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62
터벅. 축축한 흙바닥 위를 한 걸음 걷는다. 흙 알갱이들이 내 무게를 떠받치기 위해 서로 모여서 힘을 낸다. 내가 발을 뗀 다음에는 그 모양 그대로 한숨 돌려야 할 것이지만 모종의 힘이 그들을 가뿐하게 들어 올린다. 땅에 새겨진 발자국은 발을 뗀 순간 마치 유령처럼 사라졌다.
“자비로우신 지모신께서는 당신을 밟아 생긴 흔적마저도 못 본 척 지워주시고.”
투둑. 내가 치고 지나간 나뭇가지가 꺾여서 축 늘어진다. 그도 잠시 꺾인 부분에서 새로이 순이 돋아나더니 곧 새로운 가지를 뻗었다. 무성한 가지와 잎이 빈틈을 더욱 무성하게 메웠다.
“자연은 넘치는 생명력으로 짐승이 망가뜨린 숲을 메우니.”
대지술과 드루이즘. 두 마신의 잔재를 이용해 흔적을 지운다. 힐데는 내가 마신의 힘을 쓰는 모습을 보며 억울한 듯 손가락질했다.
“사기잖아요! 나 여기 있소 하고 성큼성큼 걸어가는 데 마신의 힘으로 다 지워버리다니! 한 걸음 한 걸음 최선을 다해 걷는 ‘제’가 다 억울할 지경이에요!”
뭐가? 대지술로 발자국 없애고 드루이즘으로 풀을 돋아나게 하는데 그게 왜? 네가 억울하면 나도 마찬가지로 억울하지. 나도 힐데를 가리키며 답했다.
“저는 마신의 힘이라도 쓰지 그걸 다 기공으로 해내는 힐데가 더 사기잖아요? 마신이 더 대단한 힘인데 왜 기공보다 못하죠?”
“아버님은 공짜로 얻은 힘인데 ‘제’ 기공은 십몇 년의 수련과 실전을 거쳐서 얻어낸 결과물이잖아요! 박탈감이 들죠!”
“참나. 마신은 수천 년 동안 퇴적된 인류 역사 속에서도 유난히 돌출된 천재가 피워낸 한 송이의 꽃인데요? 고작 몇 년의 수련으로 비비려는 게 말이 안 되죠.”
“아버님이 피워낸 거 아니잖아요!”
“저는 인간의 왕. 인간이 한 건 전부 제가 한 업적이나 다름없죠. 왕이 좀 쓰겠다는데 무슨 문제라도?”
“아버님은 그동안 부재중이었잖아요!”
몸을 숨기기 적당한 수풀이 나오자 우리는 말에서 내렸다. 말이 혼자 달려갈 수 있도록 장치를 해두긴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조종받지 않는 말이 길을 따라 계속 내달리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상관없다. 어차피 우리는 흔적을 숨길 수 있으니 상대방에게 가능성을 열어두게 하는 것만으로도 이득이지.
“흔적을 남기는 게 정확히는 아버님이 만들 흔적을 지우는 게 최대 고민거리였는데 다행이네요! ‘저’는 아버님을 들고 달려야 하나 생각했어요!”
“오!”
“뭔 ‘오’는 ‘오’예요?! 아버님 체력이 다하지 않는 이상 안 들어줄 거거든요!”
“체력이 다하면 들어줄 생각이예요? 캬아. 제가 진짜 딸을 낳아도 힐데보다 효심이 깊진 않을 거예요.”
“‘저’도 슬슬 효심이 고갈되고 있거든요?”
“효심이 고갈되는 종류의 자원이라니? 조상님이 들으셨다면 곡할 노릇이겠네요.”
“아버님에게 조상님도 계셨나요?”
없지. 심지어 딸내미도 없다. 고갈이고 뭐고 애초에 힐데의 효심광산은 개발이 불가능하다. 그야 딸이 아니니까. 끄덕.
저 자칭 딸내미(연상)는 투덜거리며 컨셉을 고수했다.
“우물도 조금은 젖어있어야 물이 나오는 법이에요. 다 바닥나기 전에 효심 좀 제때 채워주세요.”
“오냐. 수고했다.”
“와아아. 보람차다~.”
힐데가 투덜거리는 동안이었다. 뒤쪽 능선 너머에서 희미한 생각이 읽혔다. 젠류 남작의 직속 예일링 암흑기사단의 일원이었다. 그가 우리를 시야에 넣기 전 나는 다급히 힐데에게 다가가 입을 막았다.
“읍? 읍읍?”
“쉿. 숙여요!”
고개를 갸웃하던 힐데도 얼마 지나지 않아 유령처럼 다가오는 기척을 눈치챘다. 설명할 필요를 던 나는 힐데를 붙잡은 채 땅에 누웠다. 스르르 나무덩굴이 내 의지에 따라 솟아나며 무성한 잎으로 나와 힐데를 감쌌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유령같은 기척이 우리 근처를 스치고 지나갔다. 나와 힐데는 약속이라도 한 듯 숨을 죽였다.
흡혈귀라고 감각이 예민하지는 않다. 어둠을 훨씬 잘 꿰뚫어보고 피냄새는 기막히게 맡지만 그걸 제외한 다른 냄새나 옅은 체향 혹은 날숨이 머금은 온기 같은 걸 민감하게 느끼지 못한다.
뭐 이걸 흡혈귀의 무능이라고 하기도 좀 그런 게 나와 힐데는 가까이 붙어있으니까 선명하게 느껴지는 거지 보통 인간이었어도 수풀 속에 숨은 우리를 찾지 못했을 거다. 다만 좀 아쉽다는 거지. 기공을 익힌 인간이었다면 알아차렸을 테니… 물론 그땐 나도 땅 속에 숨었겠지만.
흡혈귀의 기척이 멀어져갔다. 충분히 거리가 벌어졌음을 확인한 나는 나무덩굴을 조금씩 거두며 몸을 일으켰다. 힐데는 고양이처럼 내 위에 웅크려서는 흡혈귀의 기척을 더듬고 있었다.
“자 자. 이제 저의 대단함을 아시겠죠? 이제 일어나요.”
“역시 아버님이셔! 효심이 조금 차오른 것 같아요!”
힐데는 내 어깨를 짚으며 슬그머니 상체를 들었다. 고개만 빼꼼 내밀어 좌우를 살핀 그녀는 의아하다는 듯이 말했다.
“추적자가 한 명? 흐음 이런 식의 탐색은 별로 의미가 없을 텐데요?”
“의미가 없긴요. 저 아니었으면 들킬 뻔했으면서.”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에요. ‘저희’를 못 보고 지나쳤다는 게 중요하죠.”
힐데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서며 말했다.
”추격의 덕목은 머릿수에요. 포위망의 틈으로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일정 밀도를 유지해줘야 하죠. ‘지나쳤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싹트는 순간 추격은 이미 실패한 것과 다름없어요. 그런데… 아무리 봐도 저들에겐 그 정도 숫자는 없어 보이네요.”
그렇겠지. 이곳은 안개 공국 북부와 남부 끝자락 말고는 햇빛이 비치지도 않는 땅이다. 양치기와 물질로 풍족한 삶을 누리긴 하지만 인구부양력은 부족할 수밖에 없다.
그래도 나라인지라 모으면 꽤 되겠지만.
“공국은 인간을 다칠지도 모르는 일에 쓰고 싶진 않겠죠. 귀중한 자원이니까요.”
“애초에 다칠지도 모르니까 인간을 안 쓰겠다는 생각부터가 잘못이에요! 손실 없는 투자가 어디 있어요? 각오하고 들이밀어야 결과가 나오지!”
“군국적인 사고방식이네요. 병신 나라. 진짜 살기 싫다.”
“말씀은 그렇게 하시지만~. 정작 제대로 박살 난 나라는 열국이랑 공국이죠? 군국이랑 통신병들은 그대로죠? 입은 그래도 몸은 솔직하시네요!”
힐데가 히죽거렸다. 누가 들으면 내가 나라마다 깽판 치고 다니는 줄 알겠어. 그냥 안 맞는 옷을 벗겨주었을 뿐인데 말이야.
“한 번 여기를 지나쳐갔으니 점차 포위망이 넓어질 거예요. 저들보다 멀리 가지는 못했지만 포위망이 성겨졌으니 빠져나가기는 더 쉽겠죠. 잠깐 쉬었다 가도 괜찮을 것 같은데 체력은 괜찮으신가요 아버님?”
“팔팔해요. 밤 동안 더 움직이는 게 좋겠네요.”
“많이 정정해지셨네요? 지금까지 보아온 모습과는 조금 괴리가 있는데?”
…확실히.
힘이 덜 들어. 보통 오래 움직이면 쓰던 근육만 혹사당해서 아프고 힘든데. 지금은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몸을 감싸고 나를 움직이는 기분이야. 그뿐만 아니라 피가 어떻게 흐르는지 내 몸이 어떻게 움직이는지가 내 머리에 직접 그려진다. 이게 마신의 힘인가?
정확하게 대응되지는 않겠지만 기공으로 따지면 감기공을 대성한 수준이다. 다만 진짜 기공과는 달리 나에겐 그걸 방출할 기력이 없으니 진짜 기공사에 비하면 턱없이 약하겠지만.
“기공인가요? 지금까지 보아왔던 바와는 조금 다른데. 혹시 지금까지 힘을 숨기신 건가요 아니면 공국에서 무언가를 배우신 건가요?”
“비밀. 노코멘트 하겠습니다.”
대충 맞지만 설명하기 귀찮아서 얼버무렸다. 그러자 힐데가 얼굴을 들이밀며 항변했다.
“왜요? ‘우리’ 사이에 비밀이 어디 있다고!”
“남의 기공을 묻는 건 원래도 무례잖아요…. 그리고 이미 밑천 다 드러난 저보다 힐데가 더 비밀스럽죠.”
“‘제’가요? ‘제’ 어디가요?”
“그럼요. 기공에 변신술에 신성력까지 쓰고 성검대였으면서 신탁을 거쳐 군국 육장성으로 암약했잖아요? 자서전으로 쓰면 자아분열 환자가 썼나 착각할 정도로 엄청난 격변이 있는데 그게 더 신기하지 않나요?”
자서전에 비유한 건 순전히 내 감상이었다. 아무리 연기하면서 살아왔어도 그렇지 매번 화자나 언행이 달라지면 나도 읽다가 정신 나갈 것 같거든.
“아하~. 아버님이 ‘저’에게 그렇게 관심이 많을 줄 몰랐네요! 방임하는 줄 알았는데 좀 기쁜걸요?”
“방임이고 자시고 애초에 키운 적도 없어요. 도대체 왜 자기 아버지를 놔두고 저를 아버님이라고 부르는 거예요?”
내가 가장 궁금했던 부분을 묻자 힐데는 의뭉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앞서 걸었다. 힐데는 내게 뒷모습을 보여주며 말했다.
“‘저’에게 아버지가 있었다면 아버님을 아버님이라 불렀겠어요?”
오호. 부모님이 없었다는 걸 어필해서 나에게 무안함을 심어줄 셈인가? 하하 어림없지. 나는 인간의 왕. 부모고 자시고 없이 그냥 뿅하고 태어난 선천적 고아다. 마치 인간이라는 종처럼 말이야.
나에게는 부모 없다는 동정팔이가 안 통해. 나는 스스럼없이 힐데의 가정환경을 캐물었다.
“제가 힐데의 아버님이랑 닮았나요?”
“아니요. 그들 중 누구와도 닮진 않았어요.”
“그들?”
아버지를 부르는데 왜 복수형이지 하고 떠올렸다가 저번에 읽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힐데의 어머니는 기녀였지. 자기도 모르게 아이를 가졌다고 하면 아버지가 누군지 모를 법도 하지…. 그런데 왜 나를 아버님이라 부르냐고. 거기에 대한 설명은 없잖아!
아무리 떠올려도 명확한 설명을 알아낼 수가 없다. 심지어 힐데 자신조차도 나를 아버님이라 부르는 적절한 이유를 떠올리지 못하고 있다.
내가 그녀의 본모습을 단번에 간파해서? 그러면 유엘에게도 엄마라고 했어야지! 그때도 별 이유 없이 그냥 불렀던 거야!
어쨌든 이건 독심술로 알아낸 사실이니까 먼저 언급할 수는 없고. 힐데의 묘한 발언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왜 아버지를 그들이라 부르죠?”
“글쎄요~. 맞혀보실래요?”
이버지를 복수형으로 부르는 이유. 독심술사가 아닌 일반인이라면 분명 이걸 궁금해하겠지. 이거다. 나는 머릿속으로 떠올린 대답을 입에 담았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혹시 자당께서… 그 칵테일을….”
이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는 이미 늦은 것이다. 힐데는 갑자기 몸을 돌려 불쑥 다가왔다. 그녀의 몸이 나와 찰싹 달라붙는다 싶더니 곧이어 내 발등에서 고통이 느껴졌다. 힐데가 내 발등을 세게 밟은 것이었다.
추격대에게 들킬까 봐 차마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고통을 삼키는 동안 힐데는 내 귓가에 대고는 속삭였다.
“정답이라도 할 말이 있고 못할 말이 있어요~.”
자 자기가 먼저 했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