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10
나는 지금껏 티르가 빠르다고 생각한 적 없었다. 언제나 자기 누울 관을 들고 느긋하게 길을 거니는 모습은 거북이와 다를 바 없어 보였다. 실제로 무저갱 바깥에서는 굼뜬 모습을 보여주었고.
그러나 안개 공국에서 티르는 놀라울 만큼 빨랐다. 자신의 어둠을 나누어 안개를 만들었다는 말이 허언은 아닌지 주변의 안개를 조종해서 헤엄치듯 움직였다. 나는 가만히 있는데 세상이 움직이는 느낌이었다.
그러고 정신을 차렸을 때 나와 티르는 한적한 목장까지 이동해 있었다. 주변에 사람이 없다는 걸 확인한 티르가 작게 심호흡했다.
“휴. 조금 전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이냐?”
“별거 아니에요. 마신의 힘을 쓴 것뿐이에요.”
“네가 말하는 별게 도대체 무엇인지 모르겠구나.”
정작 내가 태연하니까 티르도 조금 안정을 찾았다. 내가 적당한 바위에 걸터앉자 티르도 따라서 내 옆자리에 앉고는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정리했다.
‘심장을 되살린 것도 휴의 힘이었다. 오래 전 잃어버린 내 기억을 떠올리고는 불씨를 다시 지폈지. 그때는 벅차오르는 기쁨에 이후에는 이들과 함께하고 싶어서 캐묻지는 않았는데…. 휴에게 물어도 되는 것일까? 인간의 왕에 대해 캐물었다가 요정처럼 사라지는 것은 아닐까?’
이제는 물어봐도 되는데. 내가 인간의 왕이라는 건 가능한 숨기고 싶었던 사실이지만 한 번 들킨 이상 굳이 숨길 이유가 없다.
모두의 손패가 걷잡을 수 없이 까발려지고 있다. 아마 회귀자라는 존재가 한 번 미래를 보고 온 뒤 들쑤셔서 생긴 사태겠지만 덕분에 비밀은 무의미해지고 모두가 극한까지 치닫는 레이스에서 전력으로 달리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 손패를 꽁꽁 숨기는 것보다 온전히 공개하고 레이스에 참가하는 게 낫지.
나는 티르가 묻기도 전에 먼저 말했다.
“티르. 클라우디아에서 만난 마신은 독특한 힘을 갖고 있었어요. 티르도 보았듯이 벼락을 다루는 힘이죠.”
“마지막에 페루가 썼던 힘 말이냐?”
“네. 쓰는 방식은 완전히 다르지만요.”
말 나온 김에 티르에게 손바닥을 펴서 보여주었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파짓거리며 전류가 인다. 페루나 우레회주처럼 강력하진 않지만 사람 하나가 다루기엔 충분한 크기.
눈앞에서 신비를 목격한 티르가 드디어 무엇을 물어봐야 할지 결정했다.
“휴. 인간의 왕은… 마신의 힘을 쓸 수 있는 것이냐?”
이전에 한 번 말한 적 있지만 그때는 너무 뜬구름이 없었지. 제대로 알려줄까.
아군으로 삼더라도 같은 출발선에 세워야 할 테니까.
“아니요. 모든 인간은 마신의 힘을 쓸 수 있어요. 마신은 세계의 이치니까요.”
티르가 오랫동안 고심하다 대답했다.
“세계의 이치… 옛날 마법사들이 하던 말과 비슷하구나.”
“똑같을걸요? 마법사들이 쓰는 마법 역시 마신이 내려준 하나의 파편이니까요. 어떻게 쓰이냐의 문제지.”
진정으로 모르는 사람은 자신이 무엇을 모르는지도 모른다. 티르의 마음속에는 그러한 방향 없는 의문만이 가득했다. 선생 입장에서는 가장 상대하기 어려운 학생일 것이다.
그렇지만 내가 누구냐. 나는 인간의 왕. 티르의 애매모호한 의문을 전부 읽고 그 모두를 관통하는 대답을 골랐다.
“세상은 인간이 존재하기 이전부터 있었죠. 위대한 이치와 흐름 속에서 짐승은 그저 살아갈 뿐이었죠. 그런데 몇몇 짐승들은 세상의 흐름을 읽고는 자기에게 유리하게 가공하고는 해요.”
“인간 말이냐?”
“꼭 인간에 한정되지는 않아요. 날갯짓하는 새 집을 짓는 거미 댐을 세우는 비버. 세상과 함께 흘러온 모든 짐승들이 각자 나름대로 세상을 이해하고 사용하죠.”
손가락을 까닥이자 카드 두 장이 새처럼 날갯짓한다. 그걸 바위 위에 세워서 카드 하우스를 만들었다. 한 번 무너뜨린 뒤 물 샐 틈 없이 붙여서 댐처럼 만들었다.
“세상을 이해하고 가공하는 건 인간의 전유물이 아니에요. 모든 짐승은 그와 비슷한 일을 해요. 다만 인간은 조금 더 능숙할 뿐이죠. 그 능숙함을 호기심으로 바꾼 인간은 도구를 더욱 잘 쓰기 위해서라도 세상을 이해하려고 했고… 수많은 시도 끝에 결국 근원적인 이치에 닿았죠.”
“세상의 이치에?”
“네. 도구로 쓰기 위함이 아닌 세상 그 자체의 원리에 닿았어요. 비유하자면 불을 주워다 쓰는 대신 불을 피우는 법을 익혔다고나 할까요. 이치를 법칙으로 제련한 게 마신 이 세상을 깨달은 선각자가 인간에게 남긴 선물이자 힘.”
손바닥으로 바위를 지그시 눌렀다. 내 힘이나 무게로는 움직이기도 어렵지만 대지술을 쓰니 움푹 들어갔다. 내 손자국 아래에는 흙으로 변한 바위가 그대로 남아있었다. 손가락을 동그랗게 휘젓자 한 줌의 흙에서 민들레가 피어난다. 바위틈에 숨어있다가 말라 죽은 씨앗이 억지로 싹을 틔운다.
“세상을 바꾸는 힘. 이 마신을 정형화된 방법을 통해 쓰는 게 마법일 뿐 본질적으로 모든 짐승에게 허락된 힘이에요.”
“…흡혈귀는 사용할 수 없었다만.”
“그건 흡혈귀의 특성상 어쩔 수 없어요. 외부와 내부의 경계가 흐릿하니까요. 세상을 바꾸려면 자기가 중심을 잡아야 하는데 흡혈귀에게는 자신의 명확한 구분이 없었잖아요. 아 심장을 되찾은 지금의 티르라면 가능할지도 모르겠네요.”
먼저 몸 속에 맴도는 그 거대한 힘을 제어하는 게 우선이겠지만 어쨌든. 티르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
“마신이 인간에게 허락된 힘이라면 성황청이 마신을 봉인한 이유가 무엇이냐?”
“오 용케 아셨네요.”
“뻔하지 않느냐. 무저갱에서도 구름 마을에서도 성황청의 작당이 있었는데.”
성황청 냄새는 기가 막히게 맡는다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딱히 성황청이 마신을 봉인한 건 아니에요. 그럴 능력도 없고요. 황금경이나 대지모신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그들은 대놓고 세상에 드러났었잖아요?”
“그랬었지. 그들의 가르침 역시도 세상에 퍼졌고. 하면 성황청은 그걸 두고 무엇을 하고 있던 것이냐?”
“간단해요. 인간이 금기를 저지르지 못하게 하려고 마신의 지식 중 하나를 봉인해둔 거예요.”
금기라는 말에 티르가 반응했다. 세상 그 누구보다 금기와 가까운 존재 타인의 피를 마시는 탐식의 흡혈귀는 금기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티르가 언짢은 얼굴로 금기를 언급했다.
“성황청이 멋대로 정한 4개의 금기를 말하는 것이냐?”
“네. 4종의 금기는 전부 아시죠?”
“알다마다. 지긋지긋한 걸 얼마나 들었는지 지금 당장이라도 네 가지를 전부 댈 수 있다.”
“한 번 해주시죠.”
서로 아는 내용이라면 굳이 내가 설명할 필욘 없지. 티르는 내가 떠넘긴 설명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1종 금기 탐식. 사악하고 끔찍한 것을 먹어서 제 몸을 채우는 행위. 잡것들은 흡혈귀를 보고 탐식의 종자라고 매도하고는 공격하였지. 우리는 생명을 거두지 않고 피만 취할 뿐인데.”
굳이 언급하진 않았지만 보통 사악하고 끔찍한 것은 같은 인간이다. 티르도 얼굴을 찡그리며 말을 넘겼다.
“2종 금기 접목. 조물주가 빚은 몸을 버리고 다른 것으로 바꾸는 행위. 짐승의 뿔이나 날개를 몸에 기워 붙인 흑마법의 피조물이 접목의 결과물이지.”
“열국에서는 몸을 기계장치로 뒤바꾸었지만요.”
“그래. 것 또한 접목이라 할 수 있겠지. 금기라 정한 것치고는 제대로 막지도 못했지만 말이다. 어찌 되었든. 다음 3종 금기는….”
새침하게 말하던 티르는 말하다 말고 입을 콱 다물었다. 다음 3종 금기를 언급하려다 말고 어물쩍 말을 흐렸다.
“…다 다음은. 3종 금기.”
“뭐예요. 모르시나요?”
“안다! 그….”
‘3종 금기는 교접…. 그게 금기라는 건 아나 어찌 남사스러운 단어를 사내 앞에서 내뱉는단 말이냐!’
참나. 그거 말하는 것 갖고 얼굴이나 붉히고 있긴. 춘추가 얼만데 사춘기 소녀처럼 행동해? 그렇게 말하기 힘들면 내가 대신 말해주지.
“알려드릴게요. 3종 금기는 교접. 인간을 무언가와 접붙여 인간이 아닌 다른 무언가를 잉태하는 금기에요. 그 수단으로는 수간이나 난교 등 다양하죠. 온갖 짐승과 짝짓기하고 한 도시의 모든 남자와 잠자리를 같이했다는 무후 아가르타가 가장 유명….”
“너는 부끄럼도 없느냐! 나도 익히 아는 사실이니 속히 다음으로 넘기거라!”
점차 붉어지는 얼굴로 나를 찰싹 때린다. 더 놀릴려고 했지만 생각보다 아파서 얼른 다음 금기로 넘어갔다.
“마지막 4종 금기는 이단. 사특한 지식으로 인간을 현혹하고 믿음을 잃게 만드는 금기에요. 부정한 정신과 잘못된 믿음을 규탄하고 개정하려고 하죠.”
“그야말로 코에 걸면 코걸이고 귀에 걸면 귀걸이지. 제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 이단으로 여기고 공격하니.”
“저도 비슷하게 생각해요. 자 티르. 이렇게 네 가지 금기가 나왔는데. 이 네 가지의 공통점이 뭔지 아시겠어요?”
금기라곤 하나 실제로 그다지 대단하진 않은 것들이다. 은근히 주변에서 보기 쉬운 케이스가 많다. 다들 자랑스레 떠벌이진 않겠으나 극한의 상황에 처한다면 누구나 금기를 저질러서라도 살아남길 택할 것이다.
흡혈귀가 그랬고 열국인이 그랬고 아가르타가 그랬듯이. 금기는 현실에 버젓이 존재한다.
그렇지만 성황청이 이 모든 현실을 금기로 지정한 이유가 있다.
“금기란 인간의 변화를 야기하는 것들이에요.”
인간을 지키기 위해서.
“탐식은 인간을 먹잇감으로 만들고. 접목은 인간을 도구로 만들고. 교접은 인간의 순수성을 흐리고. 이단은 인간의 영성을 망가뜨리죠. 개체로서의 그리고 종으로서의 인간을 지키기 위해 성황청은 금기를 만들었어요.”
“…인간을 지킨다고?”
그걸 네가 어떻게 아냐고 티르는 눈으로 질문을 던지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쩝 거기에 대해선 할 말은 없었다.
나는 인간의 왕. 전대 인간의 왕이 갖고 있던 기억 따윈 없다. 나에게 주어진 건 먼 옛날의 약속뿐이다.
그 약속은… 처음의 성녀가 인간의 왕을 옭아맸던 그 약속은 아직까지도 전해지고 있다. 내가 아는 건 그 약속뿐. 원년의 기억은 없다. 그러니 해줄 수 있는 말도 없고.
“자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죠. 세계의 이치에 닿은 마신은 세계를 뒤바꿀 힘을 가져요. 마신의 유품이 힘을 쓰지 않아도 그들의 지식이 퍼진 것만으로도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지고 삶이 바뀌어요.”
대신 확실하게 아는 사실을 전했다.
“그런데 티르. 인간 역시 세상의 일부예요.”
성황청이 마신을 숨기려고 했다. 티르가 혈조술을 익혔다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죽이려 들었으며 흡혈귀의 존재를 배척했다. 모두가 내심 꺼리는 행위를 금기라 정했다.
그 모든 건 단 한 가지 목적.
‘인간’을 지키기 위해서.
“마신의 힘은 ‘인간’을 뒤바꿀 수 있어요. 삶의 방식이나 행동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개념 자체를요.”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로아온 보고 다시 쓰겠습니다. 그래도 오늘 안에 다음화는 못 올라올 것 같군요.
내일도 올리겠습니다
약간 달리는 바람에 조금 오류나 문맥상 이상한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기탄없이 알려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