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맞춰지는 퍼즐조각(3) >
다른 것도 아니고 반도체란다·
반도체는 최고의 기술 집약 사업이며 몇 백억 단위로는 엄두도 못 낼 만큼 어마어마한 자본력이 투입되어야 한다·
그런데 물건을 떼어다 팔거나 자원을 캐서 파는 상사가 반도체를 건드린다는 건 상상을 뛰어넘는 일이었다·
박윤재 부장은 민홍기 과장의 말을 듣자마자 감이 딱 왔다·
프록시아 입찰 포기의 이면에 반드시 이 건이 있다는 걸 말이다·
하지만 섣부르게 성주훈 부사장에게 쪼르르 달려가서 보고하는 실수를 저지를 생각은 없었다·
단순히 이 건으로 보고하면 그 반도체 회사가 어떤 회산지 규모는 어느 정도고 매출이며 순이익 그리고 발전 가능성에 회사가 어느 정도로 투자할지까지 싹 다 물어볼게 뻔하기 때문이다·
대답을 못하는 순간 능력 없는 놈으로 찍히는게 당연했으니 일단 강 실장을 만나서 어떤 상황인지 알아야 했다·
그런데 문제는 기조실이랑 그리 친하지 않다는 거?
“민통~”
“왜 또 그러십니까? 불안하게?”
민 과장이 흠칫하며 뒤로 몸을 빼자 박 부장이 얼른 다가와 슬그머니 팔을 잡고 말했다·
“강 실장님이랑 요즘 어때?”
“실장님 바빠서 얼굴도 못 봅니다· 그리고 알잖아요? 강노식 실장님이 양철기 전무님 라인이었던거· 요즘 그것 때문에 기조실 애들이 불안해서 죽으려고 해요·”
“그래?”
“뭘 모른척하고 그러세요? 다 알면서·”
“난 정치에 관심 없어·”
“관심 없으신 분이 부사장님 옆에 딱 붙어 계십니까?”
박 부장이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항변했다·
“민통아· 이거 다 먹고 살자고 하는거 아니냐· 누군 성질 더러운 그 양반 옆에 있고 싶냐? 솔직히 말해서 나도 너처럼 누구 라인 안 타고 가만히 주는 거나 잘했으면 좋겠다· 그렇다고 내가 부사장님한테 엄청 뭘 얻기나 했으면 말이나 안 한다만···”
“에이··· 연봉이 얼만데 자꾸 우는 소리십니까?”
“거 참 인사과장 앞이라서 죽는 소리도 못 하겠네· 어쨌든 묻는 말에나 대답해봐· 강 실장님이랑 친해?”
“실장님이랑은 안 친하고 기조실 친구들 몇몇이랑 친합니다· 왜요?”
“요즘 기조실 애들 힘들 테니까 내가 회식이라도 시켜주려고·”
민 과장이 기가 찬 듯이 물었다·
“누가 봐도 이상한 상황 아닙니까? 누가 알면 혹시 기조실장직 노리나 생각하겠습니다·”
“에이~ 그렇게까지는 생각하지 않겠지· 난 임원 자리 관심 없어· 벌써 상무 욕심낼 연차나 나이도 아니잖아· 그리고 임원은 고액연봉이지만 그래봤자 단기 계약직 아니냐? 명예퇴직 이야기 나오기 전까지 오래 해먹다가 쓸모없다고 하면 해외주재원이라도 나갈란다· 그리고 강 실장님과
도 언제 만나서 인사 한번 해야지·”
“그런데 갑자기 왜 그러시는 겁니까? 원래 남의 부서 일에 신경 안 쓰셨잖아요?”
“내가 궁금했겠냐?”
“아··· 부사장님··· 골치 아프시겠네요·”
“뭐 당연한거 아니겠냐·”
“그런데 그거 아십니까?”
“뭘?”
“저한테 부장님처럼 비슷한 질문 하려고 왔던 사람이 있었던 거?”
“뭔 소리야?”
“임지훈 사장님이 그렇게 되시고 사실 회사 내에 불안한 기류가 있었지 않습니까?”
“그랬지·”
“그런데 송은채 사장님이 부임하고 나서 예상 밖으로 모든 일이 빠르게 정상궤도를 찾았습니다· 그뿐만이 아니죠· 사실 부장님이 계획하시는 프록시아 인수 사장님이 신영은행에서 대출받아온 5천억 아니었으면 지금쯤 절반은 포기하고 있었을 겁니다·”
그건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팩트였다·
“놀라운 일이긴 해· 인정하는 바야·”
“부장님은 모르셨는지 모르겠지만 회사 내에서는 치열하게 암투중이었습니다· 어느 정도로 치열했냐면 양철기 전무님이 그 암투에 찍소리도 못하고 날아갔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물론 짐작은 하고 계셨죠?”
“성추행 건으로 날아간 거잖아· CCTV 증거까지 확보했고· 그걸 사장님이 찍어 날렸다고? 정확한 소스야?”
“아마 맞을 겁니다·”
“허··· 장난 아니시네·”
자신과 닮은 점이 많은 민 과장이 장난기가 심하고 사내정치를 안 좋아하지만 적어도 허튼 소리를 할 사람이 아니라는 건 안다·
“평생 집에서 살림만 했다고 알고 있는데 강단 있는 분입니다· 아까 저를 찾아와서 분위기 묻고 갔다는 사람 라인 바꿔서 사장님께 붙었습니다·”
“그게 누군데?”
“뭘 물어보고 그러십니까? 아마추어 같이··· 어쨌든 그런 판국이라 이건데 놀라운건 그룹 회장님이신 임창호 회장님이 손수 키운 양철기 전무 차지열 상무 다 날아갔습니다· 제가 왜 이렇게까지 말하는지 알겠습니까?”
“나더러 조심하라는 이야기야?”
“네· 혹시나 사장님이 하고 계신 일에 태클을 걸까봐 걱정이 돼서 드리는 말입니다· 그리고 전에도 이런 비슷한 말을 했었죠·”
박윤재 부장은 고개를 갸웃했다·
“결과는 어땠는데?”
“사장님에게 붙었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죽을뻔 했다가 아직 잘 살아 계십니다·”
“섬뜩한 소리 하지 마라· 가슴 떨리니까·”
“공포영화에 조연들이 왜 죽는지 아십니까? 떨리는 가슴 부여잡고 부득불 호기심을 해결하겠다고 어두운 곳에서 혼자 나돌다가 칼에 맞는 겁니다· 가슴이 떨릴 땐 집 밖으로 나서지 않는게 맞아요·”
“네 말도 맞긴 한데 이건 가만히 있을 건이 아니야· 조 단위 금액이 걸린 일이고 회사의 명운이 달린 일이라고·”
“부장님이 어련히 잘하겠지만 부사장님께 보고하려고 할 땐 신중에 신중을 거듭해야 할 겁니다· 자칫하면 부사장님과 세트로 묶여서 나가게 될지도 모릅니다·”
박 부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민 과장의 어깨를 두드렸다·
“고맙지만 그건 내가 결정하도록 할게·”
“뭐 들을거라고는 생각하지도 않았어요·”
“흐흐··· 넌 역시 날 알아· 나중에 소주에 삼겹살이나 하자·”
“목 안 날아가면요·”
“목 날아가면 안 볼 것처럼 말한다?”
“경영기획총괄 부장님이니까 밖에서 시간 내서 보는거지 생판 남이면 뭐하러 봅니까? 가요· 나 담배 다 폈습니다·”
박 부장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소고기 사준다고 해도?”
“그럼 뭐··· 생각해봐야겠네요·”
“새끼 튕기기는··· 흐흐···”
박윤재 부장은 역시 민홍기 과장 만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
기조실에 들러본 박 부장은 민 과장의 말마따나 여직원 둘밖에 없는 모습을 보고 뭔가 진행되고 있다는걸 알아냈다·
민 과장에게 말했던 것처럼 정말 법인카드로 유혹해 회식이라도 시켜주며 꼬셔야 하는지 고민하고 있을 때 박 부장을 본 여직원 하나가 일어서며 말했다·
“어머 실장님 찾으러 오셨어요?”
“어? 어··· 어디 가셨나?”
“방금 오셨다가 15층 가셨습니다·”
“15층? 봉선동 TFT 있는데?”
“네 그렇습니다·”
“거긴 왜?”
“네?”
“아 미안··· 하여튼 고마워·”
“네· 들어가세요·”
여직원의 배웅을 받으며 기획조정실을 나온 박윤재 부장은 바쁘게 걸음을 놀려 엘리베이터 15층을 눌렀다·
반도체 회사 하나를 싹 털어가며 투자할 가치가 있는지 조사하던 그가 갑자기 왜 봉선동 TFT로 향했을까?
생각해보니 봉선동 아파트 시공사 선정 TFT 역시 이상하긴 했다·
아무리 혜성기업을 거의 날로먹다시피 했다지만 아파트 미분양으로 워크아웃을 벗어나지 못했던 회사가 어디 가겠는가?
그런데 또 아파트 시공권을 따내겠다고 우리 회사가 직접 TFT를 만든다는 것도 이상했다·
그것도 해외자원사업부 에이스라고 인정받는 고승현 부장을 팀장으로 앉혀 놨다는 건 이걸 따내겠다고 마음먹었다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신영은행에서 들어온 5천억과 혜성기업· 그리고 봉선동 사업이 진행된 이후 프록시아 입찰을 다시금 생각한게 틀림없었다·
강노식 실장과 고승현 부장을 만나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봐야겠다고 마음 단단히 먹고 TFT 부서 문을 여는데 아무도 눈에 띄지 않았다·
이상하다고 생각해 부서를 둘러보다가 안쪽 회의실에 다가가니 안에 세 명의 사람이 둘러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똑똑···
몰래 엿듣는 건 괜스레 치사해 문을 두드리고 들어가니 놀랍게도 고승현 부장과 강노식 실장 그리고 얼굴이 익지 않은 젊은 청년이 앉아 있었다·
“부장님?”
고 부장이 여기 웬일이라는 듯 쳐다볼 때 박 부장이 강 실장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안녕하십니까· 혹시 나중에 다시 찾아올까요?”
“뭐야 나 찾아 온거야?”
“기조실 가니까 여기 올라가셨다고 해서···”
강 실장이 묻자 쑥스럽게 웃는 박 부장의 시선에 테이블 위 수북한 서류들이 눈에 들어왔다·
재빠르게 스캔하려는 찰나 젊은 청년이 자연스럽게 서류를 모아 살포시 뒤집는다·
딱 봐도 겨우 대리나 달 것 같은 젊은 청년인데 자신의 눈치조차 보지 않고 서류를 뒤집는 걸 보면서 뭔가 싸한 기분이 들었다·
“뭔데? 사적인 거야? 아니면 공적인 거야? 사적인 거면 조금만 기다려줘· 한··· 20분 정도?”
“사적인건 아닙니다·”
“그럼 말해봐· 뭔데?”
박윤재 부장은 난처한 눈빛으로 젊은 청년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강 실장은 태연히 말했다·
“괜찮아· 아 아직 인사 못 했지? 여기 비서실 최영훈 과장이야·”
“최영훈··· 과장이요?”
현진물산에 자신이 모르는 과장이 있었던가?
“잘 모르지? 올해 입사해서 그럴 거야·”
“경력직을 비서실로 채용한 건가요? 특이하네요?”
강 실장은 대답대신 묘한 웃음을 지었다·
그리곤 영훈의 옆자리를 권했다·
“서서 그러지 말고 앉아· 뭔데?”
“긴밀한 이야기라서 그냥 다음에 하겠습니다·”
나중에 둘이 따로 자리를 만들려 했는데 강 실장의 반응이 예상과 달랐다·
“여기서 할 수 없는 이야기는 다른 데서 만나도 대답 못 해줘· 그리고 공적인 일이면 코발트 광산 입찰 건 아니야? 여기서 그거 모르는 사람이 어딨어?”
“프록시아 입찰에 문제가 있다는 것도요?”
강 실장이 괜한 고집을 부린다고 생각해 욱한 마음에 내질렀다·
이렇게 말하면 당황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강 실장이나 다른 두 명 모두 놀라기보다는 재밌다는 표정을 지었다·
“부사장님이 말했군·”
이렇게 되니 따로 이야기할 필요가 없어졌다·
박윤재 부장은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알고 계셨습니까?”
“그래· 그런데 실은 나도 안지 얼마 안 됐어· 너나 나나 그리 큰 차이는 아닐거야· 그래서 만약 코발트 광산 입찰에 관해 궁금한게 있으면 내가 아니라 여기 고 부장에게 묻는게 나을걸?”
이건 또 무슨 말인가?
박 부장은 반도체 회사를 들쑤셔 놓은게 기조실이면서 안지 얼마 안 됐다는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정말입니까?”
“그렇다니까·”
어쩔 수 없이 고승현 부장에게 시선을 돌리니 그가 미적찌근한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윗선에서 결정한 내용입니다· 부사장님이나 경영기획총괄부에 악의를 가진 것도 아닙니다·”
같은 직급이지만 고승현 부장은 박윤재 부장보다 2년이나 늦게 입사했다·
스카이 출신인 박 부장보다 2년이나 늦으면서 지방대 출신인 고 부장이 부장 진급을 동시에 했으니 그가 얼마나 일을 잘하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악의가 있을 거라는게 아니라 합당한 이유를 듣고 싶은 거야· 혹시 반도체 회사에 투자하려고 그러는 거야?”
그 말을 들은 강 실장이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그 이야기 듣고 나 찾아온 거였어? 그건 또 어떻게 알았어?”
“어떻게 하다가 알게 됐습니다·”
“뭘 어떻게 하다가야? 부사장님한테 이야기 듣고 열심히 파보다가 나왔겠지· 그래서? 반도체 회사에 1조 투자할까봐 헐레벌떡 뛰어온 거야?”
“그거 듣고 심장이 벌렁거리는데 가만있을 수 있습니까?”
“기껏 해야 수백억이야· 물론 초기 투자지만 중간에 추가 투자가 들어간다고 해도 천억 내외가 될까? 조 단위 투자는 아니야·”
“반도체 회사라면서요?”
“반도체 생산 포장이 아니라 디자인 설계 쪽이거든· 설비자원이 아니라 인적자원이 핵심인 회사야·”
“그럼 그 돈 어디에 쓸 겁니까? 그냥 놀려둘 거예요?”
강 실장은 대답 대신 시선을 영훈에게 돌렸다·
박 부장 역시 그 시선을 따라 영훈에게 고개를 돌리니 영훈이 악수를 청했다·
“반갑습니다· 최영훈입니다·”
“어 그래· 나 경영기획총괄 박윤재 부장이야· 경력직이면 전에 다니던 회사가 어디였어? 세원 인터내셔널은 아니지?”
“채권회사였습니다· 말씀드리긴 그렇구요·”
“아··· 은행권? 엘리트구나·”
“그렇게 생각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제멋대로 오해하는 박 부장을 보면서 영훈이 미소를 지었다·
애초에 연희가 준 현진물산 임직원 자료에서 과장급 이상 핵심 인사들의 인적사항은 외워 놓고 있었다·
당연히 부사장과 그 밑의 박윤재 부장의 생년월일 역시 마찬가지였다·
“우리 말 돌리지 말고 핵심으로 들어가자· 사장님이 1조 그거 어디다 쓰려고 마음 먹고 계셔?”
“음···”
영훈은 대답 대신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 박윤재 부장의 얼굴을 찬찬히 보더니 말했다·
“지금은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보다··· 혹시 영업본부장 자리 관심 있으십니까?”
< 맞춰지는 퍼즐조각(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