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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mniscient First-Person’s Viewpoint Chapter 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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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454

다른 이들과 달리 유일하게 시조를 ‘적대하여’ 엘더가 된 듀 라한. 암흑기사. 목 없는 기사로서 쟁쟁한 기사들의 목을 베고 다니던 전설적인 존재.

자기 머리를 철퇴처럼 휘둘렀다고 하는 어둠의 기사 듀 라한의 머리가 몸과 떨어져 있는 건 고증에 맞다. 그렇지만 아무리 그래도 몸 없이 머리만 덜렁 등장하는 경우는 없다. 공포의 대상이었던 건 그 머리가 아니라 몸쪽이었으니까.

나는 듀 라한의 머리를 향해 물었다.

“듀 라한 경. 어찌하여 목만 오셨나요?”

“…네…놈!”

그의 목소리는 바닥 난 그릇의 밑바닥을 박박 긁는 듯했다. 아무래도 목 아래쪽이 없어서 발성에 문제가 생긴 듯하다. 엘더가 강하다고 하더라도 이래서야 나조차도 당하지 못하겠는걸.

가장 강력한 아군이 가장 무력한 모습으로 등장하자 에르제뷔트는 눈을 부릅뜨고 발다미르에게 따졌다.

“발다미르? 이게 무슨 일이죠? 듀 라한의 육신은요?”

“그의 몸은 두고 왔다. 머리와 몸이 같이 있다면 그는 필시 시조께 대항하려 들 테니까.”

“…네…?”

시조에게 대항하려는데 왜 목만 잘라서 왔는지 여전히 이해를 못 하겠다는 표정이다. 이쯤 되면 알아야지.

“머리가 딱딱하게 굳으셨네요 마담 에르제뷔트. 꼭 말로 설명해야 알아들으시겠어요?”

에르제뷔트의 원활한 이해를 위해 내가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적혈공은 당신네 편이 아니에요. 이분은 당신네들처럼 티르를 공격할 생각이 없거든요. 감히 시조께 반기를 든 반역자라면 또 모를까.”

에르제뷔트는 뒤늦게 깨달았다. 발다미르가 어째서 자리를 비웠는지. 혼자 듀 라한을 깨우러 갔는지. 그리고 지금 아무것도 모르는 척 되물으면서 어느새 이토록 가까이 접근했는지.

에르제뷔트가 대응하려는 순간 발다미르도 움직였다. 에르제뷔트는 그를 떨쳐내듯 부채를 펼쳤다. 강력한 지배력이 바닥에 깔린 피와 호응하고 핏물이 벽처럼 솟구쳐 그녀오 발다미르를 분리했다. 동시에 붉은 덩굴과 엉겨붙은 벽돌이 발다미르의 발목을 잡으려고 모였다. 마치 세상 전부가 발다미르를 붙잡으려는 것처럼 보였다.

그에 맞선 발다미르의 대응은 간결했다. 머리 위로 대검을 붙잡고 강하게 내려 벤다. 그의 앞을 가로막는 모든 것이 양단되었다. 덩굴도 벽돌도 액체인 피의 파도조차도.

사물은 물론 혈조술이라는 권능조차 베어버린다. 발다미르의 강력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에르제뷔트는 대신 양으로 찍어눌렀다. 베이는 것보다 훨씬 많은 양의 핏물이 온갖 것을 머금고 폭포처럼 쏟아졌다.

혈조술의 강함은 에르제뷔트가 압도적이다. 혈기라도 발다미르의 권능에는 반응하지 않는다. 여기서 발다미르가 마음껏 지배할 수 있는 건 그의 몸과 대검뿐.

그렇지만 에르제뷔트를 상대하기에는 그것이면 충분했다. 발다미르가 손가락을 휘저었다.

기공인지 혈조술인지. 아니면 둘을 합일한 무언가의 권능이 대검을 움직였다. 대검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날아가서는 저 혼자 핑글핑글 돌았다. 점차 빨라지던 대검은 얼마 지나지 않아 폭풍으로 변했다. 소용돌이치며 방해물을 갈아버린 발다미르는 에르제뷔트 위로 뛰어올라서는 움직이는 대검의 손잡이를 붙잡고 그대로 내리그었다.

항거할 수 없는 일격이 세상을 양단했다. 에르제뷔트는 가진 모든 힘으로 맞섰으나 피의 지배력은 만물을 부수는 일격을 막아내지 못했다. 부채가 반으로 찢어지며 제어를 잃은 혈기가 흩뿌려졌다.

흡혈귀는 죽음에 대한 공포가 희박하다. 고통을 느끼지 않는 불사자라서? 그것도 있지만 생에 대한 의지가 희박하기 때문일 거다. 가짜 돈을 걸고 도박해봤자 스릴을 느낄 수 없듯이.

그렇지만 지금 마침 자기 소망을 갖게 된 에르제뷔트는 절박해졌다. 에르제뷔트는 그녀의 권속을 향해 소리쳤다.

“나 나를! 나를 지켜라!”

그러나 그 부름에 응답하는 존재는 없었다. 에르제뷔트의 권속들은 에르테 백작을 비롯한 발다미르의 아인에게 제압당해 있었으니까.

같은 아인이라도 발다미르의 아인은 특별하다. 다른 엘더의 권능을 배우고 익힌 권속들은 인간보다도 같은 흡혈귀를 상대하는 데 특출났다. 에르제뷔트의 아인들은 단 둘에게 제압당해있었다.

절체절명의 상황. 에르제뷔트는 더 파고드는 대검을 붙잡으며 외쳤다.

“발다미르…! 배신을 하다니!”

“배신? 나는 단 한 번도 배신한 적 없다.”

발다미르는 대검을 더욱 깊숙이 찔러넣으며 중얼거렸다.

엘더인 에르제뷔트는 육체적인 손상으론 죽지 않는다. 지배력을 헝클어뜨리려고 해도 그녀의 강력한 지배력은 여전했다.

그렇지만 본신이 대검에 짓이겨지고 있는데 다른 데 쓸 힘이 남지는 않았다. 에르제뷔트는 대검에 간신히 맞서며 말했다.

“당신 당신이 소첩을 불러 말했잖아요! 공국에는 변화가 필요하다고…! 그에 동의해서 움직였을 뿐인데!”

아무렴 그래도 그렇지 게으름뱅이 엘더들의 움직임이 너무 급작스럽다 싶더니. 물밑에서 적혈공이 부추겼군.

어디 엘더가 부추긴다고 부추겨질 존재인가? 합리적인 근거가 없으면 행동하지 않을 것이다. 적혈공쯤 되는 힘과 영향력을 가진 엘더가 지원을 약속해야 좀 움직이겠지. 역시 반란의 뒤에는 적혈공이 있었다.

그게 함정이라는 건 몰랐겠지만.

발다미르는 대검을 더욱 깊숙하게 박아넣으며 중얼거렸다.

“딱 둘이었다. 너와 듀 라한.”

“무엇…이?”

“굴레를 벗어던진 뒤 언젠가 반드시 시조께 대항할 엘더. 듀 라한은 굴레를 벗어던진 즉시 그러할 거였고 너는 뒤에서 암약하다 기회를 틈타 움직일 거였지. 듀 라한보다는 네가 조금 더 번거로웠다. 그래서 번거로운 수를 썼을 뿐.”

처음부터였다. 엘더들이 굴레가 끊어진 것을 눈치채고 오랫동안 숨죽였던 욕망이 슬금슬금 피어오르던 때.

그때부터 발다미르는 차분하게 배신자를 찾아낼 계획을 세웠다.

‘다른 멍청한 엘더도 아니고 바로 이 내가…! 배신을 눈치채지도 못하다니!’

에르제뷔트는 모욕감을 느꼈다. 그건 발다미르를 향한 것이었지만 동시에 자기 자신을 향한 것이기도 했다. 엘더가 되기 전 정쟁을 통해 한 영지를 통째로 흡혈귀에게 갖다 바친 그녀인데. 고작 적혈공 한 명에게 휘둘리다니.

“처음부터…! 함정에 빠뜨릴 생각이었나요!”

“네게 움직일 계기를 준 거지. 그 길의 끝에 내가 서 있었을 뿐.”

발다미르는 대검에 힘을 주면서 왼손을 발톱처럼 오므렸다. 그의 손으로 핏물이 엉겨 붙으며 손가락이 커다란 이빨 모습으로 바뀐다. 에르제뷔트는 그의 왼손에 응축된 힘을 알아보고는 사색이 되었다.

“피거머리! 바쿠타의 힘을…!”

“배워뒀지. 엘더를 상대할 때 필요하니.”

같은 엘더는 엘더를 죽일 수 있다. 목을 치고 제압한 다음 혈조술로 지배력을 어지럽혀서 영멸에 이르게 할 수 있다. 거기에 탐식이 있다면 일은 몇 배나 더 쉬워진다. 상대방의 피를 자기 것으로 만드니까.

탐식 자체는 바쿠타만큼이나 강력하진 않겠지만 발다미르라면 그보다 유용하게 쓸 것이다. 에르제뷔트는 다급히 외쳤다.

“다. 당신! 시조 대신 공국의 왕이 될 생각은 없나요?”

탐식으로 에르제뷔트를 먹어 치우려던 발다미르는 잠시 멈추고 그녀를 내려보았다. 에르제뷔트는 바둥거리며 필사적으로 외쳤다.

“확신이 섰어요. 발다미르. 당신의 힘이라면 가능해요! 티르칸쟈카는 당신을 이길 수 없어요. 가진 힘조차 잃은 지금이라면 더욱! 당신이라면 진정으로 모든 걸 손에 넣고 휘두를 수 있어요!”

“무엇을?”

“모든 것이요! 흡혈귀 인간 엘더! 이 나라 모두를!”

절박하게 말하면서도 동시에 냉철했다. 그녀에게 있어 지금 가장 큰 적은 시조도 나도 아닌 발다미르다. 아군인 줄 알았던 그가 등을 돌린다면 승산이 없다.

그렇지만 만일 그를 아군으로 삼을 수 있다면 모든 일은 쉽게 흘러간다.

“진혈을 양보할게요. 당신을 두 번째 시조로 만들어드리죠! 시조를 죽이고 그녀의 힘을 취한다면 당신은 명실상부한 이 나라의 군주로 우뚝 설 거예요…! 더는 시조의 명령을 받을 필요도 없이!”

작게 고민하던 발다미르는 흠 하고 작게 신음을 냈다. 그걸 긍정의 표시라고 받아들인 에르제뷔트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속삭였다.

“티르칸쟈카라면 몰라도 당신이라면 소첩과 이 나라를 맡길 수 있어요. 소첩도 성심성의껏 당신에게 봉사를….”

“필요 없다.”

푸확.

발다미르의 손아귀가 에르제뷔트의 머리를 집어삼켰다. 손가락이 이빨처럼 에르제뷔트를 집어삼켰다. 흐르는 핏물이 손아귀 틈으로 흘러 들어간다. 남은 잔해가 혈조술을 중심으로 다시 형체를 이루려 하지만 발다미르는 집요하게 그 힘의 근원을 추적했다.

자르고 베어내며 집요하게 에르제뷔트를 흐트러뜨린다. 형체를 이루기 전에 부서지는 에르제뷔트의 육신 속에서 무언가를 찾아낸 발다미르는 손을 뻗어 쥐었다.

재생력의 근원인 티르의 진혈을.

한때 티르의 것이었으나 오랜 시간 에르제뷔트와 함께하여 변질된 진혈. 엘더에게 주어진 티르의 피.

진혈은 엘더의 몸을 복원하려고 핏물과 살점을 모아 이어 붙였다. 근원이 온전히 드러났음에도 에르제뷔트는 아직도 죽지 않았다.

“흠.”

조금만 더 힘을 쓰면 에르제뷔트를 영멸시킬 수 있겠지만 발다미르는 마지막 한 발짝을 남기고 멈췄다. 에르제뷔트는 반역자지만 진혈은 티르의 일부였기에. 진혈을 다시 주워 담은 그는 나를 보지도 않고 말했다.

“애첩.”

“네?”

“수고했다.”

“뭘요?”

“에르제뷔트의 발목을 잡은 것. 덕분에 시조께서 짐을 한결 덜 수 있었다.”

발다미르의 이 화법 마음에 들면서도 상대하긴 곤란하단 말이지.

그는 나의 마음을 추측한 게 아니었다. 자기가 그렇게 생각하겠다고 선언한 거다. 지금 저 말도 내가 티르를 위해 에르제뷔트를 유인한 거라고 믿는다…기보다는. 내 행동으로 말미암아 티르에게 도움이 되었으니까 인정했을 뿐.

발다미르는 내 속내를 넘겨짚지 않고 오직 드러난 결과로서만 나를 판단할 거다. 잘못된 판단은 있을지언정 나의 말에 휘둘려 판단을 잘못하진 않을 테니.

“티르를 위해서라기보다는 제가 살기 위함이었지만요.”

“현명하군.”

“별로 그렇진 못했어요. 당신이 일을 멋대로 꾸미는 바람에 꼼짝없이 성에서 갇혀 죽을 뻔했으니까요. 엘더의 배신을 예상한 모양인데 왜 미리 막지 않은 거예요?”

발다미르는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하기 전에는 배신이 아니니까.”

발다미르는 티르에게 충성하겠답시고 반란의 싹을 미리 자르지 않았다. 에르제뷔트를 부추겼을지라도 그녀가 직접 반란을 일으킬 때까지 지켜만 보았다. 발다미르는 독심술사가 아니었기에.

독심술사인 나도 마찬가지니까 뭐라 하기는 어렵지만.

나랑 비슷하면서도 정반대. 나는 의지의 실현을 보고 싶어서 지켜본다면 그는 의지를 알 수 없기에 결과를 지켜본다. 사려 깊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두려움이 없다고 해야 할지.

뭐 당장은 같은 길을 걸어가고 있으니 상관없나….

“….”

“뭐예요? 갑자기 저를 그렇게 빤히 보시고.”

당장 티르를 위해 떠나려던 발다미르는 말없이 나를 쳐다보았다. 무언가 불길한 느낌에 등줄기가 싸해질 때쯤 발다미르는 다시 대검을 챙겨 들며 중얼거렸다.

“…하기 전에는 배신이 아니지.”

“네?”

“만일 인간의 왕이 시조의 애정을 저버리더라도. 저버리기 전에는 배신이 아니다.”

‘그가 비록 시조를 사랑하거나… 혹은 동정하지조차 않더라도. 시조께서 직접 겪기 전에 내 멋대로 처리하는 건 주제넘은 일이겠지. 어떤 방식이든 시조께서 새로운 경험을 하는 건 좋은 일이니.’

이 사람 뭔가 뭔가네. 티르에게 충성스럽다기보다는 충실해. 배신할 생각은 없는 것 같지만 티르를 신이나 왕이라고 생각하지는 않고 있어.

이 감정은….

“발다미르 씨. 하나만 물어봐도 되나요?”

“듣겠다.”

말본새 봐. 나는 속으로 투덜거리면서 물었다.

“에르제뷔트의 말마따나 당신이라면 두 번째 시조가 될 수도 있었는데 왜 그러지 않았죠?”

“할 이유가 없어서.”

“아니. 그렇겠지만.”

짤막한 대답이고 담백한 진실이지만 내가 원하는 대답은 아니었다.

끙. 흡혈귀의 생각을 읽을 수야 있지만 저토록 광활한 기억을 다 읽고 감정을 유추해보는 건 너무 비효율적이잖아. 심지어 그 시절에는 감정도 희박해서 인상 깊은 기억만 골라 읽는 것도 불가능하다고.

질문으로 대답을 떠올리게 하고 읽는 편이 나은데. 뭐가 좋을까. 질문을 고르고 고른 나는 하나 더 물었다.

“당신은 티르에게 무엇을 기대하고 있나요?”

“기대?”

나름 핵심에 가까운 질문이었던 걸까. 발다미르는 그답지 않게 미간을 좁히고 고민했다.

흡혈귀는 피를 받아들인 그 시점에서 멈춘다. 육체도 정신도 그 감정마저도. 발다미르가 처음으로 떠올린 것도 그가 죽기 직전의 기억이었다.

가족도 영지도 잃었다. 복수를 다짐했지만 그는 무력했다. 가진 모든 힘을 쓰고 인맥을 동원하고 계책을 냈지만 결국 실패하여 달아났다. 적에게 쫓겨 다니다 이름 없는 숲에서 죽어가는 그의 앞으로 한 소녀가 나타났다.

누더기를 뒤집어쓴 새하얀 소녀. 맨발로 거친 덤불을 밟으면서도 그녀의 몸에는 상처 하나 없었다. 피 냄새를 맡고 짐승이 먼저 오리라 생각했는데 마녀인지 천사인지 모를 소녀라니. 마지막 가는 길 참으로 기쁜 오산이었다.

-비참한 꼴이로구나.

발다미르는 최선을 다했고 실패했다. 복수를 다짐했어도 능력이 될 때나 하는 거지 모든 걸 다 부딪혔어도 못 이뤘다면 그건 어찌할 도리가 없는 실패다. 발다미르는 딱 거기까지인 인간이었다.

-네 이야기는 들었다. 복수심에 불타 공왕에게 도전했다는 반군의 수괴. 제법 분전했으나 결국 힘이 다한 모양이로구나. 원통하게도.

과연 그럴까.

세간에 알려진 것과는 달리 발다미르는 복수를 부르짖지 않았다. 그는 현실적인 인간이었다. 적이 눈앞에 있더라도 복수심으로 일을 그르치진 않았으니까.

동시에 그는 누구보다도 낭만적인 인간이었다.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걸 알면서도 도망치는 대신 맞서 싸우기를 택했으니까.

-나와 닮은 너라면 영겁의 고독과 끝없는 고난을 견딜지도 모르겠구나.

중얼거린 소녀는 자기 손가락을 깨물었다. 나중에 진혈이라 이름 붙을 피가 멍울져 떨어지다가 우뚝 멈춘다. 공중에서 구슬처럼 뭉친 소녀의 피가 천천히 발다미르의 몸속으로 파고든다. 죽어가는 몸에서 제어를 잃은 피를 대신하여 거대한 지배력이 그를 잠식했다.

-네게 다시 시작할 기회를 주마. 살고 싶다면 내 피를 받아들이거라.

다시 시작해서까지 이루고 싶은 미련은 없었다. 실패했을 뿐 그는 이미 복수를 이루었으니까.

그의 병사는 전멸했다. 가신과 식솔은 노예가 되거나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동맹은 파기되었고 동료는 죄인이 되었다. 그는 모든 것을 걸고 나선 도박에서 패배했다.

최선을 다했고 처절하게 실패했는데 모든 것을 잃은 지금 여기서 또 한 번의 기회를 달라고 바라는 건 너무나도 추하지 않은가.

발다미르는 현실적인 수단을 쓸지언정 낭만을 좇았다. 어디서 떨어졌을지 모를 이 강대한 힘으로 이루어봤자 그의 성과가 아니다. 패배자가 될지언정 추해질 수는 없었다.

이토록 거대한 힘 앞에 저항하는 게 의미가 있을지는 모르나 나름대로 마무리를 지은 발다미르가 거절하려고 할 때였다. 소녀는 차갑고 쓸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네 복수를 다 이룬 뒤에는 나의 수족이 되어 내 복수를 돕거라.

그렇지만 반대로.

마녀인지 천사인지 모를 소녀에게는 그가 필요했다.

차갑고 깊은 증오와 복수심을 갖고 끝도 보이지 않는 권능을 지니고 있었지만. 어리면서도 오래된 시조 티르칸쟈카에게는 발다미르가 필요했다. 그는 그녀의 수단이 될 수 있었다.

어차피 모든 것을 잃었다. 그가 책임지던 것은 역사 속의 먼지로 스러졌다. 누군가의 도구가 되기에는 좋은 조건 아닌가. 발다미르는 실패했지만 소녀에게는 성공할 기회가 있다.

발다미르는 저항하는 대신 힘을 받아들였다. 추하게 두 번째 삶을 살아가기로 결정한 그는 입을 벌려 피를 받아들였다.

발다미르의 소망은 티르칸쟈카를 돕는 것. 엘더의 의무는 시조께 봉사하는 것.

수족으로써 하는 모든 행동이 발다미르의 소망과 일치하기에… 멈춰선 다른 엘더와 달리 발다미르는 더욱 강해졌다. 다른 나라를 본받아 체제를 구축하고 스스로 수련하여 힘을 기르고 기술을 익혔다.

언젠가 시조가 그녀의 바람을 이룰 수 있도록.

“….”

발다미르는 말없이 나를 쳐다보았다. 잠깐 그의 뇌리에 한 가지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아름다운 드레스를 차려입은 티르가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미는 모습을. 그리고 그 반대편에서 뺀질뺀질한 모습으로 나타난 내가 냅다 낚아채는 모습을 그렸다.

발다미르가 상상한 건 티르의 결혼식. 상대는 뭔가 마음에 안 드는 나. 그 직후 발다미르의 심기가 크게 불편해졌다. 발다미르는 듀 라한의 머리와 에르제뷔트의 심장을 챙기고는 몸을 돌렸다.

“듣겠다고 했지 말할 의무는 없다.”

툭 내뱉은 발다미르는 더는 말하지 않겠다는 듯 성을 향해 움직였다. 감히 시조를 공격하는 배반자들을 제압하기 위해서.

뒤에 남겨진 나는 조금 전 읽은 생각을 곱씹었다.  

…팔불출이었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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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mniscient First-Person’s Viewpoint

Omniscient First-Person’s Viewpoint

OFPV, 전지적 1인칭 시점
Score 9.2
Status: Ongoing Type: Author: , Released: 2021 Native Language: Korean
I, a mere con artist, was unjustly imprisoned in Tantalus, the Abyssal Prison meant for the most nefarious of criminals, where I met a regressor. But when I used my ability to read her mind, I found out that I was fated to die in a year… and that the world would end 10 years la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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