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잔인한 겨울(6) >
현진관광 임시주총이 열리기 전부터 신영모건스탠리에서 공개매수를 선언했기 때문에 이번 주총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세간의 관심이 쏠리는 건 당연했다·
그리고 임지은 사장 해임이 확정된 직후 기사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임지은 현진관광 사장 전격 해임!]
[현진관광 현진물산에 인수· 충격 반전의 내막!]
[신영금융의 흑기사 참여 국내 금융기관의 적대적 M&A 첫 사례]
[현진물산의 프록시아 입찰 포기? 이유가 있었다·]
[현진관광을 기습 인수한 현진물산의 속내는?]
[임지은 사장의 눈물과 임창호 회장의 결단·]
[현진그룹 본격적인 남매의 난 시작?]
····
포털 1면엔 온통 현진물산과 현진관광의 기습 인수합병 기사들이었다·
영훈은 핸드폰으로 기사들을 흥미진진하게 읽어 내려갔고 그 모습을 보는 이형준 상무는 귀엽다는 듯 미소지었다·
“아주 행복하시겠어?”
“상무님은 안 좋으십니까?”
“나야 수익률로 어깨에 뽕 좀 세웠지만 넌 다르잖아· 할아버지한테 전화로 이야기 들으니까 니네 회장님이 완전히 포기 했다고 하던데? 난 또 니네 회장님이 니네 사장님을 죽이네 살리네 그럴 줄 알았는데 그거 보면 참 노인네들 생각은 읽을 수가 없어·”
“그게 되면 너무 불공평한 거 아니겠습니까? 금수저에다가 키도 크시고··· 사람 마음까지 읽으려고 하는건 좀···”
“왜? 그런건 너만 해야 하냐?”
“저도 먹고 살아야 하지 않습니까?”
“먹고 사는게 걱정되면 우리 회사로 올래? 죽을 때까지 돈 걱정 안 하고 살게 해줄 수 있는데·”
“됐습니다·”
“얼마나 줄지 궁금하지도 않아?”
“궁금하지만 물어볼 생각은 없습니다· 그리고 설사 알게 된다 할지라도 그것 때문에 회사를 옮길 생각도 없구요·”
“왜? 아침부터 눈 비비고 일어나서 상사한테 욕 처 들으면서 일하는 목적이 돈 아니야?”
형준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다·
물론 그의 말이 일리가 있다·
아마 다른 사람들과 비슷한 평범한 삶을 살았다면 그 누구보다 세속적인 판단을 했을 거라 생각했다·
“저는 조금 다릅니다· 어쩌면 다행스러운 건지도 모릅니다·”
“어째서?”
“제가 마음 먹고 돈만 밝히면 상무님이 다리 쭉 펴고 살 수 있을까요?”
“하하하! 이 새끼 진짜 말로는 못 이기겠네· 알았어· 무서워서 꼬시지도 못하겠네·”
“꼬실려면 여자나 꼬시든가요· 그리고 그게 아니더라도 저 못갈 이유가 하나 더 있습니다·”
“뭔데?”
“화내거나 섭섭해하기 없기입니다·”
영훈이 모처럼 진지하게 말하자 형준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알았어· 뭔데?”
“연희 씨랑 사귀기로 했습니다·”
“임연희?”
“네·”
“하하핫! 내가 그거 가지고 섭섭해할 줄 알았어?”
형준은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지만 영훈은 속지 않았다·
“솔직히 배 아프잖아요· 제 앞에서는 거짓말 안 하셔도 됩니다·”
“하하하··· 그래? 크흠··· 너 어떻게 꼬셨냐?”
역시나 잠깐 표정관리를 하며 짐짓 통큰 모습을 보여주려 했지만 영훈을 속일 수는 없었다·
그는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한 걸 남에게 뺏기면서 허허 웃을 만큼 속이 넓은 사람이 아니다·
평범한 사람들도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픈데 그처럼 욕심이 많은 사람이 연희처럼 빼어난 미인을 뺏겼음에도 배가 아프지 않을 리 없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진실한 대화로···”
“아 시끄러· 됐어· 안 들을 거야·”
형준은 듣기 싫다며 손을 흔들어댔다·
당분간 속은 쓰리겠지만 이렇게 일부러 말해준 건 형준 같은 사람은 나중에 따로 알게 되면 괜히 자신을 속였다는 생각에 혼자 분노하는 경우가 생기기 때문이다·
“알겠습니다·”
“좋겠다 연희랑 사귀고··· 그럼 현진물산도 이제 네 꺼네? 안 오는 이유가 있구만·”
“그것 때문은 아니지만 그렇게 생각하신다면야 어쩔 수 없죠·”
“사실이 그러니까· 그럼 이제 다음 스텝이 어떻게 되나? 현진중공업? 현진기계? 현진고속은 상장회사가 아니라서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는데···”
영훈은 고개를 저었다·
“당분간 인수합병을 추가로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일거리가 꽤 쌓였거든요·”
“일거리?”
“현진건설에서 광주광역시 봉선동에 들어가는 아파트 시공사업권을 따내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거? 설마 하려고? 안 될 건데?”
“될 것 같습니다·”
형준은 코웃음을 쳤다·
“하핫! 그게 무슨 소리야? 그걸 너희가 어떻게 따내? 그거 공사비만 못해도 5천억이 넘을걸?”
“대략 7천억 정도 된다고 알고 있습니다·”
“7천억 짜리 아파트 시공권을 혜성기업이 무슨 수로 따내려고? 이건 내가 돈으로 지원해준다고 해도···”
“아마 될 겁니다·”
영훈이 그의 말을 끊으면서까지 말하자 형준의 안색이 굳어졌다·
“입찰에 관여했구나·”
“그냥 될 것 같다고 알고 계시면 됩니다·”
“와··· 씨 귀신 같은 놈이네· 그래서 뭘 지원해주면 돼? 공사 자금도 필요할 거고··· 분양할 때 집단대출을 우리 은행에서 나가주면 될까?”
“그래주면 감사하겠습니다· 아시겠지만 이번 인수로 회사 자금이 바닥을 보이는지라 앞으로 있을 대형공사에 은행지원이 필수적이라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거든요·”
“들어가서 한 번 알아보지· 공사규모나 시기와 법적인 문제까지· 그리고 또 다른 건 없어?”
“서비스 좋으십니다·”
“흐흐··· 말했듯이 어깨에 힘 좀 들어간 상황이잖아· 이 정도야 뭐···”
“사실 하나 더 있는데 이건 좀 예민한 거라 지금 말씀드리긴 어렵습니다·”
“예민해? 설마 정치권과 연결된 사항인가?”
욕심이 많을 뿐이지 머리가 좋아 척하면 척 알아듣는다·
“맞습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잘 해결해· 정치인들은 우리랑 달라· 원하는 걸 얻기 위해 뭐든 하는건 비슷하지만 우린 협상이라는 게 먹히거든· 그쪽은 원하는 게 한번 어그러지면 협상 따위는 없어· 보복만 있을 뿐이지·”
“명심하죠·”
영훈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형준이 뚱한 표정으로 물었다·
“어디 가냐?”
“회사 들어가야죠· 직장인 아닙니까?”
“그렇게 회사를 생각하는 놈이 지금까지 농땡이 친 거야?”
“상무님과의 미래를 위한 건설적인 대화였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시끄럽고 술이나 한 잔 하자·”
“안 됩니다· 저녁에 약속 있습니다·”
“데이트?”
“네·”
“흥! 가라 씨발··· 난 모델들하고 놀거다·”
“일찍 들어가세요· 그리고 이제부터는 조심해야 할 겁니다·”
형준의 눈빛이 반짝였다·
“아버지가 날 경계할 거라는 말인가?”
“혹시 드라마 도깨비 보신 적 있습니까?”
“도깨비? 공유 나오는 드라마?”
“네· 거기서 공유가 백성의 신망이 대단했던 장수였는데 전쟁에서 큰 공훈을 세우고 돌아와서 왕에게 죽습니다· 백성들에게 받아야 할 존경과 사랑을 왕이 아닌 장수가 받고 있었거든요· 큰 성공은 큰 주목을 받게 마련입니다· 긴장 풀지 마세요· 그러다 죽습니다·”
형준은 괜히 오싹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왠지 저 죽는다는 말이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진짜 죽는다는 말로 들렸기 때문이다·
“크흠··· 알았어· 알겠다고·”
“그럼 적당히 노세요·”
영훈이 미소를 지으며 사라지자 형준은 잠시 후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멀리서 형준을 지켜보고 있던 수행비서가 얼른 다가오자 형준이 말했다·
“회사로 돌아가자·”
“백화점 예약 해놨는데 어떻게 할까요?”
백화점은 형준이 주로 놀러가는 룸싸롱 이름이었다·
형준은 수행비서를 흘겨보곤 말했다·
“지금 내가 여자나 끼고 술 퍼먹을 때냐? 넌 내가 술 마신다고 하면 좀 말려라· 하··· 정말···”
형준은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흔들며 어두운 바를 빠져나갔고 수행비서는 억울한 표정으로 뒤를 따랐다·
*
“아빠 정말 이렇게 물러날 거예요? 이대로 끝낼 거냐구요·”
거의 쫓겨나다시피 논현동 집으로 들어온 임지은 사장은 소파에 몸을 기대고 지그시 눈을 감고 있는 임창호 회장을 닦달했다·
“···”
“현진관광이 일 년에 벌어들이는 돈이 얼만지 아세요? 수천억을 현금으로 따박따박 벌어들이는 캐시카우라구요· 매출도 지난 5년간 꾸준히 오르고 있었어요· 그런 알짜배기를 이렇게 놓아줄 거냐구욧!”
임 회장은 힘들게 눈꺼풀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그런 좋은 회사를 왜 그렇게 힘들게 운영했어? 그렇게 벌어들인 자금은 다 어디가고? 조선업이 그리 힘들 때 다른 계열사들 최소 5천억 이상 지원했다· 현진관광은 그때 얼마나 지원했냐?”
“저희도 5천억 지원했어요!”
“그래· 일 년에 수천억 현금을 벌어온다고 자랑하는 현진관광이 다른 계열사랑 다른게 하나도 없었다·”
“그때는 호텔 인수 때문에 그런 거잖아요·”
“그것만 있었냐? 호텔 지어보겠다고 부지 사느라 쓴 돈만 8천억 아니었어?”
“···”
“그 자리에 지금 호텔 올라가 있냐? 결국 허가 안 나와서 그대로 묶인 자금 아니야? 그 돈 있었으면 현진물산에 2천억으로 주식 교환할 필요가 있었을까? 왜 이렇게 생각이 짧아? 내가 그 자리에서 위임장 내용 엎게 해줬으면 온 세상이 현진그룹 산산조각날 거라고 떠들어댔을 게다· 내가 그 꼴을 봐야겠니?”
“위임장 내용 엎을 수 있었다는 말이에요?”
“그래· 신영그룹 회장하고 독대까지 했는데 빈손으로 왔을까? 그런데 위임장 내용 엎으면 현진물산에서 꼬리 말고 그냥 갔을 것 같으냐? 현진물산에서 가진 신영금융 지분 제외한 나머지만 가지고도 흔들기 시작하면 어쩌려고? 시장가 대비 최소 세 배는 주고 사와야 회사가 안정을 되찾을 게다· 그 돈 줄 수 있
는 능력은 있는 게냐?”
“설마 우리한테 세 배 씩이나 되는 돈을 요구할 거라고 보세요?”
“그 정도 각오도 안 하고 네 등에 칼을 꽂았을 것 같으냐? 왜 이렇게 물러?”
“···”
임지은 사장은 더이상 아버지를 조른다고 한들 해결될 수 있는 상황이 아님을 받아들였다·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는 임 사장을 보며 안쓰러움을 느낀 임 회장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이것아 아직 현진고속이 네 것이다· 그리고 내가 죽으면 현진그룹 계열사가 다 네 아들 것이 아니냐?”
“크흥··· 속상해서 그래요· 아빠가 나한테 잘 해보라고 한 회사인데 이렇게 뺏기니까 너무 속상해요· 흑흑···”
“이제 마음 단단히 먹어야 한다· 집에서 살림만 해서 뭘 할줄 아는게 있나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어· 한 발 한 발 조심스럽게 움직여야 할 게다·”
“아빠가 도와주시면 안 돼요?”
“이것아· 네 애비는 언제 관에 들어가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다· 내가 강제로 지분 정리를 해주기에도 이미 늦었다· 현진관광까지 먹은 네 올케가 이제 와서 가진거 내놓으라고 하면 말을 들을 것 같니?”
“아빠 말도 안 들을까요?”
“내 말이 무서웠으면 이런 짓을 할 수 있었을 리가 없지· 마음 단단히 먹어야 한다는 것 잊지 말아라·”
그렇게 한참 동안 임 회장은 그녀를 달래주고 저녁 즈음에 되어서 논현동 집을 나왔다·
논현동에서 코앞이라고 할 수 있는 르메르디앙 호텔에 도착한 임창호 회장이 약속된 장소에 도착하니 이미 자리에는 몇 명의 사람들이 와 있었다·
“어서오세요·”
“안녕하세요·”
낮에는 조금 당황하는 얼굴이었다면 지금은 편안해진 모습의 송은채 사장과 조금은 어려워하는 표정의 연희 그리고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목례를 올리는 영훈이었다·
임 회장은 손을 들었다 내리며 수행비서에게 코트를 건네주고 자리에 앉았다·
그는 연희에게 가장 먼저 시선을 주고는 말했다·
“많이 컸구나·”
“네···”
“할애비 피해서 해외 돌아다닌다고 욕 봤다·”
“···”
연희라고 여기서 별다른 할 이야기가 있을리 없었다·
눈치껏 송은채 사장이 말을 받았다·
“아버님 좋아하시는 농어 스테이크 주문했어요· 주방장이 아버님을 기억하고 있어서 간을 신경쓰겠다고 했구요·”
“잘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영훈에게 시선을 돌렸다·
“자넨가? 우리 애 회사를 날름 먹어치우도록 한 게?”
“세부 계획은 고승현 상무가 잡았지만 제가 주도한 일인 건 맞습니다·”
“나이가 어린 것 같은데? 입사한지 얼마나 됐나?”
“올해 공채로 입사했습니다·”
임 회장의 미간이 살포시 찌푸려졌다가 재차 물었다·
“그 전에 어느 회사를 다녔는데?”
“작은 채권회사에서 추심 업무를 했습니다·”
이 황당한 답변에 임 회장이 설명을 요하는 표정으로 송 사장에게 고개를 돌렸다·
“제 동생이 하는 채권회사에 다니던 직원이었어요· 너무 유능해서 제가 직접 채용했습니다·”
“얼마나 유능하길래··· 허··· 쓸데없는 말을 했군·”
생각해보니 눈앞의 청년은 결과로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었다·
어떤 이유로 그를 믿었는가는 이제 중요하지 않아졌다·
임 회장은 영훈에게 물었다·
“이제 어찌할 건가?”
그의 뜬금없는 물음에 영훈이 되물었다·
“더 가져갈까봐 불안하십니까?”
< 잔인한 겨울(6)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