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27
놀랍게도 밤중에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승냥이들은 우리 캐터프랙트를 털거나 도둑질한다는 발상을 떠올리기만 했지 실행으로 옮기진 못했다. 그들에겐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피에 굶주린 육장성이 눈을 부릅뜨고 있었으니까.
힐데가 불만스럽게 투정 부렸다.
“아쉬워요. 밤중에 도둑질이라도 시도했다면 정당방위로 죽여줄 수 있었는데~.”
“휴전 협정하러 왔으면서 무슨 소리야? 빌미가 될 행동은 하지 마.”
회귀자는 질 나쁜 농담으로 치부했지만 나는 그게 진심이라는 걸 읽고 몸을 떨었다. 저 사람도 약간 이상해.
힐데가 살의를 발휘하기 전에 한발 먼저 출발하기로 했다. 채비를 끝내고 캐터프랙트에 올라탄 우리는 운전수를 불렀다.
“디지. 깨어 있어요?”
연락을 받은 골렘은 한참 있다가 대답했다.
[…국 통신… 위입니다…. 한계… 양….]
지직거리는 목소리가 힘없이 울렸다. 골렘은 삐걱거리는 팔로 운전대를 잡으려다가 힘이 빠진 것처럼 고개를 픽 숙였다.
힐데가 골렘을 톡톡 건드리며 중얼거렸다.
“쯧. 통신거리에 한계가 온 것 같네요~. 아쉬워라.”
“군국 영토를 벗어났는데 여기까지 도달한 게 기적이죠. 디지 임무 종료입니다. 이제 이 기체를 운송할 필요 없어요. 알아들었으면 꺼요.”
골렘에게서 미약한 반응이 흘러나오다가 이내 완전히 마력을 잃고는 정지했다.
통신병의 지원은 여기까지다. 이제 온전히 우리의 힘으로 길을 찾아가야 한다. 힐데는 골렘을 대충 접어서 뒷자리에 던져놓고는 운전석에 앉았다.
“하아. 어쩔 수 없죠. 여기서부터는 ‘제’가 운전할게요. 혹시라도 지루해졌다간 큰일이니 아버님은 옆에서 ‘제’ 입에 간식거리를 넣어주세요!”
“군국에 간식거리가 어디 있다고 그래요? 우리 보급 다 통조림으로 받았잖아요.”
“쳇! 망할 나라!”
힐데의 혀를 차는 소리와 함께 캐터프랙트가 머나먼 황야로 출발했다.
아침 해가 뜨기 약간 전 새벽하늘이 어슴푸레 밝아오는 동안 캐터프랙트는 덜컹거리는 소리를 내며 황야를 나아갔다. 무게를 덜기 위해 지붕을 날려버린 터라 캐터프랙트는 그 뛰어난 성능에도 불구하고 겉모습은 짐수레와 크게 다를 게 없었다.
드러난 지붕으로 바람이 빛이 흙먼지가 아무런 여과 없이 나를 때린다. 넓적한 바퀴는 굴곡진 땅의 오르골을 자처하며 대지의 노래를 그대로 전한다. 하늘이나 땅이나 인간을 못살게 구는 데 도가 텄다.
그렇지만 사소한 불편함이야말로 진정한 삶의 증거겠지. 살아있으니까 살아가려고 불편을 느끼는 법이니. 시원한 바람을 뒤로 스쳐 보내며 계속 나아갔다….
다만 반쯤 죽은 한 명은 태양빛에 크나큰 불만을 드러냈다. 태양이 지평선 너머로 모습을 드러내자 티르는 불만스레 신음을 흘리며 양산을 기울였다.
“내 살며 이리 밝은 여행길은 처음이다. 어디 그늘 한 점 보이지 않는구나.”
“잠시만요. 천막을 좀 칠게요.”
“되었다. 나풀거리는 천 따위는 없느니만 못하니.”
“딱히 티르를 위해서 치는 건 아니거든요? 비 내릴 때를 대비해서라도 치긴 해야 해요.”
이게 생색이라는 거지. 별 도움이 안 될 거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심기 불편한 티르를 달래주기 위해서 천막을 세워 임시로 그늘을 만들었다.
‘흐음. 정성이 있으니 선의는 받으마.’
필요 없다고 말한 것치고 티르는 순순히 천막 아래 들어가 앉았다. 여전히 양산을 어깨에 걸친 채였지만 아까보다는 한껏 누그러진 표정으로 투덜거렸다.
“멀고 바쁜 여행길이라 하지 않았느냐. 헌데 어째서 밤에는 움직이지 않는 것이냐? 하루의 절반 가까이 낭비하다니 도무지 시간이 촉박한 이들로 보이지 않는구나.”
“왜 이리 급해요? 티르는 관 속에 있으면 하루랑 한 달을 구분하지 못하잖아요. 그러면서 고작 하룻밤 갖고는.”
“그건 내가 어둠 속에 머무를 때의 이야기다. 태양이 저 뻔뻔한 낯짝을 비춘다면 알기 싫어도 하루가 지났음을 알지 않느냐.”
“저도 가끔 일어나기 싫을 때 태양이 안 떴으면 하고 바라는 날도 있지만 여기서는 어쩔 수 없어요. 앞에 무엇이 나오는지 확인하고 가야 하니까요.”
티르는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
“무엇이 나오든 기껏해야 바위나 울타리에 불과하지 않겠느냐? 내가 보고 부수거나 피하면 그만이지.”
부순다는 말이 피한다는 말보다 먼저 나오는 게 이상하지만. 세상에는 힘으로도 극복할 수 없는 장애물이 있다.
“그건 안 될걸요?”
살짝 기분이 상한 티르는 짐짓 화난 얼굴로 대꾸했다.
“나를 너무 무시하는구나. 밤은 나의 시간이요 어둠은 나를 비추니. 빛 한 점 없다고 해도 충분히 대처할 수 있다.”
“제 말은 티르의 힘이 부족하다는 게 아니라….”
그때였다. 무언가를 발견한 힐데가 급히 핸들을 꺾으며 외쳤다.
“조심하세요!”
쾅. 동시에 캐터프랙트가 크게 흔들렸다. 앞바퀴가 무언가 딱딱한 것에 부딪혀서 들린 모양이었다. 짐이 한순간 떠오르고 아지가 놀라 깨갱 짖었다.
다행스럽게도 캐터프랙트는 모든 지형을 돌파할 수 있도록 설계된 군국의 걸작. 고작 그 정도로 충격을 받진 않는다. 충격은 내가 받는다.
힐데는 갑자기 나타난 장애물을 피하기 위해 핸들을 급히 돌렸다. 몸이 이리저리 쏠리는 탓에 난간을 잡고 버텨야 했다.
그 와중 티르가 물었다.
“…조금 전 우리는 황야 위를 달리고 있지 않았느냐?”
“맞아요.”
“그런데 지금은…. 마치….”
티르가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나무가 듬성듬성 자라나 있는 야트막한 언덕. 거기에는 작은 집터가 조약돌처럼 흩어져 있었다. 지금은 흔적만 남은 것이 사라진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난 듯했다. 마치 오래전 몰락한 것처럼.
티르가 물었다.
“…유적을 보는 듯하구나. 여기는 어떤 마을이냐?”
어 열국에서 가장 무의미한 질문이다. 내가 뭐라 설명해야 할지 고민하는 사이 회귀자가 대답했다.
“몰라. 이 마을이 옛 금국의 마을이었는지 아니면 열국에서 만들었다가 부숴 먹은 건지. 아니면 엊그제 이 모습 그대로 생겨난 건지는 그 누구도 몰라. 열국이니까.”
“모른다니?”
“이거뿐만 아니야. 모래사장이 이어지다가 갑자기 돌무더기가 보일 때도 있고. 마을 한가운데 갑자기 낭떠러지가 나올 때도 있어. 뭐가 나와도 이상하지 않아. 왜냐면 만들어지는 데 어떤 이유도 없기 때문이야.”
말을 하다 말고 회귀자는 앞쪽을 바라보았다.
집터를 이리저리 헤집어가며 간신히 언덕 꼭대기에 도착한 캐터프랙트는 다시 내리막길을 내달렸다. 그 덕분에 언덕에 가려졌던 광경이 눈앞에 드러났다.
회귀자는 저 내리막 끝에 지어진 거대한 구조물을 보고는 중얼거렸다.
“…저것도 마찬가지겠지.”
멀리서 보았기에 더욱 웅장한 장성(長城)이었다. 지평선을 따라 길게 장식을 해놓은 것처럼 커다란 성이 우리의 시야를 가로막고 있었다. 내리막 뒤쪽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높았고 한쪽 끝이 눈에 다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길었다.
다만 다른 한쪽으로는 더 이어져 있지 않았다. 무너지거나 쓰러진 게 아니라 그냥 거기서 건설을 멈춘 것처럼 딱 끝나 있었다. 덕분에 장성은 땅과 땅을 분리한다는 제 역할을 못할 것 같았다.
우리에게는 다행스럽게도 말이지. 힐데가 성벽이 없는 쪽으로 캐터프랙트를 몰았다.
가까워질수록 장성의 위용은 더해갔다. 잘 다져진 땅 위에 수직으로 우뚝 솟은 성벽에는 세월의 흔적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전투가 없었던 것일까 아니면 전투로는 망가지지 않을 정도로 성벽이 튼튼한 것일까. 쓸모가 없던 건지 너무 유능했던 건지 모를 성벽을 향해 티르가 연신 감탄을 표했다.
“대단한 규모로구나. 내 저리 크고 웅장한 성은 처음 본다. 높이도 아득하지만 끝없이 이어진 성벽에는 감탄이 나오는구나. 중간이 끊어지지만 않았어도 역사에 길이 남을 장성이었을 것이다. 저만 한 규모의 성을 만드는 데 얼마나 많은 시간이 들었을지….”
회귀자는 티르의 혼잣말에 대답했다.
“하루일걸.”
“음? 셰이 하루라 하였느냐?”
“응. 저 성을 지은 사람은 단 한 명. 짓는 데 걸린 시간은 하루야. 다른 건 몰라도 그건 확실해.”
회귀자의 말은 분명한 사실이다. 나도 황금경과 직접 마주하지는 않아서 무엇이 진실인지는 모르지만 일단 겉으로 드러난 진실이기도 하다.
그런데….
“셰이 씨. 수박 겉핥기식 설명은 그만하고 이제 슬슬 제대로 설명해주죠? 저걸 누가 만들었는지 그가 무슨 일을 하는 건지.”
물론 말로 설명하기 어렵긴 해. 그렇지만 이제 슬슬 말해줘야지. 언제까지 간접적으로만 나타낼 거야?
회귀자는 난처한 듯 말을 끌었다.
“어….”
‘설명할 자신 없는데. 황금경의 능력은 너무 이질적이라…. 사실 그 원리를 잘 모르기도 하고.’
와 정말 파격적인 인간이네. 설명할 수 없는 건 그럴 수 있어. 황금경의 권능은 그만큼 이질적이니까.
그런데 지금까지는 자신이 있었단 말이야? 네가 제대로 설명한 내용은 거의 없거든?
“크 크흠. 네가 하지 그래? 너도 잘 아는 것 같은데.”
“오랜만의 수업 시간이네요. 셰이 교육생 잘 배우도록 하세요.”
“나 나도 알거든! 설명만 대신하라고!”
“자기 입으로 설명할 수 없다면 아는 게 아니라는 격언도 있죠. 아 이 셰이 씨.”
“야 이!”
“셰이.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느냐?”
“…끙 알았어.”
원래 칠판이랑 지시봉이 있어야 하는데 이 위에서는 마땅치가 않네. 아쉽지만 말로만 해야 겠다. 등을 대고 앉은 채로 설명을 시작했다.
“간단하게 말할게요. 황금경의 능력은 연금술이에요. 세상에서 가장 강력하며 광범위한 마치 창조와도 같은 연금술이죠.”
“너희가 철 쪼가리를 갖고 장난치던 그 능력 말이더냐?”
“우리 연금술은 황금경에 비하면 장난이에요. 저 성 중간에 끊어져 있죠? 당연히 얼핏 볼 때 커다란 성이 있고 파괴력을 가진 무언가가 성을 부수고 지나간 것처럼 보이겠지만…. 사실 정반대에요.”
열국의 인간들이 각자 탈것을 타고 다니는 이유. 연금술의 나라이면서 동시에 모두가 유목생활을 하게 된 가장 근본적인 원인.
“원래 아무것도 없던 황야 위에 황금경이 지나가며 성을 ‘연금’한 거예요.”
한 나라의 영토를 만드는 황금경의 권능 때문이다.
황금경은 세상 만물을 뒤집어 엎는다. 아니 그러다 못해 새로운 무언가로 창조한다. 창조는 원래 있던 질서의 파괴. 따라서 그 파괴의 행차를 피하기 위해 열국인들은 떠돌이가 되었다.
잠시 침을 삼키고 설명을 이어 나갔다.
“다시 생각해보면 이상하잖아요? 왜 장성이 언덕 아래에 지어져 있죠? 이만한 규모의 성이면서 왜 아무런 맥락도 없이 끊겼죠? 그 의문점을 연금술이 설명해줘요. 언덕 아래에 지어진 건 여기 있는 흙과 바위를 재료로 썼기에. 성이 아무런 흔적도 없이 중간에 끊어진 건… 무언가가 부순 게 아니라 단지 거기까지밖에 만들지 않았기 때문에.”
그래서 열국에서는 어떤 지형지물이 등장해도 어떤 구조물이 나타나도 이상하지 않다. 이유가 분명하기 때문이다.
황금경이 만들었기에 그것은 존재한다. 이하의 설명은 필요하지 않다.
다만 300년 전에서 지식이 멈춘 티르는 의문을 표했다.
“황금경이라 불리는 이는 어째서 성을 만들다 말았느냐?”
“그건 황금경을 제외한 그 누구도 몰라요. 성벽 무용론이 등장한 지 언젠데 아직도 장성같은 걸 만드는지. 황금경이 왜 열국을 떠돌아다니며 빈 땅에 무언가를 채워 넣는지. 그저 추측만 무성하죠.”
“괴이한 이로구나.”
“뭐 티르도 직접 만나기 전까지는 수상할 정도로 잠이 많은 흡혈귀였으니까요. 황금경도 직접 만나지 않으면 모르죠. 지금 저는 들은 내용만 말하고 있을 뿐이에요.”
제대로 공부한 사람이라면 이 정도는 대답할 수 있다. 이웃나라의 역사 정도는 대강 알고 있잖아? 그게 가상 적국이라면 더더욱.
‘들은 내용치고는 이해가 상당히 깊잖아…. 이 녀석 군국민이라고 하지 않았냐? 꼭 열국에 살아본 것처럼 말하네.’
간접체험이라는 거다. 회귀자가 마음 속으로 투덜거리는 사이 무언가를 떠올린 티르가 손을 말아 탁 쳤다.
“아아 기억난다. 휴 네가 무저갱에서 말하였지. 누군가 연금술로 금을 무수히 많이 만들어낸 탓에 나라가 무너졌다고. 혹 그가 황금경이더냐?”
“오 이걸 기억해 내시다니. 제 교육이 헛되지 않았네요.”
“후후. 기본 아니겠느냐. 네가 한 말은 전부 깊이 담아두었다.”
“맞아요.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던 금국을 혼란에 빠뜨리고 멸망시킨 장본인이 바로 황금경 데모크리아스에요. 그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금국의 모든 황금과 무기들은 가치를 잃었고 진짜보다도 찬란한 가짜가 범람하는 세상에서 금국민들은 아무것도 믿을 수 없게 되었죠.
신뢰가 무너졌고 경제가 망가졌어요. 부를 지닌 이는 몰락하고 가난한 이는 전락했죠.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혼란 속에서 모든 원망은 황금경과 그의 가르침을 받은 연금술사를 향했어요. 금국의 왕은 모든 연금술사를 처형하려고 했는데….”
여기서부터는 말해 뭐하냐. 이미 눈앞에 결과로 펼쳐졌는데.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을 이었다.
“금국이 멸망하고 열국이 이 꼬라지가 된 걸 보니 실패한 모양이죠?”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내가 황금경을 만나면 그때부터 알 수 있겠지만 아직 직접 대면한 적은 없으니까. 이번 기회에 알 수 있겠지.
다섯 군주 중 하나였던 금국의 왕. 이해의 괴물이라고 불리던 인간의 기술을 전부 이해하고 분석하는 권능을 가진 강철의 왕이… 어째서 고작 일개 인간에게 ‘먹혔’는지. 왕을 죽인 그는 왜 황금경을 자처하고 있는지.
알아갈 기회다.
“그래서 열국에선 아주 축복받은 땅이 아니면 농사를 짓지 못한대요. 원래도 농사짓기 좋은 땅은 아니지만 그만한 기반을 마련한다고 해도 황금경이 한 번 지나가면… 애써 가꾼 황금빛 밭은 양탄자 덮인 왕궁으로 변하기 때문에.”
그게 열국에서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들은 겉모습에 현혹되지 않는다. 먹을 것 탈 것 입을 것. 그때그때 필요한 것을 만들거나 여의치않을 경우 빼앗아 충당한다. 거기에는 생존 그 이외의 논리는 없다.
세상에서 가장 많은 도구와 함께하지만 삶의 방식은 야생과 가장 가까운 땅.
캐터프랙트는 미완의 장성을 지나쳐 나아갔다. 장성은 제 역할을 못하고는 방랑자에게 안쪽을 보여주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열국의 배경… 매드맥스가 가능한 땅…
당연히 모티브는 매드맥스입니다. 사실 꼭 매드맥스만 본딴 건 아니고 연금술적 유목민을 묘사하려니 매드맥스로 귀결되었네요! 그렇지만 매드맥스와는 사뭇 다른 배경이 이어질 겁니다! 어디까지나 생존이 제일!
…매드맥스는 너무 쉽게 죽어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