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43
지모신교가 몰락하고 성황청의 믿음이 널리 퍼지기 직전. 세상에는 수많은 믿음이 산재해 있었다. 찬란한 미래를 향해 나아가려는 믿음들.
그리고 전란 속에서 믿음은 냉소로 바뀌었다.
어떠한 믿음도 그들을 구원하지 않았다.
어떠한 기도도 고통을 덜어주지 않았다.
어떠한 가르침도 답을 내려주지 않았다.
지모신교의 한 분파로 여겨졌으나 실상 그와도 별로 관련이 없던 수도승들은 세상을 보며 신음했다. 몇몇은 저 더러운 속세로부터 등지기로 결심하고 은둔했으며 보다 못한 일부는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세상에 나섰다. 그들은 가르침을 설파하고 고통에 지친 이들을 이끌었다.
…그러나 전란은 도승도 피해 가지 않았다. 속세와는 다른 원리와 교리로 행동하는 수도승들은 곳곳에서 마찰을 빚었다. 오랜 세월 수련한 무예승이 없었다면 수도승은 화마에 휩싸인 민초 중 하나로 전락했을 것이다.
속세는 더러웠고 잔인했다. 큰뜻을 품고 내려온 도승들은 낙담하고 절망했다. 다시 산속으로 돌아가는 이들도 있었고 아예 속세에 물들어 세력을 일군 수도승도 있었다. 한 뿌리에서 나왔으나 갈라진 두 분파. 두 세력의 행보가 워낙 달랐기에 서로를 비난하는 건 예정된 결과였다.
한뜻으로 뭉쳐 풍파를 겪었던 무예승은 서로를 적으로 삼고 싸우느라 점차 약해졌다. 한쪽은 속세에 물든 이를 파계승이라 비난했고 속세에서는 고결한 척 방관만 하는 그들을 위선자라고 취급했다. 두 세력의 마찰은 점차 커졌다.
그들의 하나 된 믿음과는 달리 더욱 많은 고통과 번뇌가 생겨났다.
“겉모습이 어린 소녀라고 칸쟈카의 이름이 붙은 재앙을 그리 취급하는 것은 본질을 외면하는 어리석음. 소승은 불문을 어기고 그대에게 말하겠소.”
그리고 속세에 물든 파계승 중 한 명이었던 도고는 의미를 잃은 가르침에 회의를 느끼고 자신을 더욱 큰 번뇌 속으로 빠뜨리기로 마음먹었다.
“시조 티르칸쟈카여. 소승은 그대가 무엇인지 모르오. 그러나 흡혈귀는 아무런 고통도 번뇌도 느끼지 않는다고 전해지오. 그것은 말만 들으면 우리가 추구하는 해탈의 경지.”
밤의 귀족. 흡혈귀에게 투신하기로.
“고뇌와 사색 고행과 수련 없이 주어지는 해탈에 과연 가치가 있을지는 모르나. 그 또한 고행일지라. 소승은 이 몸으로 더욱 큰 시험에 들고자 하오.”
엘더는 전부 시조의 권속이다. 그러나 꼭 시조와 뜻을 같이했다고 할 순 없다.
“소승을 흡혈귀로 만드시오. 대신 이 비루한 몸을 내어드리겠소.”
누군가는 복수에. 누군가는 목숨에. 누군가는 호기심에. 누군가는 의무감에.
누군가는 야망에. 누군가는 영생에. 누군가는 만용에. 누군가는 호승심에.
누군가는 신앙에. 누군가는 종족에. 누군가는 두려움에. 누군가는 어쩌다.
전부 이유는 다르나 시조의 권속이 되고 난 이후에는 엘더가 되었다.
과연 도고는 무엇을 느꼈을까.
혹은 느끼지 못했을까.
티르칸쟈카는 처음 겪어보는 상황에 할 말을 잃었다. 지금껏 모든 엘더는 티르가 원하는 대로 행동했다. 티르의 감정을 공유했다. 여자와는 주먹은커녕 말조차 섞지 않는 도고도 상대가 천신을 믿는다면 일말의 주저 없이 가슴팍에 주먹을 꽂아 넣고는 했다.
분노로 가득한 무예승의 주먹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다. 오직 믿음만을 가릴 뿐.
도고 역시도 엘더로서 아주 충실했다. 도(道)를 향한 믿음을 시조에게 보내고 있기에 당연한 결과이다.
그런 도고가 지금 시조를 향해 반기를 든 것이다.
“…제정신이냐? 나를 재판하겠다고?”
“비단 루스키니아의 딸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도 시험을 들어야 하오. 시조 그대가 그 시작이오.”
비썩 마른 몸을 갖고 있지만 눈빛은 형형하다. 혈승 도고. 그의 혈족은 고통을 자처하고 인간의 피도 거의 탐하지 않아 뭇 인간들에게 존경을 받았다. 좋은 의미로는 대쪽같고 나쁜 의미로는 틀에 박힌 사고를 가진 도고의 혈족들은 공국에서 법과 도리를 다루는 일을 맡고 있다.
그런 그가 나서서 시조를 규탄한 것이다.
“시조여. 소승이 그대에게 바치는 경의는 타고난 것이 아니오. 소승은 분명 모든 번뇌와 고통을 벗어던지고 해탈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 흡혈귀가 되었소. 지금까지는 서로 역할에 충실했지. 헌데.”
도고는 아주 살짝 티르칸쟈카를 한심해하는 눈초리로 바라보며 말했다.
“지배력을 잃고 남자를 방에 둔 채 색에 빠져 지내는 그대에게 소승은 어떤 경의도 느끼지 못하겠소.”
여자와는 주먹도 말도 섞지 않는다. 수양을 방해하고 정신을 어지럽히는 존재이기에. 해묵은 교리지만 해묵은 인간이었던 도고는 그 믿음을 따랐다.
그리고 굴레가 사라진 지금. 도고는 시조와 교리 사이에서 저울질을 시작했다.
도고의 반역 그리고 역천에 티르칸쟈카가 가진 감정은.
“…어?”
무엇보다도 당황이었다.
티르칸쟈카는 감각도 감정도 없었다. 다른 엘더들은 혈조술의 힘 아래 지배당하며 그와 동조하기라도 했지만 모든 흡혈귀의 종주인 티르칸쟈카는 무엇을 봐도 감흥이 일지 않고 어떤 향과 맛도 그녀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었다. 오직 성황청을 향한 증오만이 남아 티르칸쟈카는 더욱 맹목적으로 그에 매달렸다.
그러나 복수만으로는 마음의 갈증이 채워지지 않았다. 그래서 티르칸쟈카는 자기 심장이 되살아나기를 바랐다. 세상에 녹아들어 흐릿한 육신을 다시 바로잡고 무언가를 느낄 수 있는 몸이 되고 싶어서.
다만 그 과정에서 무슨 일이 생길지. 권속으로 거느리고 있던 흡혈귀들이 어떻게 될지 진지하게 고민한 적은 없었다.
왜냐하면 천여 년이 넘는 세월 동안 모든 흡혈귀는 티르칸쟈카의 권속이자 수족. 그녀의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존재였으니까.
티르칸쟈카는 처음부터 시조였다. 어떤 사연을 갖고 오든 그녀의 피를 받은 이들은 권속이 되었다. 티르칸쟈카는 그 사실에 아무런 감흥도 느끼지 못했다. 그저 쓸 수 있는 수족이 하나 더 늘었구나 하는 생각뿐.
반란과 역천은 티르칸쟈카가 떠올릴 가능성에 없었다.
“진심이냐 도고?”
“진심이오.”
“…그건 네 혼자만의 생각이냐?”
“삼라만상을 미천한 소승이 어찌 아리오. 다른 이들의 혼탁한 마음은 소승의 눈으로도 꿰뚫어볼 수 없거늘. 마침 굴레도 사라졌으니 저들의 구정물처럼 탁한 마음도 소용돌이치고 있겠지….”
문득 도고는 나란히 앉은 엘더를 둘러보았다. 룽켄 카빌라 에르제뷔트. 역천을 앞에 두고도 상황을 관망하는 그들의 모습을.
-엘더의 반란은 도고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다. 티르칸쟈카는 아주 잠깐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을 느꼈다.
손발이 떨어져 나와 자신을 향해 삿대질하는 느낌. 지금까지 일어나지 않았고 일어날 수 없었던 일이 눈앞에서 벌어지자 말을 잃었다.
신변의 위협을 느낀 건 아니었다. 다만 의외의 상황에 놀랐을 뿐. 애초에 심장이 없던 티르칸쟈카에게 두려움도 당혹스러움도 다 낯선 감정이었다.
당혹스러움은 곧 분노가 되었다. 티르칸쟈카는 감히 역천을 저지른 도고를 무시무시한 눈으로 노려보았다.
“네 진혈은 나에게서 비롯된 것일 터. 감당할 수 있겠느냐?”
“소승 또한 여쭈겠소.”
혈승 도고.
누구보다도 세속적이며 인간적이었던 무예승. 누구보다도 타락했으며 많은 인간을 죽인 파계승. 주먹에 묻은 피가 마를 날이 없던 고행자는 소녀를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시조께서는 소승을 감당할 수 있으시오?”
“네놈이…!”
상황은 충분히 알았다. 이제 분노할 차례가 다가왔다. 시조는 천천히 걸어서 내려와 비쩍 마른 고승 앞에 섰다.
“내가 심장을 되돌려 경계를 구분 지었어도 너희의 종주다. 너희를 제압하지 못할 것 같으냐?”
“…충분히.”
“그 말 후회하지 말길 바라마.”
티르칸쟈카는 작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누구 한 명 제대로 상처입히지 못할 주먹이 앙다문다. 티르칸쟈카는 곧은 자세로 선 도고를 겨누고 주먹을 뒤로 당겼다. 혈조술 피를 다루는 기술이 티르칸쟈카의 몸을 움직인다.
고행자인 도고가 일격을 피하지 않을 것을 알기에 티르칸쟈카는 온힘을 다해 주먹을 내질렀다.
도고는 피하지 않았다. 평소처럼.
공국이 잠시 요동쳤다.
보이지 않았다. 티르칸쟈카의 주먹도 도고의 몸도. 만월의 성이 부르르 흔들리고 부서진 암벽이 뒤늦게 쏟아져 내렸다. 만월의 성 피로 다지고 엮어 지은 고성에 일직선의 통로가 생겨났다. 인간의 몸이 만들어낸 바람이 성을 뒤흔들었다.
힘은 사라진 게 아니다. 바뀌었을 뿐. 모든 흡혈귀가 머리로는 알고 있던 그 사실을 실감했으나.
오직 한 명. 티르칸쟈카 본인은 무언가 아주 사소한 부족함을 느꼈다.
‘…아파?’
지금껏 고통이 없었기에 자기 몸조차 도구로 사용할 수 있었다. 어차피 재생하면 되니까. 강력한 재생력을 믿고서 자신의 모든 힘을 적을 때려 부수는 데 사용했다.
그렇지만 며칠 감각을 되살리는 과정을 거친 티르칸쟈카는 쾌감은 물론 고통에도 민감해진 상태였다. 넘치는 힘이 팔을 부수면서 나아가자 아릿한 고통이 그녀의 팔을 잡아당긴다. 조금 더 빠르고 강력했어야 했는데.
티르칸쟈카는 압도적인 위용을 선사하고도 무언가 이질감을 느꼈다.
“…이게 전력이오?”
또한 이질감을 느낀 건 그녀뿐만 아니었다. 단순한 타격으로는 흡혈귀를 죽일 수 없다. 아무리 가공할 힘이 있어도 마찬가지다. 한순간 어마어마한 거력에 반쯤 짓이겨진 도고였으나 그는 첫 번째 벽과 격돌하는 순간부터 재생하고 있었다.
고초와 풍파.
지금은 혈귀투법으로 불리는 먼 옛날 고행자가 익혔던 기공.
고통과 괴로움은 피하지 않고 그대로 감내한다. 하늘하늘 흔들리는 몸은 바람과 파도에 맞서는 대신 휩쓸린다. 타격을 피하지 않고 버틴다. 다치고 아프더라도 죽지만 않으면 된다는 기묘한 목적을 가진 고행자의 기공은 흡혈귀가 된 이후에 더욱 강력해졌다.
힘으로는 밀렸으나 기어코 버틴 도고는 뚜벅뚜벅 걸어오며 말했다.
“신비도 권능도 없는 어린아이의 주먹다짐. 이게 그대의 깨달음인가.”
“제깟놈이 주제도 모르고!”
지배력은 건재하다. 다만 아픔을 느끼고 제 몸을 구분짓는 바람에 몸 바깥으로 적용되지 않았을 뿐이다.
그렇다면 방법은 간단하다.
도고의 피에 닿으면 된다. 잠깐이지만 그의 진혈에 닿는다면 도고를 엘더로 만드는 힘을 거두어갈 수 있다.
난생 처음일 것이다. 티르칸쟈카가 싸우기 위해 궁리한 것은. 이딴 일로 지금까지 지내오던 엘더를 죽이자니 조금 아까웠으나 분노한 티르칸쟈카는 그를 감수하기로 했다.
까득. 손톱을 긋는다. 고통이 느껴지지만 이 정도는 참을 수 있다. 티르칸쟈카는 이전에 했던 것처럼 자신의 피를 흩뿌려 도고를 공격하기로 했다. 피의 파도가 도고의 몸에 생채기라도 낸다면 거기 섞인 진혈은 그대로 티르칸쟈카가 거둘 것이다.
맞서 다가오는 도고를 향해 티르칸쟈카는 손가락을 튕겨 피를 흩뿌렸다. 혈파가 순식간에 몰아쳐서 도고를 휩쓸었다. 복도가 붉은 빛으로 가득 메워졌다….
그러나 고행자는 오직 일격만 허용한다.
도고는 엘더다. 권능에 몸을 담근 자. 동시에 생전에도 강력했던 고명한 무예가이다. 티르칸쟈카의 움직임과 그 혈류를 느끼고는 붉은 족적을 남기며 움직였다.
역경.
쏟아지는 힘을 비스듬히 거스른다. 그 충격은 온전히 몸으로 견딘다. 뼈가 부러지고 근육이 끊겨도 그 또한 고행. 혈조술로 제 몸을 움직여 부평초처럼 혈파 속을 떠다닌다.
그야말로 무예의 극치. 재앙을 극복한 도고의 주먹이 티르칸쟈카의 턱에 꽂히려다가 멈칫했다.
티르칸쟈카는 막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건 흡혈귀의 방식이 아니니까. 대신 회수한 손으로 도고를 낚아채려고 했다.
곤경.
파앙. 거대한 충격파가 일어나며 도고와 티르칸쟈카를 서로 밀어냈다. 간단한 건곤의 응용이나 혈기와 상대방의 힘을 접목하여 바깥쪽으로 방향을 비트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없다. 그 힘이 거대하면 더더욱.
단숨에 거리를 두고 떨어진 도고는 눈을 감고 합장하며 결론을 내렸다.
“소승의 볼일은 끝났소.”
“어딜 네 멋대로 끝내느냐!”
티르칸쟈카가 씩씩거리며 소리쳤으나 도고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여자와는 주먹도 말도 섞지 않기에. 도고에게 있어 여자란 아이나 낳는 존재일 뿐 수양 면에서는 하등 도움 될 게 없기에 없는 존재로 치부한다. 도고가 여자에게 발휘하는 친절은 상냥함이 아니라 경멸에서 비롯된 것이다.
지배력을 잃은 시조는 도고를 해탈하게끔 해준 그 존재가 아니다. 애첩에 눈이 멀어 몸과 마음을 바친 일개 암컷일 뿐이다. 도고는 티르칸쟈카가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물러났다.
“…이!”
격노한 티르칸쟈카가 어둠을 그러모으려는 때. 섬찟한 무언가가 티르칸쟈카의 팔과 목을 스치고 지나갔다.
잠깐 시조의 팔과 다리가 덜렁거렸다. 물론 그건 찰나이며 시조의 몸은 금방 다시 붙었지만. 순간적으로 통증을 느낀 시조의 몸이 멈칫거렸다.
그 틈을 타 조금 늘어지는 듯한 장난스레 교태를 부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피이-. 시조 몸에 칼이 들어가는데요-? 어째-서?”
매끈한 곡선을 가진 그림자가 어둠 속에서 일렁거렸다.
배꼽과 겨드랑이를 훤히 드러낸 무희였다. 양손에는 둥그런 단검을 쥐고 맨발로 어둠을 딛고서 가볍게 선다. 조금 전 티르칸쟈카의 몸을 살짝 파고들었던 단검을 바라보던 무희는 칼날을 사탕처럼 핥았다.
“뮤리…?”
“일어나면 안 되는 일. 우리의 금기. 왜 해보니까 되는 걸까요-? 저의 발칙함을 어째서 벌하지 못하는 거죠-?”
어둠의 집행관. 고요의 암살자. 오직 시조만이 다룰 수 있는 어둠을 결국 손에 넣은 거짓 우상의 재현자.
유령 무희 그믐이 비추는 뮤리.
그녀의 등장이 끝나기도 전 다그닥거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흔한 말발굽 소리였으나… 묘하게 정돈된 박자에서는 말이 가지기 힘든 이지가 엿보였다.
반인반마의 마인(馬人). 켄타우로스라고 불리었던 수인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 옛날 인간에게 말이란 재산이자 권력이며 무기였다. 기공이 그렇게 발달하진 않았던 시절 말에 탄 인간은 평범한 인간의 몇 배나 되는 힘을 발휘했다. 그 ‘힘’의 범주에는 근력 전투력 기동력 수송력 등 수많은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 말은 그 자체로 전략자원이자 병기.
그리고 교접의 금기를 밥 먹듯이 저지르는 어떤 왕가는 그 병기를 인간과 합치려고 시도하여 성공했다. 상체는 인간 하체는 말. 기마병의 강력함을 타고 난 수인들은 탁월한 ‘힘’을 발휘하여 전쟁을 휩쓸고 다녔다.
…다만 아가르타 왕가가 제 몸으로 섞어 만든 것이 다 그렇듯 후손을 남기기 극히 어려운 구조라 자연적으로 소멸할 운명이었지만.
위대한 피를 이은 어떤 켄타우로스는 몇 남지 않은 부족을 지키기 위해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흡혈귀에게 몸을 맡겨 제 종족을 보존하기로.
“씨족장. 배신인가. 부족을 정녕 저버린 것인가.”
야만의 보루. 황야의 영주. 스러지기 전까지 온갖 나라를 휩쓸며 각국을 피로 물들인 문명의 파괴자… 야만의 왕이라 불리었던 ‘칸’의 후예.
주시자 라후 칸. 그가 창을 등 뒤에 비스듬히 맨 채 다가왔다.
와드득. 와드득.
누군가 돌을 입안에 넣고 씹는 소리가 났다.
만월의 성은 피로 다진 벽돌. 흡혈귀의 권능이 벽을 강화하고 보조한다. 만월의 성 자체가 거대한 흡혈귀라도 된 것처럼 한 번 부서져도 저절로 복구되는 특성을 갖고 있다. 도고가 날아가면서 부서진 벽도 천천히 되돌아가고 있었으니.
그러나 어느 부분은 마치 뜯어먹힌 것처럼 복구가 되지 않았다.
“배고…파. 굶주림이 느껴져. 얼마 만이지?”
돌을 씹고 있던 소년이 슬프게 중얼거리며 일어났다. 쪼개진 돌멩이가 목구멍을 찢으며 뱃속으로 내려갔지만 그는 상관하지 않았다. 빈 배만 채울 수 있다면 그게 무엇이든 상관없었다.
“굶주림을 없애려고 흡혈귀가 되었는데. 그러면 나는….”
돌은커녕 물조차 잘 마시지 못할 것처럼 보이는 소년은 서글프게 먹다 남긴 돌을 던졌다.
탐식은 인간의 본능이다. 굶주린 이는 무엇이든 먹고 삼킨다.
가끔 금기를 금기로 접하지 못한 인간 중 같은 인간을 식량으로 삼는 이가 있다. 죽은 시체를 먹는 것도 중죄이며 산 자를 죽여 먹는 건 금기를 넘어선 터부다.
누군가 식인을 했다는 소식이 들으면 먼저 주변 사람들이 죽이려 든다. 그게 안 된다면 병사가 잡으러 오고 그조차 불가능하다면 토벌대가 꾸려진다. 나중에는 성황청의 집행자들이 운명을 등에 업고 찾아온다.
대부분은 토벌되어 죽으나 살아남은 몇몇 탐식자는 더욱 강해진다. 아니 강해서 살아남은 걸까. 어찌되었건 목숨을 건 베팅에서 승리한 탐식자들은 적을 모두 먹어 치워 그만큼 강력해진다.
부모도 나라도 글자도 모른 채 야인으로 살아남은 탐식자. 뱃속에 마을을 담고 다니는 자. 깊은 늪의 아귀. 인간포식자.
피거머리 바쿠타 옹.
생전에도 한 시대를 풍미한 괴물들이었다. 흡혈귀가 된 이후에는 모든 시대를 살아가는 전설이 되었다. 엘더란 그러한 것들이다.
잠든 것으로 알려진 엘더가 오랜 침묵을 깨고 등장했다. 시조에 관한 소식을 듣고서.
리르는 엘더다. 아무리 경험 많고 강력한 아인이라고 해도 엘더 상대로는 승산이 없다. 그래서 저 흡혈귀들은 혹시나 하는 상황을 대비해 나와 리르를 감시하려던 속셈이었다.
다만 그보다 먼저 잠입한 힐데가 용케도 나를 찾아왔다.
“아버님. 보고드릴게요.”
힐데는 웃음기를 뺀 얼굴로 또박또박 보고했다.
“루스키니아의 아인들이 잠든 엘더를 깨우며 돌아다니고 있어요. 시조가 그들을 버렸다 고 선동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