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맞춰지는 퍼즐조각(4) >
순간 당황한 박윤재 부장은 강노식 실장을 향해 물었다·
“제가 지금 잘못 들은거 같은데요?”
“방금 나도 헷갈렸는데 제대로 들은 것 같아· 혹시 상무 달고 싶은 생각 있냐고 묻는 것 같은데?”
“그걸 왜 이 친구가 묻습니까?”
“여기서 직급은 가장 낮아도 힘은 가장 크거든·”
강 실장의 진지한 답변에 박 부장은 다시 영훈에게 고개를 돌렸다·
여전히 처음과 같은 표정으로 바라보는 영훈의 얼굴을 보며 박 부장은 급하게 고승현 부장의 바지를 뒤졌다·
“왜 그러세요?”
고 부장이 당황하는 틈을 타서 얼른 그의 핸드폰을 살핀 그는 강 실장과 영훈에게 손을 내밀고 말했다·
“어디 지금 녹음하고 있는거 아닙니까? 핸드폰 줘보십쇼·”
“그러지·”
강 실장이 피식 웃으며 핸드폰을 내놓았고 영훈도 거리낌 하나 없이 핸드폰을 내밀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박 부장의 머리를 더 혼란스럽게 했다·
“여기에 도청장치 돼있지는 않은지 조사하셔야 하는거 아닙니까? 드라마나 영화 보니까 무슨 기계로 방을 막 훑던데·”
“지금 내가 농담하는 걸로 보이나?”
“저도 농담하는 건 아니었습니다만 농담으로 느끼셨다면 죄송합니다· 그럼 혼란을 가라앉힐 때까지 기다리죠·”
영훈이 팔짱을 끼고 기다리자 박 부장은 천천히 흥분을 가라앉히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옆에서 고 부장이 말했다·
“당황스러우시죠? 저도 처음에 그랬습니다· 실장님은 그 전에 몇 번 보셔서 크게 안 놀라셨는데 전 미친놈인줄 알았어요·”
“너한테는 뭐라고 했는데?”
“음··· 그건 방금 임원을 해보겠냐는 제안보다 훨씬 충격적이라서 이 자리에서 말씀드리긴 그렇습니다·”
“과장이··· 그것도 올해 입사한··· 그치? 올해 입사한 과장이 나한테 며칠전에 목이 날아간 영업본부장 자리를 해보겠냐고 진지하게 물어보는데 이것보다 더 충격적이었다고?”
고 부장은 슬그머니 입꼬리를 올렸다·
“에이~ 고작 임원 되보라고 한게 뭐 충격적입니까? 하··· 참 입은 근질근질하는데 차마 말씀을 못 드리니까 가슴이 답답하네요·”
솔직히 고 부장 말이 틀리지는 않았다·
고작 승진 하겠냐고 권유하는 수준이랑 계열사 하나를 통째로 해먹을 생각인데 계획 한번 짜보라는 말을 들은 건 수준이 달랐다·
박윤재 부장은 팔짱을 끼며 지켜보는 영훈에게 물었다·
“질문의 의도가 뭐야?”
질문의 의도는 당연히 이제 헤어져야 할 부사장 곁에서 그를 빼오고 싶은 게 첫 번째다·
부사장은 초년에 들어온 운으로 여기까지 올라온 사람이었기에 앞으로 뭘 해도 안 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것보다 그의 권력에 대한 집착 역시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두 번째는 박 부장의 특이하다면 특이할 수 있는 사주 때문이다·
본래 그는 직장인이 되면 안 될 사주다·
겉으로 보면 유들유들하고 사람 사귀길 좋아하지만 그만큼 자유로운 영혼이라 떠돌길 좋아하고 놀기를 좋아 한다·
그렇다고 단순히 놀기 좋아하는 한량 사주냐 하면 그건 아니다·
손재주가 좋고 눈썰미가 좋아 예술쪽으로 나가면 굉장한 인재가 되었을 사람인데 그걸 모르고 샐러리맨이 됐으니 타고난 복을 다 누리지 못하고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40대 중반 넘어서 다시 대운이 들어오니 그동안 누리지 못했던 복을 이룰 수 있을 터였다·
게다가 예민한 성격 만큼이나 예민한 촉을 타고나서 자신도 모르게 위험을 피해온 사람이다·
능력은 고 부장보다 못한 사람이지만 위험을 감지하는 능력은 타고 났기에 고승현 부장 같이 유능한 사람을 밑에 두면 잘 써먹을 사람이다·
“차지열 상무님이 나가면서 영업본부장의 자리가 비었습니다· 조직이 정상적으로 굴러가기 위해 필요한 위치에 있어야 하는 사람을 빨리 채워 넣어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마치 얼마 전에 학교에서 배웠다는 말투다·
저 말투부터 적응이 되지 않지만 일단 중요한건 말투가 아니었기에 넘어가기로 했다·
“그걸 왜 네가 정하는데?”
“제가 정할 리가 있습니까? 당연히 사장님께 추천을 해드리는 거죠·”
“아니 그 말이 그 말 아닌가?”
“전 추천만 할 뿐 결정권은 없습니다· 그리고 만약 부장님이 거절하신다면 굳이 강권할 생각 역시 없습니다·”
민홍기 과장 앞에서야 임원 욕심이 없다고 했지만 대기업 직장인인 이상 임원에 관심 없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게다가 이제 직원이라면 달 수 있는 가장 높은 부장을 달았다·
여기서 임원 진급이 안 되면 결국 언젠가는 명예퇴직을 당할 시점이 온다는 이야긴데 만약 임원 승진 후 능력을 보여주기만 한다면 엄청난 연봉이 뒤따를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사장 자리까지 노려볼 수 있는 위치까지 가게 될지도 모른다·
이런 기회를 마다할 수는 없었다·
만약 이게 진짜 기회라면 말이다·
“날 추천하고 싶은 이유라도 들어보자· 너 오늘 나 처음 봤잖아?”
“얼굴은 처음 뵙지만 입사해서 어떤 일을 해오셨는지는 알고 있습니다·”
“그걸 보고 결정했다고?”
아무래도 믿기지 않는 모양이라 영훈은 조금 고민하다가 말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경영기획총괄부의 존재에 대해 좋은 이야기가 들리고 있지 않습니다· 사실상 부사장님을 위한 독립된 부서인데다가 부사장님이 직접 맡아서 집중하고 있던 사업의 매출이 몇 년 전부터 현저하게 떨어지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 그건 원재료 가격이 떨어져서 그런 거지· 그런데 뭐야? 설마···?”
“아직 아무것도 결정된 건 없습니다· 섣부르게 오해받고 싶지는 않군요· 다만 경영기획총괄부서에 부장님과 같은 인재가 썩고 있는 건 효율적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박 부장은 강 실장에게 고개를 돌렸다·
“이게 지금 맞는 이야깁니까?”
“솔직히 난 이유야 어찌 됐든 당신이 영업본부장이 된다고 상상해보니까 나름 잘 어울릴 것 같은데? 그리고 빙빙 돌리지 마· 최 과장이 믿을 만한 사람인지 아닌지는 우리를 보면 알 수 있는거 아니야? 설마 최 과장이 우리 앞에서 농담하려고 바쁜 사람 붙잡아 두겠어?”
“···”
“돌다리 그 만큼 두드렸으면 이제 답을 해· 생각해보겠으면 생각해보겠다고 말하든지·”
이때 영훈이 말했다·
“생각해보는 건 안 됩니다· 이 자리에서 답을 내려야 합니다·”
“왜?”
“발을 애매하게 걸치고 간을 보려는 행태는 그리 좋아 보이지 않으니까요·”
“내가 그런 사람으로 보이나?”
“부장님 직장인에게 임원이 되고 싶냐고 물었습니다· 그럼 대부분의 직장인이면 되고 싶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생각해보겠다고 한다는 건 이리저리 상황 보면서 찔러보겠다는 말 아닙니까?”
고승현 부장도 거들었다·
“난 그 자리에서 제안 안 받아들이면 나중에 한직으로 내쫓길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뭐 최 과장은 그런 의도가 아니라고 말하겠지만 듣는 입장에서는 그렇게 들렸었죠·”
“나도 그럴 거라는 이야기네?”
“그래도 나보다는 덜 할걸요?”
고 부장은 빙그레 웃는다·
어떻게 보면 너보다 직급은 아래지만 더 중요한 일을 제안받았다고 자랑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자랑하는 것 같다?”
“자랑은 아닙니다만 당시에 좀 억울했었는데 지나고 보니까 나쁘지 않았던 제안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아마 부장님도 그럴겁니다·”
박윤재 부장도 이렇게까지 된 마당이니 더는 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 영업본부장 시켜주면 하지·”
“좋습니다· 그럼 한 가지 해주셔야 할 게 있습니다·”
“뭐?”
“부사장님에게 프록시아 입찰 건이 문제가 생겼다는 얘길 듣고 알아보겠다고 하셨죠? 그럼 여기 강 실장님에게 브리핑 잘 받아서 부사장님께 전달하시면 됩니다·”
“그렇게만 하면 돼?”
“네·”
강 실장은 고개를 갸웃했다·
지금까지 상의 된 것도 없는데 갑자기 이런 이야기가 나오니 당황스러운 것이 분명했다·
“정말 이야기해도 된다고? 부사장님한테?”
강 실장이 묻자 영훈이 태연히 말했다·
“반도체 설계 회사가 한두 개가 아니잖습니까· 비슷한거 몇 개 알려주면 되는 거 아닙니까?”
“대놓고 미끼를 던지자고?”
“그거 안 물면 믿어도 되는 분인 거겠죠·”
“음··· 일리는 있는데··· 설마 이걸 물겠어?”
“솔직히 저도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이게 뭡니까? 서로 시끄럽고 얼굴 붉히면서 남의 가장 직장 잃게 만들고··· 진절머리 납니다· 그런데 그러지 않으려면 믿고 함께 가야 할 사람이 누구인지부터 알아야 하지 않습니까?”
“그걸 누가 모르나? 다만 의심해야 할 사람이 부사장님이라서 그런 거지· 어쩌면 자네는 아직 부사장님을 별로 뵌 적이 없기에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건지도 모르겠군·”
그럴지도 모른다·
부사장과 부딪히며 울고 웃었던 경험이 없기에 그의 사주 하나만 보며 냉정하게 결정할 수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영훈은 갑자기 기분이 침울해졌다·
마치 자신이 컴퓨터가 된 기분이었다·
남의 인생을 들여다보며 그때그때 쉽게 판단하며 결정했는데 이게 다시 생각해보니 남들과 공유한 추억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걸 깨달았던 거다·
이 상태로 10년이 지났을 때 과연 사주만 보고 냉정히 사람을 판단할 수 있을까?
왠지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친한 사람이라고 해도 그의 앞날이 어떠하리라는 걸 알고 있다면 잘 될 거라고 응원하면서 밀어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래서 무당이 될 팔자였나 하는 생각에 괜히 우울해진다·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전 그렇게 알고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강 실장은 갑자기 어두워진 얼굴로 일어서는 영훈을 보며 자신이 무슨 말실수라도 했나 생각했다·
“왜? 벌써 가려고?”
“부장님도 영업본부장 자리에 관심이 있다고 하니 제가 할 말은 다 한 것 같습니다· 실장님과 부장님이 알아서 작전 짜셔서 움직이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부장님?”
영훈이 갑자기 쳐다보자 박윤재 부장은 괜히 긴장하며 답했다·
“어? 왜?”
“어차피 많은 고민을 해봤자 결론은 하나 밖에 나오지 않을 겁니다· 스트레스 많이 받지 말고 어떤 게 회사를 위한 일인가만 생각하세요· 성주훈 부사장님을 위한 일과 다수의 현진물산 직원을 위한 일· 이 둘만 고려하면 결론은 간단합니다·”
영훈이 나가고 벙찐 얼굴의 박윤재 부장을 보며 고승현 부장이 키득거렸다·
“졸라 웃기죠? 저도 그랬습니다· 당황스럽고 그런데 사람이 적응의 동물이라고 시간이 지나면 저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됩니다·”
“아무렇지 않게 어떻게 되는데?”
“왜 재벌그룹 회장이 일 년에 몇 천억을 벌었다고 하면 별 감흥이 없잖아요? 그런데 내가 아는 사람이 산 아파트가 엄청 올라서 몇 억 벌었다고 하면 배가 엄청 아프죠· 그 차이입니다· 아예 나와는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되니까 방금 같은 상황도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가게 돼
요·”
“나도 한 긍정하는 사람이라 아마 너처럼 되는데 오래 걸리지는 않겠지만 당황스러운건 어쩔 수 없네· 그런데 실장님 나 진짜 우리 보스한테 미끼 던져야 합니까?”
“들었잖아?”
“시키면 시키는대로 해야 하는 거예요?”
“시키는대로 안 한다고 뭐라 하지는 않을걸? 아마 임원이 못 되고 저~기 인도나 알제리 같은 곳으로 발령받게 될지도 모른다는 거? 아 우리 팀에 있던 양 전무님 아들 있었잖아? 걔 내가 날려 보냈어·”
박윤재 부장은 웃고 있는 강 실장에게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전 부사장님이 이 정보를 임 회장님께 흘릴 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거야 모르지· 부사장님은 그게 회사를 위하는 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수 있잖아·”
“그럼 그게 맞는 것일 수도 있지 않습니까?”
“만약 진짜 회사를 위한 생각이라면 그 정보를 가지고 사장님을 찾을 거야· 만약 그렇다면 부사장님과 함께 갈 수 있겠지·”
“뭐 알겠습니다·”
고개를 힘차게 끄덕이는 박 부장을 보며 강 실장은 희미하게 웃었다·
이상하게 확신에 찬 박 부장보다 침울한 얼굴로 나간 최 과장의 말이 맞을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
침울한 얼굴로 비서실에 나타난 영훈을 보며 연희가 다가와 탕비실로 몰래 이끌었다·
“무슨 일 있어요?”
“네? 아니요· 별거 아니에요·”
“무슨 일 있는 것 같은데요?”
“그냥 기분이 다운돼서 그럽니다·”
연희는 영훈이 입을 열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았다·
본래 그런 성격이니까·
그래서 연희는 굳이 캐묻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럼 우리 맛있는거 먹으러 갈래요? 내가 끝내주는 스테이크 집 알아놨는데·”
확 다가와 팔짱을 끼는 연희 덕분에 영훈은 자신도 모르게 미소가 그려졌다·
“그럽시다·”
둘이 잠시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 미소를 띤 채 탕비실을 나오는데 누군가 영훈을 불렀다·
“최영훈 씨?”
영훈과 연희가 뒤돌아보니 예전 고시원 집 딸인 박세영이 화사한 웃음을 지으며 영훈을 바라보고 있었다·
< 맞춰지는 퍼즐조각(4)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