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88
클라우디아의 시민 대다수가 나와 구경하고 있음에도 둘은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서로의 눈에 상대만을 담은 채로 둘은 가까워졌다.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만 같은 대치 상황에서 먼저 회귀자가 입을 열었다.
“작작 해! 개인적인 복수심 같은 건 잠깐 미뤄둘 수도 있잖아! 진짜 이 땅에 사는 모두가 위험하다고!”
티르는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
“어리구나. 차가움과 뜨거움이 한 데 공존할 수 없고 빛과 어둠은 서로를 밀어내야만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있듯. 나와 성황청은 서로를 배제하지 않고는 그 자리에 들어올 수 없다.”
“그게 고집이잖아…!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다고! 고집 좀 꺾는 건 하나도 대수가 아니야!”
“과연 그게 내 온전한 아집으로 인한 것일까. 내 이리 행동하는 이유가 궁금하다면 잘난 성황청에 물어보지 그러느냐.”
“여기에 성황청은 없어! 나는 지금! 너에게 묻고 있는 거야!!”
회귀자는 감정을 토해내며 땅을 박찼다. 지잔을 검집으로 천앵을 칼날로. 상반된 둘을 겹쳐 들고는 티르를 겨누고 온힘을 다해 발도했다.
천지검곤 지평선 쪼개기.
검기가 대지를 가른다. 압축된 공간이 대지를 딛고 날카로운 예기를 뿌린다. 모든 것을 베어내는 아득한 공간의 칼날이 시조 티르칸쟈카를 땅과 함께 양단했다.
아무리 단단한 것이어도 무의미하다. 티르의 몸이 쪼개졌다고 그 거대한 힘을 예리하게 쏘아내어 흡혈귀의 육신을 조각 내었다고… 잠깐 모두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그러나 시조 티르칸쟈카는 ‘베이지 않는’ 존재가 아니다. 아무리 베여도 죽지 않는 존재다. 그러한 탓에 과거에도 기사 살해자라고 불렸으나 심장을 되찾은 지금은 더욱 강해졌다.
바다가 그러하듯이 거대한 권능으로 소용돌이치는 그녀의 몸은 빈틈을 메우고 원래대로 돌아왔다. 조금 전 베인 게 허상이라는 듯이.
‘심장을 되찾았다고 해서 재생력이 사라진 게 아니야. 오히려 재생력은 더 강해졌어! 쳇 상대하긴 더 까다로워졌잖아…!’
회귀자가 혀를 차는 사이 티르는 창백해져서는 저도 모르게 가슴을 더듬었다.
베인 곳이 걱정되어서가 아니다. 시조 티르칸쟈카가 날붙이에 베인 횟수는 두 손으로는 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니까.
그러나 지금 티르는 예전과는 달리 온전한 심장을 갖고 있었다. 몸을 막 써도 괜찮았던 예전과는 달리 지금 티르는 어렵사리 되찾은 심장을 지켜야 했다.
‘다행이구나…! 휴가 준 카드는 망가지지 않았다. 앞으로는 보다 조심히 싸워야겠구나. 혹여나 그게 부서지기라도 하면….’
깊게 안도한 티르는 다시금 은은한 분노를 표했다.
클라우디아는 구름 폭포에서 흘러나온 물안개가 햇빛을 가린다. 클라우디아의 그림자에서 수천 기의 흑기사가 솟아나더니 일제히 회귀자를 향해 달려들었다. 분명 흑기사는 잡졸에 불과한 전력이지만 어둠 속에서는 그만큼 귀찮은 존재도 또 없다. 어쨌든 처리해야 하니까.
‘어둠을 쫓는 것은 빛. 조금 전 얻은 힘을 다 갈무리하기 전에 쓰고 싶진 않은데….’
회귀자는 흑기사를 일일이 처리하는 대신 보다 간편한 방법을 택했다.
천앵을 강하게 그러쥔다. 압축된 공간을 더욱 조여 아득한 공간 속에 숨은 번뜩임을 다시 끌어낸다. 공간이 어그러지며 손아귀 틈으로 벼락이 새어 나왔다.
‘…하지만 상대가 티르칸쟈카라면 써도 괜찮겠지. 길들이지 않은 벼락이 더 사나우니까.’
이전 회차 우레회주에게서 배운 기술. 회귀자가 익히진 못했지만 자기 나름대로 소화해냈다. 천앵에 봉인해둔 벼락이 해방된다.
눈 깜짝할 사이 뇌광에 직격당한 흑기사 한 부대가 소멸하고 그림자가 옅어지며 흑기사들이 몸을 웅크렸다. 꿰뚫는 빛이 어둠을 찢고 새어나온다.
정상결전. 평범한 인간들은 감히 짐작조차 힘든 권능이 충돌하는 싸움.
자기가 방관자라고 생각하던 인간들이 슬슬 위기감을 느끼고는 비명을 지르며 달아났다. 우레 수호자들은 벼락의 힘을 써 전투의 여파가 새어나오지 않도록 바리케이드를 쌓아 올렸다. 그나마 다행인 건 둘이 인파에서 멀리 떨어졌던 덕분에 그 이상의 혼란이 생기진 않았다는 점일까.
페루가 저 둘의 전투를 보고는 중얼거렸다.
“…저 둘은 왜 싸우고 있어…?”
“페루. 알아두세요. 꼭 사내가 아니더라도 싸워야 할 순간은 반드시 온다는 것을. 그게 남장여자라면 더더욱이요.”
“…?”
이해하지 마. 느끼라고. 어차피 설명하기 어려워.
“…안 말려?”
“제가요? 무슨 수로요? 왜요?”
끼어들 순 있지만 둘이 감정을 다 토해내기 전에 멈춰봤자 죽도 밥도 안 되지? 이왕 될 거라면 아주 된밥이 되라고.
그때 페루의 감각에 이상한 게 잡혔다. 구름 폭포 너머로 묵직한 질량감을 가진 무언가가 느릿하게 떨어지고 있었다. 깃털이 바람을 타고 가라앉듯이.
폭포 너머라 보이지 않지만 강철을 부식시키는 페루의 힘은 희생양을 정확하게 포착했다. 페루의 시선이 돌아간다.
‘…강철 더미가 하늘에서 떨어져? 바람을 타고 느리게…? 아니 그걸 신경 쓸 때가 아니야.’
아니 왠지 신경 써야 할 것 같은데?
페루가 의아해하면서도 관심을 거두려는 때. 내가 페루를 붙잡고 말했다.
“뭐가 떨어졌는데요? 확인하러 가죠!”
“…지금은 그걸 신경 쓸 때가.”
“맞죠! 아니면 뭐 저 둘 싸우는데 끼어들 거에요? 저 사이에 끼면 다진고기조차도 되지 못할걸요? 차라리 다른 할 일을 찾는 게 낫지!”
딱히 이치에 맞는 말은 아니었지만 자기주장이 약한 페루는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그녀는 한 가닥 의문을 품었다.
‘…구름 폭포 너머로 뭐가 떨어지는지 어떻게 알고…?’
이렇게 알았지. 말해주진 않을 거지만. 나는 페루의 감각에 의지해서 그게 떨어지는 장소로 향했다.
구름 폭포는 고요히 흘러내리고 있었다. 폭포라고 부르지만 그건 비유일 뿐 본질은 두께가 수백 미터에 이르는 물안개. 어느 정도 걸었다 싶더니 나는 자욱한 구름 한가운데 있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은 구름이 시야를 가린다. 땅에 닿은 구름은 물이 되어 흐르고 물방울을 머금고 질척거리는 흙이 발을 잡아끈다.
“…조심 해. 물을 보관하기 위한 구덩이가 있어.”
“댁이나 조심해요. 걸음도 제대로 못 걷는 게 누굴 걱정해.”
페루는 자존심이 상한 듯했지만 사실이었기에 입을 닫고 묵묵히 걸었다. 어느 정도 걸어가다 문득 고개를 들어 주위를 살폈다.
“어디 있죠? 이쯤에서 느껴졌는데.”
“…저 위.”
페루가 위를 가리킨 후였다.
자욱한 구름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강철 구조물이 떨어지고 있다. 추락보다는 유영에 가까운 느릿한 낙하다. 마치 자기가 낙엽이라도 되는 것처럼 이리저리 흔들리며 내려오고 있다. 강철 주제에.
땅으로 떨어지기를 기다리던 나는 그게 생각보다 크다는 걸 깨닫고는 다급히 외쳤다.
“비켜요!”
“…앗.”
페루를 잡아 끌고 몇 걸음 물러난 뒤 예상보다는 느리지만 맞으면 위험할 정도의 속도로 무언가가 떨어졌다. 강철 무더기가 진흙더미에 처박힌다. 낙하의 충격에 부품이 이리저리 부서져 흩어진다.
“요즘에는 하늘에서 고철덩어리도 떨어지네요. 저건 뭐예요?”
“…몰라 본 적 없어.”
다행히 땅이 축축해서 튀어오르거나 하지 않았다. 나는 조심스레 떨어진 잔해에 접근했다. 마치… 갈비뼈처럼 보이는 강철 뼈대. 이걸 세워놓으면 거인의 상반신처럼 보일 것 같다. 머리 쪽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기계장치가 놓였고 뼈대 사이사이에는 찢어진 종이 같은 게 흩날리고 있었다.
단순한 장식품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공을 들인 구조물이다. 나는 위험을 무릅쓰고는 잔해를 뒤적여가며 단서가 남아있지 않는지 찾아보았다.
그러던 중 가장 위쪽 뼈대에서 글귀가 보였다. 나는 묻은 진흙을 치우고는 그 글귀를 읽었다.
-클라우디아 기상 알람 버전 11.6 밤잠없는 노인네.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뭐? 기상 알람? 이런 거대한 구조물이 단순한 알람시계라고? 이 무슨 쓸데없는.
“…이건?”
“기상 알람이라는데요? 클라우디아에 알람 시계가 있었나요?”
“…클라우디아는 종 대신 천둥이 울려. 시계가 없진 않지만… 이렇게 큰 건 처음 봐.”
“애초에 이렇게 큰 게 왜 하늘에서 떨어진 거죠? 누가 하늘 위에 갖다 놓기라도 했나.”
쳇. 단서인 줄 알았더니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물건이었네.
분명 여기에 있을 줄 알았는데. 우레회주의 비밀거처에도 없었고 느닷없이 떨어진 의문의 물건도 그와는 관계가 없다. 연달아 허탕을 친 나는 괜히 잔해를 발로 차며 투덜거렸다.
도대체 말이지 번개의 마신에 대한 단서는 어디 있는 거야?
한창 고민하던 도중 고개를 갸웃하던 페루가 황금 종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고칠게.”
“이게 뭔지 모른다면서요? 모르는 것도 고칠 수 있어요?”
“…아니. 하지만 명백히 손상된 부분이 보여. 그걸 복원하면 원래 쓰임새가 보일 수도.”
사라지거나 부러진 부분을 황금경의 권능으로 복원하고 알아보자고? 괜찮은 생각이네. 뭐 고장 난 시계를 조금 고친다고 더 잘 들어맞을 것 같진 않지만. 오히려 하루에 두 번이라도 맞을 기회를 놓치게 되는 게 아닐까.
딸랑. 페루가 종을 흔들었다.
황금경은 모든 걸 원래대로 되돌리고자 했다. 그런데 하필 그 대상이 나라라서 금국에 해당하지 않는 모든 것을 파괴하는 괴물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모든 미련을 버리고 본연의 바람에 집중한 지금 그 유물은 물체를 원래 상태로 고치는 힘만을 가졌다. 무엇을 어떻게 고칠지는 페루에게 맡기고서.
마신의 힘은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연금술이 부러지고 닳은 강철을 복원하고 제련하고 덧붙인다. 뼈대가 재조립되면서 구조물이 점차 형태를 이루어갔다.
그렇게 황금경의 권능으로 복원한 모습은…. 언젠가 한 번 보았던 것과 매우 닮아있었다. 페루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뇌 신?”
한 손에 철창을 들고 있는 거대한 상반신. 마치 노인처럼 보이는 안면부. 벼락을 머금고 있진 않지만 형태를 되찾은 지금 다른 걸로 착각하기 어렵다.
누가 보아도 이건 구름의 폭포 위에서 군림하던 뇌신. 클라우디아의 모두를 내려다 보며 벼락의 창을 쏘아내던 뇌신이다.
이게 알람이라고? 클라우디아의 대적이 사실 알람이었단 말이야?
내가 경악하기도 잠시 뇌신의 뼈대 한구석에 적힌 글귀가 눈에 띄었다. 나는 다가가서 그것을 읽었다.
-제작자: 프랑 더 라이트닝 시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