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88
힘은 공정하다. 하지만 상대적이다. 누군가에게는 반응할 할 수 없는 재앙도 누군가에게는 아슬아슬하게 대응할 수 있는 공격이다.
개 수인 웰시는 감기공까지 익힌 기공사였고 주인의 안전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 회귀자의 살의를 읽은 그녀는 필사적으로 에렉투스 공을 감쌌다.
“주인님…!”
물론 회귀자의 공격은 천재지변에 가깝다. 감기공까지 익힌 강자라고 해도 제 몸 건사하는 게 고작. 누군가를 감싸봤자 둘 모두 개죽음 그러니까 종족 차별의 의미 없이 순수한 글자 그대로의 개죽음을 당할 뿐이다.
하지만 웰시는 회귀자의 공격을 막지 못할지언정 그 살의는 막았다.
“칫.”
천반경 무형세.
한 번 쏘아낸 힘을 해소하는 기술.
지잔의 칼끝이 비틀린다. 폭풍이 하늘을 향해 솟구쳤다. 기공과 권능을 담은 일격이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향해 쏘아졌다.
충격은 웰시의 등을 간신히 비켜났다. 해방된 폭풍이 몰아치며 그에 휘말린 웰시와 에렉투스가 한 묶음이 되어 한참을 나뒹굴었다.
폭풍이 몰아친 광장 한복판. 숨을 깊게 몰아쉰 회귀자는… 아지를 향해 변명했다.
“죽일 생각까진 없었어. 혼내주려고 했을 뿐이야.”
“멍!”
아지는 항의하듯 크게 짖었다.
웰시가 에렉투스 공을 가로막는 것보다 빠르게 땅을 박찬 아지가 그 둘을 밀쳐냈다.
‘진짠데…. 그냥 내상을 입혀서 한 달 정도는 못 일어나게 할 작정이었는데. 이걸 막아주네.’
거짓말! 휘두를 땐 죽어도 상관없다는 투였잖아! ‘죽어도 상관없다’가 죽이겠다는 건 아니지만!
회귀자 저거 무섭네. ‘살려둘 이유가 없다.’ 저 낙인이 찍힌 순간 죽이는 게 이득 같으면 바로 죽일 거야. 웰시가 가로막지 않았다면 정말 죽었겠지.
다행스럽게도 목숨을 부지한 에렉투스 공은 눈을 부릅뜨며 외쳤다.
“겨 경비대! 경비대를 아니! 오벨리스크를 불러!”
쩝. 그래도 에렉투스 공은 오벨리의 공인된 인간. 도시에 커다란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권력자다. 죽였어도 문제인데 못 죽인 건 더 큰 문제.
어떻게 할 거냐 회귀자.
“거기까지 하시지요.”
일단 이 문제를 중재하러 나선 건 회귀자와 함께 돌아온 트리버 시장이었다. 에렉투스 공은 트리버를 보자마자 부리나케 달려왔다.
“트리버 시장! 조금 전 내가 공격받았어! 오벨리의 공인이!”
“…오벨리스크를 부르겠습니다만 에렉투스 공. 낯선 이에게 함부로 대하는 건 현명하지 못합니다.”
“시장의 말대로다.”
척 척. 시장의 뒤로 한 무리의 인간들이 걸어들어왔다. 키나 체형은 각자 다르지만 머리부터 발끝까지 이음매 없이 이어지는 황동빛 비늘 갑옷을 맞춰 입은 전사들이었다.
오벨리스크 수인과 짐승을 상대로 싸우는 오벨리의 정예들. 날카로운 발톱과 이빨을 막기 위해 비늘 갑옷을 입고 도시를 지키는 수호병들은 조금 전 흩뿌려진 힘을 감지하고는 몰려들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앞에 있던 인간이 에렉투스 공을 향해 다가왔다. 에렉투스 공은 반가운 얼굴로 그를 불렀다.
“사피엔 공!”
“웰시. 네 주인을 지켰구나. 고맙다. 다친 곳은… 천만다행으로 없나 보군.”
에렉투스 공보다도 먼저 웰시의 상처를 살핀 그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에렉투스. 행동을 주의하라 말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최소한의 경계심은 갖고 다녀라. 모르는 짐승을 보면 일단 자세를 낮추고 지켜봐야 목숨을 부지할 수 있다.”
“오벨리에서 무슨 경계! 이곳은 우리의 땅이야!”
“우리의 땅 같은 건 없다. 하늘 아래 있고 땅 위에 있다면 어디든 야생이야. 네가 수색대에 잠시라도 들어왔다면 체득했을 텐데.”
공인 중에서도 급이 있는지 대놓고 충고하는데도 에렉투스 공은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사피엔은 위엄 있게 망토를 휘날리며 회귀자를 마주 보았다.
“그쪽도 마찬가지다. 모험가.”
“겁만 줄 생각이었어.”
“에렉투스도 그랬을 뿐이다. 규칙도 규범도 무시하고 멋대로 행동하겠다면 네가 그와 다를 게 뭐지?”
뒤에 정예군단을 이끌면서 본인도 감기공을 대성한 강자다. 육장성까지는 아니어도 그 밑자락에 닿을 전력이며 오벨리를 지배하는 공인 중에서도 수위에 드는 권력자다.
와중에 수인 전사들과 동고동락하며 뭇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이였지만 그를 상대로도 회귀자는 코웃음치며 답했다.
“뭐 같은 양비론은 집어치워. 저게 먼저 나댔고 더 막무가내였고 그런 주제에 더 약해. 네가 아는 인간이라고 보살펴달라 징징거리지 마. 여기가 엔데가 아니었다면 위협으로 안 끝났어.”
“여기는 엔데다.”
“앞으로도 엔데이고 싶다면 간수 잘하는 게 좋을 거야. 늑대의 이빨은 상대를 안 가릴 테니까.”
“….”
와. 진짜 한 마디를 안 지네. 회귀자가 저렇게 언변이 좋았나.
사실 언변이라기도 뭐한 억지였지만 굳이 굳이 따지자면 틀린 말은 없다. 손님이 왔는데도 기싸움을 걸었고 주변에서 말려도 강행했고 정작 권위 말고는 그럴 능력도 보여주지 못했다. 목숨도 웰시와 아지가 구해줬다.
강자 한 명이 약자 수백을 상대하는 세상이다. 그럴 힘이 있다면 그건 오만도 억지도 아니다.
“자신만만하군.”
“당당한 거지. 나는 어디까지나 도와주러 온 입장이니까.”
“그렇기에 나도 더 따지지 않은 거다. 엔데와 오벨리를 지키기 위해서는 너와 개의 왕이 필요하니까.”
사피엔은 몸을 홱 돌렸다. 그를 지켜보는 오벨리스크들을 향해 물러가라는 수신호를 보내며 에렉투스를 데리고 광장 밖으로 나섰다.
나가기 전 그는 회귀자를 향해 나지막이 경고했다.
“하지만 네가 엔데를 공격한다면. 너 또한 도시의 적이 될 거다. 주의하도록.”
척 척 척. 오벨리의 수호병들은 일사불란하게 광장에서 퇴장했다. 회귀자는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도 의연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사피엔. 도시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는 오벨리의 공인. 인상은 좀 나빠졌겠지만 상관없어. 어차피 오벨리스크들은 늑대의 왕과 싸울 수밖에 없으니까.’
사피엔은 회귀자의 기억에 남았나 보네. 달리 말하면 에렉투스 공은 들러리라는 뜻.
‘겁을 잔뜩 줬으니까 나대진 않겠지. 죽이지 않은 걸 후회하게 만들지 말아줬으면 좋겠는데. 야수파와 동맹을 맺어야 하는데 저런 공인이 나대면 이상해진다고.’
아까 느꼈던 섬뜩한 분위기에 비해 이 정도면… 그나마 잘 풀린 거겠지.
균열은 좀 생겼지만 회귀자의 행동은 다른 수인들을 만족시켰다.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개 수인들은 회귀자를 향해 호의를 보이며 한마디씩 거들었다.
“말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셰이 공.”
“너무 불편하게 생각하지는 말아줘요. 원래 그러신 분입니다.”
“손속이 과한 듯하지만… 버릇을 고치려면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에렉투스 공은 공인이시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인자하지만 단호하게 수인을 타이른 트리버는 지그시 회귀자를 응시했다.
“엔데의 위기는 수인 인간 할 것 없이 모두가 힘을 합해야 이겨낼 수 있습니다. 앞으로 경솔한 행동을 하지 않을 것을 부탁드리겠습니다.”
막무가내처럼 보이는 회귀자도 의외로 정론이나 정상인에게는 약하다. 회귀자는 못 이기는 척 어깨를 으쓱거렸다.
“걱정 마. 앞으로 그런 일이 없게 하려고 강하게 나간 거야.”
“혜안이 있으셨다면 안심하겠습니다.”
‘최선은 모든 일이 순탄하게 흘러가는 거겠지만… 언젠가 한 번 충돌해야 한다면 지금이 가장 낫습니다. 그도 차선을 선택한 거겠죠.’
저걸 믿네. 회귀자가 그렇게 미래를 고려하고 행동하는 게 아닌데.
오해에서 비롯되었지만 어쨌든 회귀자를 조금 과대평가하게 된 트리버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말했다.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셰이 공에게 한 가지 임무를 맡기고 싶군요.”
“뭔데?”
“엔데는 이 도시만을 의미하는 게 아닙니다. 울타리의 바깥 보다 야생과 가까운 땅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이들도 있지요. 야생의 위협에 맞서서 살아가는 그들을 저희들은 ‘야수파’라고 부릅니다.”
문명에 편입된 수인과 달리 야인에 가까운 삶을 사는 수인들. 말이 야수파지 공적인 자리가 아니었다면 야만인 아니 그냥 야수라고 불렀을 거다.
“야수파들은 거칠지만 강력하죠. 다만 엔데와 조금 동떨어진 삶을 살다 보니 늑대의 왕과 싸울 때도 협력하지 못할 가능성이 큽니다. 서로 싸우지만 않으면 다행일지도 모르죠.”
트리버는 그들을 떠올리며 지팡이에 매달린 상아 조각을 하나 떼어냈다. 오직 코끼리의 무덤에서만 구할 수 있는 귀중한 보물을 만지작거린 트리버는 그것을 회귀자에게 건네며 요청했다.
“여기. 엔데의 상징을 드리겠습니다. 그들을 설득해주십시오. 셰이 공처럼 강인하고 사려 깊은 분이라면 야수파를 설득할 수 있을 겁니다.”
‘어쩌면. 늑대의 왕이 모든 수인을 하나로 묶는 계기가 될 수도 있겠지요. 이건 위기이자 동시에 기회입니다. 엔데가 스스로 무너지기 전 마지막으로 우리가 엔데를 구원할 기회.’
뭔가 아직까지 목격하지 못한 약간의 문제가 더 있는 것 같긴 한데. 흐음. 뭐 그건 차차 알아가면 되겠지.
“알았어.”
‘야수파. 엔데에게는 저들이 중요하지. 자칫했다간 늑대의 왕 쪽에 붙어버리는 회색이니까. 일이 잘 풀리는데.’
그러게. 일이 잘 풀리네. 나름 회귀자의 짬이 있는 건가.
문제는 하나도 풀리지 않았는데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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