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형준 상무의 싸움(3) >
형준은 신영은행 전략기획팀 자신의 방에 틀어박혀 블라인드를 내리고 생각에 잠겨 있었다·
이대로 베트남으로 가게 되면 과연 돌아올 수 있을까?
신영금융그룹 직원의 신분으로는 절대 돌아올 수 없을 게 분명했다·
어쩌면 그대로 영영 한국땅을 밟지 못할지도 모른다·
신영은행으로 옮긴지 얼마나 됐다고 베트남으로 보낼까?
외부는 물론이고 내부에서도 이해하지 못할 인사조치를 밀어붙이는 건 그만큼 아버지도 자신의 성장이 위협적이라고 판단했다는 결론 아니겠는가?
일단 생각해보겠다는 말로 겨우 시간을 벌고 나왔지만 한번 입에서 베트남이라는 말이 나온 이상 이번 정기인사 때 형준의 베트남지부 발령을 본격적으로 추진할 것이다·
적어도 3월 정기인사 전까기 방도를 마련해야 한다·
그런데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뾰족한 방도가 떠오르지 않았다·
아버지인 이세준 부회장의 영향력은 그룹 전체에 거미줄처럼 뻗어 있었고 할아버지는 이제 아버지에게 천천히 그룹의 전권을 물려주고 있었다·
이제는 부행장에 누가 오는지보다 일단 내가 사는 걸 걱정해야 할 판이었다·
설마 아버지가 이렇게 빨리 칼을 들이댈 줄은 전혀 몰랐다·
“강 전무 저녁에 나 좀 봅시다· 강남 블루문으로 오세요·”
결국 형준은 강주현 전무를 호출했다·
혹시 아버지의 눈에 뜨일까봐 사소한 만남도 자제하고 있던 형준은 더는 지체할 수 없었다·
이때 영훈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아직 회식도 안 했을 텐데 벌써 전화야?”
[회식은 됐습니다· 운 좋게 우리쪽 정보라인 통해서 상무님이 원하는 건 해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한 시간 전에 이 이야기를 들었다면 기쁜 마음에 당장 만나자고 했겠지만 지금은 마석대 따위가 중요한 상황이 아니게 됐다·
당장 나부터 죽게 생겼는데 생판 모르는 남이 부행장이 되든 말든 뭐가 중요하겠는가?
형준은 힘 빠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중에 이야기하자· 후···”
[무슨 일 있습니까?]
“그게··· 야 너 혹시 연희랑 지금 같이 있냐?”
[같이 있기는 한데··· 중요한 일이면 데이트는 미루도록 하죠·]
“내가 어지간하면 네 데이트 방해하고 싶지 않은데 지금은 좀 상황이 심각하다· 강남역 3번 출구로 나와서 계속 직진하면 왼쪽에 블루문이라는 룸싸롱 있어· 거기 가 있어라· 나도 최대한 빨리 일 마무리하고 갈 테니까·”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형준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다가 자신의 방을 나섰다·
옷을 챙겨 입고 나가는 모습에 젊고 아름다운 비서가 다가와 물었다·
“혹시 퇴근하십니까? 5시 반에 회의 있습니다만·”
“회의 취소하고 오늘 저녁은 빨리 퇴근하라고 해· 괜히 야근하지 말고·”
“알겠습니다· 혹시···”
여비서는 주변을 잠시 살피고는 속삭이듯 작게 말했다·
“응?”
“또 룸싸롱 가시는 거 아니시죠?”
“내가 우리 지은이 두고 그런델 왜 가?”
“칫··· 전에도 가셨잖아요?”
“일 때문에 간 거야~ 나 요즘 지은이 말고 다른 여자는 생각해본 적도 없다·”
“거짓말·”
“진짜야· 갑자기 일이 생겨서 그래·”
“왜요? 안 좋은 일인가요? 아까 부회장님이 불러서 다녀왔잖아요? 그것 때문에 그래요?”
형준은 살짝 인상을 썼다·
“나중에 이야기해줄게· 그러니까 오늘은 나 기다리지 말고 응?”
“알았어요·”
형준은 시무룩해진 그녀의 엉덩이를 슬쩍 쓰다듬고는 전략기획팀을 나왔다·
이곳에 와서 단번에 눈에 들어온 박지은을 꼬셔서 회사 근처에 오피스텔을 잡아줄 때만 해도 모든 게 잘 될 줄 알았다·
그런데 이제는 그녀와 즐길 시간도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아 더욱 우울해졌다·
혹시나 뒤를 미행당할까 싶어 회사에 차를 두고 택시를 타고 강남으로 향했다·
강남에 도착해서도 뒤에 누가 따라오는 게 아닌지 괜히 두리번거리다가 룸싸롱으로 들어갔다·
“어서오십시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먼저 올 거라고 말했던 친구는?”
“20분 전에 도착하셔서 술 넣어드렸습니다·”
“잘했어·”
형준은 웨이터의 어깨를 두드리고 미리 예약한 룸으로 걸어가는데 반대편에서 늘씬한 미녀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오빠! 요즘 너무 뜸한 거 아니에요?”
“바빠서 정신 없었지·”
형준이 문을 열고 들어가니 영훈이 과일 안주를 먹고 있는게 보였다·
“안 늦었지?”
“네·”
젊은 마담이 영훈의 옆으로 쪼르르 다가와 앉으며 말했다·
“어머 이 오빠는 처음 보네?”
영훈은 대꾸도 안 하고 형준을 바라보았다·
그 무심한 눈빛에 찔끔한 형준이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크흠··· 내가 부른거 아니야· 오늘은 아가씨 앉히지 않을 거니까 술이나 가져다 줘·”
마담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진짜요?”
“두말하게 하지 말고 얼른 나가·”
마담도 분위기가 심각한 걸 느꼈는지 머쓱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난다·
“네· 즐거운 시간 되세요·”
마담이 나가자 형준이 말했다·
“뭘 그렇게 민망하게 만들고 그래?”
“제가 여자 조심하라고 한 거 금새 잊어버렸습니까?”
“방금 들었지? 내가 뭐라고 그랬어? 오늘은 여자 앉히지 않을거라고 했잖아· 저 여자는 일종의 영업사원이고 난 방금 아주 단호하게 제안을 거절한 거야· 칭찬을 해도 모자를 일이라고·”
“예 예··· 듣고 보니 틀린 말은 아니네요· 그런데 제 말 허투루 들으시면 안 됩니다·”
“아니 그런데··· 생각을 해봐· 그 얘기를 1년 전부터 한 것도 아니고 나도 생활을 하다 보면 공적이나 사적으로 여자를 만날 일도 생길거 아니야? 당장 여자를 끊으라고 하면 조금 그렇지·”
형준은 억울한 표정으로 항변했지만 영훈은 표정 하나 흐트러뜨리지 않고 무겁게 받아쳤다·
“여자는 일단 살고 난 뒤에 탐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아니 뭐··· 그게 맞는 말이기는 하지· 정리할 거야 깔끔하게·”
형준은 속으로 지은이에게 어떻게 오피스텔에서 나가라고 해야 할지 아득해졌지만 그건 지금 당장 문제도 아니었다·
“아까 목소리 들어보니까 안 좋던데 무슨 일입니까?”
영훈이 물어보자 다시금 안색이 어두워진 형준은 깔아놓은 술 중 아무거나 하나 집어 들고 온더락 잔에 가득 따라 마시고는 말했다·
“아까 아버지가 날 불러서 베트남으로 가라고 하셨어·”
“베트남이요?”
“그래· 신영은행이 지금 베트남에 지부를 개설하고 상당히 공격적으로 영업을 시작하는 중이야· 너도 알겠지만 이제 한국에서 은행업은 과포화 상태야· 인구는 줄고 있고 각 은행마다 내세울 수 있는 장점이 흐릿해지고 있지· 성장에 한계가 다다랐다는 거야·”
“아···”
“밖으로 눈을 돌리니까 보인게 바로 베트남이었지· 인구도 1억이고 젊은데다가 일을 열심히 하는 민족이거든· 게다가 삼전전자가 베트남 GDP의 30% 가까이를 차지하고 있어서 한국에 친화적이기도 하고· 아직 금융이 발달하지 않아서 우리가 진출하기에 딱 좋은 곳이지·”
“그렇군요·”
“어쨌든 그래서 회사에서는 베트남에 신경을 굉장히 많이 쓰는 중이야· 물론 지금까지 나는 그게 내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어· 그저 우리가 전략을 세우면 최전방에서 전투 할 장수를 보낼거라고만 생각했었거든· 내가 그 장수가 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지·”
“칼을 빼들었군요·”
신라호텔에서 이세준 부회장을 처음 봤을 때 권력을 향한 탐욕이 대단한 사람임을 익히 알아보았다·
권력을 위해 자신의 자식이 아닌 걸 알면서도 30년 넘게 연기를 해왔던 사람이다·
남의 아들이 주머니 속의 송곳처럼 튀어나오자 조금의 지체도 없이 바로 망치를 꺼내드는 걸 볼 때 그의 결단력은 권력욕 만큼이나 대단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너한테 마석대 그 인간 어떻게 해보자고 일 시켜놨는데 내 목이 먼저 날아가게 생겼다· 하··· 씨발··· 인생 진짜 좆같네· 새해 됐는데 어디 점 잘 보는데 가서 올해 토정비결이라도 봐야 하는거 아닌가 싶네·”
“토정비결은 모르겠지만 일단 아직 포기할 단계는 아닙니다·”
“당연히 포기하지는 않았지···”
형준은 그렇게 말하다가 영훈이 지금까지 이런 절망적인 이야기를 들었음에도 전혀 표정에 안타까움이 묻어 있지 않은 걸 보고는 눈빛을 반짝였다·
“너 혹시 내가 살아날 구멍을 알고 있는 거냐?”
솔직히 이 정도로 다급한 상황에 몰렸을지는 몰랐다·
이형준 상무의 올해 사주에 이직의 운이 있기는 하지만 강하지 않았고 오히려 승진운이 훨씬 컸다·
그래서 여자 문제만 거론한 거였다·
“음··· 확실하지는 않은건데요·”
“뭔가 방법은 있다는 거 아냐?”
“그렇긴 한데···”
“하하하! 인마! 이 새끼··· 내가 너 좋아하는 거 알지? 일단 한 잔 해·”
형준은 호탕하게 웃고는 부산스럽게 손을 움직이며 영훈에게 술을 따르고 말했다·
“내가 오늘 술 좋은거 깔아놓으라고 했거든· 전에 네가 술 샀지? 내가 너한테 술 사라고 말해놓고 집에 가서 내내 마음이 걸리더라고· 가라오케에서 법인카드 긁은거 가지고 회사에서 눈치 받는 건 아닐까 싶어서 잠이 안 왔잖아·”
“그랬습니까?”
“그럼 그럼~ 혹시 송은채 사장이 뭐라고 한 건 아니지?”
“다행스럽게도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아휴 다행이네· 일단 쭈욱 들이켜·”
영훈은 피식 웃으며 술을 한 모금 맛보고는 말했다·
“일단 그 전에 한 가지 궁금한게 있습니다·”
“뭔데? 허심탄회하게 말해 봐·”
“대단한 건 아닙니다· 그냥 궁금해서요· 부회장님께서 베트남에 보낸다고 하셨을 때 느낌이 어땠습니까? 부회장님한테 받은 느낌이요·”
“어떤 느낌이었냐고?”
“네·”
형준은 영훈의 물음에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한참 뒤에 술을 마시곤 말했다·
“전혀 흔들림이 없었어· 만약 내가 너를 만나기 전이었다면 정말 단 한 점의 의심 없이 베트남으로 갔을 정도였어·”
“그렇군요·”
영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뱀 같은 속을 지닌 자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형준 상무의 싸움은 굉장히 힘들 게 틀림없었다·
“왜?”
“아닙니다· 일단 제가 드리는 답이 결코 백프로 정답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단지 상무님의 상황에 비추어 봤을 때 그나마 최선의 방도라고 생각할 뿐입니다· 제가 무슨 제갈량도 아니고 안 그래요?”
“그거야 그렇겠지·”
“어쩌면 상무님이 원하는 답이 아닐 수 있습니다· 실망하실 수 있겠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죠·”
“빙빙 돌리지 말고 빨리 물건을 꺼내· 답답해 뒤지겄다!”
형준이 가슴을 쾅쾅 때리자 영훈이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그 마석대라는 분은 딱히 흠을 잡을 만한 곳이 없었습니다·”
“정말? 단 한 군데도?”
“선비 같은 사람입니다· 그렇다고 돈을 싫어하는가 하면 그건 아닌데 선을 넘는 법이 없을 사람이에요· 어쩌면 그렇게 흠 잡을 만한 게 없으니 부친께서 자신있게 밀어붙이려는 것일 수 있겠죠·”
“뭐야? 그럼 어떡해?”
“선비 같다고 말씀 드렸죠? 본래 선비는 어설픈 협박이나 수작으로는 곤란하게 하기 힘듭니다 단 한 가지의 경우에는 납작 엎드리죠·”
“그게 뭔데?”
“실력으로 찍어 누르면 됩니다·”
형준은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미간을 찡그렸다·
“아니 일대일 격투기를 하는 것도 아니고 시험을 치는 것도 아닌데 무슨 실력을 겨루겠다는 건지···”
그는 여기까지 말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감 잡으셨어요?”
“이슈를 만들라는 건가?”
“맞습니다· 정기인사 전에 상무님이 전면에 나서서 신영은행의 엄청난 실적을 이끌어 내면 됩니다· 그럼 설사 마석대가 부행장에 아무 문제없이 오른다고 해도 나중에 상무님을 지지할 겁니다· 단순히 재벌 3세 혈연빨로 그 자리에 오른 사람이 아니라는 걸 보여주면 되는 거죠·”
형준은 가만히 생각해보다가 말했다·
“가만 가만··· 그건 이해가 가는데 내가 살아날 만한 구멍이 있다며? 그렇게 화려하게 등장해서 그대로 베트남 가버리는 거 아니야?”
“그 이슈가 상무님이 빠지면 안 되는 이슈라면요?”
“그런 게 있을라고? 야 대기업 일이라는 게 꼭 나만 해결할 수 있는 건 없어요· 전부 나 없으면 회사 안 돌아간다고 하지만 막상 빠져도 다 잘 돌아가·”
“세상 일에 반드시라는 건 없습니다· 예외가 없으면 무슨 재미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결론이 뭔데?”
“군산조선소 산업단지입주계약이 곧 종료됩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입주계약 연장이 안 될 겁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임대 계약이 종료된 광활한 땅에 설치된 한국 최대의 조선소· 매각주관사로 신영은행을 선정할 생각입니다· 더 정확하게는 상무님에게 맡기겠죠· 무진중공업은 거절할 수 없을 겁니다· 안 그러면 엄청난 돈이 들어간 그 설비들을 제값도 못 받고 팔아야 할 테니까요· 상무님이 이거 잡고 중간에서 컨트롤 하고 있
으면 베트남 안 가도 되는 거 아닙니까?”
“하··· 야 그 애물단지를 누가 사?”
“우리가 현진물산이 삽니다·”
형준은 침을 꿀꺽 삼켰다·
< 이형준 상무의 싸움(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