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63
힐데의 판단은 옳았다. 우리를 한 번 지나친 흡혈귀들은 우리를 찾아내지 못했다. 포위망 안쪽에 있다고는 상상하지도 못한 채 먼 곳만 대충 훑고 있을 뿐이었다.
저들보다 멀리 가진 못했지만 그건 별로 상관없었다. 여기는 이미 수색했다는 착각이 오히려 나와 힐데를 보호하고 있었으니까.
어느덧 근처에서 서성거리던 기척이 사라졌다. 젠류 남작이 패배를 인정하고는 잠시 물러간 것이다.
“벌써 포기한 걸까요? 흡혈귀가 끈기도 부족하네요~.”
“포기한 건 아닐 거예요. 혼자 힘으로는 찾는 게 불가능하니 근처를 다스리는 다른 흡혈귀와 공조하려고 하겠죠. 물론 결과적으로 그는 포기하게 될 거예요. 듀 라한 경의 소식을 듣게 될 테니까.”
약을 쳐 놓은 보람이 이제야 나타나네. 공조하려면 정보를 나누어야 하고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소식을 듣게 되겠지. 내가 언질까지 줬으니.
“조금 걸렸지만 말한 대로 됐죠? 이틀 만에 그를 따돌렸으니까요.”
“안심하기는 일러요. 저들은 추격대가 아니라 관문을 지키는 관리자였잖아요? 만일 티르칸쟈카가 직접 추격대를 보냈다면 최소한 엘더 하나쯤은 있겠죠. 숨을 수는 있겠지만 마찰 없이 국경을 통과하는 건 불가능해요.”
힐데는 내가 안심하는 꼴이 못마땅했는지 냉정한 현실을 들이밀었다. 앞길이 막막해진 내가 입을 다무는 동안 힐데는 나를 툭 두들기며 웃었다.
“에이~. 갑자기 왜 그런 표정이세요? ‘저’는 이제 안 속아요.”
“뭘요?”
“아버님은 아직 모든 수를 다 드러내지 않으셨잖아요? 여기까지 왔으니 이제 다 털어놓고 밝혀주세요. 아버님이 아무 생각 없이 탈출하지 않았다는 건 다 알고 있으니까요!”
“….”
어 그게 말이지.
솔직히 아무 작전 없다. 아니 아예 없다고 하면 좀 그렇지만 내가 제어할 수 없는 부분이다.
“아버님?”
“아아 네네. 그그그그게.”
어이 회귀자.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거야. 이번 밤썰물에 대해일 일어난다며. 밤썰물이 찾아올 시간이 지났는데 왜 나라에 별 반응이 없어?!
심지어 너는 대해일을 예고하러 더 일찍 왔잖아! 공국까지 왔으면 나를 찾아오든가 티르를 자극하고 본의 아니게 도발해서 시선이라도 끌든가! 그것도 아니면 뭐라도 하든가! 어딜 갔기에 감감무소식이야?!
내 속 타는 마음을 모르는 힐데가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아닌 척하시긴. 방법 있으시잖아요?”
“어어 물론이죠.”
“혹시 ‘제’가 생각한 그게 맞나요?”
뭐야. 자기가 생각해둔 게 있었어? 그런 게 있었으면 미리미리 알려줬어야지. 어디까지나 영감을 좀 얻을 겸 나는 힐데의 생각을 살짝 읽었다.
‘아버님은 인간의 왕. 그걸 찾아다니는 단체는 성황청과 만물의 영장. 둘 중 인간의 왕에게 우호적인 건 만물의 영장이지만~. 셰이가 가까우니 셰이를 부를 거라고 생각했는데. 딱히 어느 쪽에게도 신호를 보내는 것 같진 않네요?’
…그러게. 힐데도 그렇게 생각하는데 정작 회귀자는 아닌가 보다. 흐 흥. 그렇다고 내가 딱히 회귀자를 그리워하는 건 아니지만! 나는 단지 회귀자가 눈치 없이 티르에게 찾아가서 온갖 어그로를 다 끌고 달아나기를 기다리는 거라고!
어쨌든 내가 당장 어찌할 수 없는 부분이지. 나는 헛기침을 하며 대답했다.
“비슷…하달까. 우리 힘으로 무리라면 도움이 필요하겠지요.”
“기대할게요~.”
힐데의 미소가 무겁게 다가온다. 인간의 왕을 향한 근거 없는 믿음이 참 난감하다. 나름 정보국이었다며 나를 그렇게 믿어도 되는 거야? 조금은 의심해줘.
…아니 의지할 게 힐데 밖에 없는 상황에서 힐데가 나를 의심해도 곤란하지만.
“하. 그냥 산을 넘어야 하나.”
눈앞이 막막하니 이제 도박수가 아른거린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언덕 너머를 바라보았다.
산과 바다 사이에 있는 안개 공국은 서쪽으로 갈수록 높아진다. 경향이 뚜렷한 편이라 고지대에 있으면 아래쪽이 잘 보이며 수풀과 나무에 의지하지 않으면 몸을 숨길 수가 없다. 나와 힐데가 굳이 관문을 통과한 것도 그 때문이다.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국경을 넘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다만 초소보다 위. 능선 너머에 있는 산을 넘는다면? 확실히 사람 눈에는 덜 뜨일 것이다.
“산을 넘는다고 하셨나요?”
…어디까지나 사람 눈에는 말이지.
“그냥 해 본 소리예요. 호랑이가 멀쩡히 있는데 어떻게 넘어가.”
모든 산에 호랑이가 있진 않다. 그러나 호랑이는 분명히 산에 있다. 그것만으로도 산에 가지 않을 이유가 된다.
그리고 산에 높이 오르면 아래쪽에서도 눈에 띌 수밖에 없으니. 그냥 위협을 하나 늘릴 뿐이다. 나는 아무런 미련 없이 고개를 돌렸다.
‘대충 얼버무렸지만 아무런 이유 없이 언급할 리는 없어요. 아버님은 산을 멀쩡하게 넘을 수단을 갖고 계신 거군요?’
어라라. 아닌데. 진짜 막막해서 언급한 건데.
‘짐승의 귀와 코를 속이는 법? 흐음 아니. 인간의 왕이라면 그리 단순하지는 않겠죠? 어쩌면 원년에 있었다던 인간이 지상의 지배종이 된 계기와 관련된 일일지도 모르겠네요~.’
뭔데 그게? 나는 아는 바가 없는데? 나도 알려줘 봐. 내 이야기를 너만 알지 말고!
그렇지만 힐데의 생각을 아무리 뒤져보아도 대충 전해 들은 이야기가 전부였다. 반쪽짜리 성검대인 그녀는 내막을 거의 모르고 있다. 생각해보면 당연하지. 나도 모르는 내 정보가 있다면 그게 더 이상하잖아….
…잠깐만.
그러면 제대로 된 성검대나 성녀는 알 수도 있다는 거지? 나조차 모르는 내 정보를? 하지만 원견의 성녀 유엘 그리고 강철의 성녀 페르엘의 생각을 읽었을 때도 막 별다른 정보를 얻진 못했는데….
뭔가 이상하네. 내놓은 자식인 힐데조차도 뭔가 있다는 건 안다. 그렇다면 누군가는 내용까지 알고 있어야 하잖아. 성녀도 아니라면 도대체 뭐야?
아니면 내가 읽을 수 없는 영역이 존재하는 건가? 마치 회귀자의 이전 회차 기억처럼?
문득 의문이 떠올랐지만 해소할 수단이 없다. 그걸 알아내려면 일단 공국을 탈출하는 게 먼저겠지.
제발 무언가가 엘더를 최소한 발다미르의 발이라도 묶어줬으면.
***
대해일은 찾아왔다. 밤썰물을 맞아 물질하러 나설 인간들을 미리 물리지 않았더라면 사상자가 꽤 크게 났을 것이다. 해일이 해변을 휩쓸고도 여력이 남아 민가가 있는 마을까지 들이닥쳤다. 변덕스러운 해흉에 대비하여 충분히 거리를 두고 지어진 마을도 물에 잠겨 바다의 암초밭이 되었다.
“이게 전부인가?”
다만 발다미르는 이 광경을 보고도 고개를 갸웃했다. 호들갑 떤 것보다 규모가 훨씬 작았기 때문이다.
발다미르는 철퍽거리는 진창을 밟으며 걸어갔다. 바닷물은 대지모신의 양수. 눈에 보이지도 않는 작은 생물을 머금은 짠물. 고작 흐르는 물에도 혈조술에 장애가 생기는 흡혈귀에게 피 이상의 염도를 지닌 바닷물은 현실적인 공포이다.
트와윗은 닿는 순간 소금덩이처럼 녹아내리며 예일링도 정신을 집중하지 않으면 혈조술의 제어를 잃고 혈기를 흘린다. 아인이라면 충분히 버티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바닷물’을 상대할 때 이야기. 해류를 타고 떠밀려온 바다짐승이 습격한다면 온전치 않은 혈조술로는 상대할 수 없다.
그래서 발다미르는 애첩 추격작전에 참가하지 않았다. 만일 시조의 명령으로 참가했다고 하더라도 그리 적극적으로 움직이진 않았을 거다. 아버지란 딸에게 다가오는 남자에게는 위협적이어야 하지만 멀어지는 남자에게는 온화한 법이다. 딸이 붙잡으려고 할수록 더더욱.
발다미르가 인간과 흡혈귀를 데리고 친히 수해지역을 보는 중이었다. 그와 같은 엘더가 어째서 잡일을 하는가 그 이유는 곧 드러났다.
“어? 여기에 왜 돛이….”
모래에 파묻혀 있는 기이한 물체를 본 일꾼 하나가 돛을 향해 다가갔다. 그가 모래를 밟고 걸을 때마다 이파리처럼 생긴 무언가가 움찔거린다. 일꾼이 기이함을 느낄 찰나 모래가 갑작스레 빨려 들어가며 무언가가 모래를 박차고 튀어나왔다.
“우와악!”
당황한 인간의 머리로 기괴한 입이 드리워질 때. 커다란 대검이 날아와 의문의 그림자를 관통했다.
흙모래 속에서 뛰쳐나온 건 그와 비슷한 색을 가진 넓적한 물고기였다. 땅을 짚고 움직이는 데 특화된 지느러미를 가진 커다란 물고기는 고통스러운 듯이 펄떡펄떡 뛰며 아가리를 뻐끔거리고 있었다. 사람 머리까지 들어갈 만한 입이 부싯돌 부딪치는 소리를 냈다. 바깥 공기에 괴로운 것인지 아니면 식사를 방해받은 것이 분해서인지는 알 수 없다.
“사 살았다….”
안도하는 일꾼을 향해 발다미르의 아인 드리큘 백작이 다시 한번 강조했다.
“긴장해라! 지금은 밤썰물이 아니다! 저 먼바다에서부터 온갖 것이 떠밀려온 지금 온갖 위험한 생물이 근처에 숨죽이고 있다! 이상한 게 있다면 다가가기 전에 먼저 손에 든 작살을 던져라!”
일꾼들은 결연한 각오를 다지며 작살을 머리 위로 들었다. 나름 물질 좀 했다는 일꾼들은 바위틈이나 진창에 난 구멍을 향해 작살을 던져댔다.
아직 살아남은 바다짐승도 일부 있었지만 대부분은 사체였다. 특히 육지에서 꽤 위험한 소라나 게는 대부분 껍질이 부서진 채로 죽어있었다. 발다미르는 갑각류의 갑피가 깨진 흔적을 지켜보다가 문득 입을 열었다.
“카빌라.”
“뻔뻔한 낯짝으로 스스럼없이 부르지 마요 배신자!”
카빌라가 날 선 태도로 대답했다.
발다미르가 반란 정확히는 시조가 심장을 포기하게끔 하지 않은 것을 두고 카빌라는 아직도 그에게 앙심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발다미르의 알 바도 신경 쓸 바도 아니었다. 발다미르는 카빌라의 반항을 무시하고는 말했다.
“이번 해일은 어떤 종류지?”
“해일에 무슨 종류가 있나요? 바닷물이 쓸려 들어오면 그냥 해일이지. 당신이 파도를 보며 하나하나 이름 붙이는 감성적인 사람일 줄 몰랐는데.”
“섬고래가 막고 있던 해협을 텄나? 구름가오리가 날개지느러미로 바다를 때렸나? 그것도 아니라면 아무런 이유 없는 그냥 해일인가?”
감정은 감정이고 일은 일이다. 발다미르가 무감정하게 묻자 카빌라는 혀를 차면서도 순순히 대답했다.
“몰라요. 이번엔 이상해.”
“무엇이 이상하지?”
“구름가오리의 난동이 잦아졌어요. 밤썰물 전에 가끔 보이는 패턴이지만 요즘 유난히 시끄러워요. 하루가 멀다 하고 파도가 몰아쳐서 얼마나 시끄러웠는지.”
“이유는?”
카빌라가 짜증을 내며 답했다.
“저 먼바다에서 일어나는 일을 어떻게 알아요? 가뜩이나 언니 일로 정신없는데!”
“그게 네 일이다.”
“흥! 그러면 평소에 신경이나 좀 쓰든가! 한참 관심도 안 두시다가 갑자기 일 생기니까 와서 닦달하기는!”
“그게 내 일이고.”
“아익!”
카빌라가 성질을 내며 반쯤 무너져내리는 민가를 발로 걷어찼다. 쾅 해일에 약해진 벽이 무너져내리고 그 커다란 균열에서 거대한 눈동자가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