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39
죄를 저지른 자 벌을 받으리. 아주 간단한 명제이며 너무나 당연해서 의심조차 할 수 없다. 순리대로 이루어지는 숭고한 성사처럼 여겨지고는 한다.
그렇지만 근본적으로 죄는 행위이다. 벌은 그 행위에 대한 평가다. 일어나선 안 될 일이다 라는 표현은 이미 일어난 시점에서 스스로 부정된다.
흡혈귀라도 마찬가지. 둘을 확실히 구분해야 한다.
일어날 수 없는 일과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일은.
“한 번 묻겠습니다. 피고의 동기가 뭐였죠?”
내 질문에 아인은 냉큼 대답했다.
“제 어미였던 릴리를 위한 복수입니다. 그녀 자신이 말했다시피.”
“복수? 흥미롭군요. 당신은 인간 시절 바람을 기억하고 있나요 하피?”
나는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은 이름을 자연스럽게 불렀다.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나 하피니스는 내가 어딘가에서 들었다고 지레짐작했다. 당연한 일이다. 누가 독심술로 이름을 알아내었다고 생각이나 할까.
하피가 대답했다.
“이 일과는 관련이 없습니다.”
“당연하죠. 흡혈귀가 되기 전 일 따위 알 바 아닌걸. 한 번 죽음을 경험했다가 흐른 피로 되살아난 이에게 죽기 전 일이 무슨 소용이겠어요?”
나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을 이었다.
“당신은 리르가 생전의 원한을 가진 채로 그 복수를 계속하기 위해서 루스키니아를 공격했다…. 그렇게 말했죠? 하지만 그건 고작 예일링 따위를 너무 대단하게 보는 것 아닌가요?”
“리르는 예일링이 아닙니다. 릴리의 피를 받아 예일링이라 분류되었지만 루스키니아 공께서도 피를 나누어서 따지고 보면….”
“잘 말씀하셨네요! 그렇게 근본도 없는 개족보를 만든 것조차도 루스키니아 공의 뜻이었잖아요!”
반박하고 싶어서 꺼낸 말이었겠지만 그 말을 기다렸다.
말싸움은 나와 상대의 싸움이 아니다. 상대가 상대 자신과 싸우게 하는 게 진정한 말싸움이다. 꼬투리를 붙잡고 늘어져 상대방이 말실수하게끔 기다리고 그 실수한 발언을 끄집어내어 상대 자신과 맞붙여야 한다. 적을 상대할 수 있지만 자기 자신을 상대할 수는 없는 법이니까.
“루스키니아 씨는 리르로 하여금 자신을 공격하도록 종주를 거스르게 시켰어요. 뭐 그게 리르의 의지와 맞아떨어진 건지 아니면 억지로 한 건진 모르지만…. 어쨌건 엘더 자신이 의도하지 않으면 일어나지 않을 일이죠. 제 말이 맞죠?”
“…리르가 모종의 방법으로 굴레를 벗어났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어떤 방법으로요?”
“방법 말입니까? 그건 리르 자신이 소명해야 할 일.”
“아니죠. 당신도 아까 말했잖아요. 가능성을 제시한 것만으로는 안 된다고.”
말실수를 잡아낸 나는 상대를 사정없이 몰아붙였다.
“지금까지 흡혈귀는 피의 굴레라는 이름 아래 철저한 위계질서를 갖추고 돌아갔잖아요? 리르의 경우가 예외적인 거고 그 가능성을 가장 합리적이고 이치에 맞게 설명한 게 제 주장이에요. 그런데 당신은 굴레를 벗어날 모종의 방법이 존재할 거라고 주장하고는 그게 무엇인지 제시하지 못했군요.”
비아냥을 섞은 대답에도 하피는 아직도 할 말이 있는지 항변했다.
“그녀는 기이한 힘을 씁니다. 목숨을 붙여놓는 일에 한정해서는 루스키니아 공보다도 뛰어납니다. 모르는 힘이 있더라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누구도 모르는 힘이 있다. 그 힘으로 일을 저질렀다. 악마의 증명이네요. 존경하는 재판장님 어떻게 생각하세요?”
저쪽에서 우기면 답도 없지만 이 공간은 재판정. 재판장인 티르는 나에게 매우 호의적이다. 억지를 부려도 들어줄 텐데 이치에 들어맞는 타당한 말을 묵살할 리가 없다. 티르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변호인의 주장은 정당하다. 루스키니아의 암묵적인 혹은 적극적인 허락 없이 그녀가 역천을 꾀하는 건 불가능해 보이는구나. 또한 루스키니아가 그걸 의도하였다는 정황 역시 충분하다.”
타 흡혈귀들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흡혈귀가 100% 이성적인 건 아니라지만 차가운 피는 공감으로 판단을 그르치게 두진 않는다. 엘더도 아닌 아인의 감정 따위 알 바 아니라는 거다.
상황이 불리해진 하피가 필사적으로 외쳤다.
“권속이라 하여도 종주의 뜻대로만 움직이진 않습니다! 저처럼 종주가 사라지거나 잠든 경우. 권속은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습니다! 따라서 리르는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그러면 더더욱 ‘죽일’ 수는 없겠네요. 종주의 허락이 떨어지지 않는다면.”
“종주가 진혈을 취하라고 명령하진 않았을 것입니다!”
오오. 임기응변이지만 잘 파고들었네. 동기가 아닌 결과로 논점을 바꿨어.
“애첩께서 말하신 대로 루스키니아 공이 의도하신 바였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아닐 가능성도 있지만요. 그건 우리가 알 수 없습니다.”
우리? 글쎄. 나는 아는데.
“하나 의도하든 아니든 엘더의 진혈은 오직 시조께서만 다루어야 할 것. 엘더께서 영멸하신 이후 그 진혈을 취한 건 틀림없이 반역입니다! 그 피를 거두어 가소서!”
“그것도 루스키니아 공의 뜻이었을 수도 있잖아요?”
“아까 했던 말 그대로 돌려드리겠습니다.”
가능성을 제시한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는 거지. 안다. 나도 그렇게 시시하게 넘어갈 생각은 없었어.
“맞네요. 어찌 되었든 지금 진혈을 가진 건 피고고 그 자체만으로 죄네요.”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몸을 홱 돌려서 티르를 올려다보았다. 제법 괜찮은 여흥이었나 본지 티르는 은근한 미소를 지으며 내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흡혈귀들의 생각대로 이 재판에서 시시비비는 큰 의미 없다. 사실과 논리는 오직 시조를 설득하기 위한 방법일 뿐 모든 결정은 시조가 내리며 누구도 그것을 거스르지 못한다.
피의 굴레가 있으니까.
“엘더 살인 사건을 재판하는 건 아니게 되는 거죠? 판이 바뀌었네요. 이 재판은 엘더를 죽인 범인을 추궁하고 치죄하는 재판이 아니었어요. 시조의 진혈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그걸 다루는 판정이 되겠죠.”
그리고 나는 시조의 애첩이다. 베갯머리 송사까지 가면 내가 다 이겨.
여기서 패배를 깨달은 하피의 얼굴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종주 없는 권속이 자유를 찾는다는 건 거짓말은 아니었다. 봐봐. 얼마나 자유로워 보여?
“존경하는 재판장님 이 재판의 쟁점이 바뀐 것 같습니다. 엘더 루스키니아를 죽인 범인을 찾는 자리에서 그의 죽음을 어떻게 처리할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것으로요.”
“그런데?”
“쟁점이 바뀌었다면 그에 맞는 준비가 필요하니 저는 여기서 휴정을 제안합니다.”
좀 길긴 하지만 시간을 끄는 만큼 내가 유리해지니까 더 질러보자. 그랬는데 티르가 의아한 듯이 반문했다.
“하루? 그리 짧은 시간을 쉬어도 되겠느냐?”
“…그게 과연 짧은 시간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정도는 필요해 보이네요.”
“흠. 그렇다면야.”
어쨌건 나는 애첩이고 티르는 대놓고 내 편이다. 고개를 끄덕인 티르는 자리에서 일어나 선언했다.
“우리가 이 자리를 연 것은 루스키니아의 한을 풀어주기 위함이 아니다. 그의 신변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파악하고 그 대처를 마련하기 위함이었다.”
흡혈귀가 동료의 죽음에 민감한 건 단순히 그게 드문 일이기 때문. 다른 흡혈귀들도 시조의 말에 일부 동의했다.
“다만 이야기를 들으니 휴의 말에는 일리가 있다. 루스키니아는 역천을 꾀했거나 그에 준하는 실험을 했음이 분명하다. 제 목숨까지 버려가면서 말이지. 만일 루스키니아가 어떠한 의도를 갖고 행동했다면 그에게 묻는 게 가장 확실한 일이지만… 영멸한 이는 대답을 하지 못하지.”
죽은 자는 말이 없다. 그래서 산 자는 죽은 자가 했을 말을 추측하며 그들의 한을 풀어주려고 한다.
그렇지만 흡혈귀는 한 번 죽었던 이들. 그리 가슴 따뜻한 이야기엔 관심 없다.
“하면 이제 이야기는 바뀌어야 한다. 리르 나이팅게일에게 자격이 있는지. 진혈을 어찌 처리해야 할지. 잠시 휴정하였다가 다시 논의하기로 하지.”
가슴 시릴 정도로 차가운 선언이나 그게 흡혈귀다. 죽은 자를 기리고 애도하는 건 평범한 인간들이나 하는 거다.
그래 지금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고 있는 하피처럼.
재판 도중 벌떡 일어섰던 깃털이 물에 젖은 듯 추욱 가라앉았다. 처음 보았던 몸집보다 서너 배는 더 작아진 하피는 뾰족한 손가락을 꽉 쥐며 말했다.
“…시조시여. 우리를 저버리시나이까.”
“나는 너희를 저버린 적 없다.”
“리르 나이팅게일은 예일링이옵니다. 루스키니아 공의 피를 이어받고 피를 섞었으며 피가 뒤틀린. 저희 아인은 루스키니아 공의 피를 이어받은 예일링을 엘더로 모실 수 없나이다.”
하고 싶지 않다 라는 의미를 넘어선 대사였다. 예일링이 엘더가 된다면 그것도 개족보로 서열이 뒤틀린 리르가 그들의 진혈을 다스리게 된다면… 리르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흡혈귀들 역시 굴레에서 튕겨 나오게 될 테니까.
루스키니아의 아인들이 괜히 리르의 죽음을 바란 게 아니다. 그 진혈을 리르가 취한다면 리르의 종주이자 권속이 되는 아인들은 이 공국에서 이질적인 존재가 될 테니까. 마치 엘더의 뜻에 의해 강제로 굴레를 벗어던진 리르 나이팅게일처럼 한 혈족 전부가 굴레에서 벗어나는 거다.
나는 불안에 떠는 아인들의 모습을 보고 한 가지 추측을 했다.
어쩌면 엘더 루스키니아는…. 이 장면까지 그린 게 아닐까.
“그 또한 너희가 정할 일이 아니다. 내일 이 홀에서 논의해야 할 내용이지. 관련자들의 이야기를 다 들어보고 결정하겠다.”
티르의 선고는 감히 반론을 허락지 않았다. 하피는 아득한 절망감 속에서 고개를 숙여 대답했다.
“…따르겠나이다.”
더 할 말이 없는 것 같군. 오늘은 이것으로 끝났다. 나는 모두를 대표하여 외쳤다.
“그럼 이것으로 휴정!”
쿵. 묵직한 소리와 함께 재판이 멈췄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또 늘어졌군요. 면목없습니다.
내일 예비군 갔다가 돌아와서 다시 1일 1연재 운동을 시작하겠습니다.
말로는 안 되니까 결과로 보답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