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60
만월의 성 공국의 가장 어둡고 깊은 비처에 시조가 앉아있었다. 분명 애첩과 함께 별장으로 향했던 시조는 어찌 된 영문인지 돌아올 땐 혼자였다. 티르칸쟈카의 무시무시하면서도 애처로운 기백에 누구도 감히 애첩이 어디 갔는지 여쭙지 못했다. 그저 도망쳤구나 짐작만 할 뿐.
무슨 일 있었는지 다른 드레스로 갈아입고 돌아온 시조 티르칸쟈카는 옥좌에 앉아 무표정한 눈으로 엘더를 쓸어보았다.
에르제뷔트 도고 듀 라한. 지금 그녀의 앞에 있는 엘더는 전부 반란을 모의했거나 동참했던 이들. 발다미르에게 제압되었던 그들이나 엘더답게 어느덧 육신은 전부 재생된 상태였다. 사실상 패잔병이나 다름없는 그들은 시조의 앞에서 판결을 기다리고 있었다.
도고와 에르제뷔트는 이 치욕스러운 순간에도 머리를 굴렸다.
잠깐 힘에 굴복했을 뿐이지만 그들은 엘더다. 죽지도 않고 지치지도 않는다. 조금 전은 발다미르에게 기습당해 각개격파되었을 뿐이지만 모여있는 지금 힘을 모은다면 못다 한 목표를 이룰 수 있다….
아니 있었다.
[그를 데려오거라.]
티르칸쟈카의 등 뒤에 떠오른 저 불길한 그림자만 아니었다면. 에르제뷔트는 저 그림자에 얼마나 강대한 권능이 들어차 있는지 느꼈다.
시조 티르칸쟈카는 그녀가 아는 모든 지식과 권능을 거기에 담았다.
절대적인 권능을 지닌 시조는 그 힘을 어찌 쓸까 궁리한 적 없다. 대신 시조에게는 그녀의 수족인 엘더와 아인이 있었다. 엘더와 아인이 일개미처럼 물어다 온 힘과 경험. 그 기술과 깨달음은 시조의 안에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수족이 얻은 깨달음이라 본인 것처럼 쓰지 못했을 뿐.
그래서 시조는 천여 년 동안 쌓인 힘과 권능을 담을 그릇을 ‘만들었다’. 멋대로 바꾸기 어려운 그녀의 육체 대신 어둠으로 빚고 혈조술로 만들어낸 새로운 육체에다 모든 경험과 권능을 욱여넣었다. 그 결과 어둠을 두르고 시조의 혈조술을 가진 채 모든 엘더의 힘을 쓸 수 있는 괴물이 탄생했다.
[그를 데려오는 엘더만 죄를 용서받으리라.]
에르제뷔트는 뼈저리게 깨달았다. 이제 엘더는 티르칸쟈카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그나마 다른 엘더의 권능을 전부 배우고 익힌 발다미르만이 조금 대적할 수 있겠지만…. 그는 시조를 배신할 생각이 없다.
이렇게 된 이상 살아남을 길은 하나다. 최대한 납작 엎드리고 시조의 비위를 맞추어야 한다. 에르제뷔트가 그녀의 명령을 받들려고 할 때.
“거절한다.”
시조를 향해 장갑이 날아갔다. 듀 라한이 던진 장갑이었다. 어마어마한 힘으로 던져진 장갑은 티르칸쟈카에게 닿기 전 허공에서 우뚝 멈췄다. 재주 좋게도 장갑을 낚아챈 그림자는 천연덕스럽게 장갑을 껴보려고 했다.
퍼엉. 장갑은 그림자의 커다란 손도 그 강력한 힘도 버티지 못했다. 철을 덧댄 질긴 가죽장갑이 마치 풍선처럼 터졌다. 그림자가 가닥가닥 끊어진 조각을 보고 의기소침해했다.
그러나 장갑의 비극은 알 바 아니라는 듯 듀 라한과 티르칸쟈카는 서로를 노려보았다.
“나는 아직 패배하지 않았다! 비겁한 발다미르가 기습만 하지 않았어도 그리 허망하게 패배하진 않았을 것이다!”
이겼을 거라고 말하지 않는 건 그의 마지막 양심이겠지만 어느 정도는 사실이었다. 발다미르조차도 듀 라한만은 다른 엘더와 합세하기 전에 미리 처리하려고 들었을 정도니까.
티르칸쟈카는 아직까지도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 과거의 기사를 보고는 물었다.
[네 뜻은 무엇이냐?]
“결투다 시조. 네가 죽인 모든 기사를 대신하여 그리고 네게 이용당해 수백 년 동안 인간을 학살한 나 자신을 위해! 너에게 결투를 신청하겠다!”
듀 라한은 자기 머리를 목 위에 올려놓았다. 망가진 조각상을 끼워 맞추는 것처럼 듀 라한은 머리를 이리 돌리고 저리 돌렸다.
목 없는 기사 듀 라한은 자기 머리를 들고 다니며 철퇴처럼 쓰곤 했다. 적이 있다면 그의 머리와 강도를 직접 비교하는 방식으로 싸웠다. 사람들은 그걸 잔혹함의 상징으로 보았지만 놀랍게도 그건 듀 라한의 자비였다. 듀 라한은 머리가 빙글빙글 도는 제약을 스스로에게 걸어가며 싸웠던 것이다.
…다만 그조차 예상하지 못한 게 있다면 이러한 고집이 그에게 권능에 가까운 힘을 선물했다는 점이다. 머리를 휘두른다는 고집과 그의 전투센스가 맞물려 듀 라한은 경지에 이른 균형감각을 갖게 되었다. 머리가 어떤 기괴한 위치에 있어도 듀 라한은 위아래를 구분하고 자신과 상대방의 위치를 명확하게 인지할 수 있다.
죽기 전에도 뛰어났던 힘과 기술이 그 균형감각과 만나 듀 라한은 새로운 경지에 접어들었다. 발다미르가 아니었다면 그는 여전히 최강의 엘더였을 것이다.
[그게 너의 뜻이냐?]
“뭐 그렇지. 영멸은 두렵지 않아. 이미 한 번 죽은 몸인데 두 번은 못할까! 하지만 시조와 싸우지도 못한 채 굴복할 수도 없어! 내가 죽었으면서도 비루한 삶을 놓지 못하던 건 지금 이 순간을 위해서였으니!”
드디어 머리를 붙인 듀 라한은 자유로워진 두 손을 쥐었다 폈다. 그의 손으로 혈기가 응축되더니 커다란 철퇴의 형상을 이루었다.
발다미르의 대검과 마찬가지. 무인은 기공을 무기에 두른다. 경지에 이르면 무기를 마치 제 몸처럼 느끼고 쓸 수 있다. 흔히들 말하는 신검합일의 경지.
그리고 흡혈귀가 된 무인은 자기 몸이나 다름없는 혈기로 무기를 빚어낸다. 그렇게 만든 무기는 마치 흡혈귀의 육신처럼 강력하다.
“네가 사나이…는 아니지만! 명예를 안다면 도전을 받아라!”
이미 한 번 패배한 듀 라한이다. 시조가 그의 도전을 받아줄 이유는 없다. 시조제일검인 발다미르 선에서 처리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티르칸쟈카는 발다미르에게 물러나라 손짓하고는 듀 라한을 바라보았다.
[그런 건 모르지만. 나는 너의 의지를 존중하겠다. 네가 네 의지를 실현하는 것도 그가 바라는 결과였을 터이니.]
“…그가 누군지는 몰라도 제법 낭만적인 남자겠군.”
[뿐만 아니라 야만적이기까지 하지.]
티르칸쟈카는 옥좌에 앉은 채로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듀 라한은 철퇴 두 개를 맞부딪히며 시조를 겨누었다.
“그래서. 언제 일어설 건가? 옥좌에 앉아서 도전을 받겠다는 건 아니겠지?”
[그것도 좋겠구나.]
“뭐?”
티르칸쟈카는 움직이지 않았다. 대신 그녀의 뒤에 서 있던 그림자가 앞으로 늘어지더니 상반신을 바깥으로 불쑥 내밀었다. 적의를 감지한 그림자는 마치 장난감을 쥐려는 듯 듀 라한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림자의 거대한 손에 맞서 듀 라한이 철퇴를 크게 휘두르며 중얼거렸다.
“괴물이로군! 손 풀기로 좋은 상대다!”
손 풀기로 좋은 상대긴 했다.
그림자의 입장에서.
으적 으적.
그림자는 듀 라한을 고스란히 씹어 먹고 있었다. 부러진 철퇴가 바닥에 뒹굴고 닭털처럼 뽑힌 팔다리가 처량하게 꿈틀거린다. 팔다리는 몸뚱아리를 찾아가고 싶은 모양이지만 다시 하나가 되려면 그림자의 뱃속에서 모여야 할 것이다.
티르칸쟈카의 그림자를 상대로 듀 라한은 물러서지 않고 용맹하게 맞서 싸웠으나 그림자는 이제 엘더가 상대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림자는 흡혈귀라는 종의 총체. 모든 권능과 기술을 한 몸에 담은 흡혈귀의 군주.
자신의 피와 어둠을 흡혈귀라는 종에게 안개 공국이라는 나라 전체에게 흩뿌렸던 시조는 이제 없다. 신 대신 폭군이 왕좌에 앉아 잔혹한 지배를 시작했다.
[본보기가 어째서 필요한지 나는 심장을 얻고서야 깨달았다. 결국 역사는 반복된다는 것이겠지. 흡혈귀가 되어서도 인간의 본성은 달라지지 않았구나.]
그림자가 듀 라한을 먹어치우는 와중에도 티르칸쟈카는 태연하게 옥좌에 앉아있었다.
흡혈귀가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고 하지만 존재의 소멸을 원치는 않는다. 그래서 지금은 구태여 듀 라한처럼 대적하지 않는 편이 합리적이다. 도고와 에르제뷔트는 일단 입을 다물고 그 합리성에 따랐다.
즉 둘은 죽음이 두려웠다. 자존심도 접어두고 고개를 숙일 만큼.
[어쨌든 경쟁자가 하나 줄었으니. 너희에게는 호재겠지.]
그리고 티르칸쟈카는 공포심을 이용하는 법을 깨우쳤다. 평범한 군주답게.
[휴를 데려와라. 만일 그대로 도망치고자 한다면 딱히 말리진 않겠지만…. 앞으로 있을 모든 시간에서 나를 마주치지 않기를 바라야 할 것이다.]
살아남은 두 엘더는 비굴하게도 머리를 조아렸다.
***
“멈춰라. 나는 협곡을 지키는 듀 라한 경의 아인 젠류 남작이다. 인간 네 정체를 밝혀라!”
“시조의 애첩.”
“!”
변경의 젠류 남작에게도 시조에게 애첩이 생겼다는 소식은 전해진 상태였다. 그는 내 인상착의를 보고는 조심스레 물었다.
“…어디로 가는 길이오?”
“군국.”
“통행증은 갖고 있겠지?”
“그런 건 없다.”
내 뻔뻔한 대답을 듣고는 젠류 남작이 결연하게 외쳤다.
“시조의 통행증이 없으면 지나갈 수 없다! 네가 애첩인지 아닌지 증명할 수단도 없지만 설사 네가 애첩이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원칙적이고 당연한 대처다. 흡혈귀에게 인간은 가축. 그들이 멋대로 도망치는 일을 막기 위해서 군데군데 검문소를 만들어두었다. 인간이라면 멋대로 거주지에서 이탈할 수 없으며 만일 부득이하게 움직여야 할 일이라면 흡혈귀의 통행증을 필요로 한다.
쳇. 몰래 지나가고 싶었는데 하필 흡혈귀라서. 낮밤으로 지키고 있네.
그나마 다행인 건 어둠도 안개도 옅어진 낮이라면 흡혈귀의 시야는 흐려진다는 점이다. 지금처럼 말이지!
“힐데! 지금이에요!”
“네에~.”
젠류 남작의 목이 잘렸다. 땅에 떨어지는 젠류 남작의 머리는 경악으로 물들어 있었다. 아무리 충성스럽고 성실한 그라도 병사 한 명이 갑자기 뒤에서 목을 칠 거라고 예상하진 못했다.
이 또한 햇빛 쨍쨍 내리비치는 한낮이라서 가능했던 기습. 젠류 남작을 쓰러뜨린 힐데는 그의 말을 뺏어 타고는 손을 뻗었다.
“아버님! 뛰어요!”
나 역시 냅다 땅을 박차고 힐데의 뒤로 올라탔다. 힐데는 내가 자세를 잡자마자 박차를 가했다. 갑자기 주인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모르는지 말은 곧바로 달려 나갔다.
누가 본다면 자기 일 하는 관리의 목을 베고 말을 훔쳐 달아났다고 욕할지도 몰라. 하지만 그건 상대가 목이 잘리면 죽는 평범한 사람일 때나 통용되는 상식.
“저들을 잡아라!”
젠류 남작은 잘린 머리를 품에 안은 채 우리를 냅다 추격해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