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18
군국은 시민을 착취한다. 그들에게 먹고살 만큼의 물자와 약간의 사치는 허용하나 그 이상은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하게 한다. 다소 강압적인 방식으로 시민을 혹사시킨 덕분에 군국은 수많은 물질적 자산을 비축했다.
단 천금도 창고에만 쌓아 둔다면 돌덩이와 다를 바 없는 것.
인간을 부품처럼 다뤄서 어마어마한 부를 만들어낸 거대한 기계장치는 무엇을 위해 그토록 바쁘게 돌아갔을까.
“군국의 의문 하나. 그렇게 쌓은 자산은 다 어디로 갔을까요? 그 답이 여기 있네요!”
나는 캐터프랙트를 팡팡 두들기며 말했다.
군국의 전략병기 캐터프랙트. 하이코스트의 연금강으로 전면을 둘러싸 압도적인 방어력을 자랑하며 단순하면서도 혁신적인 구조로 기동력까지 갖춘 굴러다니는 요새다.
전투형 의복패킷 군장과 함께 레벨 4의 전략물자로 취급받는 군국의 정수 캐터프랙트. 철갑기병도 가뿐히 뛰어넘는 중량과 힘을 갖고 있다. 어지간한 명마라도 힘으로는 캐터프랙트의 상대가 되지 못할 것이다.
티르도 주위를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비슷한 것을 본 적 있다. 과거 군림했던 황금국의 폭군이 이와 닮은 호화로운 마차를 타고 다녔었지. 하나를 만드는 데 성 한 채의 노동력을 요한다고 들었다만 그녀는 그러한 것을 수십 대나 거느렸다.”
“캐터프랙트는 그보다는 덜 호화롭지만 더 기능적이라서 가격은 비슷할 걸요? 사람 한 명이 쓰는 게 아니다 보니 그거보다 많고요.”
“이런 사치스러운 걸 만들기 위해 백성의 피를 짜내었구나. 흐으음. 이러니 나라가 기울지.”
흡혈귀에게서 피를 짜낸다는 평가를 받은 힐데가 억울한 듯 항변했다.
“‘저’는 억울해요! 이 캐터프랙트는 ‘저’의 것이 아니라고요!”
“너의 것은 아니어도 장군인 너는 제멋대로 사용할 수 있잖느냐.”
“그렇지도 않아요! 캐터프랙트는 군국의 전략물자 중 하나라서 그 누구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없어요! 육장성인 ‘저’를 비롯해서 말이에요!”
실제로 그렇다.
군국은 지배계급인 장성에게도 사치를 허용하지 않는 나라. 장성급 의전도 알음알음 꾸민 내 방보다 구질 정도니까. 물론 장성도 재산은 가질 수 있으니 봉급을 모아 있는 사치 없는 사치 다 부릴 수야 있지만… 애초에 사치를 부리기 위해 봉급을 모아야 하는 시점에서 일반적인 사치와 거리가 멀다.
그러나 그 자체로 국가이자 귀족인 티르는 지배계급과 국가를 따로 구분해 생각하기 어려웠다.
“허나 네가 달라고 하니 속히 건네 주지 않았느냐.”
“그야 상부에서 허가가 내려왔으니까요!”
“같은 말을 돌려서 하는구나. 허가를 받아 쓸 수 있다면 그건 네 것이 아니더냐.”
“차이가 너~무너무 크잖아요? 움직이는데 상부 허가가 필요한 시점에서 ‘저’의 것이 아니고 애초에 공안부장인 ‘제’가 이런 요란한 물건을 요청해봤자 사유불충분으로 거절당한다고요! 고작 몇 명 이동하는데 케터프랙트를 내어주는 지금 경우가 특별한 거예요!! ‘저’도 못 누려본 특권을 여러분이 누리는 거라고요!”
힐데가 방방 뛰면서 자기가 얼마나 억울한지 설파했다. 그 요란스러운 분위기에 휩쓸린 티르가 귀찮은 듯 손을 내저었다.
“대강 알아들었다. 마차가 흔들리니 뛰는 것은 그만두거라.”
“네엣?! ‘저’처럼 가볍고 연약한 소녀가 발 좀 구른다고 이 무거운 쇳덩어리가 흔들릴 리 없잖아요! 너무해요!”
떼쓰는 꼴이 꼭 이웃집 할머니를 대하는 말괄량이의 그것이었다. 상대가 흡혈귀의 시조라는 점을 돌이켜보면 목숨 아까운 줄 모르고 날뛰는 것처럼 보였으나 놀랍게도 티르는 귀찮아하면서도 힐데의 말을 들어주었다.
“그래 그래. 실언이었다.”
‘원 누가 부녀지간 아니랄까 봐 둘 다 야단이로구나. 일단 어르고 달래야겠다. 장수를 공격하려면 일단 말부터 잡으라고 하였으니. 휴의 딸이라면 미리미리 친분을 쌓아 두는 편이 좋겠지.’
내 딸이라고? 진짜 믿는 거야?
이 사람 이상하다. 흡혈귀인데 인간의 말을 도무지 의심할 줄 몰라. 힐데가 딸이라고 했다고 그걸 덥석 받아들이다니. 뭔가 이상함을 못 느꼈나?
뭐 대강 어떤 결론에 이르렀는지는 알겠다. 인간이 가축을 의심하지 않는 것과 비슷하겠지. 흡혈귀는 일단 인간이지만 인간의 피를 먹이감으로 삼는 포식자이기도 하다. 속았다고 해도 여차하면 잡아 먹어버리면 그만이니까 방심할 수밖에.
저러다 언제 한 번 큰코다칠지도 몰라. 아니 이미 다쳤나. 그래도 어쩌겠어. 다 다치면서 배워가는 거지. 상처에 새겨진 경험이 오래가는 법.
나는 상처 입을 권리마저도 지켜주는 자상하면서도 엄한 왕이니까.
“…잠깐 티르칸쟈카. 저 허무맹랑한 말을 믿는 거야?”
그렇지만 회귀자는 기어이 티르가 상처 입을 권리마저 빼앗아 가려고 했다. 회귀자는 팔짱을 끼며 모순을 지적했다.
“영궤가 왜 휴즈를 보고 아버님이라고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 안 되잖아. 전혀 이치에 맞지 않아.”
“무엇이 말이더냐?”
“영궤는 군국이 처음 만들어졌을 때부터 암중에서 활약했다 알려지는 육장성이야. 군국이 만들어진 25년 전 그때 이미 현역이었다면 아무리 젊게 잡아도 최소한 마흔 줄이라는 이야기지.”
마치 탐정이라도 된 것처럼 날카롭게 쏘아붙인다. 초등학생도 충분히 할 법한 아주 초보적인 추리였으나 티르는 미처 깨닫지 못한 부분이었다.
‘앗 깜빡했구나. 본디 나는 타인의 나이를 잘 실감하지 못하는지라….’
아니 미처 깨닫지 못한 게 아니라 너무 작아서 무시한 거구나. 12세기 소녀에게 두 자릿수에서 일어나는 일은 조금 생소했나 보다.
‘…으음. 어디 보자. 나이가 무슨 상관이….’
생각을 이어 나간 티르가 금단의 진실 앞에서 우물쭈물하는 사이 회귀자는 기어이 티르가 스스로 상처 입힐 권리마저도 빼앗았다.
“저 아줌마는 변신하는 능력으로 저렇게 꾸몄을 뿐이지 실제로는 훨씬 나이가 많다고! 흥 그러면서 아들뻘인 사람한테 아버님이라니. 부끄럽지도 않아?”
와 말이 심하네. 아무리 사실이라고 해도 조금의 배려도 없는 거냐. 말이 너무 심해서 곁에 있던 티르조차도 약간 마음의 상처를 입었잖아.
“와.”
거기다 면전에서 아줌마라는 말을 들은 힐데는 살짝 가면이 벗겨졌다. 힐데는 얼굴에서 웃음기를 싹 지우고는 회귀자를 째려보았다.
“심하시네요. 무례함을 넘어 잔인하기까지 해. 정말 저리 곱상한 얼굴을 갖고도 왜 여자에게 인기가 없는지 알겠어.”
“인기 같은 건 필요 없거든! 오히려 내 쪽에서 사양하겠어!”
“후우. 이런 싸구려 도발에 걸려드는 ‘저’도 문제네요. 이래서 가면을 쓰고 있어야 해. ‘제’가 아니면 뭐라고 지껄인들 흘려 넘기면 되는데 맨얼굴의 ‘저’를 드러내면 바로 긁혀버리니까요.”
힐데는 금방 마음을 가라앉혔다. 마음 속으로는 자기 암시를 하며
“이건 진짜 진짜 기밀이라서 말 안 하려고 했는데. ‘저’를 향한 음해가 도를 넘어서 안 할 수가 없네요. 셰이 당신은 ‘에이메데르’가 군국의 수호천사라고 생각하고 있죠? ‘지크흐룬드’는 누구도 정체를 알지 못하는 암살자라고.”
“…그렇잖아?”
“땡. ‘지크흐룬드’는 ‘제’가 아니에요. 마찬가지로 ‘에이메데르’도 천사가 아니죠.”
제대로 자극받은 모양인지 힐데는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그녀만 아는 내용을 술술 털어놓았다.
“군웅이 데려온 세 영웅 ‘지크흐룬드’ ‘에이메데르’ ‘막시밀리앵’. ‘지크흐룬드’는 그 누구도 얼굴을 모르는 암살자고 에이메데르는 군국을 지키는 천사? 그럴 리 없죠. 잿더미 속에서 새로이 나라를 만들어야 하는데 형체 없는 믿음을 누가 믿겠어요.”
“잠깐. 그 말은.”
“네에. 지크흐룬드 에이메데르. 둘 모두 실존하는 인물이에요. 지금은 둘 다 군국에 없지만 군국은 그들이 존재한다고 믿게 하고 싶은 모양이에요. ‘저’로 하여금 ‘지크흐룬드’의 역할을 연기하게 했으니까요!”
‘어쩌면 그들을 위한 자리를 남겨놓은 것일 수도 있고요. 언제든지 돌아올 수 있도록.’
힐데는 그 말만은 속으로 삼켰다.
성녀의 수호대 성검대. 유엘이 성황청에서 파문되었을 때 성녀로서의 모든 권한과 물건을 봉납했으나 그 권능만은 빼앗기지 않았다. 아니 성황청이라도 빼앗을 수 없었다.
성녀는 신의 대행자이며 예언의 실행자이다. 파문되었든 가출했든 성녀의 행보는 전부 천신이 점지한 신성한 성사. 가장 신실했던 성검대 중 둘은 파문된 성녀를 보필하여 군국에 도달했다.
그 두 명이 바로 에이메데르와 지크흐룬드. 뭐 유엘이 남자 시체를 붙들고 은둔한 뒤 몇 년 지나지 않아 떠나버렸지만.
떠난 이유야 대충 짐작이 간다. 그게 나였어도 모시던 성녀가 온갖 추태를 보이며 방구석에 처박혀 있다면 있는 정 없는 정 다 떨어질 것이다. 직접 만나본 건 아니라서 자세히 모르지만 필시 그렇겠지.
‘멋모르고 불려 와 멋대로 부려 먹힌 ‘제’ 입장에서는 그다지 유쾌한 이야기는 아니지만요~.’
“그들이 누군데?”
뜻밖의 정보를 듣게 된 회귀자는 힐데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귀를 기울였다.
쯧. 계속 느끼는 거지만 회귀자가 정말 회귀자치고 아는 게 없다. 덕분에 나는 온갖 고생을 해가며 간신히 회귀자의 기억을 엿봐도 100% 신뢰하지 못한다.
심지어 이전 회차에서는 성황청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면서 군국과 성황청 사이의 비사를 몰라서야 되겠냐? 성황청의 전원이 약속이라도 한 듯 정보를 숨긴 것도 아닐 텐데 말이야.
‘흐음. 이쯤에서 멈출까요? 더 말했다간 우리 가여운 성녀님이 더 곤란해질 테니.’
와중 충분히 주도권을 쥐었다고 생각한 힐데는 이쯤에서 입을 다물었다. 캐묻는 회귀자를 향해 눈웃음을 지어 보이며 검지손가락을 입술에 대고 고개를 갸웃했다.
“알려주기 싫네요~.”
“뭐?!”
“아줌마는 변덕이 심해서 말이죠. 기분이 급격히 나빠져서 더 말하고 싶지 않아요! 흥!”
힐데가 볼을 부풀린 채로 고개를 홱 돌린다. 너무 유치한 행동에 회귀자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했다.
“지금 삐진 거야? 애도 아니고.”
“아줌마라고 불릴 바에야 차라리 유치한 아이가 될래요.”
“알았어! 사소한 걸로 꽁해지긴. 취소할게!”
“취소? 흘린 말을 다시 주워담을 수 있나요? 말은 칼과 비슷해요. 집어넣었던 칼을 빼낸다고 생긴 상처가 낫진 않죠. 상처는 진심 어린 사과로 꽁꽁 싸매는 수밖에 없어요.”
한마디로 말해 사과하라는 뜻이다. 힐데가 완고하게 굴자 회귀자는 작게 잇소리를 냈다.
‘그래. 고개 한 번 숙여서 정보를 얻으면 싸지! 내가 뭐 조금 말이 심했던 것도 있고!’
판단을 끝마친 회귀자는 미미하게 고개를 숙여 타산적인 사과를 했다.
“미안해. 그 내가 섬세하지 못했어.”
“흐응. 엎드려 절 받기지만 그 사과를 받아들이죠. 다음부터는 조심하세요.”
“끙. 알겠어.”
“그러하다 셰이. 너는 언행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느니라.”
“명심할게… 잠깐 티르칸쟈카? 왜 네가 사과를 받고 있는 거야?”
졸지에 두 사람에게 사과하게 되었지만 어쨌건 임무를 마친 회귀자는 새로이 정보를 요구했다.
“그래서 진짜 에이메데르와 지크흐룬드는? 어디 있는데?”
“몰라요!”
“응?”
힐데는 천진난만하게 대답했다.
“전임자가 여기서 어떻게 일했는지 이 직장 떠나 어디로 갔는지 ‘제’가 어떻게 아나요? ‘저’는 중간에 불려와서 일했을 뿐인데! 잊지 마세요. 원래 ‘지크흐룬드’야 어쨌든 ‘제’가 그 역할을 이어받았다는 걸!”
“야! 그러면 달라진 게 없잖아!”
회귀자가 벌떡 일어나 힐데를 향해 삿대질했다.
“어쨌든 네가 영궤고 휴즈보다는 연상이라는 건 똑같잖아!”
“헤헷. 들켰다.”
“들켰다 가 아니지! 지금까지 뭘 부정했던 건데!”
“’제’가 아줌마라는 거요! 아버님 앞에서 그런 취급을 받고 싶진 않았어요!”
“휴즈가 네 아버님이 되려면 휴즈는 태어나기도 전에 너를 낳았어야 했어! 그게 말이 돼?”
당연히 말이 안 되지.
어쨌든 돌고 돌아서 이제야 이 인과 역전을 알아차렸구나. 티르보다 회귀자가 더 먼저 알아차릴 줄은 몰랐는걸….
‘불가능하지는 않다. 만일 휴가 바로 그 존재라면.’
어라?
이상하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읽고 있는 거지.
‘모든 게 설명이 된다. 그 신비한 힘도 자신을 잃어가면서까지 나의 심장을 되찾아 준 것도. 먼 옛날 멎었던 심장의 박동. 그건 이 시대 오로지 나밖에 모르는 일이나… 휴가 인간의 왕이라면 모든 인간을 대변한다면. 알아낼 수도 있을 터.’
티르는 묘하게 사람 말을 잘 믿는다. 그건 멍청하거나 순진해서가 아니라 오래 된 집이 새로운 손님을 받아들이기 위해 문턱을 한껏 낮춘 탓이다. 그래서 무저갱에서도 내 잡소리를 다 믿었고 회귀자가 말하는 지식도 일단 수긍하고 보았다. 하물며 나를 보고 아버님이라 부르는 힐데의 말도 곧이곧대로 받아들였다.
‘분명 그때 피에서 쇳녹 냄새가 나는 괴인이 휴를 향해 말했지. 네가 인간의 왕이냐고.’
그래서일까. 티르가 내색하지는 않았으나… 막시밀리앵이 나를 보고 인간의 왕이라 불렀던 일도 그대로 마음속에 담아두고 있었다. 지금 쓰기 위해서.
좋아. 나는 인간의 왕이니까 지금은 티르의 지혜가 빛을 발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그렇다면 저 아이가 휴를 아버님이라 부르는 것도 이러면 이치에 맞는다! 태어나기 전에 낳은 아이라면 전대 인간의 왕이 낳은 아이겠지!’
왜 그런 방식으로 납득하는 거야!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그제 예비군 훈련을 다녀왔습니다.
동원 예비군이라고 해봤자 단축되어서 8시간 그마저도 원격교육으로 시간이 줄어서 6시간. 가벼운 마음으로 예비군 훈련에 임했습니다.
이상하다. 분명 힘들지는 않았는데 왜 갔다가 와서 진이 빠졌을까요. 군대에는 저의 정력을 빼앗아가는 무언가가 있는 모양입니다.
그래도 무사히 복귀하고… 집에 돌아와서 잤네요…
안 하던 일은 안 하는 게 좋습니다….
살짝 밀린 일정만큼 제 글 일정도 밀렸네요. 어제 올릴 수는 있을 줄 알았는데 퇴고하기도 전에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잠들었습니다.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