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69
흠. 여기서 어머니가 기녀라는 사실을 고백하다니. 이거 어떻게 발언해도 패륜밖에 되지 않잖아. 나는 조심스레 순화하여 말했다.
“자당께서 사랑을 파는 직업을 택하셨군요. 덕분에 아버님이 많으셔서 참 좋겠어요.”
“네. 덕분에 아버님도 만나게 되어서 정말… 좋아요.”
“뭔 소리야. 저는 그런 데는 간 적도 없고 기녀 데리고 놀 권력도 없어요! 돈이 없어서 호스트바에 아르바이트 뛰러 가기까지 했는데!”
오히려 내가 팔면 팔았지 사는 쪽은 아니었다고! …어라라. 남을 기녀라고 무시할 때가 아니었나? 누워서 침 뱉기였네.
“아버님은 손님이 아니라 점원으로 오셨었죠…. 기루가 여성을 대상으로 한 사업을 하려고 간 보다가 도리어 기녀와 눈이 맞아버리니까 바로 쫓아내 버렸고.”
“이제는 그런 설정이야?”
“덕분에 ‘저’에게는… 최고의 아버님이 생겼지만요.”
나라도 직업윤리는 있어. 군국 호스트바에서도 직장과 직접적으로 관련 있는 사람들은 티끌만큼도 건드리지 않았단 말이야. 힐데의 설정은 말도 안 되는 음해다.
그렇지만… 힐데가 굳이 나를 왜 아버님이라고 부르는지. 이제는 좀 알겠다.
“힐데의 관객은 아버지였던 거군요. 연기는 매번 달라지는 아버지에게 잘 보이기 위함이었나요?”
“…네. 기루의 손님들은 어머니를 만나기 위해 오신 분들이니까요. ‘저’는 어머니의 옛 손님이 남겼던 흔적이니 아버지들은 ‘저’를 꺼렸죠. 어머니에게 있어서도 ‘저’의 존재는 단가와 명성을 낮추는 결함이나 마찬가지였어요.”
“자기가 낳아놓고선 유난이네요.”
“천신의 교리를 따르는 제국과 제후국에서는 아이가 생긴다면 반드시 낳아야 해요. 기루라도 마찬가지예요. 덕분에 ‘제’가 태어났지만… 아이가 살아남으려면 ‘저’ 또한 남의 비위를 맞춰야 했어요.”
힐데는 거의 기억나지도 않는 과거를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첫 아버지는 ‘저’를 보기도 싫어했어요. 볼 때마다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치우라고 손짓했죠.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그건 어머니를 가지지 못했다는 패배감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그분이 ‘저’에게 미소를 지어주실 때는… ‘제’가 그분을 아버지라고 부를 때가 유일했어요. 마치 승리에 도취한 듯 뒤틀린 미소였지만요….”
“하하. 첫 번째 춘부장께서 부인을 많이 아끼셨나 봐요.”
“누군가 꺾은 꽃을 집으로 들이고 싶진 않다면서 끝까지 낙적하지 않으셨지만요.”
“젠장. 부모가 많으니까 뭐 말을 해도 인신공격이 되네. 도대체 어쩌라는 거야.”
지뢰밭을 만들어놓고 걸으라고 하는 기분이다. 나는 꼼짝없이 힐데의 말을 듣는 처지가 되었다.
“…‘저’의 존재 자체가 어머니의 결함이에요. ‘저’ 때문에 어머니를 찾는 귀빈의 급이 낮아지고 값이 내려가죠. 차라리 숨길 수 있으면 좋겠지만… 기녀에게 붙은 추문은 절대로 사라지지 않죠. 점점 지명이 밀려나자 어머니는 크게 화를 내셨어요. ‘저’ 때문이라고.”
“흠. 그냥 시간이 흘러서 감가된 거 아닌가…라고 하면 무례한 말이겠죠?”
조금 무례했나 보다. 힐데가 손으로 옆구리를 꼬집었다. 기공은 전혀 쓰지 않았지만 꼬집기는 그런 것 없어도 아팠다.
“그나마 ‘저’에게 친절한 건 어머니를 찾아온 아버지들이었어요. 겉으로나마 품위를 지키려는 아버지들은 ‘저’를 자신의 아량을 보여주기 위한 장치로 쓰셨죠. ‘저’는 아버지들의 마음에 들기 위해서 안간힘을 썼어요. 최소한 그분들이 계시는 동안 ‘저’는 가족놀이라도 할 수 있었으니까요.”
“힐데의 연기는 거기서 시작된 거네요?”
“…그러게요. 연기 라고 해야 할지. 아양이라고 해야 할지. 아버지에게 버림받지 않고 어머니에게 누가 되지 않도록 연기해야 했지요. 권위적인 아버지에겐 착하고 순종적인 ‘저’가 되었고 허영심 많은 아버지에게는 똑똑하고 되바라진 ‘저’가 되었고 늙은 아버지에게는 어리광 부리는 ‘저’가 되었어요.”
“기녀를 불렀더니 이상적인 딸까지? 그 정도면 결함이 아니라 옵션 수준이네요.”
나름 분위기를 풀려는 말이었으나 힐데는 자조적으로 중얼거렸다.
“기녀의 딸이 기녀가 되어가는 평범한 과정이었죠. 계속 그곳에 있었다간 ‘저’도 어머니처럼 사랑을 팔았을지도 몰라요.”
“다행이네요. 아 자당께서 하시는 일이 꼭 피해야 할 직업이라는 뜻은 아니고.”
“기루에 매인 기녀보다야 극단에서 일하는 게 훨씬 대우도 좋고 자유로우니까요.”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해?”
투덜거리는 나를 향해 힐데는 자그만 미소를 지으며 속삭였다.
“…라고 생각헀지만 아버님 말대로 ‘저’는 그저 관객이 필요했어요. 아무리 재주를 익히고 기예를 배워도 봐줄 관객이 없다면 무의미해요. 다른 인간과는 달리 ‘저’는 자신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어요. 언제나 ‘저’를 규정해줄 사람을 필요로 하지요.”
힐데가 연기하는 건 과거의 자신이다. 연기를 시작한 그때부터 지금까지 겪었던 모든 일을 의식적으로 망각하여 그때의 자신을 강제로 불러왔다. 연기하다가 사고에 휘말려 쫓길 때 천신에게 귀의하여 성검대로 활동했을 때 성녀에게 불려가서 영궤로 암약했을 때. 이전 배역을 잊고 보다 순수했던 그때로 되돌아간 힐데는 원점에 서서 나에게 속삭였다.
“아버님은 그 사람이 될 수 있어요. 만일 아버님이 ‘저’를 거두신다면. ‘저’는 아버님만의 딸이 될게요. 아버님을 소유하는 게 아니라 아버님이 ‘저’를 소유하게 될 거예요.”
아버지들 관객들 천신에 성녀까지. 모두를 관객으로 삼고 그 모두에게 실망한 힐데는 이제 마지막으로 찾아낸 나에게 매달렸다.
“명령이라면 무엇이든 듣고 몸과 마음을 다해서 아버님께 봉사하는. 아버님만의 성검대가 될게요.”
군국도 천신도 저버리고 모든 걸 나를 위해 쓰겠다는 뜻. 충실하고 성심성의껏 나를 모시는 노예가 하나 생기는 셈이다. 그것도 육장성급 강자.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변신하고 그 말투를 연기하며 온갖 곳에 숨어들 수 있는 영궤를.
꽤 대담한 유혹이었다. 진심이 느껴져서 더더욱 그랬다. 내가 평범하게 평범한 사람이었으면 냉큼 받아들였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아쉽게도 나는 정말로 평범한 인간이라서.
“이번 연기는 자기 자신의 전기인가요? 제법 인상적이었어요.”
내 의지는 나 하나만 움직이면 족하다. 나는 흡혈귀처럼 권속을 지배하는 종주가 될 생각이 없다. 그러면 권속의 바람이 아깝잖아.
나는 힐데를 부드럽게 밀어내며 말했다.
“그렇지만 나이를 충분히 먹었으면 이제 독립할 때가 되었죠. 언제까지 아버지를 찾을 거예요? 아무리 아버지가 딸을 감싸고 돈다지만 독립할 나이가 지나서까지 계속 남아있으면 착잡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다고요.”
단호한 거절. 힐데는 모포 안쪽에서 눈을 끔벅거렸다. 자기 자신마저 내건 제안이 이리 쉽게 거부당할지는 몰랐던 탓일까. 힐데는 쓸쓸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너무하시네요. ‘저’로는 만족할 수 없으신가요?”
“만족하니까 놔두려는 거죠. 제 뜻대로 다룰 수 있는 순간 재미가 없어지잖아요. 저는 제 손을 아끼고 사랑하지만 흥미롭고 경이로운 존재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연기자가 제 생각대로 움직이면 왜 극장에 가겠어요?”
짐승의 왕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어서 헷갈리는 사람이 있나 본데. 짐승의 왕은 짐승을 지배하는 존재가 아니다. 짐승을 대표하는 존재 즉 짐승에게 휘둘리는 존재지.
대표가 대표해야 할 짐승을 멋대로 다뤄서야 선동이잖아. 그럴 거면 애초에 짐승의 왕이 필요가 없어진다고.
내가 차분하게 대답하는데 힐데는 문득 무언가를 떠올리고는 물었다.
“아버님. 군국의 왕이 되실 생각이 없죠?”
어라.
갑자기 여기서 핵심을…? 정곡을 찔린 내가 잠시 말을 어물거리자 힐데는 차분히 내 가슴팍을 손으로 짚고는 중얼거렸다.
“지켜보면서 느꼈어요. 아버님은 다른 누군가를 지배할 생각이 없다는걸. 그저 바라보고 지켜볼 뿐. 그래서 무엇에도 미련이 없으시죠. 군국도 간단히 뒤로 하고 티르칸쟈카도 손쉽게 두고 오고.”
“그게….”
“‘저’따위조차 가지려고 하시지 않는데 나라를 가지려고 할 리 없죠. 처음부터 ‘저’의 계획은 어림도 없었군요.”
힐데의 몸에 천천히 온기가 돌아왔다. 내가 힐데의 새로운 배역을 거부한 그때부터 힐데는 다시 예전 배역을 되찾아 입고 있었다. 성검대이자 영궤이자 인간의 왕을 따라온 힐데로 되돌아와서는 나를 툭 밀어붙였다. 아까와는 달리 기공을 담은 손짓에 나는 저항하지 못하고 떠밀렸다.
힐데는 어깨에 모포를 걸친 채 나를 서늘하게 내려다보며 혼잣말했다.
“아버님은 차라리 ‘제’가 힘을 써서라도 강제로 군국에 데려가는 걸 원하시겠지요. ‘저’의 바람대로 행동하는 것을요.”
“꼭 그런 건 아니고요. 일단 군국에 찾아갈 의사는 있었어요.”
“그렇지만… 절대로 군국의 왕이 되지는 않으시겠죠.”
부정할 수가 없네.
그래. 내가 왕이 되려고 했다면 굳이 에이비 대위나 히스토리아에게 맡기고 오지 않았지. 나는 인간의 운명을 정하는 게 인간이기만 하면 족해.
“차라리 ‘저’를 가지겠다고 거짓말로라도 말씀하셨다면 서로 더 편했을 텐데.”
“제 마음이 불편해서 그건 안 되겠더라고요.”
자조적으로 말하는 힐데를 향해 나는 솔직하게 답했다.
“제가 힐데에게 버림받는 한 있어도 훌륭한 연기자 한 명을 잃을 수는 없어서요. 인류의 보물을 저 하나의 사욕에 쓰는 건 낭비잖아요.”
“….”
아쉬워도 어쩔 수 없어. 그게 짐승의 왕이니까. 세간에 알려진 거랑은 달리 인간의 왕은 그 누구도 지배하지 않아. 인간들이 스스로 지배당하는 듯한 기분을 느끼면 모를까.
그게 자연적인 존재의 삶….
문득 또 이질감이 느껴졌다. 내가 한 건 어쩔 수 없더라도 짐승의 왕 다운 판단인데 마음 속에서 형체를 이룬 무언가가 내 마음을 잡아끌고 있다.
저번에 느꼈을 때는 명확하게 구분하지 못했지만… 나는 독심술사다.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일은 누구보다도 잘 안다.
저건 내 마음이다.
나의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내 마음.
“어차피 아버님이나 저나 공국의 밖까지 탈출해야 하죠. 좋으나 싫으나 ‘저’는 아버님과 함께하는 수밖에 없네요~. 쳇. 싫어라.”
쓸쓸하게 중얼거리는 힐데를 향해 나는 문득 튀어나오는 말을 입에 담았다.
“미안해요.”
“사과하지 마세요. 더 비참해지기만 하는 걸요~. 잠이나 주무시죠.”
새침하게 쏘아붙인 힐데는 그 상태 그대로 내 위에 누웠다. 마치 내 몸이 침대라도 되는 것처럼 올라타서는 몸을 웅크리고 눈을 감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쌕쌕거리는 숨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게 입고 자면 감기 걸린다…라고 말하려다가 그만두었다. 뭐 어때. 지금은 기공을 쓰는데. 알몸으로 자도 문제없지.
벼락의 힘으로 달군 물통에서 증기가 피어오르고 있다. 뜨겁고 습한 공기가 작은 땅굴을 메웠다. 이 정도면 난로 하나 품고 자기에 괜찮을 것 같았다. 나 역시 모포를 덮은 채 잠을 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