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87
내가 이 나라를 부숴버리겠다는 의지를 표력한 직후 짧은 정적이 찾아왔다. 직후 유엘이 양손을 맞잡으려고 했다. 몸에 익은 동작인만큼 꽤 빠르다.
그렇지만 기공도 익히지 않은 방구석 외톨이가 생각을 읽는 나보다는 빠르지는 않다.
손가락을 튕겼다. 맞닿기 직전 두 손 사이로 카드 한 장이 파고들었다. 날카로운 카드는 성녀의 손에 상처를 냈다. 성녀가 신음을 흘렸다.
“윽!”
“사기 기술 좀 그만 써! 무적은 비겁하잖아!”
다이아몬드 8. 가늘고 긴 모든 것.
거기서 와이어를 뽑아낸 나는 냉큼 유엘의 손을 휘감아 잡아당겼다. 예리한 와이어가 살을 파고들며 유엘의 손을 잡아챘다. 팔이 내 쪽으로 딸려온다. 와중에 몸은 따라오지 못하도록 어깨를 세게 눌렀다.
“이익!”
“혹시나 해서 다시 말하는데 여기에는 공주님이 계십니다! 다 죽자는 작전은 이제 못써요!”
성녀가 힘을 줘보지만 우습다. 내가 그래도 기초적인 기공까지 익힌 건장한 성인 남성인데 방구석 성녀에게 힘으로 지지는 않지. 제압된 유엘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불가능해. 힘을 다 잃은 네가 군국을 멸망시킬 수는 없어.”
“군국을 멸망시키는 데는 힘 따위 필요 없어요. 예전부터 부도 수표를 무너뜨리는 건 힘이 아니라 불신이었으니까요. 신용이란 그토록 중요한 거죠.”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내가 이야기했잖아. 독 중에 가장 치명적인 독은 신경독이라니까.
나는 유엘의 귀에 속삭였다.
“에이비 대위의 도움을 받아서 통신병들이 다 자기 방에서 나오도록 할 거예요. 군국 각지에 존재하는 모든 통신병들에게 자유를 주는 거죠.”
“그럴 수 없어! 통신병은 창문 없는 방을 나가선 안 된다는 규칙에 얽매여 있어. 일개 통신병이 명령한다고 규칙을 어기지 않아!”
“하지만 일개 통신병이 아니라면? 사령부의 명령이나 다름없는 통신 모듈을 거쳐서 나오는 명령이라면 어때요?”
사령부의 정체가 통신병들의 집합이었다고 해서 통신병의 말이 바로 사령부의 명령이 되는 게 아니다.
그것이 사령부의 판단이 되려면 해당 통신병은 정보를 다른 통신병에게 전달해야 한다. 그렇게 전해진 정보는 수많은 통신병과 특정 가치판단에 특화된 모듈을 거쳐 가공되고 그 뒤 사령부의 명령이라고 포장되어 되돌아온다. 마치 인간의 두뇌처럼.
따라서 일개 통신병이 사령부의 명령을 사칭할 수는 없다.
하지만 강력한 통신병은 가까이 있는 통신병에게 동조하여 조종할 수 있지.
“보니까 위에 계신 통신병들. 하나같이 순진하기 그지없더라고요. 그림을 그려넣기 가장 좋은 건 때 묻지 않은 순백이죠. 저와 에이비 대위가 위쪽 모듈을 손에 넣으면? 그걸로 가까운 통신병부터 차근차근 해방하면. 어때요? 이제 슬슬 그림이 그려지나?”
“…정신오염을 시킬 작정이야?”
“당신은 그렇게 부르나 보네요. 저는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이라고 말할 생각인데.”
캬. 속이 뻥 뚫리네. 최후의 순간 모든 계획을 제 입으로 떠벌리는 삼류 악당의 심정이 이제 이해가 간다.
뭐? 스스로 계획을 떠벌리는 바람에 역전의 빌미를 줘? 성공이나 실패가 뭐가 중요해? 지금 당장 즐거운데!
허황된 말이라면 웃어넘겼을 테지만 내가 말한 미래가 실현 가능하기에 더욱 섬뜩하겠지. 지금까진 삶에 미련이 없이 다 포기한 듯 보였던 유엘이었으나 나의 말에 위기감을 느꼈다.
“내가… 가만히 두고 볼 것 같아?”
“안 하면 어쩔 건데요? 기도하게? 아쉽게도 손이 묶인 이상 그럴 기회는 없을 거예요. 처음부터 기도를 풀지 말지.”
성녀의 능력이라고 해봤자 처음의 성녀가 해냈던 기적의 재현. 기적인 만큼 특별하지만 대신 뻔하지. 팔도 제압되었고 공주와 함께 있는 지금 나를 위협할 수단은 없어.
아 그러고 보니 공주 손이 비었지?
“공주님 이리 와서 이 와이어 좀 잡아주실래요? 아무래도 이 여자를 데리고 나가는 데는 공주님 손이 필요하겠네요.”
“저 저요?”
“네. 아무리 저라도 반항하는 여자를 안고 사다리를 올라갈 수는 없거든요. 그 여자가 저와 같이 떨어져 죽어도 상관없다는 마음을 가졌으면 더더욱.”
공주는 덜컥 겁을 집어먹었다.
“그런 사람을 제가 데리고 올라가라고요…?”
“공주님도 대충 알잖아요. 공주님은 누구도 ‘의도적으로’ 공격할 수 없어요. 그건 개의 왕이 인간을 해치지 못하는 이유와 비슷한 거예요. 물론 관념의 존재인 개의 왕에 비해서는 덜 절대적이지만.”
공주는 뒷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지만 꼭 이해해야만 설득되는 건 아니니까. 공주가 주춤거리며 손을 뻗었다. 나는 공주가 와이어를 붙잡기 전까지 힘을 계속 주고 있었다. 유엘은 공주를 공격할 수 없을 뿐이지 팔을 뿌리칠 수는 있을 테니까.
흠. 차라리 이 와이어를 공주의 목에 걸면 뿌리치지도 못할… 아니다. 그랬다간 예기치 않은 사고로 공주가 죽어버릴 수도 있고 무엇보다 시아티가 나를 때려죽이려 들 테니까. 그 계획은 취소.
“나가서 군웅의 시체를 보여주고. 천통 에이메데르의 진정한 정체를 밝히고. 와중에 통신병을 차례차례 해방한다. 군국이 자랑으로 여겼던 통신병 시스템은 불신의 대상이 됩니다. 통신병은 일개 소녀에 불과하며 지금까지 내려온 명령은 사실 그들끼리 짜고 꾸며진 거였다! 우리가 퍼뜨린 그 불신은 알음알음 퍼져서 군국을 좀먹겠죠!”
“그딴….”
“그딴 짓! 제가 합니다! 저는 해요!”
어쩔 수 없다. 이건 직업병 같은 거란 말이다.
나는 인간의 바람을 듣는다. 하지만 군국은 인간이 아니며 따라서 군국의 바람은 듣지 못한다. 그리고 군국민이 보기에 군국은 참 빌어먹을 나라다.
집단적인 주관으로 볼 때 군국은 왕국보다 낫다. 둘 다 경험해본 이들은 대부분 그렇게 평가한다.
하지만 군국은 강압적인 나라다. 인간에게서 선택권을 책임을 죄를 빼앗는다. 따라서 군국민이 가진 모든 불행은 전부 군국의 탓이 된다. 점차 죄악이 쌓이고 그것을 해소하지 못하고 흐리는 도중….
“당신을 저를 보고 문명의 파괴자라고 했지만 제 입장은 달라요. 제가 보기에 당신은 세상에서 가장 오래 효율적으로 인간을 죽이는 기계를 발명한 인간일 뿐. 아쉽게도 그 기계는 제 이해의 대상이 아니네요.”
“야만의 시대로 돌아갈 수는 없어! 인간은 짐승이 아니야!”
“너무 자주 언급되어서일까요? 꽤 많은 사람이 그걸 진지하게 믿고는 있지만 사실 한 꺼풀만 벗기면 바로 드러나죠. 인간은 본디 짐승이라는 게.”
그러니까 내가 있는 거고.
유엘의 얼굴에 공포와 경악이 스친다. 어떻게인지는 몰라도 나에 대해 아는 그녀는 필요 이상의 두려움을 갖고 있었다.
‘안 돼. 이 나라는 나의 유일한 유산이야. 나와 그가 만든 우리 둘의 아이야! 역사에 파묻혀 스러질지언정 야만에게 좀먹혀져서는…!’
하지만 지금 유엘에게는 그 어떠한 저항수단도 없다. 슬픔에 빠져 은둔하기를 십여 년. 이제 그녀가 누군지 기억하는 이가 없으니 지키러 올 사람도 없다.
유엘의 눈이 절망으로 물들 때였다.
“저… 휴이 님.”
공주가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그녀는 무리한 부탁을 하려는 사람처럼 어쩔 줄 몰라하는 표정이었다. 독심술을 가진 나라서 아는데 보통 이런 말이 들려오면 내 의견에 반대하더라고.
갑자기 왜? 의아하지만 공주는 아직 중요한 할 일이 있었기에 부드럽게 대답했다.
“네. 말씀하세요.”
“꼭 그런 방식으로 드러내야 할까요? 너무 거칠잖아요.”
“네?”
이게 뭔 소리지. 세상에 거칠지 않은 공격이 있나? 적의 숨통을 찌르는데 상냥하게 찌를 수는 없잖아?
내 어이없어 하는 감정이 표정에서 배어나온 거 같다. 공주는 여전히 기가 죽은 채로 그래도 고집스럽게 말했다.
“분명 군국은 비정한 나라에요. 하지만 수많은 사람이 군국의 체제에 적응하고 그 명령에 따르며 살고 있어요. 군국을 움직이는 모든 비밀을 단숨에 밝혀버리면… 주체할 수 없는 혼란이 찾아올 거예요.”
“당연하죠. 처음부터 그게 목적 아니었나요? 군국이 혼란스러워질수록 우리가 안전해지잖아요.”
“그랬다간 많은 사람이 고통받아요. 지금 군국은 열국을 향해 전쟁을 일으키려는 때에요. 이 상황에서 무작정 사령부를 파헤치면 군인들이 와해될 거예요. 역사적으로도 커다란 무장 집단이 와해될수록 그건 백성의 고통이 되었어요. 그건 평화를 사랑하는 셰이 공도 바라지 않을 거예요.”
바보야. 나도 알아! 그래서 내가 회귀자를 떼고 온 거잖아!
최선의 결과만 추구하는 회귀자라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일단 군국을 살려두었을 거다. 회귀자가 원하는 건 그녀에게 유리해질 법한 적당한 혼돈이다. 이대로 두면 재앙이 찾아오지만 그렇다고 다 뒤집어엎으면 변수가 너무 많아지니까. 아마 다툼을 멈추고 인류의 힘을 온존한 다음 약해진 죄악의 왕이랑 싸울 때 그 모두를 쏟아부을 심산이겠지.
하지만 그래선 안 돼! 여러가지 의미로!
그게 도대체 어떻게 되먹은 미래인지 모르지만 아마 거기선 내가 죄악의 왕일 테니까!
“휴이 님은 말씀하셨죠. 저희는 군국을 모른다고요. 하지만 제가 바꾸고 싶은 건 자비도 상냥함도 없는 비정한 군국이었어요. 저는 군국에 상냥함이 있다면 더 좋아질 수 있을 거라고 믿어요.”
“그래서 공주님은 군국에게도 상냥해질 작정인가요?”
“그 그렇게 거창하진 않아요. 하지만 상냥하기를 바란다면 제가 먼저 상냥함을 보여야 하잖아요. 군국에게는 한 번의 기회가 절실해요.”
귀머거리는 말을 할 수 없다. 소리를 들을 수 없다면 소리 내는 법을 배우지 못한다.
그와 비슷한 이치로 그란디오모르 왕가의 핏줄은 타인에게 적의를 느낄 수 없다. 누구도 그녀를 향해 적의를 드러낸 적 없으니까 그게 무엇인지는 배워도 감정으로 익히지 못한다.
그래서일까. 공주는 고작 인간 주제에 나라를 용서하겠다는 허황된 이야기를 해버렸다.
하지만….
나는 머리를 부여잡고는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아아!”
“휴 휴이 님?! 무슨 일인가요?”
“젠장. 하필!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하필 공주가 그러냐! 여기서 더 유예를 달라는 거야?”
인간은 스스로 왕을 찾아낼 수 있다. 따라서 짐승의 왕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렇게 주장하면서 인간의 왕을 몰아냈지만 결국 모든 왕국은 무너졌다. 자신을 지배할 게 필요했던 인간들은 이제 각자 다른 것을 숭배한다.
하지만 아직 공주는 남았다. 그리고 적의를 배우지 못한 공주는 군국을 미워하지 않았다. 그 결과.
“군국의 왕이 되려는 거예요? 정말 특이한 방식으로 복권하네요요! 자기 나라를 멸망시키고 태어난 나라에 기생하여 왕이 되다니!”
“네 네? 꼭 그런 건.”
“꼭 그런 건 아니라고 얼버무리지 마요! 공주님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도 결국 똑같으니까! 이 나라에는 가능성이 있고 공주님은 그 가능성을 더 보고 싶다는 거죠?”
끙. 아직까지도 짐승의 왕이 필요없다는 거야? 상대가 군주라면 그 요청은 유효하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 회귀자의 말에 따르면 그다지 머지 않은 미래에 죄악의 왕이 각성한다고 했다. 아마 나에게 있어서도 남은 시간이 그렇게 많지는 않을 터. 이대로 유예를 주는 건….
앞으로 닥칠 내 미래를 생각하면!
“뭐 상관없긴 해요.”
상관없지.
나는 예언자가 아니고 내가 직접 보지 못한 미래는 내 알 바 아니야. 지긋지긋한 예언에 아직도 묶여있긴 하지만 아직 오지 않은 미래가 두려워서 현재의 내 행동에 한계를 두지 않아.
그건 예언자들이 사랑하는 문명의 방식이지. 나의 방식이 아니니까.
언젠가 찾아올 헌병이 무서워서 법을 어기지 않고 잘못될 것이 두려워 방관하지 않는다. 당장 할 수 있다면 한다.
“정말요?”
“다만 문제는 그게 아니에요. 공주님 공주님의 바람은 이룰 방법이 없어요.”
어디까지나 할 수 있는 것만. 안 되는 일에 머리를 박다가 깨지는 건 사양이야.
“유엘의 힘은 통신병으로 시작해서 통신병으로 끝나요. 그렇지만 공주님이 가진 힘이라고는 적의를 피하는 것 정도? 여기서 우리가 나가자마자 유엘이 우리를 죽이려고 천사를 부르거나 다른 통신병과 소통해서 병력을 움직이면? 공주님에게는 저항할 수단이 없어요. 이전의 군국과 똑같아져요.”
“유엘 님을 설득해서 약속을 받아내면 돼요! 유엘 님도 합리적인 분이니까 받아들일 거예요!”
“절대 안 그러죠. 영원할 나라에는 왕이 있어선 안 돼요. 그래서 유엘은 통신병을 만들어 아득바득 눈속임일지언정 왕이 없는 시스템을 만든 건데. 공주님의 뜻대로 상냥함이라는 것을 더하려면 다른 통신병보다 공주님의 의지가 훨씬 강해야 해요. 왕과 신하의 관계처럼.”
“앗….”
이룰 방법이 없다면 뭔 짓을 해도 이루지 못하지. 공주에게 적의를 피하는 능력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건 전지전능이 아니다. 시스템에 걸맞는 능력이 없다면 공주의 외침은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는다.
“차라리 군국이 아예 망가지는 편이 더 나을걸요? 총칼이 사방팔방을 겨누는 혼란이 찾아오면 공주님의 핏줄이 가장 돋보일 테니까.”
“저는 그렇게 되기를 바라지 않아요!”
“그러시겠죠. 어쨌든 대충 무슨 말인지 아셨죠? 그렇다면….”
내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공주를 단념시키려는 때였다.
“귀하.”
에이비 대위가 조용하게 나를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