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잔인한 겨울(2) >
현진중공업 경영기획본부장인 김태민은 아침부터 회장님의 기분이 좋지 않아 보인다는 비서실 직원들의 말에 바짝 긴장하며 들어섰다·
역시나 회장실에 들어서니 몹시도 언짢은 안색으로 창밖을 바라보는 회장님의 모습이 보였다·
“찾으셨습니까·”
“아침은 먹었나?”
“네· 시원한 콩나물 해장국으로 든든하게 채웠습니다·”
“잘했다· 모름지기 아침이 든든해야 하루가 활기차다·”
“명심하겠습니다·”
“현진물산 이야기는 들었고?”
요새 현진물산에 관해서는 입도 뻥끗 안하고 계셨기에 태민도 최근엔 현진물산에 대해 그리 큰 관심을 두고 있지 않았다·
그저 일주일 앞으로 다가온 코발트 광산 인수전을 지켜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아직 듣지 못했습니다·”
“왜? 이제 현진물산이 재미없나 보지?”
재미없냐고 묻는 건 현진물산에 흥미가 떨어졌냐고 묻는 것이었다·
“아닙니다· 뭐든지 억지로 하려고 하면 탈이 난다고 하셨던 회장님 말씀을 기억하고 있기에 때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임창호 회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자세다· 하지만 안테나는 놓지 않고 있어야지· 곤충들이 더듬이를 세우는 이유는 살아남기 위해서다· 더듬이를 세우지 못하는 곤충은 살아남지 못한다는 걸 명심해야 한다·”
“네 할아버지· 명심하겠습니다·”
태민은 변명 한 마디 없이 고개를 숙였다·
할아버지는 되도 안는 변명으로 책임을 회피하는 걸 무척이나 싫어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현진물산이 그 뭐시냐··· 코발트 광산인가 하는 그거 입찰에 참여하지 않을 것 같다고 하던데 못 들었어?”
태민은 귀가 번쩍 뜨였다·
그리고 어제 저녁 양철기 전 전무에게서 걸려왔었던 전화·
긴히 할 이야기가 있으니 시간을 내주면 어떻겠냐는 말에 바쁘다는 말로 넘어갔었던게 생각났다·
퇴사 이후 몇 번 만나봤지만 쓸 만한 이야기는 얼마 없고 순 자기 구제해달라는 이야기만 했었기에 어제 연락도 크게 의미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하지 않았었다·
“그게 정말입니까?”
임창호 회장은 태민을 잠시 바라보다가 말했다·
“네 엄마가 태어났을 때 참 예뻤지· 어릴 때 어찌나 귀엽고 말을 잘하는지 보고만 있어도 행복했다·”
할아버지가 어머니를 예뻐하셨던 건 하도 많이 들어서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어진 말은 긍정적이지 않았다·
“그래서 잘못 키웠어· 너무 오냐오냐 키우니까 떠받들여 질줄만 알았지 남을 존중해줄 줄 몰라· 조금만 기분이 나쁘면 아무리 오래되고 능력있는 직원이라도 무시하고 깔아뭉개기 일쑤지·”
“네···”
“너도 그러냐?”
태민은 화들짝 놀라면서 손을 저었다·
“아닙니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양철기가 왜 나한테 이야기한 걸 너한테 입 꾹 다물고 있었겠어?”
임창호 회장의 통렬한 호통·
화가 단단히 났다는 것도 중요했지만 양철기 전 전무에 대한 노여움도 올라갔다·
이렇게 중요한 이야기였다면 전화로 이야기해도 됐을 거 아닌가?
그깟 성범죄자 때문에 이런 일을 당하니 짜증이 치솟았지만 할 말이 없었다·
분명 양철기 전무가 잘렸을 당시 그리고 그 이후로도 어머니는 그에게 굉장한 수모를 주었음을 직접 보았기 때문이다·
옆에서 말리기는커녕 같이 비아냥댔으니 그리 좋은 마음을 품지 못했을게 분명했다·
“죄송합니다·”
“양 전무가 자리에서 쫓겨나니까 칠푼이처럼 보이냐? 내가 왜 그런 짓을 하고 쫓겨나서 검찰까지 들락거리는 놈한테 고문 자리까지 내 준다고 약속했는지 말했지 않느냐· 그걸 왜 벌써 잊었어!”
임창호 회장은 손바닥으로 탁자를 쾅쾅 두들겼다·
평소에는 기운이 없어 보이지만 아직도 화가 날 때는 저렇게 기운이 펄펄 나신다·
“죄송합니다·”
“밟을 때는 확실하게 밟아라· 감히 고개도 들지 못하게 밟아서 네 그림자만 봐도 벌벌 떨게 만들어· 그렇게 하지 못할 거면 품어라· 이도 저도 못할거면 그룹 오너가 되겠다는 꿈은 접어·”
절대 수긍할 수 없는 말이다·
“반드시 고치도록 하겠습니다·”
“크흠···”
임창호 회장은 헛기침을 하며 불편한 얼굴을 하다가 입을 열었다·
“현진물산이 코발트 광산을 포기하고 그 돈으로 반도체 회사에 투자한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뜬금이 없어도 너무 없었기에 이 말을 듣고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양철기 전 전무가 회장님께 헛소문을 전했을 거라는 거였다·
투자전문 은행이나 사모펀드도 쉽게 할 수 없는게 반도체 회사 투자인데 기껏해야 자원 투자나 하던 회사가 반도체 회사에 투자한다는 건 완전히 쓸데없는 짓을 하는 거다·
“그게 소스가 어디라고 하던가요? 너무 황당한 이야기라···”
“성주훈이가 그리 말했단다·”
“성주훈 부사장이요?”
그게 정말이냐고 되물을 뻔했다·
아무 의미 없고 자신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말은 절대 해서는 안 되기 때문에 가까스로 참은 거였다·
“그가 없는 이야기를 했겠느냐?”
“아닐 겁니다·”
“그럼 이제 넌 여기서 무슨 생각이 드냐?”
“···”
태민은 일단 대답을 미루고 생각에 잠겼다·
정말 프록시아 입찰을 포기하는게 맞는 것인가?
성주훈 부사장이 말했다고는 하지만 정말 완전히 포기한 것인지 그냥 외부에 보여주는 스탠스를 저렇게 취하는 것인지가 확실하지 않았다·
만약 저 말을 믿고 세원 인터내셔널에서 입찰가를 싸게 낸다면 현진물산은 기존에 예상했던 입찰가보다 싸게 프록시아를 인수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게 진짜라면?
현진물산은 스스로 똥볼을 차며 나락으로 떨어지는 셈이다·
반도체 회사에 1조를 박아 봐야 정말 결과가 좋다고 해도 최소 3년은 맨땅에서 구를게 뻔했다·
“그 반도체 회사가 어딘지도 말해주었습니까?”
“그래· 회사 몇 개 말해주더라·”
회사 이름까지 나왔다면 정말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을 수도 있었다·
지금까지 잘 하다가 갑자기 스스로 똥물에 빠진다?
이게 가능한 일일까?
“아무래도 쉽게 믿기 힘든 내용입니다·”
“나도 완전히 신뢰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런 이해할 수 없는 투자 움직임이 회사 내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건 주목해야겠지· 내가 현진물산을 그냥 내버려둔건 스스로 잘 하기 때문이었다· 은행 돈까지 끌어와서 얼토당토않은 곳에 쓰려는 꼴을 보려고 한게 아니었어!”
“만약 사실이라면 두고 볼 수 없습니다·”
“두고 보지 않으면 가서 깽판이라도 칠 게냐?”
그걸 왜 자기에게 묻는단 말인가?
그룹 회장도 아니고 경영기획본부장이 계열사 사장이자 숙모에게 호통을 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당연히 할아버지께서 불러다 혼을 내셔야···”
“뭐라고 혼을 내? 투자가 말이 되지 않는다고? 평생 배만 보고 살아온 내가 반도체에 대해 쥐뿔이나 알아? 그리고 아직 돈을 집어 넣은 것도 아니잖니· 입찰을 포기했다고 공식 발표한 것도 아니다· 바쁜 며느리 불러다가 실없는 사람 만들 작정이냐?”
태민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그리고 할아버지가 원할 것 같은 해답을 찾아냈다·
“지금 바로 그 반도체 회사를 낱낱이 해부한 다음 현진물산이 해당 반도체 회사에 투자 결정시 대표이사의 투자가 중대한 실수임을 알리겠습니다·”
“그리고?”
“대표이사 해임 건의를 올리겠습니다·”
그제야 임창호 회장도 표정이 풀리며 고개를 끄덕인다·
“명심해라· 조용히 숨어 있다가 삽시간에 목덜미를 물어뜯는 호랑이가 무서운 거지 지나가는 사람 발걸음 소리만 들려도 시도 때도 없이 짖어대는 개새끼가 무서운게 아니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리고··· 양철기 그 친구한테 섭섭해하지 마라·”
“네?”
“네가 품을 그릇을 보여줬다면 서울에서 예까지 달려와서 보고했을 친구다· 워낙 경험이 많고 발이 넓은 친구니 잘 살펴서 네가 품어라·”
“알겠습니다·”
“나가 봐·”
태민이 고개를 숙이곤 회장실을 빠져나갔다·
태민이 나간 문을 잠시 바라보고 있던 임창호 회장은 고개를 흔들며 조선소가 보이는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직도 하나하나 알려줘야 하니 가슴이 답답했다·
지 어미를 닮아서 성격이 급하고 품이 넓지 못하니 그게 걱정이었다·
그렇다고 사람을 휘어잡을 카리스마가 있는 것도 아니라서 이 할애비가 없을 때 그룹을 잘 이끌어 갈 수 있을지가 걱정이다·
양철기 그 친구가 부족한 사람이긴 해도 붙여둘 수밖에 없는게 바로 자기 때문이라는 걸 알아야 하는데 아직도 그걸 모르는 것 같으니···
“쯧쯧쯧···”
임창호 회장을 혀를 찼다·
*
“물었다·”
강노식 실장은 조금은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
영훈은 그가 왜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설마 부사장이 회사 기밀을 외부에 유출하겠냐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결과로 드러나니 실망한 것일 테다·
“어떻게 됐답니까?”
“두 회사 모두 투자 제안이 들어왔다고 해· 그리고 두 군데에 투자 제안한 사모펀드가 골든브릿지고·”
“그쪽에다가는 뭐라고 하셨습니까?”
“기왕 이렇게 된 거 투자받아 볼 수 있도록 노력해보라고 했지· 어쨌든 투자자를 못 구해서 쩔쩔매던 회사들이었고 돈 많은 사모펀드에서 코를 벌름거리니까 마침 딱 기회잖아·”
“투자 잘 받았으면 좋겠네요·”
“마음은 그런데 잘 되겠어? 아무래도 간만 보다가 싹 빠지지나 않을까 싶다· 어쨌거나 ‘AMA 시스템’은 잘 가렸어·”
AMA 시스템은 톱스타 서가은의 남자친구인 김학수가 세운 반도체 설계 회사였다·
“그럼 부사장님 이야기는 됐고··· 투자 규모는 어느 정도로 하는게 적당할까요?”
“1차 투자는 5백억· 2차 투자는 천억 규모로 잡고 있는데 아직 확정적이지는 않아· 그보다··· 이거 꼭 해야 하는 건가?”
“하지말까요?”
“반대하려고 한다기보다 어떤 확신이 있는 거냐고 묻는 거지·”
기획조정실에서 AMA 시스템에 대한 투자를 결정하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
재무구조는 물론이고 기존에 가진 기술력과 영업력 판매루트 및 투자 이후 인재 영입 리스트까지 모두 살펴본 결과 내린 결론은 ‘아직 모르겠다’ 였다·
분명 괜찮은 기술력을 가지고 있고 오너의 능력이 대단하기는 했지만 아직 뚜렷한 실적을 내보인 회사가 아니었기에 긍정적이기는 하지만 이게 될 투자라는 확신을 주기는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강 실장이 이 투자를 적극적으로 반대하지 않는 건 반도체 회사치고 투자금이 크게 투입되지 않고 만약 터지면 투자금의 백 배 천 배 이상을 벌어다 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냥 느낌이 그렇습니다· 이 회사 정말 잘 될 것 같거든요·”
“최 과장이 그렇다면야···”
이때 옆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고승현 부장··· 아니 이번에 특수영업본부장으로 승진한 고승현 상무가 말했다·
“기껏해야 천억이면 그럼 우리가 쓸 수 있는 자금은 거의 다 써도 되는 거네?”
“빌딩은요?”
“계약 막바지야· 협의를 해봐야겠지만 비싸지 않은 금액이라서 금방 처리될 것 같아· 일단 담보로 4천억을 빌려왔기 때문에 돈주머니는 빵빵해·”
“흠···”
이제 정말 거사일에 눈앞에 보였다·
고 상무가 물었다·
“신영에서는 어떻게 하고 있대?”
“다양한 루트를 통해 매입하고 있는 중이라고 해요· 신영은행과 신영투자 그리고 신영생명 모두 5% 직전까지 매입중이라서 거사날에는 못해도 18%는 매입 가능할 것 같다고 하더라구요·”
“그것 때문에 현진관광 주식이 조금씩이지만 계속 오르고 있어· 현진관광에서 눈치를 못채야 할 것 같은데···”
“눈치를 챈다고 해도 설마 그게 경영권을 빼앗으려는 의도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못할 겁니다·”
“그렇긴 하지· 사모펀드도 아니고 1금융권에서 매집하는 걸 보고 적대적 M&A를 위한 흑기사라고 누가 생각하겠어? 단지 신영금융그룹쪽에 문의를 넣게 되면 그쪽에서 답변해주기가 곤란할 거 아니야? 무슨 대답을 해주든 거짓말을 해야 할 테니까·”
“그건 그쪽이 알아서 처리할 겁니다·”
영훈이 신경 쓸 것 없다고 하니 고 상무도 바로 걱정을 접었다·
어쨌거나 저렇게 쉽게 주식을 매집할 수 있다면 일이 너무 쉬워졌다·
하필 무리한 호텔 인수로 회사 자금사정이 안 좋다는게 주식시장에 너무 잘 알려졌다보니 주식 가격이 하방압력을 받고 있었고 매도세가 강하다보니 주식의 반짝 반등에도 크게 매수세가 달라붙지 않고 있었다·
일이 너무 순조로워 불안할 지경이라고 할까?
“후··· 긴장되는군·”
“잘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래· 내일 오전에 현진관광 주식 3%를 가지고 있는 고성저축은행 은행장 만나기로 했다· 그것부터 시작이야·”
고승현 상무는 긴장감에 괜히 허벅다리를 쓸어내렸다·
아무래도 이 긴장은 이 싸움이 끝나기 전에는 진정되기 힘들 것 같았다·
< 잔인한 겨울(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