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산에서 생긴 일(3) >
10년도 더 된 오래된 이야기다·
영훈이 더 이상 칠흑 같은 산속 어둠이 무서워지지 않을 무렵 괜히 자신의 능력을 뽐내보고 싶을 때가 있었다·
주지스님 눈치를 보느라 대놓고 사주를 본다고 말은 하지 못했지만 은근히 기회를 보면서 괜히 한 소리를 해주고 싶었을 때였다·
대개 절에 불공을 올리면 생년월일을 적어 내기 때문에 태어난 시각만 알면 사주를 알기는 어렵지 않은 일이라 불공을 올리고 내려가는 보살들에게 한마디씩 툭툭 던지곤 했다·
지금 외부에서 영훈이 사주를 볼 줄 안다는 걸 아는 사람들은 다 이때 영훈이 툭툭 던져준 이야기를 받아먹은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노석춘의 아내가 그 사람들 중 하나였다·
당시 노석춘 아내에게 해준 이야기는 자식에 관한 이야기였는데 내용이 심각했었다·
자칫 잘못하면 자식을 잃을 수도 있다는 충고를 해주었는데 당시 노석춘의 아내가 심상치 않다고 생각해 남편과 함께 영훈을 찾았었고 주지스님 몰래 사주를 풀어준 뒤 해답을 알려주었었다·
그게 너무 오래된 일이었고 또 노석춘이 당시에는 머리가 이 정도로 하얗게 센 편이 아니었기에 바로 알아보지 못했던 거였다·
“이게 참 그래서··· 내 개인적인 문제이기도 하고 병원 전체에 관련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뭔데 그러십니까?”
“전에 그랬었지요? 내가 사업을 할 팔자라고· 그때 그 이야기를 듣고 말은 안 했지만 솔직히 스님··· 아니 이제는 뭐라고 불러야 할까요?”
영훈이 품에서 명함을 꺼내 내밀었다·
“그냥 최 과장이라고 불러주시면 됩니다·”
“허허··· 최 과장이라··· 참 인생은 모르겠습니다· 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최 과장만큼 신통한 사람을 보지 못했는데 과장이라니 말이에요·”
“옛 일입니다·”
“흐음··· 어쨌든 최 과장이 그때 내가 사업을 할 팔자라는 말을 듣고 최 과장을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난 어릴 때부터 의사가 꿈이었고 의사 생활에 만족하고 있었으니까요· 사업가가 될 팔자라는 말이 굉장히 황당하게 들렸습니다·”
“그랬을 겁니다·”
“그런데 이 나이가 되고 병원장에 올라서 운영하다 보니까 계속 답답하다는 생각이 들고 있어요·”
“이 일이 내가 할 일이 아닌 것 같죠?”
“맞아요·”
“사주라는 게 그렇습니다· 병원장님께서 어떤 직업을 가졌으면 더 잘 풀리셨을지를 알려 드리는 거니 꼭 병원장님의 지금 직업이 무엇일지를 맞추는 건 아닙니다· 그게 된다면 사주를 보는 사람이 아니라 신점을 보는 사람이겠죠·”
“그럼 난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말씀드렸듯이 이제 전 사주를 보지 않습니다· 다만···”
“다만?”
“당시 봤었던 병원장님의 사주를 기억해보자면 지금 시기가 그리 좋지 않을 것으로 기억합니다·”
노석춘 병원장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얼만큼 어떻게 어렵습니까?”
“그냥 사람만 보면서 생명을 다루는 일을 할 때는 모르겠다가 이제 돈이 보이기 시작하시죠? 그런데 병원장님 마음대로 되지 않으니 답답하실 겁니다·”
“맞아요·”
“그것만 해도 어려울 텐데 재작년부터 악재가 들어왓을 겁니다· 회사 생활이니까 실적 압박도 있으셨겠군요·”
“그것도 맞아요·”
“안타깝게도 방법이 없습니다· 이제 와서 병원을 나와 사업을 할 수도 없는 일 아닙니까?”
“그렇지요·”
“혹시 돈 사고도 났습니까?”
노석춘 병원장은 크게 놀랐다·
“그건 또 어찌 알았습니까? 사주를 안 보신다고 하셨는데 이게 다···”
“예전에 봤었습니다· 다만 이야기해드리지는 않았죠·”
“왜 이야기하지 않았습니까?”
“믿지 않으셨을 거 아닙니까?”
노 병원장은 안타까운 얼굴로 탄식을 내뱉었다·
“허허··· 당시 딸의 상황을 맞춘 최 과장님이었는데 왜 더 물어보지 않았는지 참 안타깝습니다· 후회가 돼요·”
“그게 인생 아닙니까? 당시에는 무슨 말을 하든 믿지 않으셨을 겁니다· 전 오히려 병원장님께서 따님을 살리셨던 것도 대단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주나 미신 따위는 믿지 않으셨을 텐데 말이에요·”
“맞습니다· 내가 최 과장님을 만나기 전에는 이런 건 전혀 믿지 않았습니다·”
“따님을 사랑하는 마음 덕분에 짧은 순간이나마 제 말을 믿으셨으니 따님이라도 살릴 수 있었던 겁니다· 이제 조금 어렵다고 한들 그때 그 고민과 고통만 하겠습니까·”
“그건 그렇습니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지금 당장 어려움이 닥쳤으니 쉽사리 참고 넘기기는 어려울 터였다·
“그래도 고민이 되시겠죠?”
“맞습니다· 잃을 것도 많고 챙겨야 할 사람도 많습니다· 그때 그렇게 마음을 아프게 했던 딸도 장성해서 이제 남자를 만다고 누구보다 아름다운 여성이 됐습니다· 저렇게 예쁘게 잘 자라주었으니 아빠 된 마음으로 뭐라도 더 해주고 싶은 마음입니다· 방법이 없겠습니까?”
영훈은 당시 그의 사주를 다 기억하고 있었지만 기억이 안 나는 척 잠시 미간을 찌푸리며 고민하다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생각해보건데 병원장님의 사주는 역마가 강한 사주입니다· 한 자리에 계속 머물고 있으니 혈류가 막힌 듯이 병원장님의 기가 막힌 상황입니다· 지금 자리를 나와 계속 돌아다니시면 막혔던 기가 뚫리듯이 모든 일이 풀릴 겁니다·”
“풀린다면 어느 정도나 풀린다는 말일까요?”
“최소한 돈에 관한 문제는 걱정하지 않을 정도로 풀릴 겁니다·”
그제야 노석춘 병원장의 얼굴에 근심이 사라졌다·
“그거 참 다행입니다 다행이에요· 요즘 너무 힘들어서 다른 철학관에 몇 번 가보기도 했는데 좋은 말을 들어도 이상하게 믿음이 가지 않았었는데 최 과장에게 그 말을 들으니 참 신기하게 마음이 놓입니다· 계속 돌아다녀야 한다는게 어려운 문제지만 그래도 답을 알고 나니 아주 모르던 것보다는 낫습니다·”
“기분 탓이겠죠· 음··· 그럼 이제 제가 부탁 하나만 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럼요· 당시에도 복채를 굳이 받지 않는다고 하셔서 항상 가슴속에 빚을 지고 사는 기분이었습니다· 오늘 이렇게 만나서 얼마나 다행인줄 모릅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최대한 도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영훈은 노 병원장의 말에 빙그레 웃음 지었다·
사실 이곳에 오기 전에 임창호 회장이 부산 백병원에 입원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운명이 이끄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하필 병원장이 과거 인연이 있는 사람이었다는 걸 알아채고 나서 어쩌면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고맙습니다·”
“말해보세요·”
“다름 아니고 제가 아주 오래전에 부모와 떨어져 살았습니다· 지금이라도 찾고 싶은데 아는 거라곤 이곳 부산 백병원에서 저를 낳았다는 것과 어머니 성함이 이명자라는 것밖에 모릅니다· 그런데 이름이 본명이 맞는지는 저도 모릅니다·”
주지 스님이 영훈을 데리고 올 때 당시 친모에 대해 알고 있었던 모든 정보였다·
“본명이라면 찾기 그렇게 어렵지 않을 텐데 만약 본명이 아니라면 쉽지 않을 수도 있어요·”
“못 찾으면 어쩔 수 없습니다· 꼭 찾아야 한다고 마음 먹고 있는 건 아니니 정 안 되면 운명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렇게 이야기를 끝내고 병원장실에서 나오니 연희가 기다리고 있었다·
“사장님은 어디 가셨습니까?”
“고모 만나러 가셨어요·”
“갑자기?”
“갑자기 고모가 만나자고 연락을 해왔거든요· 이왕 부산에 온김에 정리할 건 정리하자는 식으로 말씀하셨대요·”
“계열사 분리를 하자는 건 아닐 테고···”
“뻔하죠· 할아버지가 쓰러졌으니 현진중공업 회장직이 공석이 됐고 다음 정기주주총회가 3월이니까 그때 김태민 상무를 밀어달라고 요청하는 거예요·”
“아··· 도와주지 않으면 김태민 상무 쪽에서 불편한 상황입니까?”
“그렇지는 않아요· 해외 쪽 주주들이나 국내 기관들도 현재 경영권에 관해서는 크게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고 있거든요· 아 물론 지금까지는 그래요· 현진중공업 주식 10% 정도 가지고 있다고 알려진 헤지펀드에서 갑자기 경영진에 대해 태클을 걸어오면 또 골치 아파지니까 미리 엄마한테 부탁하고 있는 거죠·”
“알겠습니다· 그럼 일단 공수가 바뀔 염려는 없는 거겠군요·”
“3월까지는요· 김태민 상무가 회장직에 바로 앉기는 힘들겠고 회장직을 공석으로 두고 부회장직에 올라 전권을 휘두르게 되면 또 다른 말이 나올 수도 있으니까 안심할 수는 없을 거예요·”
“그럼 우리는 그 때까지 뭐하고 있을까요?”
연희는 빙그레 웃으며 영훈의 팔짱을 와락 꼈다·
“일단 요 앞 커피숍에 갈래요? 나 지금 궁금한 게 너무 많아·”
“그럽시다·”
영훈은 웃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
우명지주회사 가장 꼭대기에 위치한 회장실·
김태현 회장은 몹시도 불편한 얼굴로 아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확실해?”
언제나 자신만만한 얼굴이던 창훈은 참담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한 시간 뒤에 올라올 거라고···”
“이게 말이 돼! 다른 곳도 아니고 현진건설이라니! 작년만 해도 도급능력 39위인데 아니었어?”
“아무래도 조재민 의원이 손을 쓴거 같습니다·”
“고작 군산 버스터미널 하나로? 그거 하나로 4천가구가 들어서는 대단지 아파트 시공권을 내줘? 이거 현진건설이 분양가를 평당 4천 넘게 매긴다고 하던데 그럼 도대체 얼마를 남기는 거야?”
“지방치고는 너무 고가라 미분양 확률이 큽니다· 자칫 잘못하면 절반 이상 분양이 안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 현진물산이 현진관광 먹고 거기에 리츠칼튼 호텔 쉐프들 데리고 와서 조식 서비스 제공하겠다고 했다며?”
“네···”
“그럼 내가 지방에 살고 있더라도 혹하지 않겠냐?”
“그거야···”
창훈은 억울했다·
이 모든 이야기들이 다 처음 듣는 이야기는 아니지 않은가?
애초부터 다 알고 있었음에도 설마 우명건설을 제끼고 현진건설을 택하지는 않을 거라고 확신했기에 현진건설이 호텔급 조식서비스니 지랄이니 하는 걸 다 귓등으로 흘려듣지 않았는가 말이다·
이제와서 왜 그 정도를 못하냐고 묻는다면 왜 그때는 가만히 있었냐는 물음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이때 자리에 앉아 있던 큰형이 그를 도왔다·
“창훈이도 설마 현진건설이 따낼지는 몰랐을 겁니다· 그리고 호텔급 조식서비스에 LH 애들이 넘어갈거라고 생각하지 못했을수도 있구요· 그리고 애초부터 조재민 의원이 손댔다면 조식서비스고 다른 부가적인 요소를 넘어서 처음부터 결론이 난 상황에서 입찰을 붙인 것일지도 모릅니다·”
“넌 어떻게 생각해? 조재민이가 고작 버스터미널에 넘어갔을 것 같아?”
“강주원 의원이 뇌물로 날아갔습니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이 조재민 의원이 군산시장 보궐선거를 준비하고 있다고 하구요· 만약 작년 겨울부터 강주원이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처음부터 군산시장을 노리고 있었다면 고작 버스터미널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김태현 회장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지 아니지··· 공천만 된다면 누가 나오든 선거에서 당선되는 지역이 거기야· 강주원이 날아갈지 알았다면 둘 중 하나를 했어야지· 공천이 불확실했다면 여의도에 힘을 써서 공천을 확정 받든가· 공천이 확실했다면 그냥 쥐죽은 듯이 가만히 있다가 조용히 선거에 나서든가·”
여기까지 말하던 김 회장은 고개를 갸웃하더니 말을 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긴 해 보궐선거를 벌써부터 떠들썩하게 준비할 이유가 있을까? 그리고 왜 군산시장을 노리지? 군산에 뭐 꿀 발라 놓은것도 아니고 말이야·”
“맞습니다· 군산 경제도 안 좋은 상황이고 작은 지방 시장보다는 국회의원을 더 하는게 나을 텐데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시장직에 뛰어들려고 하는게 이해가 안 되긴 합니다·”
“그렇지· 잘 돼야 본전인 곳이 군산이야· 누가 봐도 험지인 곳에 왜 가는 걸까?”
김 회장이 고심할 때 억울한 표정의 창훈이 툭 던졌다·
“혹시 모르지 않습니까· 알고 보니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그곳이었을지·”
“응?”
이때 도훈이 도착한 문자를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아버지 메디슨 펀드에서 현진중공업을 노릴지도 모른다는데요?”
“현진중공업? 가지고 있는 지분도 얼마 안 될 텐데? 먹을게 있나?”
“임창호 회장이 쓰러졌으니 그냥 쥐고 흔들면서 차익을 내려는 것 같습니다· 마침 3월에 주총이 있으니 잘 됐다 싶겠네요·”
“임 회장이 쓰러졌다··· 그리고 그 와중에 외국계 펀드가 회사를 노린다··· 회사 임원진은 갈팡질팡하겠고 근로조건이 어쩌고 하면서 노조까지 흔들면 볼 만하겠구만·”
“조선업이 불황이면 아예 손도 대지 않을 텐데 이제 경기가 살아나고 있는 추세라 기회라고 본 것 같습니다·”
“절묘하군· 절묘해·”
탄식을 내뱉던 김태현 회장은 문득 생각이 난 듯 물었다·
“그런데 우리도 현진중공업 주식을 들고 있지?”
“네· 그룹 전체를 다 합하면 대략 4% 정도가 아닐까 합니다·”
“그래도 친구가 쓰러진 마당에 외국계 펀드가 현진중공업을 삼키는 걸 두고 볼 수 있나· 우리가 도와줘야지·”
도훈은 미소를 지으며 맞장구를 쳤다·
“맞습니다· 어려울 때는 서로 도와야죠· 아마 차기 경영진 쪽에서도 반길게 분명합니다· 뭐 싫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죠· 하하하!”
< 부산에서 생긴 일(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