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잔인한 겨울(3) >
나흘 뒤 15층 회의실·
[현진물산 프록시아 인수 포기하나?]
[현진물산이 호주 코발트 광산업체인 프록시아 입찰을 포기할거라는 소문이 증권가를 돌고 있다· 세원 인터내셔널과 골든브릿지 컨소시엄이 이번 입찰에 전격적으로 참여함에 따라 인수가격이 예상치보다 높게 형성될 가능성이 높아 포기한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가 상당히 설득력 있게 퍼지고 있다· 현진물산
관계자는 해당 소문을 찌라시로 일축하며 아직 호주 현지에 입찰을 준비하는 직원들이 상주하고 있다고···]
영훈은 아침에 뜬 기사를 핸드폰으로 확인하곤 고 상무에게 말했다·
“예상보다 늦게 뜨긴 했네요·”
부사장을 통해 말이 나간 직후 증권가에 소문이 돌거라 생각했는데 막상 입찰이 며칠 앞으로 다가온 지금에야 증권가에 소문이 돌았다·
“굳이 소문을 내야 할 필요는 없었을 테니까· 지금은 그저 우리 상황이 어떤지 궁금해서 떠보려고 뿌린걸 거야·”
“부사장님은 어때요?”
영훈의 물음에 강 실장이 잠시 고개를 갸웃하다가 말했다·
“어제는 출근하자마자 사우나에서 쉬다가 오후에 올라와서 대충 시간만 때웠다고 하던데? 아예 의욕을 잃은 것 같아·”
영훈은 고개를 저었다·
“의욕을 잃은게 아닐 겁니다·”
“그럼?”
“지금은 자신이 할 일이 없으니 체력을 비축하는 겁니다· 나이가 들면 무언가에 집중할 때도 상당한 심력을 소모한다고 해요· 그러니 자신이 움직여야 할 순간 모든 심력을 쏟아낼 수 있게 준비하는 겁니다· 고작 이런 정도의 일로 자신의 자리를 포기할 사람이 아닙니다·”
강노식 실장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얼굴로 말했다·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 난 20년 가까이 부사장님을 뵀지만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거든· 최 과장이 부사장이랑 만나본 시간이 고작 몇 시간 안 되지 않나?”
“짧은 순간의 만남이라고 해도 사람을 깊게 알 수 있는 법이니까요· 경계를 늦춰서는 안 될 겁니다·”
“비밀엄수야 걱정하지 마·”
강노식 실장은 며칠 전에야 봉선동 TFT가 무엇을 위해 만들어진 조직인지 알았다·
당시 느꼈던 놀라움은 그가 회사에 입사한 이래로 가장 충격적이었다고 봐도 좋았다·
아마 조재민 의원이 구색으로 갖춰놓은 봉선동 아파트 시공권까지 갖다 바쳤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더 놀라겠지만 그건 이번 인수전과 관계가 없는 사실로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강 실장은 봉선동 TFT가 정말 순수하게 구색으로만 갖춰놓은 조직으로 알고 있는 중이었다·
“며칠만 참으시면 됩니다·”
“나야 어차피 AMA 시스템 투자건만 손대고 있으니까 나머지 일은 지켜만 보면 되는 것일 테고·”
“유연탄 광산을 잘 처리해주셔서 그런 거죠·”
“내가 처리했나? 최 과장이 처리하고 나야 설거지만 한 거지·”
중국 출장을 다녀오고 나서 일주일도 채 지나지 않아 유연탄 광산이 다시 정상적으로 가동되기 시작했다·
적어도 내년초는 지나야 일이 정상적으로 돌아가지 않겠나 싶었는데 다행스럽게도 정상가동을 시작해 떨어졌던 주가도 빠르게 원상회복됐다·
“영업팀 고생했으니 회식이라도 시켜줘야 하는거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인천항에 들어와야 할 유연탄이 당장 막혔으나 영업팀이 발로 뛰며 구해와 다행히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박 상무 발령받으면서 유연탄 때문에 정신없다고 회식도 못 했잖아· 잘 처리됐으니 박 상무 승진기념 겸해서 회식하겠지· 챙겨주고 싶은 마음은 이해하지만 이번 현진관광 인수전이 코앞이니까 우린 우리 일만 집중하자고·”
영훈은 맞는 말이라고 생각됐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죠·”
“사장님은 어때?”
“여러가지 생각이 많으신 것 같습니다· 얼굴이 밝지는 않으세요·”
“흠··· 그렇겠지· 나 같으면 밤에 잠도 잘 오지 않을 거다·”
“그래도 의외로 잘 버텨내고 계십니다·”
“그게 희한해· 사장님이 그렇게 강단 있는 분인지 몰랐거든· 감히 회장님 뒤통수를 치고 계열사를 먹어 치울 생각을 하니까 말이야·”
고승현 상무가 말했다·
“현지 직원들은 어떻게 할 거야?”
“입찰 며칠 전에 복귀시키면 빠르게 눈치챌 겁니다· 그냥 느긋하게 관광이나 하고 오라고 하세요· 입찰 현장에 직원 몇 명 보내놓고 눈치나 보게 하시고·”
“그게 맞겠지·”
“매입은 어떻게 되어갑니까?”
“신영금융에서 예상처럼 매입을 다 완료한다고 치면 우리가 알고 있는 현진관광 주주들에게 추가 매입한 지분까지 다해서 간신히 50% 가능할 것 같아· 현진관광 주식을 2천억으로 교환한게 컸어·”
“주주들이 비밀엄수는 잘 지켜줍니까?”
“시가의 세 배를 쳐주기로 했으니까· 지정한 날 시간 외 거래를 통해 거래하는 거라 그전까지 비밀유지 안 해주면 앉아서 세 배 차익을 먹을 수 없잖아· 일단 고성저축은행 지분 3%와 도원시멘트에서 1·5% 그리고 명동 사채에서 유명한 큰손이라는 유지란 씨한테서 2% 확보하기로 했다· 그 외에도 적게는 세 배
많게는 다섯 배까지 주기로 약속하고 매입하기로 했어·”
“잘됐네요·”
“유지란 씨는 좀 어려웠어· 생각보다 아주 까탈스럽고 보통내기가 아니었거든·”
“세 배나 쳐준다는데도 어려웠습니까?”
“가격 때문이 아니었어· 이상한 조건을 걸어서 문제였지·”
“이상한 조건이라뇨?”
“사장을 만나고 싶다는 거야· 만나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듣고 싶다는 거였어·”
“그래서요?”
“지금은 곤란하다고 했지· 일이 끝나면 약속을 잡겠다고 했고 순순히 승낙했어·”
“궁금하네·”
“나도 마찬가지야· 사장님께 보고하니 알겠다고 하시더라고· 두 여성 파워가 만나서 무슨 이야기를 나눌지 나도 궁금해·”
“어쨌든 일이 잘 풀렸습니다·”
“남은 건 피델리티 자산운용이 가진 2·3% 지분인데··· 마침 피델리티 아시아 지부 CEO가 일본에 있다고 해서 내일 다녀올 생각이야· 잘 처리되면 무난하게 50% 확보 가능할 것 같아·”
“넘겨줄까요?”
“넘겨주지 않아도 우리쪽을 지지해준다고 위임장만 써주면 되는데 아무래도 세 배나 쳐준다고 하면 넘기지 않을까 싶어·”
“만나보면 알겠죠·”
마음 같아서는 같이 가서 도와주고 싶지만 모든 일을 자신이 다 처리할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여기 사람들은 자신보다 훨씬 능력있고 똑똑한 사람들이니 잘 할 것이다·
*
현진관광 사장실·
임지은 사장은 여유 있게 홍차를 즐기며 경제 뉴스를 시청 중이었다·
사실 임 사장은 경제 뉴스를 그다지 재미있게 보지 않았지만 사장의 자리에 있으면서 경제 돌아가는 걸 모르는 안 되기에 억지로 보는 거였다·
그래도 경제 채널 중에 재밌게 보는게 있다면 부동산이나 주식에 대해 궁금해하는 시청자가 전문가와 직접 통화하면서 상담을 받는 프로그램이다·
누구는 아파트를 얼마 대출을 끼고 샀는데 아파트 값이 오르지 않아서 고민이라거나 주식을 얼마에 샀는데 물려서 고민이라는 등의 사연을 보고 있으면 은근 시간이 가는지 몰랐다·
오늘도 마찬가지로 그런 안타까운 사연들이 이어지고 있었다·
[다음 상담받을 사연은 현진관광에 묶인 내 주식 이제 팔면 될까요? 라는 질문을 보내주신 분입니다· 안녕하세요~]
임 사장은 마침 오늘은 자신의 회사 이야기가 나오자 흥미로운 얼굴로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근 몇 년간 계속 지지부진하던 주가가 몇 주 전부터 조금씩 상승중이었기에 임 사장도 요새 주식 오르는 맛을 느끼는 중이었는데 마침 잘 됐다 싶었다·
[안녕하세요· 중랑구에 사는 주부 김순옥이라고 합니다·]
[현진관광에 주식이 묶이셨다구요? 투자한지는 얼마나 되셨습니까?]
[3년 전에 누가 호텔주를 추천해주더라구요· 경기 잘 안 타고 매출 꾸준하고··· 또 은근히 배당 이익도 있어서 쏠쏠하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마침 돈이 생겨서 투자를 하게 됐습니다·]
[3년 전이면 대략 2만 원에서 2만 5천 원 선인거 같은데 맞습니까?]
[맞아요· 2만 2천 원에 샀거든요·]
[그럼 지금 원금 회복이 가까워져 오는 수준이네요·]
[그래서 고민인 게 요즘 현진관광 주식이 반등하니까 이걸 원금회복이 가까워 오는 이때 팔아서 원금회복이라도 해야 하나 아니면 계속 들고 있어야 하나 고민이에요· 막상 팔고 나서 주가가 계속 오르면 너~무 속상할 것 같아요·]
[이해합니다· 내가 샀을 때는 떨어졌다가 원금회복 할 때 팔고 나니까 주식이 계속 쭉쭉 오를 때 정~말 속상하죠·]
전문가는 현진관광 주식 차트를 띄워놓고 설명을 이어갔다·
[차트상으로 보면 만 7천 원에서 2만 천 원 사이의 박스권을 오가던 현진관광의 주식이 두 달 전쯤에는 만 7천 원의 지지선을 깨고 급락하는 모습을 보여 줬습니다· 여기까지만 해도 현진관광의 주식이 한 단계 추가 하락하는 게 아니냐는 분석이 나왔는데 그러다 갑자기 11월 24일자에 대규모 거래량이 터지면
서 V자 반등을 시작하죠· 그리고 지금 오늘 2만 천 원의 저항선을 돌파하면서 강력한 힘을 보여주고 있어요·]
[그러니까요· 그런데 궁금한게 도대체 왜 주식이 오르는 건가요?]
전문가는 난감한 얼굴로 설명했다·
[사실 현진관광의 주식이 반등하는 건 어떤 모멘텀이 있어서 그런게 아니라 대표적인 경기방어주인데다가 저평가주이기 때문입니다· 실적이 꾸준하면서 얼마 전에 인수한 페이먼트 호텔 때문에 생긴 부채를 상환하면서 재무적으로도 상당히 건전해졌어요· 때문에 기관에서 현진관광을 비교적 긍정적으로 평가
하는게 아닌가 합니다·]
썰이 길었지만 결론은 자기도 이유를 잘 모른다는 말이었다·
[그럼 주식이 계속 오를까요?]
[현재 증권사 리포트를 보면 전부 현진관광 주식의 목표가로 2만 천원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박스권을 돌파한 상황이라 조금 지켜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여전히 힘을 받는 모습이거든요·]
[그럼 목표가를 얼마로 잡으면 될까요?]
[저 같으면 목표가를 2만 3천 원 정도로 잡으면 괜찮지 않을까 싶은데요? 박스권 돌파로 강한 힘을 보여줬지만 그래도 한번은 쉬어주는 모습을 보여줄 테고 그때 부분 매도하며 차익실현하는 게 올바른 매매라고 보여집니다·]
이때 누가 문을 두드렸다·
“사장님· 들어가겠습니다·”
비서실장이 뭔지 모르게 다급한 표정으로 들어섰다·
“뭔데?”
“사장님 지금 우리 주식이 계속 오르고 있습니다·”
“얼마나?”
“방금 8% 돌파하는 것까지 보고 왔습니다·”
“8%? 정말?”
임지은 사장이 화색어린 얼굴로 되물었다·
그녀가 사장으로 취임한 이래 하루에 8% 이상으로 올랐던 적이 얼마 없었다·
근 몇 년간 지루한 박스권 횡보 장을 보여주던 주가가 요 근래 들어 눈에 띄게 상승하고 있던 와중에 오늘 8%가 넘는 상승을 보여주니 기쁘지 않을 수 없었다·
CEO는 모름지기 주가의 상승으로 주주들에게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어야 한다·
물론 능력이 떨어진다고 한들 사장 자리가 위태롭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주식이 올라준다면 대외적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평가가 완전히 달라질 게 분명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주식이 이 정도까지 오를 이유가 없습니다·”
“누가 주식을 사고 있는데?”
“국내 기관에서 올리는 걸로 보이고 있는데 정확하게는···”
“그럼 뭘 걱정해? 걱정해야 할 이유가 있어?”
비서실장은 무언가를 이야기 하려다가 다물었다·
적대적 M&A의 가능성을 꺼내보려고 해도 대기업 계열사를 상대로 시도된 역사는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국내 주식시장 역사상 적대적 M&A가 성공한 사례 역시 극히 드물었다·
더군다나 해외 투자자도 아니고 국내 기관에서 사들이는데 주의를 기울여야 할 이유가 있을까 싶었던 거다·
“그래도 특별한 이유 없이 주식이 상승하는건 전례가 없는 지라···”
“요즘 경기가 너무 어려우니까 경기방어주에 이목이 쏠려서겠지· 그리고 우리가 얼마 전에 신영은행 대출까지 갚았잖아· 재무적으로도 건실해졌고·”
임지은 사장은 방금 전에 전문가가 해주었던 말을 되풀이했다·
비서실장은 그녀의 반박에도 고개를 갸웃하며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경기방어주라서 이목이 쏠리는 건 이해하지만 그렇다면 조금씩 점진적으로 상승해야 할 텐데 지금 상승폭은 마치 작전주가 매집했다가 이후에 폭발시키려는 모습인듯 강력합니다· 오전에만 거래금액이 백억을 넘겼으니까요· 그리고 2천억을 갚긴 했지만 아직 부채는 상당히 남아 있는 상태입니다· 급한 불만
끈 셈인데···”
“주식투자자들이 그런거 어떻게 다 생각하겠어?”
그때 TV에서 급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머! 현진관광 주식이 계속 오르고 있어요! 어떡해요?]
[오늘 현진관광에 대해 이야기하는 중이라서 그런 걸까요? 상당히 힘이 좋은 모습을··· 어? 벌써 10% 넘게 오르고 있습니다·]
[선생님 벌써 목표가가 다가오고 있는데 일단 매도 걸어놓을까요?]
[아 네· 일단 일부만···]
전문가가 땀을 닦으며 말하고 몇 초 지나지 않아 상담자의 비명에 가까운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세상에! 순식간에 팔렸어요! 계속 올라욧!]
임지은 사장은 급히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주식차트를 켰다·
현진관광의 주식이 미친 듯이 매도물량을 잡아먹으며 순식간에 16%를 돌파하는 중이었다·
각 증권사 HTS에서는 일제히 주목할 만한 주식으로 현진관광을 지목했고 거래량은 폭증하기 시작했다·
주식이 미쳐 날뛰고 있었다·
< 잔인한 겨울(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