이 이렇게까지 나오니 더 이야기를 꺼내기 어려워졌다·
“마침 오시면 하고 싶은 말이 있었어요·”
“어떤 이야깁니까?”
“듣고 많이 놀라실 수 있어요· 어··· 솔직히 이 이야기를 하려고 마음 먹는데 며칠 걸릴 정도였거든요·”
성 부사장은 웃음을 터뜨렸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길래 며칠이나 걸리면서 고민을 하셨습니까?”
“아마 들으시면 차 상무 잘린 이야기는 단번에 머리에서 사라질 만큼 충격일 수 있어요·”
“그··· 정도 인가요?”
“제가 사장인게 다행이라고 생각할 정도예요· 아니면 뺨이라도 때릴까 봐 아마 다른 사람에게 말해달라고 부탁했을 것 같거든요·”
웃으며 그런 말을 하니 그저 과장이라는 걸 알지만 저 정도까지 표현한다는 것 만으로도 송 사장의 입에서 나올 발언이 무엇일지 기대도 되고 걱정도 되었다·
“허허··· 이거 청심환이라도 먹고 올 걸 그랬습니다·”
잠시 숨을 고르던 송 사장이 말했다·
“다음달에 집행할 입찰보증금···”
“입찰보증금이 무슨 문제라도···?”
“집행할 수 없을 것 같아요·”
입찰보증금을 내지 않고 입찰하는건 불가능하다·
곧 이번 입찰을 포기하겠다는 선언이었다·
송 사장은 본래 이걸 성주훈 부사장에게 말해야 하는지에 대해 깊은 고심을 해왔었다·
결국 혼자서는 결론을 내지 못해 병상에 누워있는 임지훈 전 사장과 현재 봉선동 TFT팀을 이끌고 있는 고 부장 홍 실장과도 의논을 한 결과 사실대로 이야기 하기로 결정했다·
다른 무엇보다 성 부사장이 가진 영향력을 생각하면 입찰을 포기한 뒷감당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어서였다·
그리고 또 하나 만약 입찰을 포기한다는 말을 흘렸을 때 과연 성주훈 부사장이 그 정보를 다른 곳에 퍼뜨릴 것인지를 확인해야 했다·
“그게 도대체 무슨 말입니까?”
“프록시아 인수를 포기하겠다는 말이에요·”
성주훈 부사장은 생각지도 못한 송 사장의 선언에 그만 얼이 빠져 버렸다·
*
성주훈 부사장은 화를 씩씩 내며 돌아왔다·
그 서슬 퍼런 기세에 직원들은 숨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못한 가운데 박재윤 부장 역시 고개를 숙이며 괜한 불똥이 튀지 않을까 염려했다·
“시팔 진짜 좆같아서 못해먹겠네 진짜···”
드디어 부사장 입에서 쌍욕까지 나오기 시작했다·
오늘 여기 어딘가의 물건 하나는 작살날 거라는 선언이다·
박재윤 부장은 근처 날카로운 무언가가 있는지 슬금슬금 살폈다·
괜히 재수 없게 근처에 있다가 상처라도 입으면 누구한테 하소연할 곳도 없었다·
삼겹살에 소주 한잔 하면서 푸는 수밖에·
“야 이리 와봐·”
역시나 그냥 넘어갈리 없다·
박재윤 부장이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다가가니 성 부사장이 커다란 탁자 옆 작은 의자를 턱 가리켰다·
“앉아봐·”
“네·”
“직원들 다 어디갔어?”
“다들 어제 회식 때 무리한 것 같아서 1층 커피숍에서 커피 마시고 정신 좀 차리라고 내려 보냈습니다·”
부사장 상태가 저런데 직원들을 어떻게 그냥 둘 수 있나?
자신만 빼고 과장급 이하 직원들은 전부 피신시켰다·
사실 어제 부사장이 계산만 하고 갔기 때문에 회식이 9시에 끝난 걸 알지 못하니 할 수 있는 변명이었다·
“너 뭐 들은거 있냐?”
“어떤거 말씀이십니까?”
“프록시아 인수 관련해서 비서실이나 기조실에서 뭐 들은거 없냐고·”
“비서실이랑 기조실 말씀입니까? 음··· 떠도는 소문 같은건 없었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 있으십니까?”
성 부사장은 대답하지 않고 박 부장을 앞에 둔 채 한참을 생각에 잠겼다·
박 부장은 경험상 이럴 때는 가만히 기다리고 있어야 하는걸 안다·
얼마나 지났을까?
“사장님이 프록시아 입찰 포기하시겠단다·”
“네? 어떤거 말입니까?”
박 부장은 잘못 들은줄 알았다·
“프록시아· 네가 좆빠지게 먹으려고 고생하는 그거· 그거 포기하잖다·”
“그걸 왜···?”
지금껏 몇 달간 프록시아 입찰을 위해 밤낮없이 뛰어온 직원만 몇 명이던가?
지금도 호주 현지에서 현장 업체 매장량과 생산량이 데이터와 일치하는지 확인중이고 입찰에 이기기 위해 경쟁업체들 재무상태 체크하느라 허리가 굽을 지경이다·
그런데 그 고생을 해놓고 이제 입찰이 코앞인데 포기한다니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나도 궁금하다·”
“이유를 말 안해주셨습니까?”
“말해줬어· 세원 인터내셔널이랑 골든브릿지 사모펀드 컨소시엄에서 최소 1조 원을 쓸 거라고 하면서 그 이상의 자금은 회사에서 부담스럽다고 하시네·”
“진짜 세원 인터내셔널 컨소시엄에서 1조 원 이상을 쓸거라고 합니까? 얘네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한테 프록시아 따위는 관심도 없다고 했었습니다·”
“알지· 네가 그 이야기 한두 번 하냐? 그런데 일단 저쪽에서 가지기로 작정했나봐· 그런데 그건 그거고··· 1조 넘으면 이거 포기해야 하는 거냐?”
박 부장은 이 순간이 중요하다는 걸 알고 있다·
얼핏 보면 부사장님이 원하는 대답을 말하라고 하는 것 같아도 아무 생각 없이 살살 비위를 맞추려 하다간 된통 혼난다·
그리고 사실 비위를 맞춰주려고 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박 부장은 프록시아의 가치를 상당히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못해도 20년 이상 회사를 꾸준히 먹여 살릴 캐시카우를 장만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매장량은 초기 측정했던 값보다 훨씬 커졌고 생산량은 기술이 발전할수록 더욱 증가할 겁니다· 배터리 수요는 해가 갈수록 폭발적으로 증가할게 분명하니 설사 1조 원이 넘어간다 할지라도 반드시
잡아야 한다고 봅니다·”
“그런데 돈이 없다고 하니 어쩌냐?”
“부사장님께서는 있는 자산을 더 처분해서라도 입찰해야 한다고 보십니까?”
“난 그렇게 생각한다· 신영은행에서 우리한테 떠먹여준 혜성기업· 그거 간판 바꿔달고 현진건설로 봉선동인가 뭐시긴가 그거 한다고 주접 떠는데 그건 계속 주접 떨라고 하고 혜성기업이 가진 부동산· 그거 당장 처분해도 2천억 이상 나오는데 그거라도 잡고 해야 하는거 아니냐?”
생각지 못했는데 돈 나올 구멍이 있는 셈이라 박 부장은 더욱 긍정적으로 말했다·
“그렇네요· 만약 혜성기업··· 아니 이제 현진건설이 됐으니까 하여튼 거기에서 은행에 담보 잡힌게 있는지부터 따져봐야 할 것 같습니다·”
“내가 오면서 재무팀 들려서 확인해봤어· 깨~끗해· 그런데 이거 나만 알겠냐?”
“당연히 사장님도 알고 계실···”
“당연히 알고 있지· 그럼 뭐야? 그 2천억이 아까워서 못 던지겠다는거 아니야!”
또 목소리가 커진다·
“일단 제가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돈 아까워서 못 던진다는데 알아보면 뭐 나오냐?”
방금 전에는 뭐 들은 거 없냐고 물었으면서 괜히 화가 나 심통 부리는 거다·
“혹시 모르잖습니까· 대출까지 받은 그 돈 다시 은행에 넣어서 뭐 하겠습니까?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이자비용이 얼마나 나가는지 아시지 않습니까·”
“내 말이 그 말이야·”
“혹시 다른 프로젝트를 생각할 수도 있는 거고···”
“1조 원짜리?”
부사장의 미심쩍은 눈빛이 충분히 이해가 되고도 남았지만 그래도 뭐라도 하는 모습을 보여야 했다·
“프로젝트가 여러개일 수도 있으니까요·”
“흠··· 그래· 한번 알아봐· 제대로 알아봐· 어물쩍 넘기지 말고·”
“제 스타일 아시지 않습니까?”
박 부장이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하자 성 부사장은 손을 홱 저으며 가라고 한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한번 손을 대면 제대로 처리하는 능력을 가졌기에 부사장이 계속 곁에 두는 걸 모르는 이가 없었다·
일단 부사장 곁을 탈출한 박재윤 부장은 가장 먼저 인사과를 찾았다·
현진물산에서 가장 넓은 인맥을 자랑하는 민홍기 과장이 모르는 일은 제 아무리 들쑤시고 다녀봤자 알아내기 힘들다는걸 알기 때문이다·
슬그머니 인사과에 모습을 드러낸 박 부장이 주변에서 얼굴을 알아보고 일어나는 직원들을 억지로 앉히며 민 과장에게 다가갔다·
“민통~ 바쁘신가?”
박 부장은 후배인 민 과장이 회사 정보를 가장 통달했다 해서 항상 민통이라고 불렀다·
“바쁩니다·”
민 과장이 본 척도 안하고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했다·
워낙에 친하기 때문에 박 부장은 개의치도 않았다·
“바쁜거 알지~ 그래도 우리가 잠깐 커피 나눌 정도 사이는 되잖아? 응?”
“요즘 엄청 예민한 시긴거 아시죠?”
“알지~ 임원 몇 모가지 날아갔고 그것 때문에 빈 자리 차지하려고 떨어지는 낙엽도 조심해야 하는 것도 알지· 우리 민통이 권한은 없어도 괜히 말 나올까 몸 사리는거 누가 몰라?”
이렇게까지 하니 민 과장도 더는 못 버티고 일어섰다·
“담배 한 대만 태우고 다시 들어올 겁니다·”
“흐흐··· 어디로 갈까? 옥상?”
“네· 가시죠·”
민 과장을 데리고 옥상으로 올라간 박 부장은 슬쩍 주변을 돌아보고 말했다·
“혹시 알고 있었어?”
“뭐 말입니까?”
“프록시아 건·”
“프록시아요? 그게 왜요?”
박 부장은 영문을 모르는 민 과장의 표정을 보며 그가 전혀 모르고 있음을 알았다·
조금이라도 알고 있으면 이렇게까지 연기하면서 모른척 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모르고 있구나·”
“뭐 있습니까?”
박 부장은 잠시 말을 아꼈다가 재차 물었다·
“요즘 기조실에서 뭐 하는거 있어?”
“기조실요? 강노식 실장님이 중국에서 돌아와서 뭐 알아보고 있다고 하기는 하던데·”
먹이를 포착한 맹수처럼 박 부장의 눈빛이 돌변했다·
“어떤거?”
“반도체 회사라고 하던데요? 정확히는 모릅니다· 기조실 전체가 달라붙었다고만 알고 있습니다·”
“기조실 전체가 달라붙어?”
“네· 지금 기조실 가면 전화 받을 직원 한 둘 빼고 아무도 없을 걸요?”
< 맞춰지는 퍼즐조각(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