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진건설의 도약(2) >
한참을 고민하던 임 회장은 고개를 저었다·
“안 돼· 이건 안 되는 거야· 탐이 나긴 하는데 거제에서도 지금 받은 물량은 거의 다 소화할 수 있어·”
이미 고승현 상무로부터 많은 교육을 받았다·
중국발 조선업 불황이 시작된 이후로 수주 물량이 끊겼던 한국 조선업은 LNG선을 수주받으며 조금씩 회복되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특히 중국 조선소가 건조한 LNG선이 공해상에서 멈추는 사고가 발생했고 중국 조선소가 이를 해결해주지 못하면서 선주에게 큰 손해가 발생하고 말았다·
중국 조선소는 한국 조선소에 기술자를 보내 달라며 요청했지만 중국 조선소의 저가 공세와 기술 빼가기에 질렸던 한국 조선소측은 요청을 거부했다고 한다·
이 사고 이후로 중국 조선소에 대한 유럽 선주들의 신뢰가 큰폭으로 하락했고 중국 조선소의 선박 수주의 대부분이 자국 물량으로 채워질 수밖에 없었다·
한국 조선업이 점차 불황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이유는 또 있었다·
셰일가스 혁명으로 LNG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IMO(국제해사기구)의 2020년 환경규제로 친환경 선박으로 대체해야만 하는 상황에 놓여 졌다·
이제 선주들은 자신들이 가진 노후 선박을 교체하거나 개조해야만 하는 상황에 직면했던 거다·
특히 카타르에서 백여 척에 이르는 발주물량 대부분을 한국 조선사에서 싹쓸이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기에 드디어 조선업이 살아나는게 아느냐는 말들이 나오고 있었다·
다만 그렇게 수주 물량이 쏟아져 들어온다고 해도 국내 조선소들의 생산능력이 부족하냐 하면 그건 또 아니라는데 문제가 있었다·
카타르에서 쏟아낼 백여 척에 달하는 LNG선을 예상대로 70% 이상 수주한다고 해도 아직까지는 소화해낼 수 있다고 했다·
아직까지는···
그렇기에 무진중공업이 군산조선소를 재가동시키겠다는 약속을 져버리고 해주조선해양을 합병하는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했다·
“두려우십니까?”
임 회장은 미간을 찌푸렸다·
“배고픔을 겪어본 자만이 굶주림에 대한 공포를 알고 있지· 자네 굶어본 적 있나?”
“굶어본 적은 없습니다·”
절에 있었다고 풀떼기만 먹었던 건 아니었다·
물론 피자도 먹고 싶고 치킨도 먹고 싶었지만 그래도 지독한 굶주림이 무언지는 모르고 살았다·
“난 굶어본 적이 있네· 다섯 남매가 감자 세 알로 하루를 버텨본 적이 있었어· 먹을 거에 눈이 돈다는 게 어떤 건지 알고 있지· 그래서 난 굶주림이 무섭다네· 이 나이가 돼서도 굶주림에 대한 공포는 잊혀지지가 않아·”
다시 한번 조선업이 불황에 든다면 그 파급이 두렵다는 말이었고 또 군산조선소을 떠안은 이후 닥칠 불황은 공포를 주기에 충분하다는 말이었다·
“그렇군요·”
영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할 이야기는 그게 끝인가?”
임 회장은 흥미로운 얼굴로 영훈이 어떻게 나오는지 살폈다·
영훈은 고개를 모로 꼬고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이렇게 하겠습니다· 군산조선소는 저희가 인수합니다· 대신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현진중공업의 인력과 기술로 지분을 드리겠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제안·
아니 이건 말도 안 되는 제안이다·
그룹에서 엄연히 조선업을 하고 있는데 따로 조선회사를 세우겠다는 게 말이 되는가?
게다가 현진중공업은 그룹의 중심이자 핵심이며 정신이었다·
일단 임 회장은 흥분을 가라앉히고 물었다·
“합작회사를 세우자고?”
“네·”
“왜? 지금 잘 돌아가는 것도 아니고 직원들 다 빠진 죽은 조선소를 왜 끌어안겠다는 건데?”
조재민 의원은 대통령이 될 운명까지는 아니지만 가히 대권주자 정도로서는 부족함이 없는 운명을 타고 났다·
조 의원은 현진물산을 만나서 날아보려는 계획이지만 사실 현진물산도 조 의원 덕을 볼 것이라고 생각했다·
특히 조재민 의원은 뜨거운 여름의 사주를 타고난 사람이라 곁에 물이 있다면 금상첨화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런 사람은 사업을 해도 술 또는 음료를 파는 일이 잘 될 게 분명했다·
그러니 군산조선소의 앞날에 대해서는 영훈은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조선업이 욕심이 나서 이러는 건 전혀 아니다·
고승현 상무에게서나 매일 오후에 받는 수업에서 많은 걸 배우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도 모르는 것 천지인 데다가 현진건설만 가지고도 할 일이 너무 많았다·
합작회사를 세우는 계획 역시 고승현 상무가 며칠 동안 고심해서 내린 방안 중의 하나였다·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계열사 분리를 위해서다·
임창호 회장 입장에서 굳이 계열사 분리를 해줄 이유가 없었고 김태민 현진중공업 경영기획 본부장은 더 말할 것도 없다·
계열사 분리를 해줄 수밖에 없는 미끼를 만들어야 하는데 지금 당장 손에 걸리는 게 군산조선소밖에 없었다·
물론 진심으로 조선업에 진출할 생각은 없다·
임 회장이 그렇게 생각하게 만들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군산조선소를 가동시키기로 약속했습니다·”
“허··· 도대체 그걸 누구랑 약속했단 말이지?”
“누구와 약속을 했는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 약속을 지켜야 하고 현진중공업이 인수해서 가동시키지 않겠다면 우리가 직접 인수해서 가동시켜야 합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그게 그렇게 쉬운 줄 알아?”
“어렵다는 거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불가능한 것도 아닙니다· 잘 다니던 조선소에서 잘려 아직도 집에서 쉬는 전문인력들이 많습니다· 중국 조선소의 비싼 연봉에 혹해서 갔다가 월급도 제대로 못 받아서 다시 못 들어오는 전문가들도 있습니다· 군산조선소는 시설만으로 보면 대한민국 최대 규모이니 인력과
조직만 갖춰지면 조선회사 하나 만드는거야 문제도 아닐 겁니다·”
임창호 회장은 버럭 소리 질렀다·
“누가 인력이 없어서 굶어 죽었어? 시설이 낙후돼서 굶어 죽었냐고! 수주를 못 받아서 굶어 죽은 거 아니야?”
“IMO 규제(선박연료 황 함유량 기준을 현행 3·5%에서 0·5%로 강화)를 피하겠다고 스크러버(탈황장치) 달았다가 입항하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중국과 아일랜드는 이미 시작됐고 내년부터 싱가포르랑 아랍에미레이트도 입항이 금지됩니다· 코트라에서도 2025년에는 전체 선박 발주의 60% 이상
이 LNG 추진선이 될 거라고 예상하고 있습니다·”
“누가 그거 모르는 사람 있어? 그런데 어디 연구 결과대로만 가던가?”
“맞습니다· 미래는 알 수 없는 것이니까요·”
영훈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인다·
임 회장이 그 모습에 괜시리 불안해지는데 영훈이 재차 폭탄을 터뜨렸다·
“그럼 이렇게 하겠습니다· 지금 시장에 나와 있는 해주조선해양 저희가 인수합니다·”
“뭐?”
“무진중공업도 탐내는 해주조선해양입니다· 이미 2021년까지 수주물량을 받아 놔서 수주도 걱정 없습니다· LNG 기술력은 말할 것도 없고 군함건조에도 탁월한 기술력을 가진 곳입니다· 산업은행에서도 돈만 있다면 누구한테라도 팔 수 있다는 입장이죠· 무진중공업이 인수한다고 하는 것보다 군산조선소를 가
진 우리가 인수한다고 하면 산업은행이 누구 편을 들 것 같으십니까?”
“···”
볼 것도 없다·
군산 경제를 파탄낸 게 바로 무진중공업이다·
군산조선소를 돌리겠다고 하면 무진중공업보다 금액을 훨씬 덜 제시해도 아마 현진물산의 손을 들어줄 거다·
산업은행은 공기업이니까·
임창호 회장은 잔을 들어올렸다·
영훈이 한잔 가득 따라주니 벌컥 들이키곤 안주도 먹지 않고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군산조선소에 해주조선해양까지· 둘 다 가지겠다? 돈은 하늘에서 떨어지나?”
“군산조선소를 돌리겠다고 하면 산업은행에서 분할납부 인정해줄 겁니다· 여론만 잘 조성되면 인수에 들어가는 돈까지 그쪽에서 대출해줄지도 모릅니다· 당연히 부채도 일정 부분 털어주겠죠· 마침 현진관광을 인수했고 인수하는 과정에서 엄청난 대출금이 들어간 게 아니니 현진관광 지분을 담보로 최소 5천
억 이상의 자금을 지원받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추가로···”
“추가로?”
“이번에 보셔서 아시겠지만 신영금융은 현진물산과 행동을 같이 합니다· 이번에 현진관광 인수건으로 신영금융에서 얻은 이익만 수천억인데 최소한 그 돈 만큼 지원해달라고 하면 못 얻겠습니까?”
고승현 상무가 내놓은 몇 가지 해결책 중에 가장 최적의 결론이 바로 이것이다·
실제 고 상무는 이걸 생각해내며 해주조선해양 인수전에 진심으로 뛰어들기를 은근히 바랄 정도였다·
임창호 회장은 대답을 하지 않고 침묵에 잠겼다·
그리고 곧이어 주방에서 구운 장어가 나왔다·
임 회장은 한 젓가락 집어 입에 넣고 오물거리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짜지도 않고 부드러운게 입에 맞구나·”
“다행입니다· 많이 드십시오·”
“그래 오랜만에 허리띠 풀어야겠다·”
실제 허리띠를 풀지는 않았지만 임 회장은 꽤나 많이 먹었다·
장어와 밥 한공기를 뚝닥 비운 임 회장은 가지고 있던 손수건으로 입을 닥고는 말했다·
“그래서 내가 어쩌기를 바라냐?”
“그룹에서 가지고 있는 현진관광과 현진물산 지분을 시장가에 넘겨주시면 됩니다· 그러면 해주조선해양 인수는 계획에서 지우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무조건 군산조선소를 받아라? 내가 원하지 않으면?”
“그건 보기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회장님께서 계열사 분리를 하지 않으시면 해주조선해양 인수전에 뛰어들겠습니다·”
“허허··· 지금 협박하는 게냐?”
“통보하는 겁니다· 회장님께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실 수 있지만 물산과 관광 지분이 남아 있는 한 계속 우리를 괴롭힐 겁니다· 그렇다고 손해본다고 생각하지는 말아주셨으면 합니다· 말 그대로 잘 포장해서 넘겨드리겠습니다·”
“무진중공업이 가만히 있지 않을게다·”
“무진중공업은 인망을 잃었습니다· 올해 안에 가동시키겠다는 약속을 어긴 뒤로 이건 경제적인 문제에서 정치적인 문제로 넘어갔습니다· 정상적인 가격에 팔려 한다면 그게 더 문제 아니겠습니까?”
“방법이 있는 게냐?”
“그건 제가 생각할 문제가 아닙니다· 이 건을 풀어야 할 사람은 따로 있습니다· 그가 문제를 풀어내지 못하면 지금까지 한 이야기는 그냥 웃자고 한 농담이 될 겁니다·”
“그럴 능력이 되는 사람이고?”
“풀어낼 겁니다· 그래야 하는 이유가 있는 사람이니까요·”
“차기 군산 시장이구나·”
“맞습니다·”
임창호 회장은 기가 막힌 표정으로 웃음을 지었다·
입사한지 얼마나 됐다고 이제 차기 군산 시장이 될 사람과 군산조선소를 가지고 거래를 끝냈단다·
이게 어디 될 만한 소린가?
“넌 뭘 받았고?”
“봉선동 아파트 시공 사업권을 받기로 했습니다·”
“현진건설로 간판을 바꿔 단 혜성기업 말하는 게냐?”
“맞습니다·”
“그걸 진짜로 따냈다고?”
“거래조건이었습니다·”
임 회장은 그제야 영훈이 군산조선소를 돌려야 한다고 한 말을 제대로 이해했다·
단순히 블러핑이 아니라 계열사 분리를 안 해줄 경우 해주조선해양을 인수한다는 건 그저 계획이 아니라 반드시 실행해야 하는 목표가 될 게 분명했다·
“왜 그런 조건을 걸었냐? 하필 군산조선소를 건드린 이유가 뭐야?”
“군산 시민들이 고통을 받고 있으니까요· 대기업의 분별없는 경영으로 수많은 가정이 파탄에 이르렀습니다· 제가 성자가 되고 싶어서가 아니라 기왕 돈을 써야 한다면 더 많은 사람에게 좋은 결과가 돌아가는 곳에 써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더 많은 이익과 성장이 아닌 고통받는 시민들을 구제하고 싶은 생각이라는 말이 임 회장의 머리를 때렸다·
“허허··· 그렇군· 그래···”
어째서 죽은 손자가 다시 떠올랐는지 몰랐다·
하늘에 있는 그 착한 녀석이라면 어쩌면 이와 같은 황당한 이유로 할애비를 졸랐을지도 모른다·
꼭 그랬을 것 같았다·
임창호 회장은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그만 가실 생각이십니까?”
“네 놈의 통보를 들었으니 회사로 돌아가서 전해야 할 게 아니냐?”
“그건···”
“걱정마라· 내가 아무리 늙었다고 한들 그 이야기를 밖으로 나돌게 하겠냐? 다만 이건 나 혼자 결정할 수가 없다· 네 놈 말대로 나도 통보라도 해줘야 할 게 아니냐?”
“알겠습니다· 그럼 조심해서 들어가십시오·”
꾸벅 허리를 숙이는 영훈의 어깨를 임 회장이 툭툭 두들겼다·
그리고 천천히 몸을 돌려 가게를 빠져나갔다·
나게는 임 회장의 뒷모습을 보면서 영훈의 마음이 무거워졌다·
시간이 많았다면 이렇게 급하게 밀어붙이지 않았을 텐데···
그래도 의미 없는 싸움을 피하려면 어쩔 수 없었다·
현진중공업으로써도 조 의원의 기운을 받은 군산조선소를 가지게 된다면 새로운 도약을 이뤄낼 수 있을거다·
부디 이 기회를 놓치지 말기를 바랐다·
이때 영훈의 핸드폰으로 전화가 걸려왔다·
조재민 의원 보좌관이다·
“네 보좌관님·”
[안녕하십니까 과장님· 다름 아니라 내일부터 본격적인 선거 준비에 들어가게 됐습니다·]
“그렇군요·”
[군산조선소 관련 브리핑을 곧 받아볼 수 있을까 하는데 괜찮을까요?]
“곧 결과가 나올 겁니다·”
[다행입니다· 그리고 광주 인공지능 집적단지 공고가 날 예정입니다· 전부는 아니지만 현진건설에서 입찰하면 어느 정도는 좋은 결과를 볼 수 있을 겁니다· 이건 의원님께서 군산조선소 문제를 잘 해결해달라는 의미로 주는 선물이라고 하셨습니다·]
“하하··· 감사합니다·”
[그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영훈은 가볍게 미소지었다·
이제 정말 되돌릴 수 없게 됐다·
< 현진건설의 도약(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