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잔인한 겨울(4) >
이날 현진관광 주식은 장중 –3%에서 28%까지 등락을 거듭하며 마치 작전주처럼 움직여댔다·
그 누구도 현진관광 주식이 이렇게 날뛰는 이유를 알지 못했지만 일단 지속적인 상승추세 와중에 폭발한 거래량은 수많은 개미들을 홀리게 만들었다·
당연히 거제에서 카타르 LNG선 발주에 목을 메고 있는 현진중공업 경영진들 귀에도 이 소식이 안 들어갈 수 없었다·
“뭔데? 뭔데 이 난리야?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는 거야?”
임창호 회장의 날카로운 목소리에 수많은 임원들 중 누구 하나 입을 여는 이가 없었다·
임 회장의 시선이 태민에게 돌아갔다·
“너는 뭐 아는거 없냐?”
“호재라고 할 만한 건 없습니다· 오히려 주가가 빠졌으면 빠졌지 이런 비정상적인 상승은 확실히 이상합니다·”
“누가 쓸어 담는 중이야?”
“알아본 바로 국내 기관에서 주로 매입했다고 합니다· 외국자본은 신영모건스탠리에서 운용하는 아시아코어펀드에서 추가 매입한 것으로 알려왔습니다·”
“직접 확인한 거야?”
“네· 신영금융 본사에 문의해서 확인했습니다·”
“왜 갑자기 우리 회사 주식을 샀대?”
“투자 목적이라고만 밝혔습니다·”
“호텔 주식이 우리 하난가?”
“정확한 이유는 밝히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명확한 투자 목적이 있다고 치더라도 잘 밝히지도 않구요·”
“그럼 아무도 모른다는 거네? 누가 우리 회사 주식을 미친 듯이 사고 있는데 아무도 이유를 몰라? 당신들 뭐하는 사람들이야!”
임창호 회장의 호통에 임원들은 다들 고개를 숙였다·
사실 모르는게 당연했다·
현진관광 주식 급등은 따지고 보면 현진중공업에 상당한 호재다·
현진중공업이 가진 현진관광 주식이 무려 6%다·
따져보지는 않았지만 못해도 수십억 아니 백억 이상의 평가금액 상승이 있을 거다·
그럼에도 임 회장이 호통을 치는 이유는 혹시나 회사 경영권에 이상이 생길까 봐 걱정하는 것인데 적대적 M&A가 어디 쉬운가?
생뚱맞은 외국 자본이 적대적 인수합병을 추진하려면 주식을 매집하는데만 한세월이다·
그리고 국내 기관들이 가지고 있는 엄청난 양의 주식의 의결권을 외국 자본이 확보하기도 힘들다·
이러니 적대적 인수합병을 생각해냈다가도 슬그머니 입이 다물어지는 거다·
결국 보다 못한 태민이 다시 나섰다·
“별일 아닐 겁니다· 외국 자본이 들어왔다면 분명 티가 났을 게 분명하고 국내 자본은 안 좋은 마음을 먹어봤자 기껏해야 명동 사채시장이랑 조폭들 엮여서 작전주 만드는게 다 아니겠습니까?”
“대주주도 없이 작전주를 만들어? 네 어미가 도와주지 않고 작전이 가능하기는 하냐?”
“최악의 경우를 말씀드린 겁니다· 증권가에서도 그저 지속적인 반등추세를 타고 개미들이 몰리면서 일시적으로 거래량이 폭발했다고 분석했습니다·”
“끄응···”
임창호 회장도 더는 역정을 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라고 해서 특별히 의심이 가는게 있었던 건 아니었으니 뭐라고 할 이야기가 많지 않았던 거다·
이때 임원회의실 문이 벌컥 열리며 비서실 직원이 후다닥 달려왔다·
파래진 안색이 뭔가 급박한 일이 생겼다는 걸 암시하고 있었기에 모든 임원들은 비서실 직원의 입만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야?”
“그게··· 지금 신영모건스탠리 아시아코어펀드에서 임시주주총회를 요청했습니다·”
“뭐? 무슨 이유로?”
“임지은 사장의 무능력한 경영과 전년과 이번년도 배당률을 문제삼았습니다· 실적이 떨어지는 호텔을 매각해 주식을 부양하고 주주들에게 배당을 지급하라고···”
임 회장은 다 듣지도 않고 툭 내뱉었다·
“미친놈들이네?”
태민은 아까와는 달리 심각한 얼굴로 자신이 한 말을 뒤집었다·
“아무래도 이상합니다· 주식이 갑자기 변동이 심한 것도 그렇고 갑자기 기다렸다는 듯 임시주주총회 소집을 요청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아까는 제가 너무 쉽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해야겠어?”
태민은 비서실 직원에게 물었다·
“신영모건스탠리 아시아코어펀드에서 가지고 있는 지분이 어느 정도나 됩니까?”
“오늘까지의 주식 지분 변동사항을 공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확신할 수는 없지만 10%는 넘지 않을까 예상하고 있습니다·”
임 회장이 끼어들었다·
“10%나? 그럼 주식을 거기서 끌어올린건가?”
“확신할 수는 없지만 이 정도 거래량이면 다른 곳도 참여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거래량이 너무 큽니다·”
“태민아·”
“네 회장님·”
“아무래도 주식 가지고 장난을 칠 모양이다·”
태민은 단번에 알아들었다·
“적대적 인수합병을 무기삼아 회사를 위협해 주식을 비싸게 처분하려는 수작이라는 말씀입니까?”
“그게 아니면 갑자기 저렇게 나올 이유가 없지· 지금까지 저런 경우가 없지는 않았잖아·”
“그렇긴 합니다· 저렇게 소동을 벌이고 가진 주식 가격의 몇 배를 챙겨서 나가는 경우가 종종 있어 왔으니까요· 그런데 지금까지 그런 경우는 국내와 관계가 전혀 없는 외국 자본이었는데 신영모건스탠리는 신영은행과 관련이 없을 수 없습니다·”
“섣부르게 움직이지 마라· 내가 신영금융 이경호 회장을 만나봐야겠다·”
“알겠습니다·”
이것만으로는 안심이 안 되는지 임창호 회장은 태민에게 지시했다·
“그리고 넌 주주들을 만나봐라· 주주명부에서 1% 이상 소유한 주주들을 직접 찾아서 위임장을 받든 주식을 사오든 해·”
“자금이 부족합니다· 얼마 전에 신영은행 2천억 대출건도 주식교환을 통해 겨우 마련했던 겁니다· 현재 현진관광이 가지고 있는 현금이라 해봤자 백억이 채 안 될 겁니다·”
임 회장이 쾅 탁상을 내리쳤다·
“멍청한 것 같으니라고! 도대체 회사를 어떻게 운영했길래 회사에 백억도 없어!”
“그래도 연말 호텔 특수 기간이라 매출이 오르는 중이라서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상당한 금액을 확보할 수 있을 겁니다·”
“그 조금이 언제인데?”
“연초는 지나야···”
관광업의 최대 성수기는 7월 말부터 8월 초까지의 여름 휴가와 크리스마스때부터 1월 중순까지의 겨울방학 기간이다·
이 기간은 최대 피크 기간이기에 유명 리조트 회원권을 가진 회원들도 추첨을 통해 당첨되어야 갈 수 있고 비행기 값은 엄청나게 올라간다·
당연히 호텔 숙박 비용 역시 가장 비싼 가격으로 공실 없이 꽉 들어 채울 수 있는 기간인데 문제는 그 기간이라고 바로 돈이 들어오는게 아니라는 거였다·
누가 호텔에서 현금으로 결제하겠는가?
당연히 카드로 결제할 것이고 카드사는 수일 후에 그 결제한 대금을 쏴주게 된다·
그 며칠이 문제였다·
“그럼 위임장이라도 받아와! 주주총회에서 네 애미 끌어내리겠다고 하니 그놈들 입이라도 막아야 할 거 아니야! 이대로 그놈들의 협박에 넘어갈거야!”
“알겠습니다·”
임 회장은 정말 오랜만에 머리가 지끈거리는 걸 느꼈다·
중국발 조선업 불황이 닥쳤을 때 이후로 이런 두통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제 아무리 움직여본다고 한들 뾰족한 방법이 없었고 급기야 아시아코어펀드 측에서 공개매수를 선언했다·
주식은 또다시 급등하기 시작했고 현진중공업과 현진관광은 뒤늦게 백기사를 찾으며 현진관광 주식 매수에 동참했다·
2만 원이었던 주식이 5만 원을 돌파했을 때 드디어 주주총회가 열렸다·
*
광화문 인근의 대형 프랜차이즈 카페·
가장 안쪽에서 커피를 홀짝이던 영훈이 말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신영투자증권 본부장에서 신영은행 그룹전략부문 전략기획팀 상무로 직책이 바뀐 이형준이 대답했다·
“우리야 전문가들이 알아서 한 거고 너희 쪽도 잘 끌어모았네· 막판에 부족한 주식 채운다고 급하게 흔들어서 괜히 손해만 보고 주식 확보도 못하는가 싶었는데 말이야·”
“능력있는 분들이 알아서 잘 하셨습니다·”
약 한 달에 가까운 기간 동안 조용히 매집했지만 그것만으로는 조금 부족했다·
그렇기에 마지막에 주식을 확보하기 위해 시장에 나온 매물을 급하게 매수하느라 주식이 급등하게 된 거였다·
어쨌거나 일은 잘 마무리됐다·
이미 신영금융쪽에서 가진 주식이 워낙 많았고 신영은행 대출을 갚기 위해 교환했던 주식이 12%나 됐다·
사실상 거의 이긴 싸움에서 시장을 통해 부족한 주식을 매집하는 과정으로 마무리 한 것 뿐이었다·
하지만 영훈은 그 과정에서 괜히 자신이 나쁜놈이 된 것만 같아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개미들이 달라붙는 과정에서 상당한 피해를 보지는 않았을까 하는 마음 때문이었다·
이게 다 경제지식이 부족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기업을 인수한다고만 생각했지 그 과정에 소액투자자들이 붙을 것까지는 생각하지 않았었다·
아직 배워야 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라는 걸 다시금 느꼈다·
“우리야 문제가 아닌데 상무님 쪽은 괜찮습니까?”
“아주 괜찮을 리가··· 너희 꼰대가 우리 회장님 면담 신청했어· 회장님이야 모건스탠리가 한 일이라고 싹 잡아 떼겠지만 나중에 그 주식 위임장이 현진물산을 지원했다는 걸 알게 되면 그 뒷일은 내가 감당해야 해· 물론 회장님도 알고 하는 거지만·”
“회장님은 뭐라고 하십니까?”
형준은 입을 씰룩이며 커피잔을 쓰다듬고는 말했다·
“우리라고 어디 해외 투자은행처럼 전 세계를 누비며 엄청난 거물이 되고 싶은 마음이 없겠어? 다만 그럴 환경도 되지 않았고 뭘 하려고 하면 오만 잡것들이 꼬이면서 발목을 잡으니까 그랬지· 뭐 실력이 부족하기도 했고··· 그런데 손자인 내가 적대적 M&A로 크게 먹어보겠다고 하잖아· 처음에는 말도 안 되는
일이고 얼토당토 않다고 생각하셨지만 그래도 날 믿어주셨어·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꽤 그럴듯하다고 생각하셨나 봐· 그리고 지금 흘러가는 상황도 긍정적이고· 당장 평가이익 금액만 4천억이 넘어·”
꼭 돈이 되어서만이 아니라 이번 기회로 손자에게 좋은 경험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을 거다·
“다행스럽군요·”
“날 못 믿으면 지금 주주총회가 벌어지고 있는 와중에 만나줄 이유가 있겠어? 이미 그 전에 만나서 다 해결해줬겠지· 니네 회장님 지금 엄청 열 받았을 거야·”
사실 영훈은 임창호 회장이 어떤 사람인지가 궁금했다·
왜 이렇게까지 현진물산을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지 그것도 물어보고 싶었다·
“아마 그렇겠죠·”
“이제 어떡할 거야? 1조에 다 먹어치우면 깔끔하긴한데 그러면 진짜 현진중공업하고 전쟁이야· 알지?”
“전쟁은 이미 시작한거 아닙니까?”
“대국적인면에서 보면 이 정도는 국지전이라고 봐야지· 여기서 물러나면 서로 깔끔하게 정리되는 거고· 이왕 이렇게 된 거 계열사 분리를 하든가·”
“그것도 좋은 생각입니다· 하지만 손에 들어온 걸 토해낼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현진중공업이나 현진관광은 그 주식 살 돈도 없을 겁니다·”
“휴전은 하더라도 깃발 꽂은 데까지는 우리 거다?”
“양보해야 할 이유는 없으니까요·”
영훈은 지금쯤 주주총회에서 무슨 말이 오가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
시끌벅적한 현진관광 본사 대회의실·
정장을 입은 사람들과 점퍼를 대충 입고 온 소액주주들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단상을 주목하고 있었다·
그리고 저 멀리서 경제지 기자들이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며 분위기를 담느라 분주하게 손을 놀렸다·
“회사 경영은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페이먼트 호텔을 인수하는 과정에서 생긴 부채는 전부 해결됐으며 재무구조는 건실합니다· 때문에 오늘 임시주총에서 건의할 안건은 무의미한게 아닌가···”
현진관광 이진열 부사장이 해명하는 와중에 마흔 중반의 남자가 손을 들었다·
이진열 부사장은 그가 누군지 잘 알고 있었다·
같은 계열사 직원이었기에 오고가며 몇 번 인사를 나눈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현진물산의 고승현 부장이었다·
아니 이제 상무가 됐다고 하던가?
그런데 왜 저 자가 이 자리에 있단 말인가?
“이의 있습니다· 임지은 사장님께서 경영을 맡은 이후 외형 확장에만 열을 올려 주식은 계속 2만 원대를 맴돌았고 배당률도 극히 낮았습니다· 현진관광이 가진 잠재력이 이보다 훨씬 크다고 생각하며 주주의 입장에서 회사가 이런 상황에 이른게 안타깝기 그지 없습니다· 때문에 임지은 사장님의 경영능력에 의
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입니다·”
이진열 부사장은 자신도 모르게 이마에서 흐르는 땀을 닦았다·
그저 위협을 주면서 주식을 비싸게 팔아먹으려는 수작인줄 알았는데 현진물산 관계자가 경영진의 능력을 의심하고 있었다·
이건 상상을 벗어나는 상황이었다·
“배당에 관한 사항은 경영진의 회의를 통해 다음 분기에···”
고승현 상무는 이 부사장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았다·
“그렇기에 현진물산은 현진관광 주식 16%를 보유하고 34·1% 지분의 위임을 받은 대주주의 권한으로 대표이사 해임을 건의하겠습니다·”
이진열 부사장은 그제야 고승현 상무 옆에 가만히 앉아 있는 송은채 사장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 잔인한 겨울(4)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