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잔인한 겨울(5) >
을지로입구역에는 상당수의 금융회사 본사가 몰려 있었다·
그리고 그중 신영금융지주회사도 포함되어 있었다·
하늘 높은줄 모르고 솟아 있는 신영금융지주 본사 사옥의 지하주차장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한 대형 세단 안에는 현진중공업 임창호 회장이 타고 있었다·
현재 그의 심기는 무척이나 불편한 상태였다·
며칠 전부터 만남을 요청했음에도 바빠서 시간을 내기 어렵다는 핑계로 시간을 끌다 이제야 찾아오면 잠시 시간을 내주겠다는 식으로 나왔기 때문이다·
이렇게 찾아가는 것 자체가 자존심이 상해서 심기가 불편한 게 아니다·
지금 진행되고 있을 임시주주총회에서 뭔가 안 좋은 소식이 전해질 것만 같은 느낌 때문이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임시주총이 열리는 현진관광 대회의실에 들이닥치고 싶었지만 아무것도 준비되어 있지도 않은 상태로 가봐야 위신만 떨어질 뿐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이거 오랜만이구만· 경제인연합회 오찬 때 보고 거의 반년 만인가?”
임창호 회장과 나이가 엇비슷한 이경호 회장은 정성스레 난을 손질하고 있었다·
“무릎이 쑤셔서 서울에 자주 올 수가 있어야지· 한가하게 난이나 손보고 있으면서 그리 매정하게 나올 수가 있어?”
임창호 회장이 붉은 가죽 소파에 몸을 실으며 퉁명스레 말하자 이경호 회장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허· 이거 단단히 뿔이 나셨구만·”
“농을 치는게 아니야· 내가 뭐 자네에게 섭섭하게 대했나? 날 물먹이려고 작정하지 않았다면 이 중요한 시기에 내 연락을 피할 리 없잖아·”
임 회장의 섭섭한 말투에 이 회장은 고개를 저으며 상석에 앉았다·
“그러지 마시게· 내가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서 그랬겠는가? 자네랑 하루이틀 본 사이도 아니고 말이야· 허나··· 자네나 나나 이제 곧 물러날 사람들 아닌가?”
“그래서?”
“생각해보면 젊었을 적에 참 힘들었어· 그 가난했던 시절에 살아보겠다고 어릴 때부터 구두닦이며 식당일에 조금 근육이 생기고 나서는 공사장 잡부까지 안 해본 게 없었지· 그 때는 삶이 그렇게 힘들 수가 없었는데 지금 생각하니 살만했었던 것도 같아· 힘들었지만 가족들과 함께 있으면 항상 웃음이 나왔거든·
희망이 있었지·”
“갑자기 옛날 일은 꺼내 뭐해?”
“그렇게 상고를 나와 은행일을 시작한 이후부터 내 세상이었어· 뭘 하든 다 할 수 있을 것 같았지· 자네도 그런 때가 있었잖아· 한창 팔팔했을 땐 조선소 확장해보겠다고 나한테 돈도 꾸었었던 게 기억나네·”
“이 양반아 내 자네 말 듣다가 숨 넘어가겠네·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이제 우리 아이들에게 일 넘기세· 이제 손자가 재롱을 어떻게 떠나 구경만 하고 살아도 재밌을 것 같지 않은가?”
임창호 회장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자네 아들은 재주가 많아 믿고 맡길 수 있을지 몰라도 내 새끼들은 아직 부족한게 많네· 하나부터 열까지 하나하나 가르쳤음에도 아직 물가에 내놓은 애들 같아· 뭘 하든 똑바로 하는게 없는데 내가 어떻게 손을 놓나?”
이경호 회장은 재미있다는 듯 눈을 흘긴다·
“그게 무슨 소리야? 며느리와 손녀딸이 저렇게 똑똑한데?”
“뭐라?”
“내 그동안 우리 손자··· 자네도 알지? 형준이라고· 내가 전에 몇 번 데리고 다니긴 했는데 말이야·”
“뭐 봤다고 치세·”
임창호 회장의 성격상 빈 말은 하지 않는 성격이라 기억나지 않으면서도 기억나는 것처럼 말하지는 않았다·
“안타깝군· 내가 우리 형준이 자랑하는 맛으로 요즘 지내는데 말이야· 어쨌든 형준이 녀석이 현진관광 투자 건을 물고 왔어·”
그제야 기다리던 화제가 나왔는데 임 회장은 섣불리 나서지 못했다·
투자건을 가지고 온게 하필 이 회장의 손자라는 말·
자칫 잘못하면 두 기업 간의 싸움이 될 수 있는 말을 이 회장이 지금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었다·
이건 둘 중 하나다·
현진그룹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 않는 사람이 되었거나 지금 이 사태가 현진그룹에 큰 손해가 아닌 상황이라는 말이었다·
일단 임 회장은 끓어오르는 화를 억누르고 잠자코 이야기를 들었다·
“신영모건스탠리도 그렇고 신영투자증권도 요즘 실적이 부족해서 굉장히 난감한 상황인 건 자네도 알거야· 미국하고 중국하고 싸우는 통에 주식이 영 재미가 없거든· 회사 입장에서는 놓칠 수 없는 기회이긴 한데··· 한국 사람은 ‘정’이라는 게 있어서 자네 뒤통수를 친다는 게 영 꺼림칙했다네·”
“그런데도 눈 딱 감고 신영모건스탠리에 넘기려고 한 건가?”
“아니야·”
“뭐가 아닌데?”
“넘기려는 데가 신영모건스탠리가 아니라고· 현진물산이네·”
임창호 회장은 순간 자신이 잘못 들은줄 알았다·
“자네 지금 뭐라고 했나?”
“쉽게 믿기지 않지? 나도 처음엔 그랬어· 현진물산이 왜 현진관광을 먹으려고 하겠나?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완전히 말이 안 되는 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네· 자네 며느리 그렇게 안 봤는데 여장부야· 툭하면 며느리가 마음에 안 든다고 하더니 다 흰소리였구만·”
임 회장은 이게 다 무슨 말인지 순간적으로 파악이 되지 않았다·
“그러니까 지금 이게 다 무슨 소리야?”
“지금 이 판을 다 짠 게 현진물산이었다고· 우린 거기에 같이 좀 어울려서 놀아주고 품삯 좀 받은거라네·”
“그럼 지금 주주총회에서···”
“대표이사 해임 건의를 했을 거네 현진물산에서·”
임창호 회장은 격동을 숨기지 못했다·
그는 아직 온기가 남아 있는 차를 단숨에 들이키고는 말했다·
“그 애가 그런 배짱이 있다고?”
“그걸 왜 우리한테 묻나? 자네 며느린데 자네가 더 잘 알 거 아닌가?”
“몰랐으니까 묻지!”
버럭 소리를 지르는 임 회장에게 이 회장이 귀를 막고 말했다·
“소리 좀 지르지 말게· 거 기차 화통을 삶아 먹었나·”
“내가 자네처럼 우아하게 계산기만 두드리면서 살지 않아서 그러네· 작게 말하면 기계 소리 때문에 듣질 못하니 이렇게 소리를 지르는게 습관이 됐네· 됐나?”
“거 성격 하고는··· 자네 며느리가 현진관광 주식을 현금 2천억이랑 교환한 건 알지?”
그제야 다시 임 회장의 목소리가 누그러졌다·
“알지·”
“우리 그룹이 가진 현진관광 주식이랑 본인이 가진 주식을 가지고 현진관광을 먹으려고 판을 만들었네· 이미 한참 전부터 소액주주들을 설득하고 위임장을 받아왔을 거야· 대표이사 해임은 막을 수 없을 거네·”
“허허···”
임창호 회장은 허탈한 웃음으로 소파에 등을 기댔다·
그런데 그런 임 회장을 바라보는 이 회장의 눈빛에는 안타까움이 아닌 흥미로움이 담겨 있었다·
“어차피 딸이 가진 걸 며느리가 가져갔을 뿐이네· 누가 가지든 자네 핏줄 아닌가? 그리고 능력있는 며느리와 친손녀라면 꼭 나쁘다고만은 볼 수 없지· 솔직히 자네도 알지 않은가? 자네 손자는 몰라도 자네 딸은 거대한 기업을 이끌어가기에는 조금 부족하다는거 말이야·”
“부족하긴 하지만 주변에서 도와주면 못해낼 정도는 아니었네·”
말로는 아니라고 해도 임 회장의 목소리에는 분노의 감정이 담겨 있지 않았다·
그 모습을 빤히 지켜보던 이경호 회장이 물었다·
“내 자네가 꼭 돌려달라고 한다면 돌려주겠네· 자네와 내가 불알 친구는 아니지만 그간 돈거래하던 정이 있으니 한 번쯤은 손해봐주지·”
“됐네·”
임 회장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저 정도까지 말했다면 이미 대표이사 해임 건의안이 통과된 이후일 거다·
그런데 이제 와서 위임장을 뒤집는다?
그 파장이 엄청날 것임은 말할 것도 없고 파장이 크면 클수록 현진그룹에서 지불해야 할 비용 역시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갈 것이다·
손해를 봐준다는 말을 고스란히 믿을 만큼 임 회장이 그 긴 세월을 순진하게 살아오지는 않았다·
또한 설마 정말로 그 엄청난 파장을 감수하면서까지 일을 되돌리며 현진중공업에 대가를 요구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임 회장은 이제 기력이 빠져 버렸다·
딸에 대한 실망 그리고 이 상황이 오기까지 무력하게 자신의 것을 뺏겨버린 기대했던 태민에 대한 실망이 겹쳐졌다·
그리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 같던 그 귀여운 놈을 하늘로 보내버린 손녀딸이 생각났다·
그 아이가 지 살겠다고 고모 걸 빼앗는 걸 보니 가슴이 아려왔다·
“난 이만 가보겠네·”
“정말 그냥 가도 되겠어?”
“그냥 안 가면?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할려들랑 하지를 말게· 그리고 차가 영 네 맛도 내 맛도 아니구만· 돈 있으면 좀 바꾸게·”
“클클클··· 입맛이 영 까다로우이·”
임창호 회장은 회장실을 나와 차에 올랐다·
“어디로 모실까요?”
수행기사의 물음에 잠시 고민하던 임 회장이 답했다·
“현진관광으로 가자·”
“알겠습니다·”
본래 논현동으로 가서 딸을 달래주려고 했지만 마음을 바꾸었다·
신영금융지주 사옥에서 현진관광 본사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가면서 미리 연락을 했기에 현진관광 정문에 차가 멈췄을 때 반쯤은 혼이 나간 표정의 임지은 사장이 임원들과 미리 마중을 나와 있었다·
“아빠!”
차에서 내리자마자 뾰족한 고성에 임 회장이 미간을 찌푸렸다·
“나 아직 귀 안 먹었다·”
“올케가 나 끌어내리려고 대표이사 해임 건의 올렸어요· 위임장만 어떻게 해주면··· 신영은행에서 어떻게 해준다고 해요?”
“들어가자·”
임 회장은 대꾸 없이 그대로 그녀를 지나쳐 들어갔다·
그 단호한 태도에 일이 해결될 거라고 생각했는지 임지은 사장이 조금 밝아진 얼굴로 얼른 뒤따랐다·
우르르 이동하는 현진그룹 임원들을 향해 경제지 기자들이 연신 플래쉬를 터뜨리는 가운데 보무도 당당하게 대회의실로 입장한 임창호 회장은 잠시 두리번거리더니 어느 한 곳을 향해 걸어갔다·
“오셨어요·”
놀란 얼굴로 일어나는 송은채 사장·
그녀의 곁에 앉아 있던 현진물산 직원들은 자동 기립하며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임창호 회장을 바라보았다·
“앉아라·”
임 회장이 다가서자 송 사장 옆에 앉아 있던 고승현 상무가 얼른 자리를 내어준다·
그 자리에 앉은 임 회장이 다시 자리에 앉은 송 사장에게 말했다·
“아침은 챙겨 먹고 왔나?”
“네 아버님·”
“코발트 광산인가 뭐시긴가 그거 안 한 게 이것 때문이었나?”
“꼭 이것 때문만은 아니지만 원인이 되기는 했습니다·”
임창호 회장을 쫓아와 뒤에 서 있던 임지은 사장의 얼굴이 울그락불그락 해졌지만 아버지를 믿고 입을 열지 않았다·
“지은이가 괜히 조용한 숲에 불 붙인 장작을 던졌구나· 세원 인터내셔널을 끼워넣지 않았으면 아무 일도 없었을 것을··· 그런 게지?”
“맞습니다·”
“단단히 화가 났을 텐데 슬기롭게 잘 풀었구나·”
긴장된 마음에 손을 꼬옥 맞잡고 있던 송은채 사장의 눈빛에 놀람이 깃들었다·
그와 동시에 임지은 사장이 놀란 얼굴로 어버버했다·
“아 아빠· 무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시끄럽다! 다른 사람들 눈이 안 보이는게냐?”
“아빠···”
임지은 사장을 힐난한 임 회장은 다시 말을 이어갔다·
“회사를 하나 운영하는 것과 두 개 운영하는 건 아주 많이 다르다· 생각해놓은 게 있니?”
“베스트 웨스턴 호텔에서 15년간 부사장으로 근무하며 뚜렷한 실적 상승에 기여했던 로져스 박이라는 전문경영인을 이미 초빙했습니다· 기존 경영진이 물러나면 바로 새로운 경영진이 투입될 예정입니다·”
막힘없는 대답에 임 회장은 고개를 끄덕였고 임지은 사장은 울상이 되어갔다·
“호텔을 쪼개 팔지는 않을게지?”
“인수 전부터도 현진관광에 대한 미래를 보고 결정한 일입니다· 코발트 광산인 프록시아 인수보다 더 안정적이고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렇지· 그깟 광산 따위야 시장 상황에 따라 독이 될 수도 있지만 호텔은 그 가치가 떨어지지 않지· 좋은 판단이었다·”
“감사합니다·”
임 회장은 급기야 고개를 돌리고 눈물을 찍어내는 딸의 모습을 본 척도 하지 않고 송 사장 주변을 둘러보다가 물었다·
“누구야? 판을 짠 놈이 누구야?”
고승현 상무는 눈을 굴렸다·
작전을 짠 건 자신이지만 이 모든 판을 지휘한 건 최 과장이었다·
그런데 그걸 말해도 되는 건지 확신할 수가 없었는데 송 사장이 나섰다·
“이 자리에 없는 직원입니다·”
“그래? 성주훈이는 아니겠고··· 누군데?”
“말씀드려도 모르는 직원입니다· 입사한지 얼마 안 되는 직원이라서요·”
임 회장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친구 내가 좀 보잔다고 전해라· 오랜만에 서울 올라왔으니 좀 쉬다 내려가야겠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저녁에 애비 병원에 가보자·”
송은채 사장은 떨리는 눈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버님···”
“나올 거 없다· 내가 왔으니 기자들이 이상한 이야기는 못 쓸 게다· 그리고 넌 날 따라와라·”
임창호 회장의 말에 임지은 사장이 버럭 소리질렀다·
“못 가요! 어떻게 이렇게 가요? 아빠 진짜 이럴 거예요? 날 이렇게···”
“그럼? 현진중공업도 여기 아가한테 주랴?”
임 사장은 서슬 퍼런 임 회장의 눈빛이 장난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저한테 어떻게 이러실 수가 있어요?”
“그럼 넌 나한테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 나는 그렇다고 치자· 태민이한테는 어찌 그럴 수 있어? 네가 애먼 짓만 안 했으면 이게 다 태민이 거였다· 당장 오후에 기사 나갈 텐데 흉한 꼴 태민이가 보게 할 거냐? 가자·”
그제야 임지은 사장은 엉망이 된 얼굴을 수습하고 억지로 임 회장의 뒤를 따랐다·
< 잔인한 겨울(5)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